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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년 왕희지 그늘에 가려진 김생, 김육진, 황룡사 스님 “신라 무장사에 김생의 글씨를 쓴 비석이 있는데 어디인지는 모릅니다.” 1760년(영조 36년) 무렵 경주부윤이 된 이계(耳溪) 홍양호(1724~1802)는 ‘전설의 명필’인 김생의 비석이 무장사에 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무장사는 원성왕(재위 785~798)의 아버지(대아간 효양)가 숙부인 파진찬을 추모하려고 지은 절이다. 는 ‘무장(무藏)은 태종무열왕(654~661)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와 투구를 이 사찰에 묻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속전을 소개했다. 이 절에는 승하한 소성왕(799~800)을 위해 부인인 계화왕후가 세운 아미타불상의 이력을 적은 비석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무장사비이다. 무장사비문의 복원도. 왕희지의 필체를 빼닮아 왕희지집자비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최근 이계 홍양호..
"성락원 바위글씨는 '나만의 집(장외가)'…누가 '추사 코스프레'했나"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늪의 서쪽 암벽에 ‘장빙가(檣氷家)’라고 새긴 글씨는 명필 추사 김정희 선생의 것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사이트에 쓰여있는 명승 제35호 성락원 설명자료이다.성락원 영벽지 바위에 새겨진 글씨. 지금까지는 ‘장빙가(檣氷家)’로 읽어 ‘고드름이 열린 집’이라는 의미로 통용됐다. 그러나 손환일 대전대 서화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빙’자는 ‘외(外)’자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연구원은 후한시대의 이른바 팔분법에 따라 표기된 용례를 들어 ‘장외가’는 ‘아름답지만,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성락원은 1992년 당시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이 전문가 의견을 무시하고 국가문화재로 지정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최근..
"뻣뻣한 젊은 것들을…", 조선시대 직장갑질, 신고식 문화 “너는 볼 일 없는 재주로 외람되게도 빛나는 관직에 올라…더러운 너를 받아주는 것은 천지의 넓은 도량을 본받았기 때문에…지금까지 전해오는 고풍을 이제와 그만둘 수 없으니 아황죽엽주에 용머리와 봉황꼬리 안주를 즉각 바치도록 하라. 선배(先進)들.” 첫눈에 봐도 범상치않은 글이다. ‘송재선’을 ‘선재송’으로 이름과 성을 뒤바꾼 것도 그렇고, 이름 앞에 신귀(新鬼·새로운 귀신)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도 그렇다. 여기에 ‘전통에 따라’ 선배들에게 거위새끼의 털처럼 노란 술(아황·鵝黃)과 대나무 빛깔(竹葉)과 같은 술인 아황죽엽주와, 생선을 상징하는 용머리(龍頭), 닭을 의미하는 봉황꼬리(鳳尾)를 대접한다면 너그럽게 받아주겠다는 내용이다. 글의 뒤에 ‘선배’를 뜻하는 ‘선진(先進)’ 3명의 수결(手決·사인)도 눈..
죽고 살아남은 조선의 4대문, 그 아픈 역사 얼마전에 돈의문, 즉 서대문을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로 복원한 모습을 공개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서울의 4대문은 숭례문(남대문)과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숙정문(북대문) 등이다. 이중 철거된지 104년이 지나도록 복원되지 않은 유일한 문이 바로 돈의문이다. 원래는 원상회복 방침이었지만 주변토지 보상과 교통난 해소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에 증강 및 가상현실로나마 아쉬운대로 ‘상상속의 돈의문’이라도 감상할 수밖에 없다. 돈의문 철거소식을 의인화해서 알린 매일신보 1915년 3월4일자. ‘나는 서대문이올시다’라는 제목으로 철거의 안타까움을 전하고 있다.돈의문이 철거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이었다. 그해 3월4일자 매일신보는 ‘난 경성 서대문이올시다’라는 제목의 기사에..
흥선대원군은 왜 경복궁 현판바탕에 검은색을 칠했을까 ‘박정희 친필 한글 글씨(1968년)→하얀색 바탕의 검은색 글씨(고종 때 훈련대장 임태영의 한문글씨·2010년)→검은색 바탕의 황금빛 동판글씨(2019년)’로…. 14일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위 회의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광화문 현판의 재복원방식이 ‘검은색 바탕에 황금빛 동판글씨’로 결정됨으로써 9년간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광화문 현판의 제작방식 논란은 2010년 광복절 광화문 복원에 맞춰 내건 현판이 불과 몇개월만에 균열이 생겼고, 문화재청이 그해 연말 전격적으로 교체를 결정함으로써 전개됐다. 하지만 광화문 현판 논쟁은 1968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가로쓰기 한글 현판이 걸리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보아야 옳다. 그렇게보면 50년도 더 된 논쟁이었다. 1865~68년 사이에 경복궁과 함께 복원..
일제는 왜 서대문(돈의문)은 헐고 남대문(숭례문)은 살렸나 ‘난 경성 서대문이올시다.’ 1915년 3월4일 매일신보가 조선총독부 기관지 답지않은 기사를 싣는다. 돈의문(서대문)의 철거를 의인화해서 ‘영원히 사라질 돈의문(서대문)’을 안타까워했다. 기사는 “나는 1421년(세종 3년) 팔도장정 30만명의 손으로 탄생한 성문 8곳, 즉 8형제 중 둘째되는 돈의문이다”로 시작된다. “이름 덕분에 몇백년 먹어도 갓난아이처럼 ‘새문 새문’소리를 듣더니…여러분과 인연이 끝나 경매되어 팔린답니다…조국에 변란이 일어나면 무능한 나도 국가의 간성(干城)노릇을 해서 성밑에 몰려드는 적군의 탄환과 화살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지엄하게 한성의 서편을 지켰는데 다만 경매 몇푼에….” 돈의문 철거소식을 의인화해서 알린 매일신보 1915년 3월4일자. ‘나는 서대문이올시다’라는 제목으로 철거..
관통도로에 일왕연호 '소화'까지…일제의 종묘 훼손 증거 나왔다 ‘소화(昭和) 8년 3월 개축’.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사당인 종묘(사적 제125호)의 외곽담장에는 국권침탈의 뼈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다. 조선 임금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국가사당에 일본 왕(히로히토·裕仁)의 연호인 ‘소화(昭和·1926~89)’ 글자를 새긴 것이 9개나 된다. 그런데 이 일본 왕의 연호인 ‘소화’ 명문이 일제가 1932년 종묘~창덕궁·창경궁 관통도로를 뚫은 뒤 훼손된 종묘담장을 개축하고 새긴 모욕의 상징이라는 추정이 나왔다.종묘 외곽담장에 새겨진 일왕 히로히토(재위 1926~1989년)연호. 소화(쇼와·昭和) 8년은 1933년에 해당된다. 일제가 창덕궁과 종묘 사이를 지나는 관통도로를 뚫은 뒤 훼손된 담장을 수리한 증거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궁능사업본부 종묘관리소 제문화재청 궁..
내시가 조성한 정원, 과연 문화재의 가치가 있을까 ‘새롭게 밝혀진 내시의 별장, 문화재 가치가 있는가.’ 최근들어 조선조 철종 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장이자 의친왕의 별궁으로 ‘200년 조선의 비밀정원’이라는 이유를 들어 명승(제35호)으로 지정된(1992년) 성락원(서울 성북동)의 문화재적 가치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그 결과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1983년과 92년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전문가 의견을 무시하고 문화재로 지정한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국회 문화체육관광위 김영주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국사편찬위원회를 통해 ‘철종 때 이조판서 심상응’은 사료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논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성락원의 문화재적 가치는 애초부터 없었는데, 문화재관리국이 성락원 소유자의 근거없는 주장을 검증없이 받아들였다는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