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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또 하나의 궁궐' 회암사는 왜 폭삭 무너졌을까

“천보산중(天寶山中) 회암사(檜岩寺) 보광명전(普光明殿) 사교각(四校角)~현금탁(縣琴鐸)~”

2000년 5월 어느 날 점심 무렵. 양주 회암사 6단지를 조사 중이던 경기도 박물관 발굴단원의 눈에 이상한 유물이 걸려들었다.
보광전 건물지 앞쪽에서 글자가 새겨진 청동유물들이 이리저리 흩어진 채 발견된 것이다. 현장책임자인 송만영(당시 경기도박물관 학예사)을 비롯한 발굴단은 명문 청동기의 출현에 아연 긴장했다.
 ‘천보산 중턱의 회암사 보광전 네 모서리에 달린 금탁’으로 시작된 명문 청동기에는 무려 134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명문은 “功德主 嘉靖大夫 判內侍府事 李得芬”으로 끝나는 공덕주 이득분의 발원문(發願文)이었던 것이다. 1997년 첫 발굴이후 처음으로 나온 ‘회암사’라는 이름이었으므로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나 이 유물의 용도를 알 수 없었으므로 발굴단의 애간장을 녹였다.
하지만 보름도 안돼 수수께끼가 풀렸다. 보광전 북동부 기단부 쪽에서 똑같은 명문 청동기가 출토된 것이다. 결국 명문 중 ‘사교각~현금탁’은 바로 보광전 네 모서리 추녀 끝에 매단 금탁(풍경)이었던 것이다. 

회암사지 절터. 발굴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관람객들이 고고학자가 된 양 답사할 수 있다.

 

◇청동금탁을 매단 이유

이 금탁은 여느 ‘풍경’과 격이 달랐다. 금탁 상단부에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무학대사)’와 ‘朝鮮國王(이성계)’ ‘王顯妃(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世子(방석)’ 등의 명문이 새겨 있었다.

또 ‘홍무 27년, 즉 1394년’에 이 글을 썼다는 내용도 새겨져 있었다. 명문의 내용은 이렇다.
“천보산에 있는 회암사 보광명전의 교각 넷을 금으로 단장하여 꾸며 천궁을 능가하게 하고 금탁을 매달아 모든 부처님께 바칩니다. 또한 작은 티끌 같은 여러 중생들이 그 소리를 듣고 본심에 깨달음을 얻고자 합니다. 부처님이시여. 원컨대 우리가 이 신묘하면서도 아름다운 연기를 이어 조선이라는 이름이 만세토록 전해지고, 전쟁이 영원토록 그쳐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여 결국 함께 하는 인연으로 돌아감을 깨닫게 하소서. 홍무 27년 갑술 6월 짓다.” 
결국 이 금탁발굴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 건국 3년만인 1394년, 국찰인 회암사 보광전을 ‘무학대사와 총애하는 신덕왕후, 그리고 세자 방석을 위해’ 호화롭게 꾸몄다는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밝혀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회암사 보광전에서 발견된 청동금탁.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를 위한 사찰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득분이 누구인가

그런데 이 불사의 공덕주인 이득분은 누구인가.

환관인 이득분은 고려 말 우왕의 총애를 배경으로 뇌물을 받고 탄핵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조선개국과 함께 다시 중용된 인물이었다.

그런데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정부인인 신덕왕후 강씨가 중병이 들자 이득분의 집에서 머물며 치료를 받았다는 <태조실록> 기록이 심상치 않다. 1396년 8월 왕후인 강씨는 숨진 곳도 바로 이득분의 집이었다.
그만큼 태조 이성계 및 강씨의 총애를 받았다는 증거이다.

이득분은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인 방석과 방번의 후원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강씨의 죽음 이후 왕자의 난이 일어나 방석과 방번이 비참한 최후를 맞고. 태조 이성계마저 왕위를 정종(태조의 첫번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둘째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이득분의 신세도 급전직하했을 것이다.

정종이 즉위하자 마자 이득분 역시 탄핵을 받았다.

<정종실록>은 “1398년(정종 1년) 이득분이 불사를 행하도록 임금(태조)에게 권하여 국고를 탕진하게 만들었으니 죄를 주어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상언을 소개한다.  

<정종실록>의 이 대목, 즉 이득분의 ‘불사를 일으켜 국고를 탕진한 죄’란 바로 회암사 보광전을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꾸민 죄를 물은 것이다.

금탁에 새겨진 이름들, 즉 무학대사, 신덕왕후 강씨, 방석 등은 태조의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들인 방과(정종)와 방원(태종) 등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산산조각 난채로 발견된 불상들. 아마도 유생들이 절을 불태우면서 마구 훼손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처참하게 찢어진 채 흩어진 인형불상들

그런데 발굴지에서는 때로는 짓이겨져 부서진 채, 혹은 머리가 무참히 잘린 채 몸통은 이쪽, 머리는 저쪽으로 흩어진 불상들이 수습된다.
예컨대 동자상은 네 토막으로 잘린 채 발견됐는데 각각 반경 50~60m 떨어진 채 확인됐다.

몸뚱이는 5단지, 머리는 6단지, 팔과 다리는 7단지와 8단지, 뭐 이런 식이었다.

이것은 누가 증오심, 불타는 적개심으로 불상들을 훼손시켜 사정없이 내던졌다는 뜻이다.
누구의 짓일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434년(세종 16년) 이래 회암사에 대한 대대적인 중수와 불교의 폐단을 비난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잇따른다.
회암사 중들이 불사를 화려하게 치렀다든가, 종실과 비빈이 이를 비호했다는 삼사(三司)의 비판이 이어졌다. 그도그럴 것이 회암사는 당시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고, 승려수가 무려 3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무엇보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수도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고, 세종대왕의 둘째형인 효령대군이 머문 것이기도 했다.

그랬으니 아무리 유생들이 난리를 쳐도  소용없었다.

국왕은 조종(祖宗)의 유습이라든가, 종실의 효성이라고 하면서 유생들의 입을 막았다.

승려들의 추행도 잇달아 비판의 대상이 됐다. 추행의 대상은 왕실 및 고급관료들의 부인과 그들을 수행한 여종들이었다. 사실여부를 떠나 금욕의 공간이면서 은밀하고 조용한 공간이기도한 사찰의 특성은 온갖 추측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예컨대 1419년(세종 1년) 회암사 스님들의 간음 절도사건을 다루던 상왕(태종)이 “이럴 줄 알았다”면서 빙긋 웃었다.   

“저 중들이 항상 부녀자와 함께 있었으니 어찌 범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내가 일찍이 저 중들로 하여금 사찰에 여자종을 부리지 못하도록 한 까닭이다.”(<세종실록>) 

또 1434년(세종 16년)에는 “대갓집 여인네 20여명이 회암사에 여러날 머문 죄를 물어 회암사 스님들을 추국했다”는 <세종실록> 기록도 있다.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태조 때부터 부침을 거듭했던 불교와 회암사는 명종 때, 즉 문정왕후가 실권을 잡고 보우를 등용하면서 다시 전성기로 접어든다. 보우는 쇠락해가는 불교세력을 확장하고 왕실의 후원을 얻기 위해 1565년(명종 20년)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회암사 무차대회를 계획한다.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친다. 보우는 유생들에 의해 요승(妖僧)으로 표현된다.
“회암사 주지승인 신묵이 백정을 결박하여 마구 때리고 콧구멍에 물을 부었으며 다리 정강이를 부러뜨렸다”(<명종실록> 1565년)는 경기감사의 계본(啓本·임금에게 제출하는 문서)은 회암사에 대한 유생들의 적개심을 대변한다.
무차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 공교롭게도 보우가 그토록 믿었던 문정왕후가 죽는다. 그러자 상황은 돌변한다.
<명종실록>은 “1566년(명종 21년) 송도의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도로 유배된 보우는 끝내 맞아죽고 만다.
그런 보우는 최근까지도 요승(妖僧)의 딱지를 붙이고 다녔다. 하지만 요즘 학계 일각에서는 보우를 품격 높은 시문을 바탕으로 불교의 전통을 유지·발전시키기 위해 애쓴 고승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선조 때인 1595년 “회암사 옛 터에 불탄 종이 있다”(조선왕조실록)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회암사는 1566~1595년 사이 유생들에 의해 불태워진 것이 틀림없다.

절터에서 확인된 청기와. 절의 위상을 일러주는 유물이다.


◇인도 고승 지공의 숨결이 담긴 회암사

회암사가 언제 창건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인도승 지공 스님의 감화를 받은 제자 나옹 스님(1320~1376)이 1374년 중건불사를 했다는 기록이 이색(1328~1396)의 <목은시고>에 담겨있다.

“지공스님이 회암사의 지세가 천축의 나란다와 같다고 나옹(지공의 수제자)에게 말해 이곳에 창건하게 하였다.”

이 무슨 말인가. 나란다사는 인도 동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종교와 학문의 요람이었다.
이미 2세기말 교육장소를 갖춘 사원으로 출발하였다. 631년 이곳을 찾았던 당나라 고승 현장법사는 “이곳에 상주하는 승려가 1만 명, 교수가 2,000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지공스님(1300?~1363년)은 이 사원의 기록상 마지막 졸업생이었다. 마다가국 만왕의 왕자로 태어나 나란다사에서 율현에게 수학한 뒤 스리랑카의 보명존자에게 득도했다.
스님은 원나라를 거쳐 1326년 3월부터 2년7개월 동안 고려에 머문다. 고려백성들은 “석존(釋尊)이 다시 태어나 이곳에 도착하셨으니 어찌 뵙지 않겠는가”하며 “석가의 환생”이라고 추앙했다.
세계불교학계에서는 9세기 이슬람의 침입으로 나란다사가 폐허가 됐다는 통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회암사의 지공비문에 따라 13세기에도 나란다사가 건재했음을 밝혀주었다.
여하간에 지공스님은 인도현지의 나란다와 회암사의 지형이 상통한 것에 주목, 바로 회암사에 나란다의 후신을 세우려 했다.
지공 스님은 원나라에 머물 때 라마교도들에 의해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랬던 지공 스님이었기에 고려스님들과 민중들의 환대를 잊을 수 없었다. 또한 이슬람의 침입으로 쇠락한 인도 나란다사의 후신을 재현하고 싶어 했다.
사실 1950년 인도 나란다사 입구에 새로운 나란다사가 설립됐으나 회암사 옛터와는 그 규모가 비교되지 않는다. 실제 실제 회암사의 산세는 나란다사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한다. 1357년 지공은 나옹에게 “‘三山兩水間’에 있는 회암사를 중창하고 머물면 불법이 크게 일어난다”며 수기(手記)를 주었다.
회암사는 삼산인 삼각산의 뿌리를 안산으로, 임진강과 한강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야말로 ‘삼산양수간’인 것이다. 회암사에서 보는 삼각산은 둥글둥글한 볏섬처럼 보이는데, 북쪽으로 뻗은 도봉(道峰)의 한 자락은 나란다사에서 멀리 보이는 경치와 상통한다. 임진강 동북으로는 화장사가, 한강의 동북에는 신륵사가 자리 잡았다.


회암사는 인도의 고승 지공스님이 수학한  나란다사를 본따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란다는 학교, 회암사는 궁전

이 절들은 회암사의 두 날개와 같다. 그러나 회암사의 성격은 교육위주였던 인도의 나란다사와는 차이가 있었다. 나란다사는 수도원 형태의 기숙사가 컸지만, 회암사는 고려의 전통을 따랐고 왕실의 진전사원이란 특징이 있었다.

이색의 <목은집> 중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를 보면 건물 262칸과 15척의 불상 7구 외에 10척의 관음상을 조성했다.
그런데 1997년부터 2003년까지 6차 발굴을 끝낸 현재, 55곳의 건물지 조사가 마무리됐는데 전체 건물 칸수가 256칸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색의 기록과 근접한 수치. 청동금탁과 흩어진 불상들의 발굴성과 외에도 회암사와 관련된 엄청난 비밀들을 풀 수 있었다.
우선 특이한 구들유구. 정면 8칸(31.6m), 측면 4칸(14.1m)의 아궁이, 온돌시설, 부엌, 굴뚝, 계단, 출입시설, 기둥자리가 세트로 발견됐다. 구들은 바닥에서 약 52㎝ 도드라진 형태로 마치 군대 내무반 침상 같다.
 건물터 가운데 가장 높은 위치인 8단의 대지에 마련된 건물터, 즉 정청터(政廳址)와 동·서 방장터(方丈址)는 이 절의 품격을 웅변해 주고 있다.
즉 일반적으로 사찰에서의 방장의 위치는 한적한 곳이나 경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 또는 부처님을 모시는 주불전의 주변에 자리 잡는다. 불법을 호위한다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그런데 이 회암사는 방장보다 정청을 더 중요시 여겼다. 정청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방장이 있다는 사실이 그걸 말해준다.
고려 말 나옹에 의해 중창이 이루어졌을 때 조성된 이 구조는 조선시대 때도 변함이 없었음을 발굴조사과정에서 밝혀냈다. 회암사에서 화려한 행사를 펼친 공양왕이나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머물던 곳이 바로 정청이었던 것이다.

회암사지 서쪽에서 발견된 공동화장실(해우소) 유구. 깊이가 4미터가 가깝다. 처음에는 음식물저장고로 여겼다가 바닥에 갈린 흙에서 기생충알이 다수 발견되면서 화장실 유구로 확정됐다.

사찰의 큰스님이 방장에 기거하면서 왕의 거처인 정청을 직접 보살폈던 것이다. 이 구조는 한마디로 고려의 궁궐인 개성의 만월대와 유사한 건물배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회암사의 위상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또 하나 발굴현장에 남아있는 부도는 원래는 보우의 부도로 치부됐으나 지금의 연구결과로는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
제주도로 유배된 뒤 타살된 보우의 부도가 세워졌을 리 만무하다는 것. 최근에는 성종 3년 회암사 중창을 담당한 정양사 주지 처안(處安)스님의 부도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정면에서 바라본 회암사지 발굴현장, 2000년대 초반의 발굴장 모습이다. 

◇국내 최대의 해우소 발견 

지난 2006년엔 또하나 흥미로운 유구가 확인됐다. 

절터 서쪽 부속건물터에서 깊이 4m, 폭 10m 이상의 돌 구조물이 발굴된 것이다. 처음엔 음식저장고이거나 창고인줄 알았다.

그러나 바닥에 깔린 흙덩이를 분석해보았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흙에서 기생충알이 다수 확인된 것이다. 흙 1g당 흡층과 회충알이 30개 이상 나왔다. 이것은 흙이라기보다는 대변성분에 가까웠다.

제대로 발굴해보니 공동화장실, 즉 해우소의 규모는 길이 14m, 폭 2.8m, 깊이 3.8m였다.

구덩이 내부의 사면은 돌벽이었고, 바닥은 박석으로 깐 얼개가 특징이었다. 구덩이의 둘레에는 12개의 기둥자리가 발견됐다. 구덩이 내부는 발굴당시 무너진 기와더미로 덮여있었다.

추론하면 대형 구덩이 위에 마루 널판을 깔고 기둥과 기와 지붕을 올려 화장실을 만들어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화장실 유구 북쪽으로는 수조가 설치되었는데, 뒤처리용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2000년대 초반 발굴 당시 회암사를 2~3차례 답사했던 필자는 최근 15년만에 다시 찾아갔다.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절터는 발굴 현장 그대로 보전되어 있었다. 화장실 유구는 필자가 답사할 때는 없었다. 

각설하고 관람객들은 지금 마치 고고학자의 기분으로 회암사 유구를 돌아볼 수 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부인 강씨, 그리고 무학대사 등의 체취를 맡을 수 있고, 희대의 여걸이라는 문정왕후와 승려 보우의 이야기도 더듬어 볼 수 있다. 

절을 불태운 유생들의 함성과, 그때 폭삭 내려앉아 400여년 만에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 회암사지에서 이 소식을 전한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