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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덜미가 좋고' 천재시인 이상이 썼다는 연서는 여성이 여성에게 보낸 편지였다 “나는 진정 네가 조타(좋다). 웬일인지 모루겟다(모르겠다). 네 적은 입이 조코 목들미(목덜미)가 조코 볼따구니도 조타….” 2014년 7월 제목만으로도 단박에 주목을 끄는 기사가 보도됐다. 당시 25살이던 이상(1910~1937)이 당시 23살 소설가였던 최정희(1912~1990)에게 보냈다는 핑크빛 연서였다.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문학을 이끈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1910~1937)이 23살 젊은 이혼녀이자 동료소설가에게 보낸 러브레터가 처음 발견됐다’는 것도 핫뉴스일텐데, ‘네 입과 목덜미까지 좋다’는 편지 내용까지 일거에 대중의 시선을 빼앗을만한 소식이었다, 이상이 최정희에게 보낸 연서로 소개된 편지. 그러나 편지 끝부분의 서명이 ‘이상(李箱)’이라 했지만 이상이 아니라 이제(李弟)이며,..
경주 쪽샘에서 출토된 1500년전 '행렬도 토기', 말갑옷의 비밀 경주에 ‘쪽샘’이라는 지명이 있다. 황오동·황남동·인왕동 일대의 약 38만㎡ 면적인데, 이곳에 쪽빛 하늘이 그대로 비치는 샘이 있다고 해서 ‘쪽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신라의 천년고도 답게 경주는 그 어느 곳을 파도 유물밭인데, 바로 이 쪽샘 지구가 그렇다. 4~6세기에 살았던 신라 귀족들의 무덤이 800여기가 집중된 곳으로 유명하다. 1960년대부터 주택과 버스터미널이 들어서면서 고분 훼손이 심해지자 2002년부터 민가와 사유지를 매입하고 2007년부터 본격발굴하기 시작했다. 발굴은 20년 예정으로 진행되고 있다.2009년 경주 쪽샘지구 C 10호 목곽묘에서 확인된 말갑옷이 복원을 끝내고 첫 공개됐다. 복원결과 말갑옷은 736매의 철편으로 중무장한 신라 중장기병의 것임이 드러났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
조선의 김치사발이 오사카성 한채값 '일본의 국보'가 되기까지 ‘에비!’ 예전에 부모님이 말 듣지않은 아이를 달래고 어르기 위해 쓴 말이다. \‘무서운 괴물이 나타난다’는 경고성 메시지인데, 이 말의 유래를 아는 이는 드물다. 이 말은 ‘이비야(耳鼻野)’의 줄임말인데, 임진왜란 때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간 야만적인 일본인이라는 소리다. 말 듣지않은 아이를 어르려고 ‘코와 귀를 베어가는 일본 야만인이 온다’고 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가 전국시대의 오랜 전쟁에 지친 다이묘(大名)를 무마하려고 베어온 코의 숫자에 따라 조선땅을 분배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일본의 국보가 된 조선의 막사발 기자에몬 이도(喜左衛門 井戶). 이런 막사발들은 경남 진주지방에서 제삿날 김치를 담는 그릇이었다고 한다, 소장자였던 기자에몬(喜左衛門)의 이름을 땄다...
기마, 무용, 수렵…고구려 벽화를 빼닮은 '신라행렬도' 1500년만에 현현 말을 탄 인물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춤추는 듯한 모습이다. 활쏘는 사람들이 암수 사슴과 멧돼지, 호랑이, 개 등을 사냥하고 있고, 주인공인 듯한 인물이 개(犬)와 함께 행렬하고 있다. 안악 3호분이나 무용총 등 고구려 고분벽화의 행렬도와 흡사하다. 그러나 신라 특유의 선각문 기하학 문양들도 보인다.5세기대 신라 귀족 무덤으로 알려진 경주 쪽샘 44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에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빼닮았지만 신라 특유의 문화도 빼놓지않은 ‘신라 행렬도’를 새긴 토기가 발견됐다. 행렬이라는 큰 주제 아래 기마·무용·수렵의 내용을 파노라마처럼 펼친 복합 문양은 신라 회화에서 처음 확인된 사례이다. 무덤제사와 관련된 유물로 추정된다.쪽샘 44호분 에서 확인한 ‘신라행렬도’ 토기. 굵은 선으로 된 부분이 찾아낸..
사명대사는 왜 "조선의 보배는 가토 기요마사의 목"이라 했을까 “승장 유정의 정예병이 왜적을 참획(斬獲)하는 공을 여러번 세웠다. 그렇지만 속세를 떠난 유정이 군직(軍職)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특별히 파격적인 상을 내려 훗날의 공효를 거두지 않을 수 없다. 유정에게는 당상관(堂上官·정 3품 이상)의 직을 제수하여….” 1593년(선조 26년) 4월 12일 선조가 승병장인 사명대사 유정(1544~1610)에게 “당상관(정 3품 이상)의 상급을 내리라”는 특명을 내렸다는 내용의 기사이다. 그런데 이 기사를 쓴 사관이 붙인 평가가 폐부를 찌른다.“전란을 당해 날래고 건장한 장수들조차 두려움에 떨었는데 엄청난 전공이 도리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늙은 승려에게서 나왔다. 이것이 어찌 무사들만의 수치이겠는가.” 의 사가는 쉰살이 된 사명대사의 분전을 인용하면서 임진왜란 때 ..
40대 여성, 그녀가 1500년전 영산강 유역을 다스린 지도자였다 ‘영산강 유역 다시벌(평야)을 다스리던 마한 출신 토착세력의 지도자는 40대 여성이었다. 그리고 이 여인은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착용하고 있었다.“ 영산강 유역 전남 나주의 넓은 평야에 복암리 고분군이라는 대형 무덤떼가 자리잡고 있다. 그중 복암리 3호분에서는 3m에 가까운 대형옹관묘가 26기 출토되고 금동신발과 장식대도 등 최상급 유구와 유물이 쏟아졌다. 3세기~7세기까지의 무덤이 모인 고분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이 복암리 3호분을 마한 출신 토착세력 지도자들의 고분이라 평가한다.영산강 유역 드넓은 평야를 다스린 5세기 말 6세기 초 마한 토착세력의 지도자가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정촌고분의 피장자는 40대 여성이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사진은 발굴된 인골을 분석해 복원한 얼굴..
최초의 '전 백성' 여론조사 실시…세종의 숨겨진 업적 “전국의 전·현직 관리는 물론이고 세민(細民·가난하고 비천한 백성)들에게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 그 결과를 아뢰도록 하라.” 1430년(세종 12년) 3월 5일 세종대왕은 가히 혁명적인 명을 내린다. 호조가 ‘전답 1결 당 조 10두 징수’를 골자로 한 공법(세금) 방안을 제출하자 세종이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지시한 것이다. 이 최초의 여론조사에는 무려 5개월여가 걸렸다. 꼭 4개월이 지난 7월5일에는 ‘여론조사 중간점검 회의’까지 열었다. 이때 호조판서 안순(1371~1440)은 “지금까지의 조사를 보면 경상도에서는 찬성이 많고 함길·평안·황해·강원 등은 반대가 많다”고 중간보고했다. 세종은 “각 도의 (여론 조사) 결과가 도착하면 중앙 및 지방의 관리들은 공법의 장단점과 해결방안을 마련해서 보고하라”..
'대자보' '투서' … 한글창제 후 생긴 일 “내가 늘그막에 할 일이 없어 글자를 만들었겠냐.”1443년(세종 25년) 12월30일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은 이듬해 2월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1445) 등과 논쟁을 벌인다. 최만리는 “언문(한글)은 사대주의에 어긋나는 부끄러운 문자”라며 “설총(655~?)의 이두는 비속하지만 중국 글자를 빌려 어조(語助)에 사용해서 학문을 일으키는 데는 일조했다”고 나름 평가했다. 그러면서 “언문으로 입신출세한다면 무엇 때문에 어려운 성리학을 공부하겠느냐”며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일 뿐”이라고 깎아내렸다.(보물 제951호). 1593년(선조 26년) 임진왜란 와중에 평안도 의주로 줄행랑친 선조는 포로가 되어 왜적에 협조하는 백성들에게 한글교서를 내려 “백성들이여! 돌아오라!”고 권했다.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