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자라면 흔히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 등장하는 해리슨 포드를 떠올리고, 그 멋진 남자의 모험담을 연상하게 됩니다. 실제로 영화를 보고 학문의 길로 접어든 고고학도들도 제법 보았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은 그렇게 낭만적인 학문은 아닙니다. 한여름철 뙤약볕에 앉아 행여 발굴되는 유물이 상하고 유구가 무너질까봐 트롤(꽃삽 같은 도구)과 붓으로 감질나는 작업을 펼칠 때가 많은 직업이니까요. 하지만 획기적인 유물이나 유적을 자기 손으로 찾아내는 그 벅찬 순간을 잊지 못하겠지요. 아마 그래서 고고학 하나봅니다. 이번 주에 아주 흥미로운 발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해방 이후 우리 손으로 처음 발굴한 유물이야기입니다. 비록 패망한 일본인 학자의 귀국을 막아선 끝에, 그것도 미군정청의 예산을 받아 시작했지만 그래도 한국 학자들이 주인격으로 참여했으므로 나름 잊을 수 없는 발굴이었지요. 무엇보다 그 첫번째 발굴에서 고고학사에 길이 남을 유물이 하나 터져나옵니다.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 그것도 시내 한복판에서 고구려의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의 체취가 묻은 유물이었습니다. 왜 하필 고구려 임금의 유물이 경주에서 나왔을까요. 또하나 흥미로운 것은 그 유물에 새겨진 글씨의 앞 뒤에 마치 붙은 수수께끼 같은 부호들입니다. #(井)하고 十인데, 도통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해시태크(#)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24회는 바로 '경주 호우총에서 확인된 광개토대왕의 체취'를 다루려 합니다.

  

 “안되겠소. 좀 계셔야겠습니다.”
 조국이 해방된 1945년 9월, 초대 국립박물관장으로 부임한 김재원에게 소망 하나가 있었다.
 ‘우리 손으로 제대로 된 발굴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이제 박물관이 조선인의 수중에 들어왔으니 우리 손을 거친 발굴유물의 수집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자연스레 터져나왔다.
 경주시내에 있는 가장 큰 신라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 봉황대를 발굴하자는 얘기도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만한 이유도 있었다. 일제시대에 벌써 경주의 신라무덤에서 순금제의 신라금관이 3개나 출토된 예가 있었다. 그런 만큼 우리도 훌륭한 신라유물을 발굴해 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열악했다. 우리에게 고고학적인 발굴경험이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에 실시된 일본인들의 발굴조사에 조선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잡일이나 날품팔이로 동원됐을 뿐이었다. 여기에 해방(일본인 입장에서는 패망)이 되었으니 국내의 일본인들도 모두 철수해야 했다.

호우총에서 확인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흔적. 서체가 광개토대왕비문의 글씨와 매우 흡사하다. 호우총은 해방 이후 우리 손으로 조사된 첫번째 발굴이었다.

 ■김재원과 아리미쓰
 이 때 김재원 관장의 눈에 띈 이가 바로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라는 일본인이었다.
 아리미쓰는 일본이 패망했으나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우리나라 사람에게 인계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박물관 책임자였다.
 이제 박물관이 우리 손으로 개관되었으므로 아리미쓰 역시 귀국선을 타야했다.
 김재원은 아리미쓰의 경험을 통해 경주의 무덤을 하나 발굴 조사하기로 마음먹고 그의 귀국을 막았다.
 일단 아리미쓰를 귀국하지 못하도록 미 군정청의 양해를 얻었고, 박물관에서 함께 근무하면서 발굴조사 계획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적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는 그 대상이 정해지면 첫째, 조사를 맡아 할 능력이 있는 고고학자가 있어야 하고 둘째, 발굴비용이 마련되어야 하며 셋째, 당국의 허가가 필요하다.
 이 가운데 한 가지라도 해결되지 않으면 발굴조사는 불가능하다.
 김재원은 독일 뮌헨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와 경성대학(현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고 있었다. 광복이 되자 그는 바로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했고, 박물관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시급히 고고학적인 발굴조사가 활성화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유적의 발굴조사를 서둘렀던 것이다.
 그런데 아리미쓰라는 발굴전문가는 확보했지만 발굴허가가 문제였다. 당시 발굴은 미 군정청의 본부가 있는 동경 맥아더 사령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 모든 난관을 김재원이 해결하고 이듬해인 1946년 5월 드디어 경주의 신라무덤 1기를 발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광복 후 우리 손으로 최초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대상이 바로 이 호우총(壺우塚)이었던 것이다. 왜 하필 호우총이었을까.

 

 ■최초의 발굴보고서
 호우총은 해방 2년 전인 1943년 4월3일, 노출된 유적이었다. 당시 경주 노서리에 살던 주민이 호박을 심다가 우연히 장신구 10여 점을 발견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 때 총독부 박물관은 발굴전문가로 아리미쓰를 급파했다. 아리미쓰의 조사결과 순금제 목걸이 33개와 곡옥·관옥·환옥 달린 목걸이, 순금제 귀고리 등 수십 여 개의 유물을 수습했다.
 그 인연 덕분에 이 고분이 해방 조선의 첫 번째 발굴조사 후보로 꼽힌 것이다.
 그런데 발굴 12일이 지난 1946년 5월 14일. 엄청난 유물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호우총과 은령총 발굴조사보고서>가 전하는 그 날짜 발굴 일지를 보라.
 “(1946년) 5월14일 날씨 청명. 인부 주간 12인, 야간 3인. 곽내의 토기와는 완전히 위치를 달리하는 청동제 용기를 채취(採取)하였다. 이 용기는 최초부터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었던 것이다. 기저에 명문이 나타나 큰 ‘쎈세이순’을 일으키게 하였다. 명(銘)은 양각으로 4행 합(合) 16자로서 16자 외에도 무슨 기호 같은 것이 있다.”
 이 보고서는 조선인의 손으로 작성한 최초의 발굴보고서로도 유명하다. 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서 제1책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보고서는 1948년 4월 10일 을유문화사 간으로 나왔으며, 가격 1,200원(圓)에 500부 한정판이고 저자는 김재원이라고 돼있다.
 “김재원이가 경주에 체류하면서 최순봉이의 안내로…” 하듯 존칭 없이 ‘OOO 이가’하는 표현이 흥미롭다.

동아일보 1946년 5월25일 기사. 호우총 발굴소식을 전하고 있다.

 ■신라 무덤에서 확인된 광개토대왕의 자취
 그런데 그 명문내용은 더욱 엄청났다.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
 이 무슨 조화인가. 경주의 신라무덤인 호우총에서 고구려 유물, 그것도 고구려 정복왕이었던 광개토대왕의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신라 수도 경주에 고구려 무덤이 존재했단 말이 아닌가. 사실 명문유물 발굴은 발굴자에게는 더할 수 없는 행운이다. 새겨진 문자를 통해 엄청난 역사·고고학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복 후 국립박물관 주관의 최초 유적발굴조사에서 그런 행운을 잡게 될 줄이야.
 당시의 발굴보고서도 “이 청동기는 이번 경주발굴에서 가장 중대한 발견품이며 고적발굴사상 특필(特筆)할 만하다”고 흥분했을 정도였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청동항아리 명문의 글씨체는 1883년 중국의 지안(集安)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의 비문과 너무도 흡사했다는 것이다. 마치 동일인의 필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발굴보고서는 이로 보아 그 청동기가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신라에 운반된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궁금증이 양산됐다. 명문 가운데 제일 먼저 쓰여져 있는 을묘년(乙卯年)이 어느 해에 해당되는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에 쓰여진 호우십(壺우十)의 ‘十’자는 무엇을 뜻하는가. 
 더구나 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관련 유물이 신라무덤에 함께 묻혀있는가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재위 391~412년)이 서기 412년에 죽고 난 지 3년 후가 되는 해이다. 서기 415년에 해당되고 그래서 이 청동항아리가 415년에 만들어 진 것은 분명했다.
 문제는 누가 신라에 가져와 묻히게 되었는지는 수수께끼였다.

호우총 발굴모습.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지칭하는 명문이 나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복호’가 유력한 용의자?
 우선 <삼국사기> 기록을 보라. ‘복호’라는 인물이 ‘유력한 용의자’로 거론될 수 있겠다.
 “2년(418년) 왕의 동생 복호가 고구려에서 제상 나마와 함께 돌아왔다.(王弟卜好 自高句麗 與堤上奈麻還來)”(<삼국사기> ‘신라본기·눌지왕조’)
 신라 제 17대 내물왕의 왕자였던 복호(卜好)가 412년 인질의 신분으로 고구려에 가 있다가 7년 만인 418년에 신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복호와 이 호우총 유물이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일까.
 고구려의 장례풍속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3년째 되는 해에 상복을 벗는다고 되어있다. 이 청동항아리 역시 광개토대왕이 죽은 후 3년이 된 415년, 즉 탈상하는 해에 광개토대왕을 기리는 제사용 술을 담는 용기로 제작된 게 아닐까. 그래서 마침 인질로 와 있는 복호에게 기념으로 주었던 것으로 보면 어떨까.
 그 항아리를 복호가 신라로 돌아올 때 가져왔으며, 훗날 그가 죽자 함께 묻어 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 무덤은 복호의 무덤이 되는 것이다.
 호우총이 발굴되고 난 후 무덤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을 통해 연구된 결과는 무덤이 마련된 시기를 6세기 전반 경으로 보고 있다.
 이 청동 항아리가 만들어진 시기와는 1세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렇게 되면 복호가 100살이 넘도록 살다 죽었다고 봐야 하는데 이 또한 믿기 어렵다. 
 문제는 복호가 죽은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 현재로서는 사망 날짜를 알 길이 없다.
 다만 복호의 형인 눌지왕이 서기 458년에 죽었기 때문에 동생인 복호 역시 이를 전후한 시기에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보는 게 타당성이 있다.
 만약 이 호우총을 신라왕자 복호의 무덤으로 본다면, 여기에 함께 묻힌 신라유물의 연대 또한 6세기 전반이 아니라 5세기 후반으로 시기를 앞당겨야 할 것이다. 그래야 1세기의 격차를 줄일 수 있는 해석이 될 것이다.

 

 ■암호인가 부호인가
 또 한 가지 궁금증이 있다. ‘호우십(壺우十)’의 의미가 무엇인가. 호우란 술을 담는 용기로 보면 되겠지만 ‘十’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발굴보고서는 “해석이 곤란한 자인데 이 경우 우리는 이 十자를 다만 여백을 채우는 十자형으로 보아야 할 줄 안다”고 얼버무려 놓았다.
 그러나 이 十자가 수량의 표시인지 어떤 부호를 의미하는 것인지 의문이지만 숫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해 기념으로 10개를 만들었던 것일까. 그 중 하나가 신라에 들어왔다는 얘기인가.
 ‘우물 井’자 혹은 ‘#문양’ 또한 지금껏 숱한 논란을 일으킨 부호이다.
 당시의 발굴보고서는 “井(#)자형은 이 보이는데 이 역시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고 여백을 메우는 한 장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이 수수께끼를 제대로 풀어낸 연구는 거의 없다.
 다만 소설가 최인호는 <왕도의 비밀>에서 이 ‘#’자는 고구려의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을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학자들의 반응은 “제대로 된 논문조차 거의 없다”면서 섣부른 추정을 삼가고 있다. 문제는 ‘#’가 새겨진 유물은이 1997년 풍납토성에서도 발굴됐고, 구의동 아차산 4보루에서도 발견되는 등 끊이지 않고 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욱 답답할 노릇이다. 일각에서는 고구려 토기에서는 井, 小, X, 工, 大, 卍자 모양이 새겨진 경우가 많은데, 제작지와 제작자, 혹은 주문처를 표시한 것이거나 벽사(피邪·귀신을 쫓는 것)의 의미일 수 있다는 해석도 한다. 특히 ‘井(#)’자 문양토기는 일본에서도 묵서(墨書)로 쓴 예도 있는데 이 역시 벽사의 의미라는 것이다(平川南·1996년·古代人の死と墨書土器·국립역사민속박물관 연구보고 제68집)
 더욱 심오한 해석도 있다. <주역>을 보면 “井의 중심은 공(空), 즉 무극이태극(无極而太極)이요, 十은 음양이며 口자에 十을 넣어 田이 되니 이것이 사상이 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는 것. 결국 주역풀이에 따르면 井은 하늘이고 十은 땅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우물은 아무리 길어 마셔도 없어지지 않고, 놔둔다고 해서 철철 넘치지도 않는데(无喪无得), 물이 나오는 원천을 못 고치는 것과 같이 모든 제도나 법령 등도 백성의 민생안정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不改井)는 것이다.(김석진의 <대산 주역강의>에서)
 한국 주역학의 대가로 꼽히는 야산 이달(1889~1958년)은 학역자(學易者) 대부분이 간과한 井괘를 연구했는데, 공자(孔子)도 ‘井은 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우총 항아리 명문에 나오는 ‘井’과 ‘十’은 혹 주역의 내용을 표현하는 것일까.   

호우총에서 확인된 청동용기들.

 ■광개토대왕 비문과 똑같은 서체
 놀라운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호우총 발굴 용기의 명문은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
 그런데 지안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 비문은 ‘지(地)’ 대신 ‘경(境)’을 써서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로 돼있다.
 참고로 중국 지안 모두루 무덤의 묘지(墓誌)에 새겨진 관련 명문은 ‘國岡上廣(혹은 大)開土地好太聖王’이다.
 따라서 당시 발굴보고서는 시호(諡號)가 적힌 ‘광개토대왕 비문’의 글자가 가장 정당하지만 때에 따라 다소 다르게 부를 수도 있었던 것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호우총 명문 16자의 서체가 희한하게도 지안의 광개토대왕 비문 서체와 똑같다는 점도 주목거리이다. 가히 같은 사람의 서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니 신비롭기만 하다.
 또 하나. 발굴자들을 평생 가위 눌리게 한 유물이 출토됐다.
 나무로 만든 위에 옻칠을 했는데 눈알은 유리이고 그 홍채에 해당하는 부분은 푸른빛이었으니 발굴자들이 소름끼칠 만 했다.
 김재원은 “방상씨면은 태피(態皮)를 쓰고, 황금 눈 넷을 단 면을 쓰며 무기를 들고 역귀를 몰아내는 존재”라는 <주례(周禮)>를 인용, 이 유물을 방상씨면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런 유물이 훗날 백제·가야지역에서 종종 발견되는 화살통이라는 사실을 당시 발굴자들이 알 턱이 없었다.
 발굴단은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없었으므로 새겨져 있는 글자 가운데 ‘호우’라는 글자를 기념해서 호우총으로 이름 붙였다.
 이 호우총의 발굴은 광복 후 최초의 고고학적인 학술발굴이란 점 외에도, 발굴주관은 우리나라, 발굴지도는 일본인, 발굴 장비와 발굴비용은 미국이 각각 담당한 최초의 국제발굴이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발굴이 끝난 뒤 김재원은 일본인 학자 아리미쓰를 지프에 태워 부산 부두까지 태워주었다.
 아리미쓰는 그 이후에도 교토대 고고학과 주임교수 등을 역임하는 등 요직을 거쳤다. 특히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의 환대를 받는 몇 안되는 일본인이었는데, 1967년 방한 때에는 때마침 회갑(11월10일)을 맞아 우리 측이 회갑연을 베풀어 주었다. 이때 참석한 이가 이병도, 이희승 등 20여 명이었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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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