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월 충남 공주 수촌리에서 백제 무령왕릉 이후 최대의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불과 300평 남짓한 구릉 한편에서 백제 무덤 6기가 확인됐는데 그 속에서 금동관모 2점과, 금동신발 3켤레, 중국제 흑갈유도자기 3, 중국제 청자 2, 금동허리띠 2, 환두대도 및 대도 2점 등 백제사를 구명할 수 있는 찬란한 유물들이 쏟아졌다. 이렇게 많은 백제의 금동제 유물이 쏟아진 것은 무령왕릉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자지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청동기 세트의 현현 

대체 어찌된 일인가.

시계를 두달 전인 2003년 10월로 돌려보자. 

수촌리 현장은 동편 뒤로는 산을 등졌고, 서편 앞쪽으로는 드넓은 정안 뜰이 펼쳐져있는 명당이었다.   

예부터 홍수가 나면 정안뜰까지 물이 들었다고 해서 수촌리(水村里)라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문화재조사가 펼쳐졌다. 농공단지 조성을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발굴은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이 맡았고, 책임자는 이훈 연구실장(현 공주대 공주학연구원)이었다.

이훈은 발굴대상을 1지역(1000), 2지역(300)으로 나누었고, 먼저 1지역부터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1020. 1지역에서 뜻밖의 유물이 터져나왔다.

공주 수촌리 유적 항공사진. 청동기 시대부터 5세기 무렵까지 이 지역을 다스린 수장 가문의 선산임을 알 수 있다.

청동검(한국형 세형동검)과 청동꺾창(靑銅戈), 청동창(靑銅矛·끝을 뾰족하게 하여 찌르는 창의 일종), 청동도끼, 청동 조각도 등 청동기 세트가 한꺼번에 쏟아진 것이다.

이것으로도 엄청난 발굴성과였다. 발굴단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하면 언론에 발굴성과를 자랑할까 그 걱정 뿐이었다. 2차 발굴대상지, 즉 300평이 더 남아있었지만 '별 것 없으리라'고 여겨 서둘러 조사를 끝내려 했다. 이미 조경수를 심은 개인 소유의 땅이라 땅속 유구가 훼손되었을 것이라는 판단했다. 조사단은  발굴조사에 앞서 통과의례처럼 지내는 개토제(開土祭·흙을 파기 전에 토지신에게 올리는 제사)생략했다.

 

■"! 금동신발, 금동관모"

그런데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11월3일 수촌리 2지역 현장에서 발굴한 첫번째 무덤(1호분 토광묘)에서 금동신발과 환두대도 등 범상치않은 유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금동신발이 무엇인가. 이미 1971년 무령왕릉, 즉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바 있는 최상격의 유물이 아닌가.

이밖에도 역시 무령왕릉에서 확인된 청자육이호(靑磁六耳壺·귀가 여섯개 달린 항아리)와 비슷한 청자유개사이호(뚜껑 있는 귀 네개 달린 항아리) 등 중요 유물이 더 나왔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석실분인 3호분에서도 역시 한켤레의 금동신발과 한두대도, 항아리 등이 줄줄이 엮여 나왔다.  

4호분에서는 더 했다.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금동고리칼, 금동허리띠 등 지역의 수장층이 갖추고 있어야

막 노출되고 있는 금동신발. 백제 중앙정부가 수촌리 가문에게 하사한 위세품이었을 것이다.

할 모든 필수품이 세트로 나왔다. 이 외에도 색다른 유물이 걸렸다.

살포(논에 물꼬를 트거나 막을 때 쓰는 농기구)와 등자, 재갈, 그리고 계수호(鷄首壺·닭머리 달린 항아리) 등 도자기들이 쏟아졌다.

4호분 출토유물은 6기의 무덤 가운데 최고의 부장품을 자랑하고 있었다.

"흙 속에서 검은색 닭머리(계수호)가 삐죽 삐져 나왔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이훈씨)

 

■뒤전으로 밀린 청동유물 세트

10월 1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 세트 역시 중요한 유물이었지만 졸지에 뒷전으로 밀렸다.

발굴과정에서 희한한 일도 있었다. 

3호 무덤에서 금동신발이 나올 무렵, 갑자기 강풍과 폭우가 쏟아졌다. 무서울 정도였다. 그때서야 느낌이 왔다. 가만 생각해보니 무덤을 파헤치면서 제사조차 지내지 않은 싸가지 없는 후손들이 아닌가.

 

'별거 없을 것'이라고 여겨 개토제를 생략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조사단은 간단한 제사상을 차려 위령제를 지냈다조상들의 화가 풀린 것인가. 날씨가 거짓말처럼 말끔히 개었고, 포근해졌다.

"망국의 한을 품고 있어서일까요. 백제인들은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번 문을 열어주면 속내까지 다 보여주는 것 같아요. 바로 이 수촌리의 주인공들처럼.”(이훈)

이제 기원후 4~ 5세기, 한성백제국 수촌리 마을로 돌아가보자.

당시 이 땅에 묻힌 무덤의 주인공들이 살았던 바로 그곳으로.

 

수촌리 출토 금동관모. 백제지역에서 출토된 금동관(모) 7점 가운데 수촌리에서만 2점 나왔다.

■수촌리 마을의 정체 

 

 

수촌리 고분에는 누가 묻혔을까. 발굴자인 이훈은 '기원후 4~5세기에 조성된 거대한 가족묘'라는 결론을 내린다.

만약 후손이 돌아가신 부모의 무덤을 조성했다고 치면 1~2호분은 증조 할아버지·할머니 묘이고, 3호분은 할아버지, 4~5호묘는 부모묘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한 게 있다. 왜 3호분엔 할아버지만 모셨을까.

"아마도 조사단이 찾지 못했겠지요."(이훈씨)  

그도 그럴 것 같다. 

그런데 왜 가족묘라는 해석이 나올까. 하나의 단서가 이듬해인 2004년 여름 잡혔다.

수촌리 출토유물을 정리하던 연구원이 헐레벌떡 뛰어와 소리쳤다.

"이 관옥 두개가 붙어요." 

무슨 소리인가. 연구원이 들고있는 자색 관옥 2점은 4호분과 5호분에서 한 점씩 출토된 것이었다.

그런데 유물정리중 형태가 비슷한 것 같아 서로 맞춰보니 딱 맞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4호분과 5호분의 주인공은 부부가 아닐까. 부절(符節, ·대나무·옥 따위를 잘라 신표로 삼던 것)임이 분명했다. 살아생전 부부의 도타운 정을 죽어서도 간직하고픈 것이 아니었을까.

혹은 먼저 간 사랑하는 남편(혹은 아내)의 머리맡에 옥을 부러뜨려 고이 넣고는 자식들에게 말했으리라. “나 죽으면 나머지 부러진 옥을 내 머리맡에 놓아주거라라고. 죽은 뒤 하늘에서 만나 맞춰보려면. 결국 4~5호분도 애틋한 부부의 정을 담고 있는 무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아버지의 묘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수촌리 5호분에서 나온 관옥 1점. 4호분에서도 5호분 관옥과 쌍을 이루는 관옥이 나왔다. 사랑의 증표인 부절이 아닌가 판단된다.

■마한과 백제의 무덤 

이 또한 역시 고고학의 묘미다. 바로 묘제의 차이를 살펴보는 것이다.

즉 수촌리 무덤을 보면 일정한 시차를 둔 다양한 묘제를 자랑하고 있다는 것이 드라마틱하다. 한 가문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흙무덤과 돌무덤의 차이다.

충청도나 전라도의 토착세력, 즉 마한사람들은 흙무덤(토광묘·土鑛墓)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한성백제가 마한을 복속시키면서 점차 돌무덤이 전파되었다. 돌무덤은 발해연안에서 선진문물을 창조해낸 사람들의 후예, 즉 백제인이 BC 18년 남하하면서 가져온 고급 묘제이다.

그런데 이 수촌리 1~2호분의 주인공은 마한의 전통이 남은 토광목곽묘를 썼다. 반면 3호분은 백제 묘제인 횡구식석곽묘(橫口式石槨墓·앞트기식 돌방무덤), 4~5호분은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굴식돌방무덤)이다.

토광목곽묘는 위에서 구덩이를 판 뒤 목곽을 짜맞춰 놓고 그 안에 시신을 넣는 묘제인데, 1~2호분은 목곽 안에 목관을 조성했다. 3호묘인 횡구식석곽묘는 돌방무덤을 만든 뒤 앞에 문을 만들어 출입하게 했다. 4~5호묘인 횡혈식석실분은 무덤 앞에 안팎으로 통하는 무덤길(연도)을 만든 뒤 무덤방, 즉 돌방무덤을 조성했다.

기원전 4~기원전 2세기 무덤에서 확인된 청동기 세트. 수촌리 가문의 조상으로, 청동기 시대 이 지역을 다스린 수장의 유물로 판단된다.

 

■청동기 시대부터 뼈대있던 가문

고대의 묘제는 토광목곽묘횡구식석곽묘횡혈식석실분의 순서로 발전한다.

수촌리 고분을 토대로 해석함다면 증조 할아버지 때까지는 마한의 전통을 살렸지만 할아버지, 아버지 대에는 선진 묘제인 돌무덤을 쓰기 시작했다. 지체높은 분들이었으니까 첨단 묘제를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편년을 해보면 1~2(토광목곽묘)AD 380~390, 3(횡구식석곽묘)AD 400~410, 4~5(횡혈식석실분)AD 420~440년으로 추정된다.

5세기 중반에 살았던 수촌리 어떤 가문의 증조 할아버지 부부, 할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 무덤 등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금동제 유물이 쏟아진 수촌리 2지점과 붙어있는 1지점에서 확인된 청동기세트를 떠올려보자.

이 수촌리 가문은 청동기 시대(BC 4세기)부터 뼈대 있는 가문이 아니었을까. 청동기시대 수장(首將)이 지니고 있었을 청동기세트를 땅에 묻은 집안의 후예가 마한의 지배세력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합리적인 추론이다.

 

■마한땅을 야금야금 침범한 온조

시계를 기원 전후로 되돌려보자.

이복형인 고구려 유리(주몽의 적자)의 핍박에 밀려 북쪽에서 내려온 백제 온조왕은 마한의 도움으로 위례성에 도읍을 세웠다(BC 18). 이 무렵 한반도 서남부에는 마한 54개국이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굴러온 돌인 백제 온조왕은 차츰 남쪽으로 영역을 넓히더니 BC 6년 강역을 획정했다. 북으로는 패하(浿河·예성강), 남으로는 웅천(熊川), 즉 금강까지였다. 10년이 흐른 AD 5년에는 급기야 웅천책(熊川柵), 즉 금강에 목책을 세우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자 마한왕은 참다못해 사신을 보내 질책한다.

수촌리 고분을 시대별로 정리한 구분표. 청동기시대부터 터전을 잡고 이 지역을 다스렸던 마한 가문이 새롭게 이 지역을 점령한 백제 중앙정부로부터 금동유물들을 하사받고 이 지역을 계속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입장에서는 간접지배가 아니었을까. 

 

(온조)이 처음 왔을 때 발 디딜 곳이 없어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내주었는데이제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 없다고 생각해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이 어찌 의리라 하겠는가.”(<삼국사기> '백제본기')

마한왕의 질책에 백제 온조왕은 부끄럽게 여기고 그 목책을 헐었다. 하지만 불과 2년 뒤인 AD 7년 강성해진 온조왕의 야욕은 끝내 발톱을 드러낸다.

마한은 어차피 망해가는 나라다. 우리가 아닌 다른 나라가 병합하면 순망치한 격이니 우리가 먼저 치는 편이 낫다.”

온조왕은 사냥을 빙자하여 군대를 일으켰으며, 이듬해(AD 8) 마침내 마한을 멸망시킨다. 이것이 삼국사기에 나온 백제의 흥기와 마한의 쇠망에 관한 기록이다. 물론 마한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마한이 완전하게 멸망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마한은 백제가 강성해지면서 점차 그 영역이 축소되면서 그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한 수장에게 하사한 선물

또하나, 온조왕이 마한을 정복했다고 해서 마한의 전통이 쉽게 사라졌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리어 백제의 입장에서 보면 토착세력을 위무시키려고 마한인들을 북돋는 정책을 펼쳤을 것이다.

사실 마한의 입장에서 백제는 배은망덕한 나라다. 이복형(유리)에게 쫓겨 내려와 집도 절도 없던온조에게 땅까지 주며 거둬주었는데, 배신했으니 말이다.

이와 관련해 한가지 의미심장한 기록이 있다. 즉 온조왕이 마한을 병합한 뒤 7년이 지난 기원후 16년의 <삼국사기> 기록이다.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에서 반역하였다. 온조왕이 몸소 군사 5000을 이끌고 이를 치니 주근은 스스로 목을 매고.”

따라서 주근과 같은 마한 잔여세력의 반항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백제로서는 이들에 대한 위무정책을 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

백제가 마한을 정벌했다고 해서 직접 통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지역의 토착세력, 즉 옛 마한 수장급의 후예들로 하여금 해당지역을 통치하도록 했을 것이다.

이른바 간접지배의 형태로...

그러면서 백제 중앙정부는 금동관이나 금동신발, 환두대도 같은 예기(위세품)를 하사했을 것이다.

AD 4세기말~5세기초라는 시기 또한 심상치 않다.

이 무렵 수촌리 가문이 받은 백제의 하사품들은 기원후 392년 광개토대왕의 남침 등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하기 위해 내부결속을 다지려고 지방세력에게 내린 위세품이 아닐까. 뭐 이런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수촌리 고분에서 발견된 닭머리 장식 항아리. 

한성백제왕이 하사한 왕·후 작위

근거 있는 해석이다.  

<송서> '백제전' 및 <남제서> '백제전'에 등장하는 '왕·후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백제는 국가에 일정한 공로를 세운 자를 예우하기 위해 왕(()제도를 두었다.

이것은 이른바 작호제(爵號制)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수촌리 가문이 바로 그 경우가 아니었을까. 마한의 후예, 즉 공주를 기반으로 성장한 귀족에게 금동관과 금동신발 같은 최상급의 하사품을 주지 않았을까.

또 하나, 수촌리 가문 계보의 출자를 설명할 수 있을까.

마한 54개국 가운데 공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소국인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이 심상치않다. 

혹시 수촌리 고분의 주인공은 바로 옛 감해비리국의 수장 출신으로 백제의 중앙귀족으로 편입된 가문이 아니었을까.

여기서 주목되는 사람이 바로 동성왕의 백가라는 인물이다.

웅진세력이 기반인 백가는 백제의 웅진 천도 이후 새로이 두각을 나타낸다. 수촌리 고분 가문과 백씨 가문에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이 백가는 동성왕을 시해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보면 수촌리 고분의 주인공은 기원전 4세기부터 공주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지배계급의 후예임을 알 수 있다. 후에 마한 54개국 중 감해비리국의 수장으로 이어지며, 훗날 한성백제의 지방 혹은 중앙귀족이 된 뼈대있는 백씨가문이었다. 물론 이것도 지금까지 고고학 발굴 성과와 문헌자료를 토대로 엮어본 그럴듯한 추정일 뿐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