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와 친동생(안평대군)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즉 세조(재위 1455~1468)의 얼굴은 어땠을까.

국립고궁박물관은 22일부터 내년 1월13일까지 지하층 궁중서화실에서 ‘세조’ 테마전시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박물관 측이 2016년에 구입한 ‘세조 어진 초본’을 최초로 공개하면서 세조의 생애, 정치·문화적 업적과 관련된 유물 30여점을 함께 선보인다.

세조의 어진, 일제감점기 화가 김은호가 1735년 그린 세조 어진 모사본을 토대로 다시 옮겨 그린 초본이다.|국립고궁박물관  

■세조의 초상화 맞나

이번 전시의 핵심유물인 ‘세조 어진 초본’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이왕직(李王職)의 의뢰로 화가 김은호(1892~1979)가 1735년의 세조 어진 모사본을 다시 옮겨 그린 초본이다. 표암 강세황(1713~1791)은 조선의 초상화를 일컬어 초상(肖像), 즉 닮을 초(肖) 본뜬 상(像)이라 하지 않고 ‘사진(寫眞)’이라 표현했다. 특히 임금의 어진은 북송의 유학자 정이(1033~1107)의 말마따나 ‘터럭 한오라기가 달라도 다른 사람(一毫不似 便是他人)’이라는 원칙에 따라 그렸다. 심지어 태종은 아들인 세종의 지시로 완성된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는 정색하면서 “만일 터럭 하나라도 같지 않다면 내 자신이 아니다(若有一毫未盡 卽非吾親)’라는 말이 있다. 이 초상화는 불태우는게 좋을 것 같다”(<세종실록> 1444년 10월22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이렇게 엄정하게 그린 어진이었으므로, 김은호가 왜곡하지 않은 이상 세조의 초상화도 주인공의 원모습을 빼닮았을 것이라 여겨진다. 

사실 조선시대 땐 상당수의 어진이 제작됐다. 특히 국초부터 서울의 문소전, 영흥의 준원전, 평양의 영숭전, 개성의 목청전, 경주의 집경전, 전주의 경기전 등 지방 5곳에 개국 시조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태조의 어진은 엄청났다. 전신상과 반신상, 승마상 등 다양한 형식의 영정이 있었다. 명종 때인 1548년(명종 3년)까지만 해도 경복궁 선원전에 태조 영정이 무려 26축에 달할 정도였다.

지금 남아있는 태조 어진은 전주 경기전의 노년 전신상이다. 이 어진도 생전에 화가가 용안을 직접 쳐다보며 그린 도사본이 아니라 1872년 모사된 이모본이다. 다른 임금들의 어진 역시 상당수 전해져왔다.


■화마에 수난당한 어진

그러나 조선의 어진은 임진왜란-이괄의 난-정묘·병자호란에 이어 1900년(고종 광무 4년) 경운궁 실화사건 등으로 수난을 당했다. 그때마다 영정모사도감을 설치해서 모사본을 제작했다. 조선왕조의 어진들은 1908년 칙령에 의해 국유로 이속됐다. 

일제강점기에도 신원전에 보관됐던 조선 임금의 어진은 총 48점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 이 어진들을 피란수도인 부산에 옮겼다. 피란민들이 가득찬 부산에서는 심각한 주택난 때문에 불에 취약한 ‘빠락’(바락크, barrack), 즉 가건물을 다닥다닥 붙여놓았다.

영조의 연잉군 시절인 1714년 그린 초상화. 다소 나약한 모습을 풍기고 있다.  부산 화재때 일부가 불탔다.

그러니 불에 취약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 12월26일 아침 6시20분쯤, 다시 동광동 용두산 일대에서 큰 불이 났다. 

화재는 용두산 남쪽 동광동에서 전기공사 청부업을 하고 있는 정모씨(33)의 식모 안모양(22)이 판자집 2층 마루바닥에 촛불을 켜놓고 잠자다가 옮겨붙는 바람에 삽시간에 번졌다. 당시 27일자 경향신문은 “이 불로 빠락(판자집) 290동이 불탔는데, 이 말썽많은 용두산 일대의 전 판잣집이 다 잿더미로 변했으며, 이재민이 1300여명에 달한다”고 전했다. 그런데 4일 후인 12월31일 경향신문을 보면 심상찮은 후속보도가 눈에 띈다.

“지난 26일 새벽에 발생한 부산 동광동 대화재 소식은 이미 전한바 있는데 그후 전하는 바에 따르면 6·25 당시 부산으로 소개(疏開)했던 구황실 어용(御用)의 국보적인 서적 기명 장식품 등이 대부분 소실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한편 국악원에서 귀중히 여기는 고전음악보와 악기 등도 다수 소실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사결과는 참담했다. “12대 임금의 초상화(어진영·御眞影)와 <궁중일기> 등 약 4000점 중 3500점이 화마로 잿더미화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1955년 1월6일 경향신문)는 것이었다. 즉 동광동 부산 국악원 창고에 보관중이던 임금의 초상화(어진영)와 친필글씨(어친필·御親筆), 역대재상들을 그린 초상화와 궁중일기 등의 서적과 은제기(銀祭器) 등 4000여점이 소실됐다.


■남은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 뿐 

그 중 반만 탔거나 재활용할 수 있는 물품 546점만 겨우 구출되어 광복동에 있던 국립박물관 창고에 보관했다. 당시 경향신문은 “…4000년 이상 쌓아온 선조의 문화의 탑이 이처럼 무관심, 소홀히 훼손하고 우리는 무슨 문화민족이라 할 것이냐”고 개탄하면서 “어떤 이방인이 ‘한국의 선조가 남긴 찬란한 문화유업을 어째서 그리 천대하느냐’고 매우 괴이한 표정으로 묻는데 얼굴이 붉어질 뿐”이라고 한탄했다. 지금 남아있는 조선의 어진은 태조 어진 1점과 영조 어진(연잉군 시절 1점 포함) 2점, 철종 어진 1점, 익종(순조의 세자) 어진 1점, 그리고 초본 상태인 고종어진 몇 점과 순종 어진 2점 정도이다. 

따라서 만약 김은호가 그린 세조의 어진이 주인공의 얼굴이라면 이 초본은 세조의 모습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로 가치가 크다. 

지병목 국립고궁박물관장은 “이번 전시가 피의 군주이자 치적 군주라는 양면적 평가를 받는 세조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