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조는 관서의 토호이다. 사촌형인 (황)겸조의 밀고로 암행어사의 내사를 받고 있다고 지레 짐작했다. 황명조는 한밤중에 사촌형을 찔러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1822년(순조 22년) 7월8일, 암행어사 박래겸(1780~1842)이 평안남도 지방을 휘젓고 다닐 때였다. 평남의 토호 황명조가 암행어사 출현 소식에 제발이 저렸는지 그만 끔찍한 살인-자살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정작 암행어사는 자살한 황명조를 내사할 생각이 없었다. 그만큼 ‘암행어사 출몰소식’은 못된 짓을 일삼던 현지의 수령과 아전, 토호세력에게 ‘충격과 공포’였던 것이다. 

1822년 4월21일 평안도 지방을 돌던 박래겸이 어느 마을을 지날 때였다. 길가 집에서 “젖 달라”고 우는 갓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박래겸은 귀를 쫑긋 세웠다. 아이를 달래던 할머니가 “울지 마라. 암행어사 오신다.”고 하지 않은가. 넌지시 할머니에게 물었다.

“아이가 어찌 암행어사가 무서운 줄 안단 말이오?”

“말도 마시오, 요즘, 이 고을에 암행어사가 출두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 소문 때문에 관리들과 토호들이 벌벌 떨고 있다오.”

할머니가 내친김에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암행어사가 평생 두루 다녔으면 얼마나 좋겠소. 그래야 가난한 마을의 힘없는 백성이 그 덕택으로 살게 아니겠소.”


그랬다. 바로 할머니의 토로가 바로 순조 임금의 밀명으로 125일간 4915리(2064~2654㎞)의 발품을 팔며 평안남도 암행어사의 직분을 감당한 이유이다. 

박래겸이 암행어사의 체험담을 꼼꼼히 기록한 <서수일기>에는 19세기 초 백성들의 생생한 생활상과, 당대의 모순을 바로잡으려 했던 ‘어느 암행어사의 분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지방에서 잘했으면 좋겠소.”

 사실 조선시대에는 왕권을 대행해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행위는 지방수령들에게 전적으로 일임했다. 

 관찰사는 그런 수령들을 규찰하고 통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사헌부가 각 지방에 감찰을 파견하거나 지방에 분대를 설치하기도 했다. 중종 이후에는 사헌부 감찰이 파견되지 않고 어사가 지방 관리들을 규찰했다. 그런데 효과적인 규찰을 위해 명종 때부터 암행규찰이 허용됐고, 이후 암행규찰을 원칙으로 하는 암행어사가 파견된 것이다.

 이후 선조 때부터 19세기 말까지 3세기 동안은 암행어사가 지방감찰의 유일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임금은 암행어사에게 봉서(封書)와 사목(事目), 마패(馬牌)와 유척(鍮尺) 등을 직접 하사했다. 봉서(封書)의 겉봉에는 ‘도남대문외개절(到南大門外開切)’, ‘입도개견(入到開見)’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말 그대로 남대문 혹은 동대문 밖에서, 혹은 임지에 도달해서 봉투를 열어야 했다. 당연히 집에도 알리지 않고 즉시 떠나야 했다. 이유가 있다.

암행어사 임명 사실을 알고, 임지까지 밝혀질 경우 그 소문과 정보가 해당지역에 삽시간에 퍼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래겸 밀명을 받다 

1822년 윤3월16일, 박래겸은 순조의 부름을 받고, 창덕궁 희정당에 들어갔다. 

임금은 그에게 봉서(封書) 한 통을 건넸다. “지방으로 내려가 잘 했으면 좋겠소.”

분명 암행어사 임명장이었다. 박래겸은 공손히 봉서를 받들어 소매 속에 넣은 뒤 물러나 신문(新門·서대문) 밖으로 나와 열어보았다. 봉서에는 역시 임명장과 함께 업무지침, 즉 매뉴얼인 사목(事目) 한 책과 마패 하나, 유척(놋쇠로 만든 표준 자. 범죄수사나 시체검시에 사용되는 형구가 규격에 맞는지 단속할 때 필요했다) 둘이 들어있었다. 박래겸의 어깨가 책임감으로 무거워졌다.

‘이 못난 사람이 어찌 그런 중책을 맡을 것인가.’

앞서 밝혔듯 원래 암행어사로 임명되면 집에도 들리지 못한 채 떠나야 했다.

박래겸도 “미처 가족과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급히 떠나야 했다”(3월16일)고 일기에 썼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길을 떠난다고 기록한 그 다음 일기가 3월21일부터 시작된다. 

5일의 공백? 아마도 임명장을 받은 날은 ‘곧바로 떠날 생각을 가졌다’가 결국 5일이나 지체했던 것 같다. 좋은 말로는 사전준비를 위해 그랬다고 볼 수도 있고, 가족들과 친구들이 베푸는 송별회를 마치고 떠난 것일 수도 있다. 


암행어사에 임명된 추사 김정희가 1826년 활동내용을 정리해 조정에 제출한 보고서. |경향신문 자료 

■얼굴이 누렇게 뜬 백성들을 만나고 

각설하고, 3월21일 길을 떠난 암행어사 박래겸은 아우 박성부와 생원 김후근 등 12명을 수행원으로 한 암행어사단을 꾸며 출발한다.

“해진 옷에 부서진 갓차림에서 관단마(느릿느릿 가는 조랑말)에 걸터앉아 길을 떠났다. 새벽달은 그림 같고 구불구불 서쪽으로 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가난한 선비의 행색이라 내가 보아도 우스꽝스러웠다.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갔다.”

서울을 떠난 지 3일만 에 황해도 남천 당에 들어선 박래겸은 임지인 평남에 도착할 때까지 수행원을 3개조로 나눠 세 방향으로 활동하게 했다. 효과적인 암행활동을 위한 것이었다. 박래겸이 만나본 18세기 백성들의 삶은 고단했다, 

“백성들이 얼굴이 누렇게 떠있었고, 구걸하는 나그네들이 많았다. 빈민구제책을 집행하는 정사가 너무도 지나치게 추려내는 통에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호소할 길도 없다.” 

양덕의 가리탄에서 만난 노인은 전임수령의 잘잘못과 아전들의 폐단을 암행어사에게 털어놨다. 

그리고는 “암행어사가 온다는 소문이 들리지만, 아마도 관가와 아전들은 서울과 내통하여 이미 암행어사 소식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3월24일) 

불신이 얼마나 뿌리가 깊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암행어사 일행은 첫 번째 암행어사 출도를 외친 5월 13일 전까지 45일간 21개읍을 암행·염찰했다. 특히 박래겸이 겪은 함종(평남 강서군)에서의 일화가 가슴을 때린다.

 “관가 아전들이 곡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몇 사람이 ‘받은 쌀의 빛깔이 나쁘다’면서 ‘수령에게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전들이 막아서자 몇몇 백성이 항의했다. ‘근자에 암행어사가 온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당신들이 이렇게 장난을 치는가. 질이 나쁜 곡식을 주고 하소연할 길마저 막다니 백성들이 어찌 살라고 하는가.’ 그러나 아전들은 콧방귀를 뀌면서 도리어 호통쳤다. ‘어찌 시끄럽게 구는가.’ 그러자 백성들은 아무 말도 못한 채 흩어졌다.”(4월28일)

박래겸은 바로 ‘환곡의 폐해’를 목격한 것이다. 환곡은 원래 춘궁기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고 가을 추수 때 받는 진휼제도였다. 환곡은 원래 춘궁기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고 가을 추수 때 받는 진휼제도였다. 

하지만 지방의 수령들은 춘궁기에 빌려줄 때는 추곡(거친 곡식)을 주고, 가을에 정곡(精穀·좋은 곡식)을 돌려받는 등의 불·편법으로 백성을 수탈했다. 암행어사 박래겸은 이날 바로 전형적인 ‘환곡의 폐단’을 현장에서 목도한 것이다. 그는 일기에서 장탄식했다.

“심하구나! 어리석은 백성들이 하소연할 때가 없음이여.”

 



박래겸 어사가 출도한 과정과 경로. 박어사는 암행 염찰한 21개 읍 가운데 11곳에서 출도했으며, 순안과 개천에서 ‘봉고(封庫)’ 처분을 내렸다.|김명숙의 논문, ‘서수일기를 통해 본 19세기 평안도 지방의 사회상’에서

■위기에 빠진 암행어사

암행어사는 해진 옷과 부서진 갓을 쓴 추레한 선비 모습으로 돌아다녔다. 

과거에 낙방하고 산수를 돌아다니는 선비행색을 하면서 각 지방을 규찰해야 했으니까…. 그러다보니 때에 따라서는 신분이 노출되는 위기도 겪곤 했다. 

암행어사를 사칭하고 아전과 백성들을 공발 협박하여 재물을 빼앗는 무리도 있었다. 

예컨대 1525년(중종 20년), 황해도 암행어사 조종경이 강령현(황해도)에 갔을 때 그 지방 수령이 성문을 닫아걸고 말았다. 조종경은 할 수 없이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 샅샅이 수사해서 많은 불법문서들을 찾아냈다. 1539년(중종 34년)에는 암행어사가 압수한 불법문서를 지역 수령이 다시 훔쳐간 황당한 케이스도 있었다. 

“강원도 어사 송기수가 아뢰었다. ‘강릉에서 압수한 문서 3건을 책상 위에 봉해서 올려놓았는데 누가 다른 봉서로 바꿔치기 해놓았습니다. 다른 향교를 압수 수사했는데 다른 봉서마저 도둑맞았습니다.”

어사의 규찰활동을 고의로 방해하는 사례도 심심치 않았다. 박래겸도 몇 번이나 곤욕을 치렀다. 

즉 1822년 4월22일에는 가짜 암행어사로 몰려 포박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 때는 어쩔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마패를 꺼내 암행어사임을 알렸다. 그를 쫓던 사람들이 흙빛으로 변해 마치 ‘판때기 위에 뒹구는 탄알처럼 ’혼비백산 흩어졌다.”(<서수일기>)

 그러나 역시 암행어사 출도의 위세는 대단했다.

 5월13일 순안현에서 첫 번째로 ‘암행어사 출도!’를 외쳤을 때였다.  

 “암행어사 출도를 외치니 사람들이 바람처럼 날고 우박처럼 흩어졌다. 문루에 오르니 온 성의 등불이 모두 켜졌고, 바깥문은 닫혀 있었다. ~각 관청에 들어갔지만 텅 비었다.”


■토호들의 반격

물론 관리들과 토호들의 반격도 만만치는 않았다. 

암행어사에게 부조리를 고발한 자가 보복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까….

예컨대 1516년(중종 11년), 평안도 선천의 한 백성이 평안도 어사 홍언필에게 수령의 비행 사실을 고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홍언필이 막상 선천에 도착해 보니 고한 사람은 옥에 갇혀있었고, 다른 백성들은 이미 도피해서 만날 수가 없었다. 

홍언필의 보고를 받은 중종은 “보복이 두려우니 백성들이 도망한 것”이라고 앙앙불락하면서 선천군수 우행언을 잡아 추고했다.(<중종실록> 1516년 9월14일, 10월7일) 

또 인조 때 전라도 암행어사 이계는 나주목사 구봉서의 불법을 적발, 처벌을 건의했다.

문제는 훗날 이계가 선천부사로, 구봉서가 평안감사로 각각 임명됐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구봉서가 이계의 직속상관이 된 것이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격이 됐다. 

이것이 비극을 불렀다. 구봉서가 “이계가 청나라 장수 용골대 진영에서 국익에 반하는 발언을 했다”고 고변한 것이다.

이 때문에 역적죄로 몰린 이계는 아버지·아들과 함께 3대가 처형 당했다.(1642년 11월22일) 

훗날 이계의 손자 이선이 “구봉서의 모함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상소문을 올렸다. 하지만 3대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었다.(<숙종실록> 1675년 11월3일))      


■피감기관장에게 성 접대를 받다

흥미로운 것은 ‘암행어사 출도’를 외친 다음에는 지역 관리들로부터 온갖 향응을 받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 접대까지 공공연히 받았다.

사실 박래겸은 출도 전에도 여러 차례 기생을 만났다. 황진이·이매창 등과 함께 조선의 3대 명기(名妓)로 꼽히던 (김)부용을 끈끈한 말로 유혹했다.

“내 장래에 황금집에 살게 해주마.”(5월5일) 

그러나 부용은 역시 서울에서도 이름을 떨친 조선의 ‘3대 명기’ 다웠다. 

“비록 제가 천하지만, 돈 많은 남편을 위하는 것은 부끄럽게 여깁니다. 황금집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저를 지기(知己)로 대하지 않는군요. 서글픕니다.”

박래겸으로서는 애간장이 녹았을 것이다. 

“그래. 이제야 그 얼굴을 보았으니 과연 허명이 아니구나!”

그렇게 감탄사만 연발했던 박래겸은 이번에는 또 다른 기생인 경란의 집을 찾아가기도 했다.(5월12일) 

암행어사는 경란과 경란의 어미인 빙심과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주흥에 젖을 무렵, 두 여인이 뭔가 감을 잡은 듯 운을 뗐다.

“선비님은 범상한 인물이 아닐 것 같네요.”

그러자 박래겸은 정체가 탄로난 줄 알고 곧바로 일어섰다. 

박래겸은 ‘기생과 음식이 아까워했지만 가까이 할 수 없었다.’(4월7일)고 토로했다.

‘암행어사 출도’ 때까지 나름대로 꾹 참았던 것이다.

암행어사 박래겸의 ‘절제와 금욕’은 5월13일 암행어사 출도 후 봇물 터졌다. 

“용강현 수령이 기생 향염을 보내 하룻밤 동침했다”(5월19일)고 기록할 정도였으니….

<서수일기>에 따르면 박래겸은 성천의 부용과 경란, 용강의 향염, 평양의 만홍 등 무려 4명의 기생과 동침하고 잔치를 벌였다. 심지어 6월20~21일에는 서울에서도 유명했던 부용을 불러, 고을 수령이 제공한 유람선까지 타면서 시와 노래를 읊고 불렀다.

감사기간 중 피감기관장이 제공한 성접대에 흠뻑 빠졌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천인공노할 노릇이다. 하지만 이 시대엔 일기에 “(감사기간 중) 기생과 하룻밤 동침했다”고 기록할만큼 ‘허용값 내의 관행’이었던 것 같다.


■암행어사의 한계

이런 우여곡절 끝에서도 박래겸은 평안남도 수령(48명) 가운데 4분의 1에 달하는 12명을 적발했다. 

그 중에는 그와 친분이 있던 순안 현령 이문용은 봉고(封庫·부정부패를 저지른 관청의 창고를 관고를 잠그는 것)의 처벌을 내렸다. 그러면서 “못할 짓이지만 (그의 탐학이 심해) 어쩔 수 없었다”(5월16일)고 괴로움을 토로했다. 나름대로 흐트러짐 없는 공정한 감사를 진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래겸은 어사의 직분을 마친 뒤 순조 임금에게 전·현직수령의 공과를 보고한 ‘서계(書啓)’와 평남지방의 사회문제와 개선책 20개조를 건의한 ‘별단(別單)’을 제출했다.

여기에는 ‘삼정(환곡·전정·군정)의 문란’과 관직을 임명할 때 뇌물을 주고받는 ‘매향·임뢰(賣鄕·任賂)’, 그리고 서북인 차별정책의 폐해 등이 담겨있다. 

그러나 박래겸의 ‘암행어사 출도’는 봉건사회의 체제적인 모순을 푸는 근본해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갈수록 심해졌고, 암행어사들마저 뇌물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내겸이 적발되어 징치된 안주 목사 서준보를 보자. 서준보는 불과 5개월도 되지 않은 1822년 12월20일 재기용됐다. 순조는 이를 두고 “지난번 처분은 암행어사의 서계에 거론됐기 때문이지 참으로 죄가 있어 법을 적용한 것은 아니다.”라고 변명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약시 순조 때의 일인데, 사간 윤석영이 암행어사들의 불법행위를 보고하면서 처벌을 건의했다.(<순조실록> 1833년 10월9일)

“경기도 암행어사 이시원이 경기도 37고을 가운데 20여 곳이나 암행어사 출도를 외쳤는데…. 그러나 이시원이 접대를 받고 역마를 바꿔 타는 데서 끼친 폐단은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잠행(潛行)의 의(義)를 크게 어겼습니다. 성묘한다면서 위세를 부리고, 제물을 마련했으며, 벌초할 때에는 역군을 징발했고….”

그러나 순조가 무엇이라 했냐고 하면…. 

“남을 너무 심하게 논박하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그대의 말이 또 이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왜, 누구를 위해 암행어사를 보냈다는 말인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박래겸, <서수일기>, 조남권·박동욱 옮김, 푸른역사, 2013년

김명숙, <서수일기를 통해 본 19세기 평안도 지방의 사회상>, ‘동아시아 문화연구’ 제35집,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2001년

오수창, <암행어사 길>, ‘역사비평’ 통권73호, 한국역사연구회, 2005년

박영호, <서수일기를 통해 본 박래겸의 리더십>, ‘동방한문학’ 56권, 동방한문학회 2013년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