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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계 별시계 통합 천문기구 만든 18세기 실학자 유금을 아십니까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양의 천문시계(아스트롤라베·이슬람에서 고안된 천문시계)를 조선식으로 해석한 이가 있다. 실학자 유금(1741~1788)이다. 역시 실학자인 유득공(1748~1807)의 숙부이자 당대 학술·예술·과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실학자이자 발명가다. 이 유금이라는 분이 1787년(정조 11년)에 만든 천문관측도구가 바로 혼개통헌의(渾蓋通憲儀)이다. ‘혼개통헌의’는 천체를 관측하는 기구라는 뜻이다. 유금이 만든 혼개통헌의는 해시계와 별시계를 하나의 원판형의기(천체의 운동을 관측하는 기구)에 통합해서 표현한 천문관측기구이다.정조시대 실학자 유금이 재작한 천문기구인 ‘혼개통헌의’. 해시계와 별시계를 하나의 원판형의기(천체의 운동을 관측하는 기구)에 통합해서 표현한 천문관측기구이다.|문화재청 제공..
'용의 눈동자'를 가진 국왕직대 효명세자는 궁중공연의 대표 프로듀서였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어렸을 적 달달 외웠듯 조선의 임금은 총 27명이다. 그러나 살아 생전에는 임금이 아니었지만 사후에 임금으로 모신 이른바 ‘추존왕’이 9명 있다. 이 추존왕 9인을 정식 임금으로 쳐주지 않지만 그래도 그중 1명은 ‘국왕대우’로 대접받아야 할 것 같다. 왜냐면 그 이는 정식으로 등극하지 않았을 뿐이지 실제로 조선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바로 순조(재위 1800~1834)의 맏아들인 ‘추존왕’ 익종(고종 때 문조로 다시 추존)이자 효명세자(1809~1830)이다. 2016년 방영된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박보검 탤런트가 연기한 주인공(효명세자), 바로 그 이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하라”는 순조의 명에 따라 1827년 2월 18일부터 22살..
'미인박명' 지광국사탑, 110년 역마살 끝내고 귀향한다 ‘미인박명’. 강원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 제 101호)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미인’이란 국내 부도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는 뜻이고, ‘박명’은 그만큼 탑의 팔자가 기구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1911년 원주에서 반출되어 서울 명동으로 옮겨졌을 때의 지광국사 탑. 이 탑은 오사카로 팔려갔다가 다시 돌아왔다지만 경복궁으로 이전됐다. 문화재청은 건축문화재분과 문화재위원회의 검토 결과 현재 해체·복원 작업중인 지광국사탑을 원래 있던 곳인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의 법천사지로 이전을 결정했다고 최근 밝혔다. 그러나 지광국사 탑과 탑비를 원래의 위치에 보호각을 세워 복원할지, 아니면 사지내 건립을 추진 중인 전시관 내부에 탑을 이전 전시하게 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어떤 경우든 지광국사탑의 실제 이전 ..
'유적 말고 래고랜드?'…춘천 중도 청동기 마을의 파괴 방조는 역사의 수치다 "중도 유적 대신 레고랜드를 짓는다. 이것은 역사의 수치다." 서울 석촌동과 풍납동 일대는 백제 왕릉급 고분(석촌동)과 도성(하남위례성·풍납토성)이 확인된, 한성백제(기원전 18~기원후 475년)의 500년 역사를 오롯이 증거하는 핵심유산이다. 하지만 개발의 광풍에서 사라질 뻔 한 유적을 온몸을 던져 막아낸 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이형구 동양고고학연구소장(75·선문대 석좌교수)였다. 레고랜드 조성부지에서 확인된 다양햔 형태의 지석묘(고인돌). 신분의 상중하를 알 수 있는 지석묘들이다. 이교수는 1983년 백제 적석총인 석촌동 3호분과 4호분 사이에 도로 관통 공사를 강행하고, 마구 파헤친 고분에서 백제 인골이 포클레인 삽날에 찍혀나가는 참상을 확인했다. 이교수는 한편으로는 공사 차량을 몸으로 막아서고 한편..
사라진 신안 보물섬 유물 2만점 중 일부 도자기, 40년만에 현현했다 1975년 8월20일 전남 신안 중도 앞바다에서 조업중이던 어부 최평호씨(당시 35살)의 그물에서 심상치않은 물건이 걸렸다. 청자꽃병을 비롯한 중국제 청자와 백자였다. 최씨는 이 물건들을 그냥 마루밑에 보관해 두었다. 6개월 뒤 초등학교 교사인 최평호씨의 동생이 ‘마루밑 중국제 청·백자 이야기’를 듣고 가만 있지 않았다.40여년만에 회수된 신안선 유물들. 1980년대초 잠수부를 동원해서 건져올린 뒤 은닉해온 것들이다. |문화재청 제공"심상치 않은 물건 같은데 신고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동생은 곧바로 신안군청에 중국제 청백자의 인양 사실을 알렸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신안선의 존재는 이렇게 알려졌다. 감정에 들어간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의 전신)은 이 중국제 청·백자가 중국 송~원나라 시대의 것임을 ..
태종이 직접 밝힌 양녕대군 폐세자 이유-"대체 너 때문에 몇 사람이 죽었냐" “나이 10세 때 세자 책봉을 받았지만…16~17세 때 성스러운 덕을 타고난 세종에게 하늘도, 인심도 쏠린 것을 알고는 일부러 미친 척하면서 하루같이 술과 기생 속에 보내….” 정조가 1789년(정조 13년) 양녕대군 이제(李제·1394~1462)의 사당을 위해 지은 ‘지덕사기’(至德祠記)의 내용이다. 왜 양녕대군의 사당을 ‘지극한 덕’을 뜻하는 ‘지덕사’라 했을까. 정조는 “무슨 덕이 제일 좋을까”라고 자문하고는 “그야 사양하는 덕, 그것도 명예를 사양하는 일”이라고 자답했다. 1962년 개봉된 영화 ‘양녕대군 주유천하’. 양녕대군이 부왕(태종)의 뜻이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 일부러 거짓 광태를 부리며 주색에 빠진다. 그러나 이 영화는 “훗날 양녕대군이 ..
도량형 통일한 세종대왕 당시의 기준 자(尺) 는 무엇인가 세종대왕이 도량형을 통일한 1446년(세종 28년) 건축물을 지을 때의 영조척(營造尺·과거 건축물이나 조영물을 만들때 사용된 길이기준)은 312㎜ 내외였다. 세종대왕 영조척은 상황에 따라 다소 달리 쓰이기는 했지만 18세기 후반까지 건축물을 지을 때 대체적인 기준으로 알려져 왔다. 이 기준은 19세기 들어 일본의 영향아래 1자당 303㎜의 자로 바뀐다. 그런데 최근 세종대왕 당시의 영조척이 19세기 중후반에도 사용됐음을 알려주는 유물이 나왔다.경기 안성 청룡사 대웅전 해체 보수과정에서 확인된 곡자가 발견됐다. ㄱ’자 형태의 자인 곡자는 전통건축에 쓰인 목재와 석재 길이를 측정하거나, 집 전체의 크기와 비례, 치목(治木·나무를 깎는 일)과 치석(治石·돌 다듬는 일)에 필요한 기준선을 부여할 때 사용한다. ..
행방이 묘연했던 신라 명필 김생의 친필 글씨, “3건이나 있었다” 신라 명필 김생의 일화 중 아주 재미있는 것이 있다.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김생의 필법을 이어받은 서예가인 홍관(?~1126)이 송 휘종 연간(재위 1100∼1125)에 진봉사(進奉使·중국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려고 파견한 사신)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김천 수도암비’에서 확인된 ‘김생서(金生書)’ 글자(왼쪽)와 제작연대를 밝힌 연호인 ‘원화 3년’(808년) 글자(가운데), 그리고 제작목적을 알린 ‘비로자나불’ 글자.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은 “이 비문은 ‘김생서 수도암 비로자나불 조성비’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 제공 ■왕희지의 재림을 몰라본 중국인들 어느날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빈관에 머물고 있던 홍관을 찾은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송나라 한림대조 양구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