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평강에서 안변으로 향하는 경원선 길목에 삼방협(三防峽)이란 지명이 나온다.

 

··下防을 합한 말인데 북방의 적을 막은 천혜의 협곡. 금강산을 향하는 백두대간이 평강과 안변을 갈라놓았다.

 

얼마나 험한지 기차가 이곳을 지날 때는 바로 앞 역인 복개역에서 화차를 앞·뒤에 달아 지그재그로 오르내릴 정도였다.

 

그런데 조선 말기 지도인 청구도를 보면 바로 이 삼방협, 그것도 중방에 궁예왕의 묘가 분명히 표시돼있다. 1924년에 쓴 최남선의 풍악기유(楓嶽記遊)’를 보자.

 

삼방개울을 끼고 철도용 수원발원지를 지나 남으로 오리쯤 가면 조그만 전우(殿宇)가 보이는 것은 태봉의 궁대왕을 숭봉한 곳인데~ 그 당우(堂宇) 뒤로 돌담같이 보이는 것은 석축 봉분의 남쪽 면이요, 그 북서 양면은 고제(古制)가 온전하고. 묘전(廟前)에 둘러쌓은 장석(墻石)은 본디 분벽(墳壁)의 일부인 것을 알겠다.”

 

철원 군사분계선을 딱 반으로 가르고 있는 궁예의 태봉국 도성

최남선은 바로 궁예왕의 무덤흔적을 본 것이다. 그렇다면 궁예는 정사(삼국사기·고려사)의 기록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까.

 

여러 장수들이 태조(왕건)를 옹위하고 문을 나섰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1만여 명에 달했다. (궁예)나의 일은 끝났구나하고 체념하며 미복으로 갈아입고 암곡(巖谷)으로 도망하여 이틀 밤을 머물렀는데 허기가 심하여 보리이삭을 몰래 끊어먹다가 뒤이어 부양(斧壤·평강)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려사)

 

하지만 삼방지역의 주민들이 전하는 전설은 이렇듯 비참한 타살이 아니라 천명이 다했음을 알고 감행한 의연한 자살이다.

 

구레왕(궁예)은 삼방골짜기로 들어왔다. ~먹을 것을 찾고 은피(隱避)하여 재도(再圖)할 땅을 둘러보는데 문득 어떤 중이 나타나자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중은 나도 약간의 식량을 어제까지 다 먹고 죽기만을 기다린다고 했다. 이에 (왕이) 혹 용잠호장(龍潛虎藏)할 땅이 없겠느냐 하매 중은 이 병목 같은 속에 들어와 살길을 찾는 것이 어리석다하자~(궁예가) 아아 천지망아(天之忘我)로다 하여 그 봉우리에서 심연을 향해 몸을 던졌는데~우뚝 선채로 운명하였다. 선채로 금관(金棺)을 만들고~.”(풍악기유)

태봉국(궁예) 도성터(위)와 궁예왕릉 추정터. 철원에서 왕건세력에 쫓긴 궁예는 곳돗히 선채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전설이 있다.

 

삼방사람들은 선채로 죽은 궁예의 주검을 황금관으로 만들어 장례를 지낸다.

 

여기서 궁예가 구레왕, 즉 고려(고구려)왕으로 일컬어졌다는 것은 특기할 만 하다.

 

이 지역에서는 궁예가 극심한 의처증 때문에 부인 강비를 달군 쇠몽둥이로 음부를 찔러 죽인 일을 두고, 왕건이 실제로 강비와 간통했다는 식의 전설이 사실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그 양반(궁예)이 금학산(947미터ㆍ철원군 동송읍)에 도읍을 정했으면 300년 갈 거였는데, 아 그만 고암산(780미터ㆍ철원군 북면) 앞쪽, 즉 지금 풍천원에 도읍을 정하는 바람에 30년도 가지 못했다는 거야.』

 

실패한 군주 궁예왕에 대한 안타까움이 젖어있는 구비전설이다.

철원, 포천, 평강 일원에는 이렇듯 궁예의 이야기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 숱한 유적과 산과들, 그리고 구비 및 문헌전설이 남아있다.

 

명성산(鳴聲山ㆍ923미터)과 관인봉(655미터), 그리고 운악산(936미터)에 남아있는 산성들은 대표적인 궁예의 흔적이다.

이밖에도 지금도 왕건과 대치하며서 여우처럼 엿보았다고 해서 붙은「여우고개」, 200명이 들어갈 수 있다는「궁예왕굴(명성산)」, 궁예가 자신의 운세와 국운을 점치려「소경과 점쟁이」들을 불렀다는「소경의 절터」, 궁예와 왕건이 투석전을 벌였다는 운악산 인근의「화평장터」, 대패한 궁예군의 피가 흘렀다는「피나무골」등 궁예 관련 지명과 전설이 허다하다.….


궁예왕이 기생들의 연주를 보고 빙그레 웃어 이름 붙었다는 완이정(莞爾亭ㆍ평강 화현산 기슭), 사냥 중의 휴식터였다는 계현(憩俔), 몸소 농사를 지었다는 전중평(典仲坪) 등은 궁예의 최후 보루이자 마지막 안식처에서 전해 내려온 구비전설이다.

학이 앉은 형세의 금학산 앞 철원평야. 궁예가 금학산을 주산으로 이 평야에 도읍을 정했으면 300년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지만, 고암산을 주산으로 했기에 30년을 버티지 못했다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왕건군의 추격에 궁예의 짧은 행복은 끝난다. 왕건군과 싸우던 궁예는 갑기천(甲棄川ㆍ갑천)에서 무거운 갑옷을 던져버리고 도주하고, 궁예의 옹주(翁主)는 옹주포(翁主浦)에서 자살한다.

궁예 사망 이후의 이적(異蹟)은 예사롭지 않다. 궁예는 죽은 뒤 삼방(三防) 지역의 독존신(獨尊神)으로 추앙받는다. 그의 무덤 앞에서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말발굽이 땅에 들러붙는다. 구비전설에 따르면 일제시대 때 경원선을 개통할 때 계속 인명사고가 났는데, 궁예왕 무덤에 제사를 올리자 사고가 뚝 끊어졌다고 한다.

 

또한 기차가 궁예왕 무덤을 지나갈 때 앞으로 나가지 못했는데, 제사를 지내자 움직였다고 한다. 유인순 교수는 이 모두가 궁예왕에 대한 주민들의 승모와 연민, 안타까움을 상징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역사 기록과 달리 궁예왕은 이곳 백성들을 사랑하고 백성들로부터 사랑받은 왕이었을 겁니다. 이곳에 전해지는 숱한 전승의 내용은 바로 궁예왕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보여주고 있어요.』 경향신문 논설위원
 

 

물론 정사(正史)를 놔두고 전설을 믿는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누누이 말하지만 역사란 승자의 기록. 패배자는 암군(暗君), 패륜아로 그릴 수밖에 없다.

 

역사서의 전범인 사마천의 <사기>는 제후와 왕의 흥망성쇠를 세가(世家)’에 담았다. 그런데 사마천은 진나라 말기에 한갓 농사꾼의 신분에서 일어나 한때 천하를 쥐고 흔들다가 끝내 좌절한 미완의 혁명가 진섭을 당당히 세가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올려주었다.

 

그러나 44년간이나 한반도를 3분하며 후삼국시대를 열었던 궁예와 견훤을 그저 열전의 반열에 올린데 그친 삼국사기는 그런 점에서 각박하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민간전설은 바로 그런 정사의 허점을 보완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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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