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를 담당하는 지신사(도승지) 황희는…자기와 친한 인물을 임금(태종)께 여러번 칭찬해서 벼슬에 임명하니 재상들이 매우 싫어했다. 좌·우의정이 천거한 인물들을 배척하고 자기 사람을 임명한 것이다.”

1408년(태종 8년) 2월4일 <태종실록> 기사이다. 요약하자면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격인 지신사(이하 도승지) 황희(1363~1452)가 인사전횡을 휘둘러 재상들마저 ‘패싱’했다는 것이다. 기사내용을 뜯어보면 매우 흥미롭다.

<은대계회도>. 1534년(중종 29년) 농암 이현보가 도승지 남세진 등 승정원 동료들과의 모임을 기념해 그린 그림이다. 지금의 대통령비서실과 같은 승정원은 단순히 왕의 명령만 출납하는 역할에 만족하지 않았다. 실학자 안정복이 말했듯이 ‘승정원은 왕의 출납을 맡아 옳은 것은 아뢰고, 부당한 것은 거부했으니’ 그 임무는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한국국학진흥원

■‘인사전횡을 저지른 자 황희!’라는 익명서 써붙인 재상들 

당시 예법에 따라 좌의정(성석린)은 이조판서를, 우의정(이무)은 병조판서를 겸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승정원의 수장인 도승지 황희는 말하자면 ‘이조 담당’ 비서관으로서 이조의 인사권에까지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그러니 성석린(1338~1423)과 이무(1355~1409) 등 해당 부서(이조·병조)의 장을 겸했던 재상들은 졸지에 ‘바지저고리’가 되고 말았다. ‘황희의 인사전횡’ 기사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두 재상은 황희를 매우 꺼렸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어 겸직에서 사직했다. 두 사람은 황희의 불공정 인사사례를 모아 2~3차례 익명서까지 게시한 적도 있었다. 이에 황희가 조금 뉘우치고 깨달아, 예전 제도를 회복했지만 마찬가지였다. 황희는 이후에도 재상의 의논을 쓰지 않고 붕당(朋黨)을 가까이 해서 사람들이 모두 지목했다.”

이 대목에서 두 재상이 황희의 불공정 사례를 익명서에 적어 게시했다는 내용이 자못 흥미롭다. 지금으로 치면 부총리 두 분이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대통령 비서실장의 불공정 사례를 익명으로 게시한 셈이다. 지금이라면 엄청난 파문이 일어났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황희의 인사농단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황희는 조선 건국이나 태종의 등극에 특별한 공로가 있었던 인물도 아니었다. 당연히 성석린이나 이무 같은 쟁쟁한 공신 세력에 견줄 수 없는 미약한 존재였다. 황희가 태종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그렇게 마음껏 인사권을 휘두를 입장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 일부 연구자들은 황희가 지신사가 된 1405년, 그 시점에 태종이 승정원을 국왕의 직속 독립 관서로 승격시켰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개국과 제1·2차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차지한 태종으로서는 이제 수성(守成)의 길을 모색했다는 것이다. 태종은 개국공신(1392년)과 정사공신(1398년·제1차 왕자의 난 공신), 좌명공신(1400년·제2차 왕자의 난 공신) 등 쟁쟁한 공신들의 세력기반을 약화시키고 수성에 걸맞은 젊은 인재들로 하여금 친정체제를 구축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태종이 공신과는 거리가 먼 황희에게 비서실장직을 맡기고 인사권까지 장악하게 만든 이유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황희가 등용한 이들은 태종의 의중에 부합되는 인물들이 아닐까. 그것이 황희가 ‘인사전횡’이라는 비난을 받아가면서 3년8개월간이나 도승지직을 유지한 이유라는 것이다. 물론 실록의 기자가 황희를 ‘붕당을 조성한 인물’로 지목했으니 섣부른 단정은 금물이다.   

승정원은 언제든지 임금의 부름에 응할 수 있도록 임금 가까이 자리잡고 있었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 <동궐도>를 보면 임금이 공식업무를 보던 인정전과 선정전 근처에 승정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 번역팀의 <후설>, 고전번역원, 2013년에서 

■의문의 1패를 당한 맹사성과 신개

도승지의 전횡 기사는 황희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의 치세에 무려 4년1개월간 도승지였던 안숭선(1392~1452) 역시 실록 기자의 예봉을 피하지 못했다.

1434년(세종 16년) 8월7일자 <세종실록>에는 조정의 인사발령을 소개하면서 그중 전농시윤(정4품)과 전농소윤(종4품)이 된 조항과 이축을 콕 찍어 비판한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 도승지 안숭선의 이름이 등장한다.

“조항과 이축은 도승지 안숭선의 인아(사돈의 총칭)이다. 여러번 도승지 안숭선의 추천을 받은 끝에 기어코 이 자리에 발령 받았다.”

실록의 기자는 “안숭선의 사람됨은 모질고 팩하며 급하고 빨라서 쉽게 노하고 기뻐하여 동료들이 그 뜻을 어기면 욕설을 퍼붓기 일쑤여서 동료들이 모두 원망하고 미워했다”고 꼬집었다. 

실록 기자는 이 대목에서 애꿎은 좌의정 맹사성과 이조판서 신개마저 끌어들인다.

“안숭선이 인사권을 행사할 때 이조판서 겸 좌의정인 맹사성은 착하고 부드러워서 결단성이 없고, 판서 신개는 그저 ‘예예’만 하므로 모든 인사는 안숭선의 손에서 나왔다.”

맹사성(1360~1438)과 신개(1374~1446)는 실록에서 공연히 ‘의문의 1패’를 당한 셈이다.


■‘승정원 기강이 이렇게 무너졌냐’

이 두 사례는 지금의 대통령비서실격인 승정원의 위상을 단적으로 일러주고 있다. 

승정원은 비서실장인 도승지와 좌·우 승지, 좌·우 부승지, 동부승지 등 정3품의 승지 6명과 정7품의 주서 2명(혹은 3명), 그리고 잡일을 보는 이속 72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6명의 승지들 품계가 모두 똑같은 정3품인 것이 특이하다. 

그러나 같은 품계라고 해서 도승지의 권위를 무시해서는 곤란했다. 예컨대 1477년(성종 8년) 7월9일 동부승지 홍귀달(1438~1504)이 도승지 현석규(1430~1480)를 통하지 않고 강간 사건 관련 보고사항을 임금에게 아뢴 일이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도승지 현석규는 소매를 걷어올리며 눈을 부릅뜨고 “승정원의 기강이 언제 이렇게 무너졌냐”면서 “지금 승지가 위계질서를 뛰어넘었으니 이것은 도승지인 저의 불찰”이라고 개탄했다. 다 같은 3품관이지만 승지의 위계는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좌승지→도승지 순이었다.      

<은대조례> . 조선시대의 기능과 임무를 알기쉽게 정리한 일종의 업무메뉴얼이다. |장서각 소장

■거지도 도승지를 불쌍히 여겼다    

승정원은 6조 체제의 행정부서와 유기적이고 긴밀한 정책조율과 의견교환으로 임금의 업무를 보좌하도록 6방체계를 갖췄다. 

도승지는 이방(吏房), 좌승지는 호방(戶房), 우승지는 예방(禮房), 좌부승지는 병방(兵房), 우부승지는 형방(刑房), 동부승지는 공방(工房) 등을 맡았다. 오늘날 청와대 정무·국민소통·민정·시민사회·인사·일자리·경제·사회수석 등으로 나누는 것과 비슷하다. 

승지들은 흔히 후설(喉舌)이라 했다. “왕명을 출납하니(王命出納) 왕의 목구멍이자 혀(王之喉舌)”라는 <시경>에 따라 승지를 ‘후설지신’이라 일컬었다. 즉 왕명을 신하들에게 전달하고 신하들의 상소나 보고사항을 왕에게 올리는 역할을 했다. 임금의 최측근에서 국정전반에 걸친 업무를 보좌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지금의 대통령비서실 업무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임금을 보필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오죽하면 거지가 추운 날 새벽 일찍 궁궐로 출근하는 도승지를 보고 불쌍하다고 여겼다고 해서 ‘걸인련도승지(乞人憐都承旨)’라는 속담이 나돌았을까. 

그러니 아무나 감당해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세조는 승지 6명을 선발하기 위해 27명의 후보자를 대상으로 친히 면접시험까지 보았다. 면접과목은 ‘경술(유교를 바탕으로 한 통치력)과 이치(吏治·관리의 품행과 도리)’였다(<세조실록> 1467년 4월25~27일).


■‘제발 너희가 좀 걸러줘라.’ 

신권(臣權)이 만만치 않았던 조선시대 임금들은 자신을 보좌하는 승정원을 왕권(王權) 강화의 수단으로 적절히 활용했다. 

특히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 등 이른바 3사가 해대는 끊임없는 직언을 때로는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예컨대 태종은 1411년(태종 11년) 사간원이 끈질기게 우군동지총제 곽승우를 탄핵하자 승정원에 ‘너희는 대체 뭣하는 작자들이냐’고 펄펄 뛰었다.

“너희는 나의 후설(喉舌)이 아니냐. 이런 상소를 보았다면 물리쳐야지, 어찌하여 나에게 아뢰고 난 뒤에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가?”

태종의 호통에 도승지 김여지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태종은 이것도 모자라 “대간(사헌부·사간원)들은 할 말이 있으면 마땅히 대언사(승정원)를 통하지, 상소문 따위의 문서로 올리지 말라”(1415년)는 명까지 내렸다. 승정원에 ‘상소문 보고 거부권’을 부여한 것이다. 

태종을 비롯한 조선의 군주들은 이렇게 승정원의 왕명 출납 기능을 이용해서 대간과 공신집단, 그리고 그 외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의 언로를 차단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 vs 사헌부’ 3년 전쟁의 서막

승정원이 이렇듯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니 다른 권력기관들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유치하지만 치열한 힘겨루기가 벌어지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권력기간끼리의 갈등은 다름 아닌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의 치세에 벌어진 ‘승정원-사헌부의 3년 전쟁’을 들 수 있다.  

사건은 1424년(세종 6년) 8월26일 일어났다. 이날 도승지 곽존중을 비롯한 승정원 관리들이 단체오찬을 나누고 있었다. 그때 사헌부 장령(정4품) 양활이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계본)을 들고 대궐 뜰에 섰다. 평소대로라면 이 상소문은 승정원이 받아 임금에게 올려야 했다. 그런데 밥을 먹고 있던 승지가 별감을 시켜 “지금 식사 중이니 기다리라”고 전했다. 그러나 이 다음이 문제였다.

승정원 관리들끼리 술판을 벌인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장 주재로 열린 단체 회식에서 술판을 벌인 셈이니…. 어찌됐든 날이 저물 때가 돼서야 승정원의 좌부승지 이대가 나와 상소문을 받았다. 일언반구 미안하다는 말도, 해명도 없었다. 인내력에 한계를 느낀 양활은 사헌부 본부에 즉각 보고했다. 사헌부는 “뭐 이런 경우가 있냐”면서 양활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전한 승정원 별감을 체포해서 엄중히 취조했다. 사헌부는 그 취조내용을 바탕으로 탄핵 상소를 올렸다. 이날의 사건은 명백히 승정원의 잘못이었다. 

세종은 도승지 곽존중(?~1428)을 비롯한 승지들을 불러 “대간은 내가 존중하는 관리인데 그런 무례를 범하느냐. 내가 어제 한숨도 못잤다”고 질책했고 승지들은 “술김에 저지른 일”이라며 진땀을 흘리고 때로는 울며 용서를 빌었다. 

세종은 “이후에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용서해주면서 3일 뒤인 29일 사헌부 수장 이지강 등을 불러 승정원 승지들과 화해를 주선해주었다(8월29일).  

광주 이씨 가문이 보관하고 있던 승정원 일기 사초. 승정원 소속 주서(7품)들은 임금의 일거수 일투족을 일일이 기록해야 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술 공격으로 앙갚음한 승정원  

그러나 임금까지 나서 화해시켰건만 사헌부의 탄핵을 받은 승정원 승지들이 ‘꽁’했던 것 같다.

한 달여가 지난 10월4일 이번에는 승정원의 반격이 시작됐다. 오랜만에 대궐 밖에서 사냥을 나섰던 세종이 대신들에게 술상을 내려준 뒤 자리를 피했다. 그러자 승지 김자가 나서 “화해도 했으니 마음껏 취해보자”면서 한 달여 전 승정원을 탄핵한 사헌부 장령 양활을 술로 집중공격했다. 승지 6명이 큰 사발로 한잔씩 술을 돌린 것이다. 승정원의 술공격에 양활은 인사불성이 되어 모두 토하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졌다. 급기야 아전이 부축하고 나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세종실록>은 사헌부와 승정원 관리들을 싸잡아 꼬집었다. 

“승지 김자는 사헌부에 탄핵받은 것 때문에 동료들과 계획적으로 큰 술잔을 골라서 양활에게 술을 권했다. 그 마음씨가 좋지 못하다. 양활도 사헌부 관리의 체통을 잃었다. 모든 이가 우러러보는 직책인데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마구 마셔대 실수를 했으니 그 또한 절조가 없는 사람이었다.”


■‘들어와 고하시라고 여쭤라’(승정원) vs ‘안들어간다고 여쭤라’(사헌부) 

승정원과 사헌부의 싸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무슨 그리 앙금이 많은지 3년 뒤인 1427년(세종 9년) 5월30~6월4일 3라운드를 벌인다. 이때도 사헌부 소속 양활과 승지 김자가 연루됐다. 즉 이날 사헌부 지평(정5품) 배권이 승정원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임금의 부름을 받았는데도….

한참 후에야 승지가 나오지도 않고 아전을 시켜 ‘들어오라’는 말을 전했다. 화가 난 배권은 대궐 뜰에 서서 승정원 승지들과 힘겨루기를 벌였다. “들어오시라고 여쭤라”는 승정원과 “안들어간다고 어쭤라”는 배권 사이에 핑퐁식으로 오가야 했던 아전의 고초를 잠작할 수 있다, 배권은 “승지가 직접 나오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고 버티다가 결국 세종 임금을 배알하지도 않고 돌아가버렸다.

부하인 배권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사헌부 장령 양활이 폭발했다. 3년 전 자신이 당한 상황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양활은 세종 임금에게 시시비비를 가려달라는 상소를 올리려고 득달같이 달려가 승정원 앞뜰에 섰다. 이번에도 역시 양활과 악연인 승정원 우부승지 김자가 나서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김자는 “사헌부 대간의 상소라도 승정원 청내로 직접 들어와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활은 “대간이 임금에게 직접 올릴 터이니 승정원 청사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팽팽히 맞섰다. 

이에 사헌부 수장인 최사강(1385~1443)은 “승정원이 임금의 총명을 흐리게 하고 있다”며 6명의 승지 모두를 탄핵했다. 양 기관 간 감정싸움이 초유의 사태로 비화한 것이다.


■승정원의 일방적인 승리

그렇다면 세종 임금은 두 권력 기관의 사이에서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결론적으로 세종은 승정원의 손을 들어주었다.  

“대간은 말 하나, 행동 하나 경솔하게 해서는 안된다. 사헌부가 일개 지평(배권)의 말 때문에 6승지를 몰아붙여 ‘임금의 총명을 속였다’는 둥 과한 표현으로 갑자기 탄핵했는데 이처럼 경솔한 일이 있는가.”

결국 배권과 양활 등은 파직되고 나머지 사헌부 관리들은 모두 좌천되고 말았다. 권력의 두 핵심이 벌인 힘겨루기는 결국 승정원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것이다. 천하의 세종대왕이라도 입바른 소리만 해대는 사헌부보다는 지근거리에서 임금을 모시는 승정원(대통령 비서실)에 더 마음이 기울었던 것이 아닐까.

황희 정승 영정. 황희는 태종 연간에 지신사(도승지)를 맡아 인사 전횡을 저질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아마도 왕권을 강화하려던 태종의 의중에 부합되는 인물들을 추천한 것일 수도 있다,

■혹 떼려다 붙인 정인지 

그로부터 14년 뒤인 1441년(세종 28년) 이번에는 내각과 승정원이 한판 승부를 벌였다. 

당대의 저명한 정치가인 정인지(1396~1478)와 도승지 황수신(1407~1467)이 직접 칼을 겨눴다. 7월21일 당시 예조 겸 병조판서인 정인지는 승전색(4품의 내시부 관직)을 통해 보고서를 올리려 했다. 그러나 이는 웬만한 상소는 승정원을 통해 올리라는 세종 임금의 명에 부합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자 도승지 황수신은 내시부 서리를 불러 “판서가 승정원을 경유하지 않고 주상께 보고할 수 없으니 올리지 마라”고 지시했다. 황수신은 그것도 모자라 사람을 정인지에게 보내 “주상께 보고할 일이 있으면 승정원에 나와 보고하라”는 말까지 전했다. 이에 정인지가 발끈했다. 정인지는 승정원에 가기는커녕 환관 전균(1409~1470)을 시켜 세종 임금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그러자 황수신이 세종 앞에 나서 “만약 의정(삼정승)이라면 주상께 직보할 수 있지만 좌·우찬성(종1품·지금의 부총리격) 이하는 모두 승정원을 경유해야 한다”면서 “정인지가 그런 원칙을 깼으니 심히 불편한 일”이라고 아뢰었다. 정인지도 가만있지 않았다. 세종에게 나서 “신이 주상께 업무보고를 해야 하는데 승정원이 가로막았으니 이는 옳지 않은 일”이라고 반발했다. 

 두 사람의 갈등이 승정원과 내각의 싸움으로 비화하자 세종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승정원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1446년(세종 28년) 7월21일 세종은 “이후 모든 보고서는 반드시 승정원을 경유해야 하며, 또한 모든 왕명은 승정원을 통해 선포해야 한다는 것을 영원한 법식으로 삼겠다”면서 “이를 어길 경우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승정원의 권력을 견제하고자 했던 예조판서 겸 병조판서 정인지로서는 혹 떼려다 붙인 격이 됐다.  


■“양녕대군과 어울린 무리 용서하면 안됩니다” 

그렇다고 승정원이 임금의 목구멍과 혀 노릇에만 만족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임금이 잘못한 경우에는 목숨을 걸고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철권을 휘두른 태종조차 “내가 자네(승지)들을 기용한 것은 바른말을 듣고자 해서 쓴 것인데 말을 하지 않으면 무슨 쓸모냐. 말하지 않는 것이 두렵다”(1417년 윤5월26일)고까지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승정원은 왕족의 동정까지 면밀히 살펴 잘못된 것이 있으면 가차없이 탄핵하는 일도 맡았다.

예컨대 1431년(세종 13년) 사헌부의 탄핵을 받은 전 지이천현사(知利川縣事) 김훤이 평소 친분을 쌓아둔 양녕대군(1394~1462)의 비호로 용서를 받게 됐다. 그러자 도승지 안숭선(1392~1452)과 승지 남지(?~1453) 등이 나서 “양녕대군과 어울린 무리를 용서하는 것이 진실로 양녕대군을 위하는 일이 아니니 김훤을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강력히 청했다. 세종이 “그 자(김훤)가 임금의 형(양녕대군)을 그저 공경했기 때문이 아니냐”고 오히려 비호하자 안숭선은 “법률에 따라 김훤은 곤장 100대에 도형(노역형) 3년에 처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각종 이권을 노리고 임금의 친·인척 주변을 맴도는 무리들을 승정원이 가만 두지 않고 탄핵했던 것이다.


■세종과 설전 벌인 승지 허후

허후(?~1453)라는 인물은 대단한 승지였다. 임금의 친·인척 문제에 특히 엄정한 잣대를 들이댔다.

1438년(세종 20년) 4월23일 허후는 세종의 넷째아들인 임영대군(1420~1469)이 “창기(娼妓·악공의 딸)를 첩으로 들였다”며 탄핵했다. 세종은 “나에게 미리 보고하고 허락을 얻었으니 괜찮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허후는 “주상께서 엄중히 꾸짖더라도 모자랄 판에 하물며 그 뜻을 좇아 허락하신단 말씀이냐”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후 허후와 세종이 설전을 벌였다.  

“창기를 간통한 대군을 용서하고 허락하셨다고요. 그럼 나이 어린 대군들이 ‘아 이제 성상께서 이미 허락하셨다. 먼저 보고만 하면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하자고 한다면 어찌하시렵니까.”(허후)

“비록 창기라고 하지만 시집가지 않은 소녀인데 무엇이 불가하다는 말인가. 이 역시 후사를 넓히는 한 방법이 아니냐.”(세종)

“진정으로 후사를 넓히시려고 하신다면 양가(良家)의 처녀를 택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하필이면 창기란 말입니까.(허후)

“야. 그럼 종친들의 기첩(妓妾)을 다 쫓아내란 말이냐.”(세종)

당시 경녕군 이비(태종의 제1서자)와 함녕군 이인(태종의 제2서자)이 모두 기녀를 첩으로 두고 있었기에 세종이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래도 허후는 물러나지 않았다.

“다 내쫓아야죠. 그래서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기첩을 두는 것은 방자한 자나 하는 짓입니다. 지금 학문에 힘써야 할 젊은 대군들이 불의와 향락을 가까이해서 마음을 어지럽혀서는 안됩니다.”(허후)

한마디 한마디가 다 옳은 말이 아닌가. 세종은 “여러 아들 중에서 임영대군은 본래 학문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내가 이를 허락한 것”이라면서 “이미 허락해 놓고 차마 다시 내쫓도록 하지는 못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논리가 군색해진 세종은 넷째아들(임영대군)을 두고 ‘본래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자식’이라고 ‘디스’ 해버린 셈이 됐다. 허후는 약점을 잡았다는 듯 세종의 말실수를 물고 늘어졌다. 

“본래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 자식이라면 오히려 더욱 엄하게 다스려야지요. 그리고 불가한 일이라면 반드시 대의로 잘라버려야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미 허락하셨지만 다시 번복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세종은 서슬퍼런 허후의 직언에 꼬리를 살짝 내렸다. 하지만 임금 체면이 있으니 좀 봐달라는 듯 이렇게 다독거렸다.

“이미 이를 허락해 놓고 즉시 버리라고 명한다는 것은 내 진정 차마 하지 못하겠다. 내 앞으로 생각해 보겠노라.”


■신선처럼 우러러볼(여기도 고쳤습니다) 만한 대통령비서실장은 누구?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순암 안정복(1712~1791)은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맡아 옳은 것은 아뢰고, 부당한 것은 거부했으니 그 임무가 막중했다”(<순암집>)고 언급했다. 더 나아가 안정복은 “사람들은 승정원 승지들을 신선처럼 우러러보았다”고 했다.

독자 여러분은 이분들의 이름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권근, 황희, 성삼문, 황보인, 신숙주, 상진, 이준경, 윤두수, 이원익, 이산해, 이이, 정철, 유성룡, 이덕형, 이항복, 이수광, 박세당….

이름만 꼽아보아도 쟁쟁한 이분들이 누구냐. 바로 도승지를 지낸 분들이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비서실은 승정원과 비서실장인 도승지가 아닌가. 그렇다면 역대 대통령비서관과 비서실장 중에 ‘옳은 것은 아뢰고, 부당한 것은 고개를 바싹 세우고 거부한’ 이들이 과연 있는가. 또 그들 중에 ‘신선’으로 여겨 우러러볼 만한 이가 누구인가.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이동희, ‘조선 태종대 승정원의 정치적 역할’, <역사학보> 제132호, 역사학회, 1991

유휘상, ‘조선 초기 승정원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연구’, 서울대 석사논문, 2000

승정원일기 번역팀, <후설>, 한국고전번역원, 2013

심재권, ‘국왕의 비서실 승정원의 조직과 기능’, <국가기록연구>, 국가기록원, 2013

전해종, ‘승정원고’, <진단학보> 25권, 진단학회, 1964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