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라는 역사인물이 있습니다. 한쪽 눈을 잃은 비운의 영웅 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일어서 한때는 삼한 재통일의 가도를 달렸으나 너무 과속하는 바람에 왕건의 고려세력에게 패한 인물쯤으로 말입니다. 미륵불을 자처하고 허황된 관심법으로 신하들은 물론이고, 부인과 자식까지 무참하게 죽인 폭군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궁예는 그렇게 단순하게 폄훼될 인물이 아닙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한때는 영원한 평등세상을 이루는 대동방국, 태봉국의 기치를 드높인 난세의 영웅이었습니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기에 폭군의 반열에 든 것일 뿐입니다. 또하나, 궁예가 웅지를 편 곳이 어딘줄 아십니까. 바로 철원의 드넓은 벌판, 지금은 비무장지대 안쪽인 풍천원입니다. 그 뿐입니까. 군사분계선, 즉 휴전선을 딱 반으로 가르고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궁예의 꿈이 서린 태봉국의 도성입니다. 물론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곳입니다. 이제 궁예의 꿈이 서린 철원 비무장지대안 휴전선으로 가보려 합니다. 만약 남북한의 고고학자들이 둘레 12,5킬로미터가 넘는 저 엄청난 규모의 태봉국도성을 공동발굴한다면 어찌 될까요. 휴전선을 밟고 공동조사를 펼치는 남북한의 학자들…. 상상만 해도 기막힌 뉴스가 되지 않을까요. 궁예의 꿈도 함께 발굴해보면 어떨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22회는 ‘휴전선…미완의 혁명가 궁예가 꿈꾼 세상’입니다.

 

 

『저기가 정녕 비무장지대인가?』

강원 철원 홍원리 평화전망대에 오를 때마다 늘 새롭다. 비무장지대란 높고 깊은 산악지대, 즉 사람들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게 일반상식인데…. 게다가 이곳은「철의 삼각지대」가 아닌가.

 

『적(북한·중국)의 생명선인 철원·김화·평강의「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 Zone)」를 깨뜨려야 합니다.』(밴플리트)

한국전쟁 때 밴플리트 장군이 이름 붙인 바로 그 유명한 요충지인데…. 하지만 해발 220~330미터 위 용암대지에 펼쳐진 드넓은 평원이다. 

하지만 평야를 품에 안고 있는 저편 고지와 능선의 이름, 그리고 사연을 알게 되면 나른한 평온이 깨진다.

전망대에서 맨 왼쪽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백마고지다.

 

 궁예가 대동방국의 기치를 내걸며 도읍지로 삼은 풍천원 들판. 태봉국 도성은 군사분계선을 딱 반으로 가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1952년 10월6일부터 백마고지를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수 만 명의 인명피해를 주고받은 뒤 마침내 한국군 9사단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백마고지는 지금 민간인들은 갈 수 없는 남방한계선 북쪽에 있다. 주변의 산인 고암산(780미터)은 일명 김일성 고지이며, 곁의 능선 별칭은 피의 500능선

이다. 또 이어 낙타고지…. 그리고 또 하나, 철의 삼각지대 맨 위 꼭짓점인 평강은 지금은 갈 수 없는 북한 땅이다.

평강은 한국전쟁 때 미 극동사령부가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여 지목한 핵무기 가상표적이기도 했다.

 

비록 영국 등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쩔 뻔 했단 말인가. 비극의 현장이 될 뻔한 평강이다.

 

여기서 잠깐, 한국전쟁의 회고로만 그치면 안된다.

 

전망대에서 야간 오른쪽 방향을 쳐다보면 뭔가 심상치않은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

 

언제 봐도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나무를 따라 쭉 이어진 윤곽.... 그곳이 바로 태봉국도성 외성의 흔적이다.

 

태봉국도성이라. 바로 풍운아 궁예가 1100년 전 저기 보이는 풍천원 너른 들판에 도읍을 정하고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바로 그곳이다.


저 너른 들판에 도성을 건설했다. 그런 생각도 든다. 왜 다른 왕조는 이곳에 도읍을 정하지 않았을까. 의문점이 생긴다.

 

도성의 벽 흔적이 남아있다. 먼발치로만 더듬어 볼 수 있다.

그런데 태봉국도성이 단순히 비운의 왕 궁예의 야망과 좌절을 묻은 곳이라는 의미에서만 주목을 끄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태봉국도성은 전쟁과 분단이 갈라놓은 비극의 상징이다. 남북 분단과 냉전의 상징인 휴전선(군사분계선)이 딱 반으로 도성을 가르고 있으니 말이다.

휴전선을 중심으로 남북 2킬로미터 씩 물러난 공간 사이, 즉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에 팔자 센 도성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그뿐 이런가. 그것도 모자라 서울~원산간 경원선 철도도 도성을 갈라놓았다.

 

 -휴전선으로 쪼개진 도성
 
남북으로는 끊어진 경원선이, 동서로는 군사분계선(휴전선)이 도성을 잘라 놓은 것이다. 비운의 궁예는 죽어 1000년이 훨씬 지나 백골이 진토가 되었을 텐데도 사지(四肢)가 잘리는 신세에 놓여있는 것이다.

『천우 2년(905년)에 새 서울(철원)에 들어가 대궐과 누대(樓臺)를 수리하였는데 극히 사치로웠다.』(『삼국사기』「열전」‘궁예조’)


 

『궁예는 혹독한 혹정으로 백성을 다스리며~국토는 황폐해졌는데 오히려 궁궐만은 크게 지어~원망과 비난이 일어난 것이다.』(『고려사』「태조」‘원년조’)

 

굳이 옛 사료를 들추지 않아도 태봉국도성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 때 지도를 보면 도성의 외곽성은 12.5킬로미터, 내곽성은 7.7킬로미터에 이른다. 백제의 풍납토성(3.5킬로미터), 신라 월성(1.8킬로미터), 고구려 국내성(2.7킬로미터)에 비할 바가 아니다.

 

조선의 서울성곽(17~18킬로미터)에 견줘도 그리 손색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금단의 땅. 그저 먼발치로 도성의 흔적만을 추측할 뿐이다. 곁눈질로 힐끔힐끔. 비무장지대의 관할권이 유엔사 정전위에 있고 비무장지대 출입 자체가 정전협정 상 금지되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먼발치에서 본 궁예의 흔적

일제시대 때 확인된 석등   


지금까지 4번 정도 태봉국도성을 조사한 이재 국방문화재연구원장(전 육사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흙으로 쌓은 흔적입니다. 사다리꼴 단면으로 성벽 단면 하단 폭은 6~7미터, 상단 폭은 5미터 정도이며, 높이는 1.2미터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물론 성 자체가 비무장지대 안쪽인 데다 지뢰지대인 만큼 이원장도 제한된 수색로를 따라가며 제한된 지역만을 먼발치에서 확인했을 뿐이다.

 끊어진 경원선과 3번 국도의 흔적은 잘 남아 있었다. 남북이 합의한다면 경원선과 3번국도 복원사업은 어렵지 않게 이뤄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궁궐터도 짐작할 수는 있었는데 유구를 확인할 수 있는 거리는 안됐다.


 

일제가 만든『조선보물고적도보(朝鮮寶物古蹟圖報)』를 보면 태봉국도성터에서 많은 유적·유물이 확인됐음을 알 수 있다. 왕궁성 부근에 있었던 석등은 일제 때 국보 118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외성 남대문터에서는 귀부(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가 확인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궁예가 꿈꿨던 세계는 어떤 세상이었을까.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뭇 도적이 고슴도치 털처럼 나타났다. 가장 악독한 자들이 궁예와 견훤 두 사람이었다.』

『삼국사기』편찬자인 김부식(金富軾)은 궁예와 견훤을「열전(列傳)」에 담으면서 궁예와 견훤을 이렇게 혹평했다. 특히 궁예에 대한 김부식의 평가는 각박하기 이를 데 없다.

처음에는『사졸들과 고락을 함께 했으며, 인사에도 사사로움 없어 백성들이 추앙했다.』고 나름 칭찬해놓고는….

이쯤해서 역사는 늘 승자의 편임을 상기하자. 궁예가 웅지를 펼 무렵 중국 중원은 혼란기였다.

 

당나라에 망조가 들고 중원은 5대10국 시대(907~979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천년왕국 신라는 망해가는 나라였다.

『삼국사기』「열전」‘궁예조’에 따르면『궁예는 신라 헌안왕(재위 857~860년) 또는 경문왕(재위 861~875년)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신라의 왕자라는 소리다. 나면서부터 이빨이 있었고, 지붕에서 하얀 빛깔이 무지개처럼 하늘 위로 뻗치었다.

 

일관(日官ㆍ나라의 길흉을 점치는 사람)이『저 아이는 나라에 이롭지 못하니 길러서는 안 된다.』고 했다.

불안에 떤 왕이 사람을 시켜 포대기 속에서 아이를 꺼내 다락 아래로 던졌는데, 아이의 유모가 그 아이를 받다가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 유모는 그 아이를 안고 달아났다.

유모의 손에 큰 어린 궁예는 10여 살 때 출생의 비밀을 안다. 구슬피 울던 궁예는 곧바로 세달사(世達寺)
로 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는데 스스로 법명을 선종(善宗)이라 했다.

 

수색로를 따라 조사 중인 조사단 모습.(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제공)  

궁예는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웅지(雄志)의 뜻을 품고 지방 호족세력의 우두머리인 기훤(箕萱)과 양길(梁吉)에 차례로 의탁하여 세력을 넓힌 뒤 민심을 얻어 장군으로 추대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사졸들과 고락(苦樂)을 함께 하면서 공(公)과 사(私)를 분명히 하여 민심을 얻었다고 한다. 세력을 얻은 그는 송악(개성)에서 찾아온 왕건에게 철원태수에 임명했다.

드디어 궁예는 901년 스스로 왕이라 칭한 뒤『평양 구도(舊都)에 잡초만 무성하니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하고는 국호를 고려라 했다. 고구려 재건의 기치를 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야망은 커진다.

 

-대동방국의 기치를 들다

904년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었고, 911년엔 태봉(泰封)으로 다시 고친다.

 

마진은 「마하진단(摩訶震檀)」의 줄임말이다. 「마하」는 범어(梵語)로「크다」는 뜻이고「진단」은 동방을 말한다.

 

또 주역에는「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고 했고,「봉(封)」은 봉토를 뜻한다. 결국 궁예는「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 즉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그는 철원(896년·현재 구 철원 동송)~송악(898년)에 이어 905년 다시 철원(이곳 풍천원)에 도읍지를 정했다. 철원에만 두 번이나 도읍을 정한 것이다.

 

백마고지. 한국전쟁 대 피아간 2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백마고지 오른쪽 평원이 태봉국 도성터이다.

궁예가 뜻을 폈던 시기에 신라 천년왕국이 뿌리째 무너지면서 백성들은 유리걸식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미륵불을 자처하고 나타난 궁예에 홀딱 빠졌다. 세상이 끝나는 날 홀연히 출현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미륵불이 현신했다니까. 그는 세상을 구원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세운 것이다.

철원 환도 이후 궁예는 907년 무렵 삼한 땅의 3분의 2를 품에 안았다. 실로 대단한 기세였다.

 

하지만 너무 과속했던 탓일까. 궁예에게 귀부했던 고구려 부흥세력, 즉 왕건을 중심으로 한 송악세력이 반발의 기미를 보인다.

 

당초 궁예가 구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는 왕건세력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북원(원주)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떨친 양길을 제압하려면 송악 호족들과의 제휴가 필요했던 것이다.
 
-「과속스캔들」, 비참한 최후를 맞다

 

하지만 궁예는 뜻을 이루자 다시 철원으로 복귀했다.

 

그러면서 청주지역의 1000가구를 철원 땅으로 이주시킨다. 이것은 궁예가 송악세력 말고도 새로운 지지세력을 확보하려는 뜻이었다.

 

남으로 남으로 세력을 키워간 궁예로서는「고구려 세력」만으로는 천하를 경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동안 궁예를 도왔던 송악세력, 즉 고구려 부흥세력은 불안에 떤다. 게다가 도읍지 건설에 엄청난 공력을 쏟았고, 때마침 흉년이 들면서 민심이 돌아섰다.

불승들도 관심법(觀心法)을 내세워 신하들과 심지어 부인, 아들까지 죽인 궁예를 외면했다.

『미륵불을 자처하고 외출시 복장이 화려하며 행렬도 호사스러웠고 따르는 비구만도 200명이 넘었다. 직접 불경 20여 권을 지었으며 이를 비난한 석총(釋聰)스님을 철퇴로 때려죽였다.』

 

『궁예의 무도함을 보다 못한 부인 강씨가 정색을 하고 간하자 궁예는 도리어 강씨가 다른 사람과 간통했다고 몰아붙였다. 강씨가 부인하자「내가 관심법(觀心法)으로 다 보았다」면서 강씨의 음부에 달군 쇠방망이를 쳐 넣어 죽였다.』

결국 궁예는 918년 보수 호족들에 의해 축출된다. 그의 최후는 너무도 비참하다.

『궁예는 암곡(巖谷)으로 도망하여 이틀 밤을 머물렀는데, 굶주림이 심하여 보리이삭을 몰래 끓여 먹다가 부양(평강)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려사』)

 

철책 너머로 보이는 태동국 도성의 흔적.

 

역사서는 한결같이 궁예를 역사의 패륜아로 기록하고 있다.
『임금과 신라 베기를 마치 짐승 죽이듯 풀 베듯 했으니 실로 천하의 극악한 사람이었다.』(김부식의 평가)

하지만 과연 100% 맞는 얘기일까.

 

재미있는 대목이 있는데, 철원지역에서 지금도 채록되는 구비전설은 궁예왕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로 전한다는 것이다.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전설은 사뭇 다르다.

『구레왕(궁예왕)이 재도(再圖)할 땅을 둘러보는 데 어떤 중이 나타나자~이에 왕이 혹시 용잠호장(龍潛虎藏)할 땅이 없겠느냐 하매 중은 이 병목 같은 곳에 들어와 살 길을 찾는 것이 어리석다 하자~ (궁예가) 아아 천지망아(天之忘我)로다 하고 심연을 향해 몸을 던지니~우뚝 선 채로 운명하였다.』

육당 최남선이 궁예왕 묘가 있는 삼방협(三防陜ㆍ평강~안변 사이의 협곡)에서 채록하여 쓴『풍악기유(楓嶽記遊)』의 한 토막이다.

풍악기유는 또한『(궁예왕은 이후) 이 지방의 독존신(獨存神)이 되었다.』고 했다. 유인순 교수(강원대)의 채록을 살펴보자.

『(왕건과 강비의 사통이) 들키니까~왕건을 죽일 수 있지만 자기를 보살펴준 사람이기 때문에~.』

대부분 긍정적인 내용이다. 구비전설은 물론 궁예왕의 실정을 대궐터 선택의 잘못, 방탕한 여성관계, 가학증세, 그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왕건과 갈등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원인에 대해서는 역사서와는 분명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각박한 평가
 
 유인순 교수(강원대)는『전설 전승 집단의 의식 속에 왕건에 대한 강한 부정의식이 숨어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구비 및 지명전설에는 궁예왕이 추종세력과 함께 보개산성(포천 관인), 명성산성(철원 갈말), 운악산성(포천 화현) 등에서 치열한 항전을 벌인다.

 

『궁예 관련 지명전설을 보면 무려 네 곳의 대궐터가 보입니다. 풍천원 벌판을 비롯해 왕건 세력과 치열하게 싸운 명성산성과 보개산성, 그리고 운악산성 등이 그곳입니다. 궁예는 쫓겨난 뒤 바로 죽은 게 아니라 왕건과 10~15년가량을 더 항전했다는 자료입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궁예왕이 지었다는 20여권의 불경에 대해『삼국사기』는『그 내용이 모두 요망한 것이라 하여 석총이 비난해자 쇠몽둥이로 쳐 죽였다.』는 대목이 있다.

 

이 대목은 궁예를「미치광이 사교(邪敎)의 교주」로 몰아붙이는 데 결정적인 전거를 마련해준다.

 

하지만 유인순 교수의 말마따나 혈혈단신 적수공권으로 전쟁터를 누빈 장수가 불경을 20여 권이나 썼다면 얼마나 비범하다는 얘기인가.

『말(전쟁터)에서 천하를 얻은 궁예는 이제 종교적 신앙심으로 국력을 강화하기 위해 불경을 저술했다는 얘기잖아요. 기존의 정치체계와 종교생활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궁예의 새로운 도전은 낯선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됐을 겁니다.』

 

태봉국 도성은 휴전선으로 갈라져있지만 경원선으로도 찢겨있다. 경원선의 흔적도 볼 수 있다.

새로운 미륵세계를 꿈꾸는 궁예는 이처럼 기존 세력을 제거했고, 그에 맞선 기존세력은 왕을 패륜아로 몰았던 것이다.   

사실 궁예는 원대한 포부를 지닌 개혁가였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과 대결에서 끝내 패했다. 또한 역사서는 승자의 기록 아닌가. 궁예를 어떻게 폄훼하든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좀 옹졸하다는 생각은 든다. 저 유명한 역사가 사마천은 무려 2000년 전에 쓴『사기』에서 유연한 사고를 보여준 바 있다.


그는 제후들의 흥망성쇠를 담은『사기』「세가(世家)」를 썼는데, 진나라 말 농사꾼의 신분에서 일어나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미완의 혁명가 진섭(陳涉)을 당당히「제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면서 이유를 달아놓았다.

『진섭이 죽었으나 그가 봉립하고 파견한 왕후장상(王侯將相ㆍ항우와 유방이 대표적)이 마침내 진을 멸망시켰다. 이것은 진섭에 의해 처음으로 반란이 시작되어 그런 결과를 촉진한 것이다. 고조(유방)때는 진섭을 위해 분묘를 간수하는 30가구를 배치해놓고 지금도 가축을 잡아 진섭을 제사지낸다.』

승리자로서, 최소한 이 정도의 아량은 베풀 수 있지 않을까. 또 하나, 군사분계선을 딱 반으로 가르고 있는 태봉국 도성을 보고 있노라면 갖가지 상념이 생긴다.
 
-남북화합의 상징

 

이곳을 조사한 경험이 있는 이재 원장의 말이 심금을 울린다.

『감히「출입」이라는 말이 가당치도 않아요. 그저 수색로를 맴돌며「관측」했다고 하는 표현이 옳을 겁니다.』

그동안의 조사는 힘들고 외로운 작업이었다. 군지도와 미군이 찍은 항공사진, 일제 때 자료를 참고로 남아있는 도성을「눈」으로 찾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도성의 잔존 구간이 서로 다른 데다 높이는 알 수 없는 실정이었다.

지도에서는 마땅히 도성의 성벽이 있어야 하는 곳인데, 수풀이 우거져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조사 후 만나는 사람마다 도성의 규모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물어오곤 했어요. 그러나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태봉국도성은 그곳에 분명 있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참으로 초라하게 남아 있었다. 1100년 전에 쌓은 대제국의 도성을 후손들이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파괴시키고 훼손시켰는가. 궁예를 폄훼한 고려와 조선, 그리고 파괴의 절정이었던 한국전쟁. 그렇게 해놓고 역사와 전통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늦지는 않았어요. 한국전쟁 당시「힘을 합해」도성을 파괴했던 남과 북은 이제 다시「힘을 합하여」도성을 조사해야 한다면 다름대로 큰 의미가 있으니까.』

휴전선을 반으로 가르고 있는 태봉국도성에 대한 공동조사야말로 분단 극복과 민족 통일의 상징이니 말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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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