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향의 눈

윤동주의 서시, 어디서 썼을까

필자가 태어난 곳은 서울 종로 청운동 산1번지 13통 7반이다.

 

어디냐 하면 지금 청운동~부암동 사이를 뚫은 청운터널 바로 위쪽이다. 1974년 산동네가 철거된 뒤 그 상태로 놔뒀으니 지금은 수풀만 무성하다. 지금도 발굴해보면 60년대 동네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다.

 

회사가 가까운 필자는 틈나면 청운동~옥인동과 인왕 스카이웨이 등을 거닌다. 자연스레 발길이 그리 간다. 옛 추억에 대한 향수라 할까.

 

타마구(아스팔트 찌꺼기를 코팅한 종이)를 지붕에 올려 겨우 비만 피하고 살았던 청운동 산동네 하꼬방의 추억은 늘 가슴 속을 후벼 판다. 필자의 코흘리개 시절의 기억이 선명한 청운·옥인 아파트는 최근 10년 사이 철거됐다.

북아현동 산비탈에서 바라본 서울 하늘. 윤동주 시인은 1941년 11월 북아현동 하숙집에서 대표작인 '서시'와 '별을 헤는 밤'을 지었다. 지금 이 지역은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추억여행의 맥을 끊어 아쉽지만 철거된 산동네 판자촌과 두 아파트 자리에 칙칙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1969년 건립된 청운아파트의 경우 시공사를 구하지 못해 재건축을 포기한 케이스다.

1971년 지은 옥인아파트 자리는 어떤가. 원래 인왕산 녹지대를 침범한 아파트라 도시자연공원으로 복원하려던 차였다.

그런데 2009년 아파트 9동 옆 계곡에서 돌다리가 하나 발견됐다.

이것은 바로 겸재 정선(1676~1759)의 ‘장동팔경첩’(간송미술관 소장) 중 ‘수성동 계곡’ 그림에 등장하는 기린교와 똑같았다.

기린교의 발견으로 옥인동과 청운동의 역사가 줄줄이 복원되기 시작했다. 이곳에 비운의 왕자인 안평대군의 집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조명됐다. 추사 김정희의 시(‘수성동 우중

옥인동 수성동 계곡.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에 등장하는 다리(기린교)가 발견됐다.

 폭포를 구경하다’)도 새삼 회자됐다. “…발 밑에 우레소리 우르르르릉(吼雷殷극下) 젖다못한 산 안개 몸을 감싸니(濕翠似과身) 낮에도 밤인가 의심되는구나(晝行復疑夜).”

중인계급들의 시인공동체인 ‘송석원 시사’가 활약한 곳도 바로 인왕산 자락이었다.

필자가 상상도 못한 스토리텔링이 또 있었다.

‘윤동주 시인’이다.

기린교 발견 이후 계곡 복원 소식이 들리더니 어느 날부터 누상동의 윤동주 하숙집이 새롭게 조명됐다. 좀 어색했다. 3층짜리 연립주택 건물을 두고 ‘윤동주 하숙집’이니 뭐니 하는 모양새가 ‘오버’ 같았다.

 

그러더니 청운아파트에 물을 공급하던 가압장을 ‘윤동주 문학관’으로 꾸미는가 하면 창의문 옆에 ‘시인의 언덕’을 조성하고 대표작 ‘서시’를 새긴 조형물까지 떡하니 세웠다.

시인이 이 언덕에 올라 ‘서시’를 썼단 말인가.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그래 필자는 윤동주 시인의 절친인 정병욱의 회고를 바탕으로 시인의 누상동 시절을 더듬어봤다. 그랬다.

시인이 소설가 김송의 집(누상동 9번지)에서 하숙한 것은 1941년 5월부터 8월까지 3개월 남짓이었다. 우연히 전신주에 붙은 광고쪽지를 보고 구한 하숙집은 바로 소설가 김송의 집이었다. 시인의 누상동 시절은 짧았지만 행복했다.

종로구 누상동 윤동주 하숙집터.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 4학년 때인 1941년 5월부터 약 3개월간 소설가 김송의 집이었던 이곳에서 하숙하며 지냈다.   

“아침 식사 전엔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할 수 있었다. 세수는 아무데서나 할 수 있었다.…전깃불이 켜져있을 때 누상동 9번지로 돌아가…저녁을 먹고…선생(김송)의 청으로 대청마루에 올라가 한시간 남짓 환담하고 자정 가까이 책을 보다 자리에 드는 것이다.…참으로 알찬 나날이었다.”(정병욱)

시인의 누상동 시절 작품은 ‘십자가’와 ‘태초의 아침’ 등이다.

그렇다면 ‘자화상’과 ‘서시’, ‘별을 헤는 밤’은 대체 언제, 어디서 썼단 말인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에 나온 시인의 행적을 복기해봤다.

먼저 ‘자화상’은 1939년 시인의 서소문 하숙 시절 작품이라는 설이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는’ 우물이 바로 서소문 하숙집(옛 서대문구청 자리) 근처에 있었다는 것이다. 시인과 연희전문 입학 동기생인 유영의 주장이다.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과…시와 어머니, 어머니’를 담은 ‘별헤는 밤’과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외친 ‘서시’ 역시 누상동 시절의 작품이 아니다.

1941년 9~11월 사이 북아현동의 전문 하숙집에서 쓴 것들이다.

“북아현동은 7~8명이 들끓는 전문 하숙집이었다.…졸업반인 동주형은…진학에 대한 고민, 시국에 대한 불안…등 인생의 가름길…절박한 상황에서 대표작들을 썼다.”(정병욱)

옛 청운아파트 인근에 조성한 윤동주 시인의 언덕

그래, 필자는 호기심이 생겨 시인의 서소문·북아현동 흔적을 한번 찾아보기로 했다. ‘자화상’의 우물이 있었을 지 모를 옛 서대문구청(서소문 합동 27-1)을 우선 더듬었다.

 

그러나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시인이 찾아뵌 적이 있다는 정지용 시인의 자택(북아현동 1-64), 그리고 시인의 고종사촌인 송몽규가 지냈다는 하숙집(북아현동 240) 부근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인의 체취가 조금이라도 묻었을 법한 곳을 찾아간 것이다.

 

하지만 땀깨나 흘렸을 뿐 허탕치고 말았다. 두 곳 다 재개발을 눈앞에 뒀거나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다.

북아현동 산동네 비탈길 아파트 공사장 인근에서 어두워진 서울 하늘을 내려보았다.

 

아마 이쯤 어디에서 시인은 별을 헤고, 별을 노래하며 ‘주어진 길을 가야겠다’고 다짐했겠지.

 

공사판이 된, 혹은 재개발을 눈앞에 둔 한밤의 북아현동 뒷골목을 걸어내려오며 온갖 상념에 젖었다.
숨은 이야기들을 발굴해서 이런저런 스토리텔링으로 엮어낸 청운·옥인동은 어떻게 변했는가.

윤동주 시인을 비롯한 숱한 역사인물이 살아숨쉬는 ‘서촌’으로 거듭났다.

지금 이순간도 골목길에 서린 이야기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이곳 서촌을 찾는다. 인근 통인시장도 덩달아 유명세를 탔다.

 

반면 ‘서시’와 ‘별을 헤는 밤’의 무대인 북아현동은 어떤가. 삭막한 아파트촌으로 변했거나 변할 위기에 놓였다. 이야기를 잃어버린 동네가 된 것이다.

 

청운동 윤동주 문학관을 찾아 해설자에게 “시인의 대표작 무대는 청운·옥인동이 아니라 북아현동이 아니냐”고 슬쩍 운을 뗐다. 해설자의 응수가 걸작이다.

“아닐 수도 있죠. 윤동주 시인이 이곳 ‘시인의 언덕’에서 구상한 작품을 북아현동 하숙집에서 썼을 수도 있잖아요.”
‘딴은 그렇겠다’는 생각에 씩 웃고 말았다. 맞다. 이야기를 잃어버린 동네와 이야기를 발굴한 동네의 차이일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