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리(擇里), 즉 사는 곳을 택하는 책은 이중환이 썼는데 사람들이 그 책에 엄청 현혹되어 그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擇里之書李重煥創著 人多被惑 其弊無窮)”(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택리변증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1788~?)은 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가 끼친 부정적인 영향을 염려하는 평론을 남겼다. 그도 그럴 것이 <택리지>는 사대부가 조선 팔도에서 살만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요즘으로 치면 어느 지역에 아파트와 땅을 사놓으면 돈을 번다는 식의 이야기를 역사와 경제, 유통, 명승의 관점에서 ‘족집게’처럼 콕 찍어 정리했으니 ‘혹’할 만 했다.    

1723년(경종 3년) 9월 이중환이 임청각의 고성 이씨에게 보낸 편지다. 목호룡의 배후 세력으로 몰려 곤욕을 치렀다가 9월2일 풀려난 뒤 태백산 일대를 유람하던 시기에 쓴 편지다. 이중환은 “제가 근래에 겪은 일은 에전에 없던 변괴라 다시 꺼내 말하고 싶지 않다”고 토로하면서 “그러나 내주인(이인복)과 함께 태백산과 소백산의 경치를 유람했으니 이것은 한가지 흡족한 일이다”라는 심경을 밝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한 안동 임청각의 소장품   

■“사대부도 돈이 있어야 한다”

그랬으니 18세기 이후 글깨나 읽는 식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택리지>를 읽었을 것이다. 소재처가 확인된 <택리지> 사본만 160여종이고, 개인소장본까지 합하면 200여종에 달한다. 이중환은 살만한 곳을 고르는데 지리·생리·인심·산수 등 4가지 기준을 내놨다. 그 중 이중환이 가장 주안점을 둔 기준은 바로 생리(生利)였다. 생리란 생계를 유지하고 생명을 지키기에 적합한 장소가 최적의 거주지라는 뜻이다. 이중환 같은 사대부가 무슨 생계유지를 최우선으로 따지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이중환의 한마디가 그럴듯하다.

“(사대부의) 예(禮)라는 것은 부(富)가 아니면 제대로 성립할 수 없다. 생업을 마련해서 네 가지 의례인 관혼상제로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길러 가문을 보전해야 한다.”(<택리지> ‘사민총론’) 

즉 사대부의 예를 지키기 위해 경제활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가 먹고 살 호구지책이 있어야 사대부의 정체성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택리지>의 원래 이름은 ‘사대부가거처(士大夫可居處)’, 즉 ‘사대부가 거처할만한 곳’이었다. 


■이중환이 콕 찍은 돈되는 곳, 베스트 5

이중환이 콕 찍은 ‘사대부가거처’는 어디인가.

이중환은 시냇가 마을 중에서 첫번째를 충남 공주의 갑천과 대전 유성으로, 두번째를 전주 율담으로, 세번째를 청주 작천(까치내)으로. 네번째를 경북 선산 감천으로. 다섯번째를 전남 구례 구만으로 각각 꼽았다.

으뜸인 공주 갑천의 예를 들자. 이중환은 “갑천의 맑고 화려한 사방 산세도 좋지만 무엇보다 넓은 들과 관개의 편리가 돋보인다”고 했다. “특히 1묘에 1종을 수확하고 목화를 가꾸기에도 좋다”고 했다. 산수는 기본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좋은 지역이라는 뜻이다. 또 지근거리에 시장이 있고, 바다와 산지의 물자가 통해서 영원토록 대를 이어 살만한 곳이라 했다. 

또 전주 율담 역시 높은 산을 끼고 있지만 무엇보다 좋은 밭이 있으며 큰 냇물이 흐르고 소출량이 많은 논이 있으며, 무엇보다 대도시인 전주와 가까워 이용후생에 이롭다는 점을 꼽았다. 작천의 경우 시내와 골짜기가 많아 어디든지 관개하기가 편리해서 예부터 부유한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감천 역시 시냇가마다 관개가 잘되는 비옥한 논이 있어 흉년이 들 줄 모르며 대대로 부유한 자가 많아 인심 또한 순박하다고 치켜세웠다. 구례 구만 역시 토지가 비옥하다고 했다.

이중환은 경상도 경북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도 명촌으로 꼽았다. 물론 퇴계 이황(도산)과 서애 류성룡(하회)의 거주지이기는 하지만 교통(뱃길의 편리)과 생리(비옥한 전답)와 피란(소백산 피란처)의 측면에서도 주거지 요건을 골고루 충족시킨다고 여겼다. 

이중환은 그저 행정중심지 위주로 서술한 다른 지리지와 달리 신흥 경제 중심지를 특히 부각시켰다. 

특히 원산, 강경, 광천, 목포, 법성포, 유궁포(예산) 등의 포구와 한강·낙동강·예성강·금강 수계의 많은 교통요지들을 꼽았다. 이들 지역은 이중환의 <택리지> 이전에는 전혀 존재감이 없었던 곳들이었다.

이렇게 이중환이 ‘살기 좋은 곳’으로 새롭게 발굴한 곳은 산수와 인심, 그리고 학풍이 뛰어난 곳 보다는 사람과 화물이 모여드는 교통 요충지이자 물류의 거점지역이었다. 요컨대 돈 되는 곳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  이중환은 지리지인 <택리지>를 쓰면서 “조선 천지에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이 없다”는 다소 뜬금없는 결론을 내렸다. 

■이중환의 허무한 결론, “살만한 곳이 없다”

그런데 <택리지>를 읽어나가다 보면 몇가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온갖 지식을 다 동원해서 ‘어디는 살기 좋은 곳이고 어디는 살 수 없는 곳’이라고 애써서 저술해놓고는 그 말미에는 너무나 허무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동쪽에서도, 서쪽에서도,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살 수 없다. 장차 살 땅이 없어지고 살 땅이 없어지면 동서남북이 없어진다.… 이렇게 되면 사대부가 없어지고 농부와 장인, 상인도 없어진다. 이것을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라 한다. 내가 ‘사대부가거처’, 즉 사대부가 거처할만한 곳을 지은 이유다.”(‘결론’)

이 무슨 알쏭달쏭한 결론이란 말인가. 이중환은 헷갈리는 독자들을 위해 후기에서 확실하게 매조지했다.

“나는 이 책에서 살만한 땅을 가려 살고자 해도 살만한 땅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겨 이를 기록했을 뿐이다.”(‘후발’)

생각해보면 이 무슨 허무개그란 말인가. 살만한 땅이 없는데 왜 힘들게 <택리지>를 썼다는 말인가. 그 해답의 실마리는 이중환의 처가 집안 사람인 목희경(1698~1782)이 쓴 <택리지> 발문에서 찾을 수 있다.

“이중환 선생은 젊은 나이에 급제하고 문장과 학식, 재주, 지모가 당대 제일이었다. …순탄히 높은 관직에 오를 것 같았는데 불행히도 운명의 영달을 미워하고 귀신도 시기하며 먼길을 가는 수레가 번번이 가로막혀 사방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 살아갈 터전조차 없어졌다.…<택리지>를 지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목희경은 “<택리지>를 쓰면서 선생은 동서남북 어디나 살 곳이 마땅치 않아서 움츠러든다는 탄식을 토해냈다”면서 “험악한 인심과 박절한 세상길을 여기서 확인하니 선생의 품은 뜻이 가련하다”고 가슴아파했다.  


■남인의 희망, 이중환이 <택리지>를 쓴 이유

왜일까. 목희경의 말마따나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 이중환은 왜 출세길이 막혀 사방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으며, 애써 지리지를 저술했음에도 조선은 사대부가 살 곳이 못된다고 했을까. 이중환은 <택리지>에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그 이유를 밝혀놓았다. 

그것은 다름아닌 ‘망국적인 사색당파’였다. 이중환은 <택리지> ‘인심조’ 대목에 당파싸움의 전말을 구구절절 소개하고 분석해놓았다. <택리지>가 명색이 지리지라는 것을 감안하면 완전한 ‘뜬금포’ 항목이다. 왜 그랬을까.

이중환, 바로 그 이가 사색당파의 희생양이었기 때문이다. 이중환은 당파를 논하자면 남인 가문에 속한 인물이었다. 저명한 실학자인 성호 이익(1681~1963)은 집안 할아버지였다. 그런 이중환은 젊었을 때부터 남인의 희망이자 기대주였다. 

24살 때인 1713년(숙종 39년) 증광시에 급제했다. 조선에서 과거에 급제하는 나이가 보통 35살 내외라는 점을 감안하면 평균보다 10년 이상 앞선 이른바 ‘소년급제’였다. 그런만큼 이중환은 김천도찰방과 승정원 주서(사관),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 및 병조정랑 등을 지내며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다.

<택리지>는 모두 200여종의 이본이 전해질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려대 소장인 <동국산수지>와 와세다 본 <택리지>의 내용이 사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대회 이승용 등의 <완역 정본 택리지>에서

■무시로 뒤바뀌는 정권에 죽어나는 사대부들

그러나 변덕이 죽끓는 듯한 숙종의 이른바 환국정치로 3번이나 정권이 바뀌는 등 정국은 바야흐로 혼돈의 양상에 빠져있었다.

즉 서인은 경신환국(1680년)으로 축출된 남인의 처리를 두고 강경파인 송시열(1607~1689)의 노론과 온건파인 윤증(1629~1714)의 소론으로 분화했다. 그러나 서인 정권도 10년을 채우지 못한채 희빈 장씨를 앞세운 남인세력에게 정권을 넘겼다. 이를 기사환국(1689년)이라 한다. 기사환국으로 송시열 등 서인 100여 명이 사형·유배·삭탈관직의 정치보복을 당한다. 하지만 남인정권도 5년을 버티지 못한다. 

1694년(숙종 20년) 다시 인현왕후와 숙빈 최씨를 앞세운 서인에게 정권이 넘어갔으니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갑술환국 후 남인은 몰락했지만 이제는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본격화한다. 숙종 말년에 소론은 희빈 장씨의 아들이자 숙종의 맏아들인 세자(경종)를 지지했고, 절대 다수파인 노론은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영조)을 떠받들었다. 

희빈 장씨와 남인 세력을 쫓아낸 노론이 다수당의 세력을 차지했다. 

결국 이중환의 시대는 1680년 경신환국(서인정권)→1689년 기사환국(희빈 장씨의 중전책봉과 남인정권)→1694년 갑술환국(인현왕후의 복위와 서인 정권 재등장)→갑술환국 후 소론(경종)과 노론(연잉군)의 갈등 본격화 등으로 이어지는 혼돈의 정국이었다.   

1720년 숙종이 64살의 나이로 승하하자 세자인 경종이 보위를 이었다. 하지만 당시 다수파인 노론은 임금인 경종을 무자비하게 핍박했다. 

노론은 “임금이 춘추왕성(33살)이지만 (생식기능이 없어) 후사를 잇지 못한다”고 압박했다. 그 결과 노론이 지지하던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됐다. 여세를 몰아간 노론측은 왕세제(연잉군)의 대리청정까지 요구하는 등 강경책을 밀고 나갔다.

위기감을 느낀 소론과 남인 잔존세력은 경종을 뒷배삼아 끊임없이 노론을 공격했다. 다수파인 노론의 공세에 밀리던 경종은 오락가락 행보 끝에 ‘왕세제의 대리청정’ 요구를 끝내 거부했다. 수세에 몰렸던 소론은 모처럼 승기를 잡았다.

소론 강경파는 이참에 아예 노론을 쓸어버릴 요량으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선다. 1721년(경종 1년) 12월 소론측의 김일경(1662~1724)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요구한 노론 4흉(김창집·이선명·이이명·조태채)은 삼강오륜과 군신유의를 저버린 적신(賊臣)”이라면서 그들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린다. 노론의 핵심인사들을 역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경종은 상소를 올린 김일경을 이조참판으로 전격 제수하고 노론측 인사들을 줄줄이 쫓아낸다. 바야흐로 경종의 친정체제 구축이었다.


■이중환의 앞길을 가로막은 사건

이어 4개월 뒤인 1722년(경종 2년) 정국을 피바람으로 몰고온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다. 이른바 목호룡 고변사건이다. 그런데 이것은 엉뚱하게도 이중환의 앞길을 완전히 가로막은 사건으로 비화한다. 

즉 원래 노론이었다가 소론으로 돌아선 목호룡은 “칼로, 혹은 독약으로 성상(경종)을 시해하려는 자들이 있다”고 실로 끔찍한 고변으로 노론측 젊은 인사들을 역적으로 몰았다. 

목호룡은 특히 “역적 중에는 동궁(왕세제·영조)을 파는 자들이 있다”면서 “동궁은 빨리 누명을 벗어 국본을 안정시키라”고까지 했다. 

겉으로는 동궁(왕세제·영조)에게 “빨리 누명을 벗으라”고 촉구했지만, 속으로는 “동궁 당신이 바로 역모의 수괴 아니냐”고 지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고변으로 목호룡은 부사공신(扶社功臣) 3등의 상급을 받고 동성군(東城君)의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목호룡의 고변은 이듬해(1723년 2월·경종 3년) 조작 및 무고 사건으로 드러남으로써 또한번의 반전이 일어난다.

문제는 이때 이중환이 목호룡 고변사건에 연루된 정황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즉 이중환이 김천찰방이었을 때(1718년) 목호룡에게 역마를 빌려주었다는 의혹이 발목을 잡았다. 

특히 고변사건으로 공신이 된 목호룡은 “이중환이 신(목호룡)을 충의로 격려하고 계획을 가르쳐 주었다”고 진술했다. 즉 목호룡이 고변 사건의 공을 이중환에게 넘긴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이중환은 이 사건으로 옥에 갇혔지만 대사면으로 풀려났다.

<승정원일기> 1755년 10월13일조. 영조가 30년전인 1725년 목호룡 고변사건을 재조사 할 때를 떠올리면서 “이중환이 곤장을 맞고 그 후유증으로 죽지 않았느냐”고 물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남인의 희망 이중환의 숨통을 끊어놓은 노론

이중환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그 해(1723년) 8월 경종이 의문사하고 영조가 즉위하자 완전히 급전직하하고 만다.

영조 즉위와 함께 노론은 피의 보복전에 나선다. 1725년(영조 2년) 영조는 해묵은 목호룡 고변사건을 재조사하면서 이중환과 그의 처남인 목천임(1673~1730)도 친국(임금이 중죄인을 직접 심문)했다. 이중환은 자신의 혐의를 모두 부인했고, 노론측도 이중환이 목호룡 고변사건에 개입했다는 증거를 대지 못했다. 

그러나 노론측은 남인의 마지막 남은 끈(이중환)마저 끊어버릴 태세로 강경하게 몰아붙였다. 인현왕후의 오빠이자 노론의 거두인 민진원(1664~1736)은 “이중환은 이잠의 재종손(사촌형제의 손자)이며 그의 혐의는 목호룡의 동생인 목시룡의 진술서(공초)에도 나오기 때문에 처벌을 미룰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민진원이 언급한 이잠(1660~1907)은 성호 이익의 형이었다. 이잠은 1713년(숙종 39년) 노론측이 희빈 장씨의 아들(세자 경종)을 제거하려 했을 때 세자를 적극 옹호하면서 노론을 통박하는 상소문을 올린 인물이다. 이 상소문으로 이잠은 사형당했다. 이미 지난 사건임에도 민진원은 이잠의 재종손인 이중환까지 처벌해야 한다고 압박한 것이다. 노론으로서는 남인의 마지막 희망인 이중환의 숨통까지 끊어놓으려는 심산이었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꺾인 인재

이중환은 10여차례의 고문을 당했지만 끝내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외려 “이것은 남인을 몰아내려는 노론의 표적이기 때문에 신(이중환)의 죄가 날조됐다”고 임금 앞에서 항변했다. 삼사(홍문관·사헌부·사간원)는 입을 모아 “이중환을 사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영조는 “죄를 끝내 자복하지도 않았고 증거가 없는데 사형을 시켜서는 안된다”면서 결국 외딴섬에 유배보내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이것도 마지막은 아니었다. 

1728년(영조 4년) 전국적으로 20만명이 가담한 무신란(이인좌의 난)이 터지면서 이중환의 정치생명은 완전히 끝났다. 남인 가문인 이중환의 처가는 완전히 쑥대밭이 됐다. 

이중환의 처조부인 목내선(1617~1704)은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이 정권을 잡은 기사환국(1689년)의 주도 인물이었다. 이후 서인과 노론정권의 등장으로 기를 펴지 못하던 목씨 일가는 영조 연간에 일어난 무신란으로 가문이 문을 닫을 지경이 되었다. 이중환의 처남들 중에 목천임이 장살 당했고, 또다른 처남인 목천현과 처조카인 목성관은 진도에 유배됐다.

목씨 가문은 물론이고 유배에서 풀려난 이중환도 노론의 집요한 방해로 ‘죄사함’을 받지 못했다.


■영조, “이중환 30년 전에 죽지 않았던가?”

1725년 이중환이 10여차례 고문 끝에 유배형을 당한 뒤 30년이 지난 1755년(영조 31년)의 일화가 기가 막힌다.

영조는 그 해 자신의 집권 의리를 천명한 책인 <천의소감> 편찬을 마무리했다. 이 책은 영조 재위기간 일어난 여러 차례의 역모사건의 원인은 왕세제 책봉 때문이라고 인식하고 자신의 세제책봉이 정당했음을 천명한 책이다.

그런데 영조는 1755년 10월13일 막 간행한 <천의소감>을 열람하면서 과거의 사건들과 관련 인물들을 논평했다. 이중 찬수당상(편찬책임자)인 조명리(1697~1756)와 나눈 이야기가 기가 막힌다.

“이중환은 장살 당했지?(李重煥杖斃乎)?”(영조) “아닙니다. 이중환은 생존했습니다.”(조명리)

그야말로 블랙코미디 아닌가. 영조는 <천의소감>이라는 책을 열어보다가 문득 30년전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이중환을 떠올리고 ‘그가 곤장의 후유증으로 죽지 않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중환이 아직도 살아있느냐’는 식으로도 읽힐 수 있다.

한때 촉망받던 청년, 24살의 나이로 소년급제한 이중환은 그렇게 미증유의 당파싸움에 휘말려 넘쳐흐르는 재능을 피워내지도 못한채 스러져 간 것이다. 임금도 30년동안이나 잊어버릴 정도로…. 더 기가 더 막힌 대목이 있다. 영조가 ‘이중환이 죽지 않았느냐’고 물었던 1755년은 이중환이 죽기 1년전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나이 만 55살 때였다. 그런 판국이었으니 이중환은 당파싸움 하면 이를 갈았을 것이 뻔하다. 


■<택리지>에 당파의 역사를 기록한 이유  

이중환이 <택리지> ‘인심’조에 가히 뜬금포와 다름없는 ‘사색당파’를 지극히 구체적으로 설명해놓은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이중환은 ‘인심조’에 조선중기부터 당시(1750년대)까지 전개된 당파의 전과정을 분석해놓았다. 

“(당파가 깊어져) 신축·임인년(1721~22년) 이후 노론·소론·남인의 구원(仇怨)이 날로 깊어져 서로 역적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씌었다. 이것이 시골에까지 뻗어나가 전국이 전쟁터가 되었다.”

이중환은 “이로써 다른 당파끼리는 혼사가 통할 수 없게 되고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서 “처음엔 당색이 미약했지만 200년이 흐르자 이젠 단단해져서 깨뜨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본래 서인이던 노론과 소론이 갈라진 것은 겨우 40년 밖에 안된다. 형제 숙질 간에도 노·소론으로 나뉘어졌는데 이젠 오나라·월나라 사람들처럼 으르렁댄다.”


■‘철천지 원수가 되어 죽이는게 문제다’

이중환은 ‘인심’조 뿐 아니라 결론과 발문에서도 사색당파를 끈질기에 물고 늘어진다. 

이중환은 특히 “나라의 제도가 사대부를 죽이는 형벌을 가볍게 시행했다”는 이중환의 한탄이 눈에 띈다.

“선량하지 않은 자가 매번 나라의 형벌을 빙자하여 사사로이 원수를 갚기 때문에 사대부를 죽이는 사화가 여러차례 일어났다. 명성이 없으면 버림받고 명성을 얻으면 시기를 받으며 시기하면 기필코 죽이고야 마니 참으로 벼슬하기 어려운 나라다.”

이중환은 이어 “복수심이 깊어지자 서로 원수를 죽이는 함정을 파서 몰아넣었다”면서 장탄식한다.

“아! 사대부가 조정에서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산림에서 살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또한 여의치 않다.”

왜냐. 사대부가 주동이 된 무신란(1928년)이 향촌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후 전국의 어느 향촌마저 역적의 소굴이라는 의심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이 지경이니 사대부가 낙향해서 살 곳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높은 벼슬을 하든 이름없이 묻혀있든, 등용되든, 버림받든, 재야에 있든, 조정에 있든, 사대부가 몸 둘 곳은 아무 곳도 없다.”

이중환의 한탄은 끝이 없다. “그러면 사대부의 신분을 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자문하고는 “그것도 그렇지 않다”고 자답한다.

“당파싸움의 해악이 사대부에게만 끼치는가. 아니다. 사대부와 친소관계를 맺으면 일반 백성들도 같은 패냐 다른 패냐로 갈린다. 그렇게 낙인 찍히면 바로 경계가 구분되어 꼼짝 할 수 없다.”

그런 판국이니 조선은 사대부는 물론이고 농부, 장인, 상인까지도 살 수 없는 땅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가 막힌다. 잔뜩 공을 들여 <택리지>를 완성해놓고는 굳이 ‘조선에서는 누구도 살만한 땅’이 없다고 한탄할게 무엇이란 말인가.


■‘<택리지>의 참뜻을 살펴 읽으라’  

‘발문’에 덧붙인 이중환의 최후 한마디를 곱씹어봐야 한다. 

“글을 살려서 읽을 줄 아는 분이라면 문장 밖에서 참뜻을 찾아보는 것이 좋으리라.”

이 대목에서 정인보(1893~1950)의 <택리지> 읽는 법도 안성맞춤인 듯 싶다. 정인보는 “이 책은 책명대로 살만한 곳, 즉 주거에 관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지만 근본취지는 그게 아니다”라 운을 뗀다. 즉 “이중환의 책을 ‘택리’ 그대로만 보는 것은 격화소양(隔靴搔痒·가죽신을 신고 가려운 곳을 긁는다)이요, 나아가 지리서로 훌륭한 저술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지음(知音·깊은 뜻을 안다)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놓고는….

“…이중환의 글(사색당파 비판)은 자기 나라를 비하하는 것 같다.…그러나 치우치고 사사로운 당파의 견해를 뿌리째 뽑아버린 뒤라야 비로소 본 바탕을 찾을 수 있고 본 바탕을 찾은 뒤라야 비로소 사람으로 설 땅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한마디로 이중환의 <택리지>는 ‘18세기판 헬조선’의 생생한 고발기이다. 필자는 그 무엇보다 단순히 반대파라는 이유로 사람을 도륙하는 그 무자비함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이 기사는 최근에 출간된 ‘안대회·이승용 외의 <완역 정본 택리지>, 휴머니스트, 2018년’을 주로 참고해서 작성했습니다.)    


<그밖의 참고자료>

안대회, ‘택리지와 조선 후기 지방 이해의 혁신’, <한국한문연구> 제53권 53호, 한국한문학회, 2016

         ‘이중환의 택리지 개정과 이본의 형성’, <민족문화연구> 제79권,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2018 

임영걸, ‘택리지 다시읽기’, <대동문화연구> 제93권 93호,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2016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