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문화연구의 대표 전문가다. 전문적인 훈련이 부족했지만 문헌사, 고고학, 미술사 등 다양한 제반자료를 넘나들며 총합적으로 접근하는 향토사가의 면모였다.”
“아주 나쁜 놈이었다. 송산리 6호분을 완전히 파먹은 자였다. 영원히 잊지못할 악질 도굴꾼이요, 유물약탈자였다. 일본인 사회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제강점기 충남 공주를 무대로 활동한 일본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恩·1897~1970)을 둘러싼 지역 학계와 주민들의 평가는 복잡다단하다. 그도그럴 것이 공주를 근거로 활동한 학자들은 가루베가 닦아놓은 길을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공주라는 공간을 학문적인 토대로 만든 최초의 근대학자라는 평도 나온다. 하지만 가루베가 지나온 길을 더듬어보면 그러한 긍정 평가가 얼마나 덧없고 헛된 것인가를 금방 깨닫게 된다.

송산리 6호분의 북벽과 천정 축조상황.  송산리 6호분의 주인공은 웅진백제 시절의 임금인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 성왕 중 한사람일수밖에 없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됐으므로 나머지 4명의 백제왕 중  사람일 것이다. 

 

■공주는 아마추어의 신천지였다 
가루베는 와세다대(早稻田大)에서 국어·한학과를 전공했다. 역사 및 고고학과는 관련이 없는 비전문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평소 낙랑 및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는 가루베는 식민지 조선을 찾아 1925년 3월 평양 숭실전문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하지만 이미 낙랑·고구려 유적은 너무도 유명해져서 비전문가가 취미생활로 접근할 수 없는 ‘넘사벽’이었다. 결국 충남 공주로 쫓기듯 내려왔다.
“1927년 1월 처는 막 태어난 장녀를 업고 영하 20도의 엄동설한에…너덜너덜한 버스에 흔들리며…조선의 대도시 평양에서 쫓겨나 섬으로 유배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비참했다. 마침내 공주에 닿았다. 이곳이 백제의 구도 웅진성인가 하고 낙담했다.”(가루베 지온의 <백제와 나>에서)
공주고보에 부임한 가루베의 담당과목은 역사가 아닌 국어(일본어)였다. 사실 평양의 경우 낙랑고분 발굴에 혈안이 되어있던 일제 관학자들의 영향력 때문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비전문가인 가루베에게 공주는 신천지나 다름없었다. 부여와 함께 백제의 옛 도읍지였던 공주는 그때만 해도 일제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 틈새를 가루베가 비집고 들어갔다. 가루베에게 웅진백제는 ‘블루오션’이었다.

가루베 지온이 공주고보 교사로 부임한 1927년의 공주 송산리 고분군 모습.  가루베는 공주 일대의 백제고분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정상기의 ‘일제 강점기 공주 송산리 고분의 조사’ 논문에서

 

■1000기를 조사한 마구잡이 사굴(私掘)
가루베는 신이 나서 공주 지역의 백제 유적을 찾아다녔다. 도착한지 한달도 안되어 이미 도굴로 노출된 송산리 1~4호분을 찾았고, 웅진동과 교촌리, 금학리 등의 공주 시내와 주미산·월성산 등 시내 주변지역을 샅샅이 누볐다.
“1927~32년 사이 내가 실견한 백제고분이 1000기에 이르며 그 가운데 송산리 고분을 비롯한 중요 자료 100여기(182기)는 실측조사했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가루베가 천정의 구조에 주목해서 분류한 백제고분은 무려 738기에 이른다. 무엇보다 실측조사했다는 182기를 연도별로 보면 1931(97기)~32년(34기)에 집중돼있다.
이를 두고 조선총독부 소속 전문학자들조차 “연구목적의 미명 아래 저지른 유례없는 사굴(私掘) 행위”라고 비판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사무 촉탁이었던 고고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는 훗날 “5년간 738기라면 1년에 150기 가까운 고분을 조사한 셈인데 고분의 학술적인 조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숫자”라 비판했다. 아리미쓰는 ‘아마추어’ 가루베의 마구잡이 발굴을 두고 ‘얼마나 날림이었겠냐’고 꼬집고 있는 것이다. 

1933년 8월 가루베가 찾아낸 송산리 6호분의 배수로 벽돌열. 무덤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고분의 냄새를 맡았다
가루베가 확인했다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꼽자면 바로 벽화가 그려진 벽돌분인 송산리 6호분이다. 
1931년 가루베는 6호분 인근을 배회하면서 많은 백제 문양전(문양 있는 벽돌)이 흩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미 고분의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조선인 농부 몇 명이 무덤길 부근을 도굴하는 것을 목격했다. 가루베는 “이때 곧바로 공주경찰서에 신고했다”고 회고했다.
“공주경찰서에 도굴사실을 알린 뒤 내가 수습한 벽돌 몇 점을 조선총독부에 보냈다. 그 해 가을(1931년) 총독부의 촉탁(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이 파견되어 나(가루베)와 함께 도굴된 장소를 다시 발굴했는데 도중에 호우를 만나 중지했다.”
총독부 차원의 정식발굴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1년 남짓 지난 1932년 10월 송산리 고분군에서 유람도로 진입로를 조성하는 공사가 펼쳐졌는데, 이 과정에서 백제고분 5~8호분이 차례로 노출되기 시작한다.
특히 10월26일 벽돌로 조성한 6호분의 배수구 일부가 발견됐다. 이미 1년 전부터 이곳에 벽돌무덤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 가루베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무덤(6호분)으로 향하는 길(배수구)을 찾아냈다는 기쁨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총독부의 정식발굴로 이어지지 않았다.
총독부는 왜 도굴의 최초 인지(1931년)부터 배수구 입구 확인(1932년 10월26일) 이후에도 정식발굴에 나서지 않았을까. 당시 일제의 주된 관심인 낙랑과 가야 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관심했던 탓일까. 가루베는 이 고분의 구조와 내용물을 확인하고 싶어 안달했던 것이다.

 

■도굴의 증거를 인멸한 가루베?
가루베는 결국 사고를 친다. 배수구 발견 후 8개월 후인 1933년 7월 29일 이른바 무단시굴을 자행하게 된다.
“공주군 보승회의 의뢰를 받아 6호분의 시굴을 시작했다. 8월1일 오후 약 21m를 북쪽으로 파고 들어가 연도 앞 벽 상부에 도달했다.…천정에 해당되는 부분을 아래로 파내려가자 이조 말기의 백자 도기파편이 나왔다. 근자에 도굴되었음이 확실해져서 실망했다.…연도 천정의 일부가 파괴되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도굴되었음이….”

6호분 입구에서 바라본 무덤길 막음 벽돌층. 1933년 8월 가루베가 무단발굴했다.

하지만 이 발굴은 처음부터 불법이었다. 당시 모든 고분은 1916년 조선총독부령으로 제정된 ‘조선보물고적보존령’에 따라 엄격하게 보호·보존됐다. 즉 보존규칙 제3조는  ‘고적 또는 유물을 발견하는 자는 멋대로 그 현상을 변경해서는 안되며 3일 이내에 지역 경찰서장에 신고해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공주군보승회가 개인인 가루베에게 발굴을 의뢰했다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공주군보승회는 지역의 관변단체 중 하나였다.

만약 도굴이 문제가 되어 반드시 발굴조사가 필요했다면 당연히 조선총독부 조사단이 담당해야 했다. 그러니 가루베의 발굴은 ‘사굴(私堀· 사사로운 발굴)’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가루베는 현장을 보존하지 않은 만행을 저질렀다. 가루베의 연락을 받고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과 함께 도착해서 고분을 조사한 조선총독부 촉탁 고이즈미 아키오는 훗날 쓴 ‘송산리 벽화전축고분-참담한 도굴분’이라는 제하의 회고담을 보라.
“현장의 6호분 현실(무덤방) 내부는 도굴분이라 하지만 너무도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유물이라고는 토기조각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얇은 진흙을 건조한 것 같은 마른 흙먼지 위에 발자국만 어지러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관대 위에 깔아놓은 벽돌도 거의 벗겨졌고, 관대의 주변이나 연문 서쪽의 벽돌상이 뜯겨졌다.”
고이즈미가 “어떻게 된 거냐. 유물은 없었느냐”고 묻자 가루베는 “원래부터 이 상태였고 아무 것도 없었다”고 딱 잡아뗐다.
하지만 가루베의 대답은 거짓이었다. 가루베 본인이 훗날 “6호분 안에 상당수의 유물이 있었다”고 털어놓은 것이다.
“무덤안은 상상 이상으로 완전히 보존되어 벽화, 불감, 관대 등이 있었다. 도굴된 것에 비해서는 유물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어서 그 기쁨 속에….
가루베는 그러면서 수습한 유물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중요한 유물은 대부분 없어졌지만 호박의 구옥(勾玉·굽은 옥) 1개, 환자옥(둥근 옥) 80여개, 순금제 귀고리, 대금구(허리띠 장식), 대도(큰칼), 도자(칼), 금동제 영락 등 많은 것이 나왔다. 지금까지 빈약했던 웅진성 시대의 확실한 유물 중 단연 빛난다.”

송산리 6호분의 관대와 북벽 사진. 유물이 말끔히 치워진 사진이다.

■누락된 현장사진의 정체
가루베의 행적은 짚을수록 의심스럽다. 즉 가루베는 사망하기 1년 전인 1969년 2월 송산리 6호분의 사진과 실측도 사진 자료를 공주고보 시절의 제자에게 보냈다.
그런데 이 자료를 검토하던 당시 정재훈 문화재관리국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련번호가 찍힌 자료 중에 10번이 누락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10번 사진은 ‘제6호분의 바닥, 즉 관대와 현실(무덤방)의 유물노출상태를 찍은 것’으로 추정됐다. 출토유물 정보를 고의로 은폐한 것이 아닐까. 이것이 합리적인 의심이다.
사사롭게 발굴한 것도 모자라 총독부 조사단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무덤 안을 깨끗이 치워버리고 “유물이 한 점도 없었다”고 거짓 대답한 것 자체가 용서받을 수 없는 도굴 및 훼손 행위다. 오죽하면 총독부 조사단인 고이즈미가 “무덤 방의 구조물, 즉 관대나 벽돌상을 훼손한 장본인은 가루베”라고 지칭했을까.
이것은 ‘고적 또는 유물을 발견하는 자가 멋대로 그 현상을 변경해서는 안된다’는 ‘조선보물고적보존령’을 어긴 것이다.
총독부 조사단을 이끈 후지타가 가루베를 질책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저 온후한 후지타 위원의 질책은 현지 관계 유력자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 중에 아무런 내색없이 설명진에 참가하고 있는 특정인물(가루베를 지칭)을 향한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후지타 위원은 경찰서장과 군 면의 수뇌자를 모아 ‘비록 도굴분이라 해도 법에 따라 절대 개인이 발굴하도록 해서는 안되며 앞으로는 법규에 따라 엄중히 단속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후지타는 가루베를 겨냥해서 공주경찰서장과 지역관리들에게 “다시는 불법적인 발굴행위가 없도록 하라”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이것은 총독부의 문화재 관련 법규를 상습적으로 무시해온 가루베를 향한 경고였다.  

 

■'장어 요리 담당'에 그친 가루베 

당시 고고·역사학자들은 아마추어 발굴자인 가루베를 불신하고 한없이 깔봤던 것 같다.
이 무렵 송산리 29호분을 조사한 고고학자 아리미쓰는 2002년 이 고분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내면서 보고서의 많은 부분을 가루베의 학문적인 과오를 비판하거나 바로잡는데 할애했다. 아리미쓰는 특히 “송산리 6호분을 가루베가 ‘공동 참여했다’고 했지만 그것은 어불성설”이라면서 “가루베는 ‘조사자’가 아니라 ‘보조자’였을 뿐”이라고 폄훼했다. 학자들이 가루베를 전문가로 취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가루베가 후지타의 추도특집 논집에서 송산리 6호분 발굴 때의 회고담을 실었는데, 그 내용이 흥미롭다.
“발굴현장은 금강의 고미나루 도선장에 가까운 장어의 산지였다. 어느날 커다란 장어를 사서 후지타 선생 특유의 독설에 놀림 당하며 내 능력을 발휘했다.(장어를 구웠다는 표현)…이후 매일 장어 굽는 일을 맡아 견학차 오는 여러 선생들에게 후지타 선생 추천의 ‘명물 장어구이’를 맛볼 수 있도록 했던 일도 그리운 추억이 됐다.”
가루베는 송산리 6호분의 정식 발굴 과정에서 그저 ‘장어굽는 일'을 맡았을 정도로 보조자 역할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도굴범은 바로 가루베 자신이 아닐까
가루베는 송산리 6호분의 현장을 보존하지 않고 유물을 수습한 다음 깨끗하게 치워버렸을까. 또 총독부 조사단에게는 유물의 존재를 부인했으면서 다른 저서를 통해서는 “유물의 일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언급했을까. 가루베는 자초지종을 언급하지 않았다. 의심받아 마땅한 행적이다. 
한가지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가루베는 과연 송산리 6호분의 현실(무덤방)에 언제 들어간 것일까. 1931년부터 고분 근처를 배회한 가루베가 몇몇 농부의 도굴 사실 등을 알았고, 1932년 10월 26일 배수구 입구까지 확인한 다음 10개월여 만인 1933년 8월1일 무덤방에 들어간 것이 맞을까.
사실 가루베가 언제 무덤방에 들어갔는지는 전적으로 본인의 언급 말고는 입증할 길이 없다. 가루베는 공주에 온 직후부터 송산리 일대의 고분에 눈독을 들였다.
가루베는 혹시 1931년이나 32년 6호분의 존재를 확인한 다음 본인이 손수 도굴한 것은 아닐까. 그런 다음 예전에 이미 도굴된 것처럼 꾸미려고 다시 원상태로 복구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1933년 8월1일 무단 발굴에서 유물을 빼돌리고 이미 도굴된 것처럼 위장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6호분의 도굴범은 바로 가루베 자신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공주 현지 주민들의 육성을 취재한 이구열은 “가루베가 6호분을 도굴하기 전에 개(犬)를 먼저 집어넣었다”는 증언까지 들었다.
“당시 나이 서른 안팎이었던 가루베는 중학교 교사의 탈을 쓴 천하의 고얀 놈이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아무래도 저 가루베가 수상하다”는 등 “가루베 자식, 이번에 한 20만원 챙겼을거야”라는 등의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다고 한다.

1932년 도쿄제실박물관(현 도쿄국립박물관)이 가루베로부터 구입한 백제토기. 가루베가 이미 1930년대초에 공주의 백제고분에서 무단발굴한 유물들을 일본으로 빼돌려 팔아넘겼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가루베의 ‘내로남불’
그런 가루베가 당시 공주 지역에서 자행되는 도굴행위를 개탄하는 글을 남겼다는 것이 흥미롭다.
“고분 내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상당한 가격으로 팔렸기 때문에 주민들이 빈번히 도굴을 자행하고…매일 이 귀중한 백제고분을 비롯한 분묘가 파괴되는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고까지 했다.

가루베는 한술 더 떠 “몇년 혹은 십수년 후 공주 지방에서 고분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를 금할 수 없다”고 걱정했다.
이것은 가증스러운 ‘내로남불’ 이었다. 가루베는 약 1000여기의 고분을 실견했고, 그 중 738기의 고분 유형을 분류했으며 중요한 182기는 실측조사했다. 아마추어 발굴자의 탐욕 때문에 백제고분이 마구 파헤쳐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유물을 챙겨 무단으로 가져갔다. 문자 그대로 사장(私藏), 즉 ‘개인 착복’이었던 것이다.
공주고보를 거쳐 1940년 대전 대동여고(대전여고) 교감, 1943년 강경여중 교장으로 옮겨가면서도 공주 일대에서 거둬들인 유물들을 싣고 다녔다.

가루베가 소장한 백제토기에는 유물명과 발굴지, 일시 등을 기록한 딱지(레이블)이 붙어있다. 이 백제토기는 ‘출토지=공주부근. 시일은 소화 6년10월(1932년 10월)’과 ‘가루베 소장품’임을 입증하는 딱지가 붙어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한 트럭분의 유물은 어디에 있을까
가루베는 훗날 “내가 소장한 자료의 대부분은 한국에서 철수할 때 그대로 남겨두고 왔다”고 술회했다.
1965년 니혼대(日本大) 미시마 분교(三島分校)가 발간한 교지에는 “1945년 패전 직후 알몸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언급했다.
유물이 과연 얼마만큼인지, 또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리됐는지 가루베는 정확하게 밝힌 바가 없다. 당연히 가루베를 둘러싼 의혹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
이구열의 취재에 따르면 가루베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마지막 부임지인 강경에서 트럭 1대에 소장유물들을 몽땅 싣고 재빨리 대구로 도망쳤다. 대구에서 역시 악명높은 유물약탈자였던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와 합류한 뒤 일본으로 밀반출했다는 것이다.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장으로 취임한 유시종 당시 관장은 1946년 미군정청 공주지구 군정관인 카터 중령을 앞세워 강경여중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교직원들은 ‘해방직후 가루베가 트럭을 대절하여 부산으로 도망쳤다’고 증언했다.”(변평섭의 <실록 충남 반세기>, 창학사, 1983년)
이와 관련해서 가루베의 딸인 야마가와 치즈코(山川千鶴子)는 대전 kbs 취재팀에게 “아버지(가루베)의 자료는 일본 귀국 때 대전의 전기회사 창고에 옮겨놓았고, 일부는 강경의 지인에게 맡겨놓은 것도 있었다”고 말했다. 훗날(1968년) 공주를 방문한 가루베는 강경의 지인에게 유물의 소재를 물었으나 “물건은 인민군에게 약탈됐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전전기회사로 옮겼다는 유물도 확인되지 않았다.

가루베가 소장했다가 모교인 와세다대에 기증한 ‘목짧은 항아리’(단경소호). 1933년 8월 공주부근에서 출토된 유물이라는 딱지가 붙어있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도굴·무단수집한 유물로 팔아넘기고 선심 쓴 가루베
그러나 가루베는 상당수의 백제유물을 일본으로 반출해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해방 직후 한트럭 분을 한번에 가져가지 않았더라도 그 전부터 차례차례 분산해서 반출한 것이 틀림없다. 가루베는 자신의 소장품에 ‘가루베 소장품(輕部所藏品)’이라는 딱지를 붙여놓았다. 여기에 번호와 품명, 발굴지, 시일까지 적어놓았다. 이것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됐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에 따르면 가루베는 1932년 도쿄제실박물관(현 국립도교박물관)에 18점의 유물을 일괄로 팔아넘겼다. 가루베는 이외에도 ‘조선 공주에서 발견된 석촉 3건’까지 기증했다. 팔아넘긴 유물 중에는 조선 공주 발견품(토기병 3점, 금제귀고리 2점)이 6점에 이른다.

이 유물에는 ‘품명=백제토기, 발굴지=공주 부근, 시일=소화 6년 10월(1931년 10월)’이라 적혀 있었다. 가루베는 또 백제 토기와 함께 팔아넘긴 금제귀고리와 관련된 논문을 쓰면서 “소화 5년(1930년) 가을 공주 주미리 5호분에서 옥잔과 함께 출토된 것”이라 밝혔다.

그런데 이 논문(‘공주의 백제고분’)은 1934년에 쓴 것이다. 가루베가 1930년대 초부터 야금야금 소장유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했음이 틀림없다.

가루베가 와세다대에 기중한 세발달린 잔. 소화6년(1932년) 6월 공주에서 발굴된 유물이라고 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어디 도쿄제실박물관뿐인가. 가루베가 대학 은사인 아이즈 야이치(會津八一)에게 개인적으로 선물한 백제유물 몇 점이 와세다대 아이즈야이치기념박물관(會津八一記念博物館)에 소장돼있다.
이중 ‘목짧은 작은 항아리’(단경소호)는 1932년 8월 공주 지역 고분을 무단발굴할 때 수습한 토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에 ‘소화7년 8월(1932년 8월)’이라는 딱지가 엄연히 붙어있다. 또 ‘작은 항아리(소호)’에는 ‘소화 5년 5월(1930년 5월)’이라는 딱지가, ‘세발달린 잔’(삼족배)에는 ‘소화 6년(1931년)’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모두 1930~1933년 가루베가 백제왕릉이 모여있는 송산리 고분 등을 헤집고 다니면서 도굴 혹은 수집한 유물들이다. 이런 유물들을 자신의 모교에 자랑스레 기증한 것이다. 남의 땅에서 수집하거나 도굴한 물건을 멋대로 반출해서 팔아넘기고 멋대로 기분을 내서 기증해버리고…. 도굴꾼이자 약탈자가 아니고서야 무엇이겠는가.
        
■백제통으로 행세한 가루베
역사 및 고고학 분야의 ‘아마추어’였던 가루베는 공주 지역에서의 무단발굴 경험을 바탕으로 ‘백제 전문가’로 거듭났다.  
국어(일본어) 교사였던 가루베는 738~1000기에 달하는 백제 유적을 조사한 경력을 유감없이 활용했다. 패망 후인 1947년부터 니혼대(日本大)에서 동양사(주로 한국사)를 가르치는 교수로 임용돼 1970년 사망할 때까지 ‘백제통’으로 행세했다.    

1939년 발굴된 공주 교촌리 3호분. 가루베는 미완성 고분이라고 해석했다. |정치영의 ‘사이토 다다시의 공주 교촌리 전실분 발굴조사와 가루베 지온 비판’ 논문에서

가루베는 “내가 조사한 고분 중 대다수는 도굴분이었다”고 변명했다. “내가 아니었다면 그나마 조사조차 못했을 것이니 고마운 줄 알라”는 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도굴을 부추긴 자들이 누구인가. 바로 일본인들이었다. 1930년대 평양박물관장을 지낸 고이즈미마저 일본인들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도굴을 비판했다.
“조선민족은 사욕(死褥·죽은 뒤 모욕을 당하는 행위)을 기혐(忌嫌·꺼리고 싫어함)하는 뿌리깊은 사상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니 어지간히 하급의 무식자가 아니면 이런 일(도굴)을 감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고분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온전하게 남은 조선의 고분들을 마구 파헤치고 있다는 것이다. 고이즈미의 반성 섞인 회고담이 계속된다.
“고분 도굴의 참상은 병합(1910년) 전후부터 내지인(일본)들이 조선의 촌(村)까지 파고들었다.~일확천금을 꿈꾸고 한국에 온 일본인들이~묘 속에서 금닭이 운다든가 하는 전설의 고분을 요사이 유행인 금광이라도 파낸 것 같은 생각으로 파돌아다는 것 같다.~”(<조선> ‘205호’·1932년)
1932년이면 가루베가 혈안이 되어 공주 일대를 파헤치던 바로 그 시기가 아닌가. 고이즈미는 바로 가루베와 같은 ‘도굴배’를 비판한 것이다.

 

■가루베는 그냥 악질 도굴꾼
한국 학계 일각에서는 가루베의 행적을 두고 ‘만용과 과욕’이라는 표현을 쓴다. 아마추어가 활개쳤으니 ‘만용’이요, 욕심이 지나쳤으니 ‘과욕’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또한 너무 후한 표현이다. 고고학의 훈련도 없으면서 1000여기의 백제고분을 자체 조사했고, 송산리 고분을 비롯한 상당수 고분을 무단발굴, 아니 도굴한 죄는 그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범죄행위이다. 게다가 발굴 후 현장보존도 하지 않았고, 발굴 후 제대로 된 학술보고서도 내지 않았다. 또 도굴 혹은 수습한 유물을 멋대로 보관했고, 이것을 무단으로 반출했을 뿐 아니라 그 유물의 행방을 두고도 평생 모호한 입장을 보였다.
혹여 “가루베가 자잘한 유물만 반출해간 것이 아니냐”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가루베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자잘한 유물이라도 멋대로 가져갈 수 있다는 말인가. 또 가루베는 자신이 가져간 자료를 토대로 공주 지역을 방문하며 공주고보 교사로서의 추억을 되살렸다. 가루베는 공주 지역을 방문하는 유력인사로, 저명인사를 안내하는 학자로서 행세했다. 전형적인 아마추어로서 ‘고고학자 코스프레’하면서 공주의 고분을 파헤친 가루베는 그저 “악질적인 도굴꾼이요, 유물 약탈자”였을 뿐이다.

최근 공주대박물관이 확인한 교촌리 3호분. 무령왕릉에 앞선 시기에 조성된 왕릉급 무덤인 것으로 해석된다. |공주대박물관 제공

■“가루베는 아마추어!”
최근 공주대박물관이 공주 교촌리에서 송산리 고분군, 특히 무령왕릉과 유사한 형태의 백제 전축분(벽돌무덤)을 발견했다.
다름아닌 가루베가 공주고보 부임직후인 1927년 2월과 1939년 10월 조사한 바 있던 교촌리 2호분과 3호분을 일컫는다.
그런데 당시 가루베는 2호분은 이미 인위적으로 파괴된 폐분(廢墳·폐무덤), 3호분은 무덤을 조성하다가 중지한 미완성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2호분의 경우 무너져 버린 벽돌을 재활용했다는 것이며, 3호분은 천정과 연도가 축조된 바가 없는 미완성 무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형적인 아마추어 관점이었다. 당시 가루베의 연락을 받고 조사에 나선 총독부 박물관의 사이토 다다시(齋藤忠)는 가루베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2호분의 경우 인위적인 폐기의 증거가 없으며, 3호분의 경우도 원래 온전하게 완성된 무덤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황폐해지고 유물도 도굴되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사이토는 기본이 안된 아마추어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가루베의 주장은 지금까지 80년 가까이 생명력을 잃지않고 면면히 이어져왔다. 3호분의 경우 1971년 발견된 무령왕릉을 축조하기 위해 연습용으로 조성했다는 견해도 있었다.

 

송산리 고분군 분포도. 무령왕릉과 6호분은 바로 붙어있다. 가루베가 무령왕릉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 천만다행이다.

■가루베가 무령왕릉을 찾아냈다면
하지만 최근 공주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폐무덤이라던 2호분은 원래부터 무덤이 아니라 네모꼴의 석축단이었다.
주변에 무령왕릉에서 나온 문양벽돌과 같은 연화문 벽돌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웅진 백제 시대의 중요시설이었음이 분명하다.
또 ‘미완성분’이라던 3호분은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과 같은 터널형 구조의 전축분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여전히 미완성 무덤인지, 아니면 무령왕릉 이전에 조성된 왕릉급 완성 무덤인지 100% 입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조사단은 미완성 무덤보다는 백제 왕릉급 무덤으로 보는 시각에 무게를 싣는 분위기다.
굳이 미완성무덤으로 볼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무덤 방안에 등잔 따위를 놓는 감실(움푹 판 구멍)이 조성돼있다. 무덤의 축조에 사용된 벽돌은 무늬가 없는 네모꼴과 긴 네모꼴이다. 벽면을 가로로 쌓아 만들었다. 이것은 무령왕릉이나 6호분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무령왕릉보다 이른 시기의 왕릉급 무덤일 가능성이 짙다.
백제 임금이라면 누구일까. 웅진백제 시기(475~538년)의 백제왕은 문주왕(재위 475~477)-삼근왕(477~479)-동성왕(479~501)-무령왕(501~523)-성왕(523~554·538년 사비로 천도) 등 5명이다. 이 중에서 무령왕릉은 1971년 확인됐다. 그렇다면 문주왕·삼근왕·동성왕·성왕 중 두 사람일까. 그중 문주왕과 삼근왕은 재위 3년만에 정변(문주왕)으로, 혹은 어린 나이(15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전축분의 주인공이 되지말라는 법은 없다. 중국 남조의 남제와 활발하게 교류했던 동성왕은 어떨까. 아니 재위 도중 사비로 도읍을 옮긴 성왕도 이곳에 묻히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한가지 더, 6호분과 붙어 있었지만 가루베의 눈길을 아슬아슬 벗어난 무령왕릉은 1971년 그 찬란한 모습을 드러냈다.
무령왕릉 발굴 역시 잘된 발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족했던 어떻든 우리 손으로 발굴했고, 그 유물 또한 이 땅에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가루베가 무령왕릉을 보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다 털어가지 않았을까. 참고로 가루베는 송산리 6호분을 무령왕릉이라고 짐작했단다. 생각할수록 모골이 송연해진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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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輕部慈恩(가루베 지온)의 백제고분 조사와 유물’, <한국사학보> 제25호, 고려사학회, 2006
정치영, ‘사이토 다다시의 공주 교촌리 전실분 발굴조사와 가루베 지온 비판’, <백제연구> 제64권,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2016
정상기, ‘일제 강점기 공주 송산리 고분의 조사. <중앙고고연구> 통권 제10호, 중앙문화재연구원, 2012
이구열, <한국문화재수난사>, 돌베개, 1996
정규홍, <우리 문화재수난사-일제기 문화재약탈과 유린>, 학연문화사, 2005

변평섭, <실록 충남 반세기>, 창학사, 1983
황수영 편,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4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