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을 아십니까. 서재필 박사가 조선의 자강독립을 위해 프랑스 개선문을 본따 만들었다는 그 독립문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한가지는 알고 계시니까. 독립문의 이마에 떡하니 새겨져있는 ‘독립문’ 편액을 누가 썼는지…. 독립문이니까 아마도 독립 투사 중 명필인 분이 쓰셨겠지요. 그러나 아닙니다. 저 ‘독립문’ 글씨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조선 귀족의 영수 후작 이완용 각하’였답니다. 제 얘기가 아니라 동아일보 1924년 기사에 나와 있는 표현 그대로입니다.
매국노와 독립문…. 이 해괴한 조합은 무엇일까요. 왜 하필 이완용이 ‘독립문’ 편액을 썼을까요. ‘독립문’을 공부하다보면 온갖 희한한 일들을 알게 됩니다. 서재필과 이완용이 말한 ‘독립’의 의미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독립문과 독립협회, 독립신문을 만들었다는 박사 서재필이라는 인물의 두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서재필은 다름 아닌 미국 이름 필립 제이슨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을 잊어서는 안될 이야기가 남아있습니다. 독립문은 서재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독립문 건설이 백성 성금 모금운동으로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독립신문은 성금을 낸 백성의 이름을 한사람씩 게재했고, 건설비가 부족하자 ‘제발 빨리 좀 내라’는 독촉기사를 거의 매일같이 냅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23회는 바로 독립문 건립을 둘러싼 갖가지 이야기를 풀어헤치려 합니다.

 

“교북동 큰 길가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모양으로만 보면 불란서 파리에 있는 개선문과 비슷합니다. 이 문은 독립협회가 일어났을 때 서재필이란 이가 주창하여 세우게 된 것이랍니다. 그 위에 새겨있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이라는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귀족 영수 후작 각하올시다.”

1924년 7월15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내 동리(네) 명물’ 기사에 서울 교북동의 독립문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 좀 이상하다. 서재필이 프랑스 개선문을 모방해서 독립문을 만들었다는 것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다.

 

그건 그렇다치자. 그런데 그 독립문의 편액이 매국노의 상징인 이완용의 작품이라는 것은 뜻밖이다.

독립문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완용의 글씨가 새겨진 독립문. 이완용은 독립협회 부위원장 자격으로 독립문건설에 100원 기부했다.

■독립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폐하(고종)께서 청나라 임금보다 낮은 곳에 계셨는데… 그럼에도 분히 여기는 생각이 없어…. 일본과 청국의 싸움 끝에 조선이 독립국이 되어…. 이제 모화관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세계만방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표방하자는 것이요… 영은문의 수치를 씻으려면 그 자리에 독립하는 주춧돌을 세우는 것이니….”

1896년 6월 20일자 <독립신문>의 기사다. 독립문의 설립 취지를 명확하게 밝혔다. 여기서 서재필 등이 말하고자 한 ‘독립’의 본질이 보인다.

‘청나라’, 즉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한 것이다.

 

수백년간 중국에 종속된 채 지냈는데도 그 수치를 모르고 있을 뿐 아니라 독립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므로 독립문 같은 표상을 세워 자긍심으로 삼는 한편 세계만방에 고하자는 것이었다. 1896년 무렵이었다.

그랬으니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은 거론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은 조선이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도운 나라처럼 운위됐다. 청일전쟁으로 조선이 자주 독립했다는 것이니 말이다. 이런 시각은 <독립신문>의 논설에 그대로 투영돼 있다.

“조선 사람들은 일본이 조선을 위해 한다는 뜻을 자세히 모르는 것이다… 일본이 청국과 싸워 이긴 후에 조선의 분명한 독립국이 되었으니 조선 백성이 일본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있을 터이나….”(1896년 4월7일)

완공된 직후(1897년 11월)의 독립문. 서재필은 일본식 정원 같은 독립공원의 조성을 꿈꿨다. 

 

■독립문 건립에 100원 기부한 이완용
어쨌든 14일 뒤인 7월4일 독립협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의장에 안경수가 맡고 위원장에 이완용, 위원은 이윤용·김가진·김종한·권재형·고영희·민상호·이채연·이상재·현흥택·김각현·이근호·남궁억 등이었다.

이중 이완용 등 상당수는 훗날 한일병합의 공로를 이유로 일제로부터 작위와 거액을 받은 친일파로 전락했다.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청일전쟁 이후인 1895년 허물어졌다.  

미국인 ‘필립 제이슨’으로 활동했던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의 핵심인물이었지만 미국인 신분이어서인지 발기인 명단에서는 빠졌다. 대신 서재필은 고문역을 맡아 ‘파리 개선문식 독립문’의 건립을 기획했다.

1947년 귀국한 서재필은 서양식 건물로 지은 까닭을 자서전에서 밝혔다.

“영은문처럼 지붕을 만들고 기와를 덮어 조선식으로 세워볼까 했다. 그러나 서양을 다녀온 사람이 구식 건물을 짓는다면 남이 웃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서양식으로 하려는 마음을 품었다. 그래서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본으로 해서 그 규모를 축소하되 모양 만은 똑같이 했다.”

여기서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독립협회의 결성 이유는 한가지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독립문을 포함한 독립공원 건립과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이었다.

 

발기인 가운데 이완용 형제가 가장 많은 100원씩 200원을 냈고, 안경수 40원, 김종한·권재형 30원씩 등 총 510원을 모금했다. 독립협회에서 이완용의 지분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완용으로서는 독립문의 편액을 쓸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완용은 급기야 1898년 독립협회 회장이 된다.

 

■“이완용은 빼어난 재상이다.”
그랬으니 이완용을 바라보는 <독립신문>의 논조는 한없이 우호적이다.

“리(완용)씨가 자기 힘껏, 재주껏 평화토록 조선에 큰 해가 없도록 일을 해나갔다. 리씨가 갈리면 그보다 나은 이가 있을른지 모르겠더라.”(<독립신문> 1897년 1월23일)

교체설에 시달리던 이완용을 위해 ‘그 사람보다 나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라는 톤으로 변호하고 있다.

“학부대신 리완용씨는 애국애민의 마음으로…나라 권리를 외국에 빼앗기지 않으려 애쓰다가 미워하는 사람을 많이 장만하여…평안도 관찰사로 가니…. 충성있는 사람들은 다 섭섭히 여기더라.”(<독립신문> 1897년 9월1일)

결국 평안도 관찰사로 좌천된 까닭을 ‘시기 질투하는 자들 때문’이라 두둔해준다.

1904년 무렵의 독립문.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 독립문 건립의 취지였다.

 

급기야 1897년 11월 11일 <독립신문> 논설은 이완용을 몇 안되는 빼어난 재상으로 치켜세운다.

“몇 달 전에 리완용 씨가 외부대신으로 있을 때에…. 죽는 것을 무서워 아니하고…. 자기네 나라 임금과 인민을 대하여 자기 직분을 하였는지라…그 까닭에 우리가 리씨를 대한의 몇 째 안가는 재상으로 알고….”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독립에 큰 공이 있다”
이 뿐이 아니다, 독립협회가 발행한 신문, 즉 독립신문을 보면 이상한 기사가 한 두 꼭지가 아니다.

“후작 이등박문씨(이토 히로부미)는 세계에 가장 유명한 정치가요. 또 우리 대한 독립한 사업에 대공이 있는 사람이라…. 이번에 유람차로 오니 각별히 후대하기를 바라노라.”(<독립신문> 1898년 8월20일)랓

이상한 기사 아닌가. 다른 곳도 아닌 독립신문이 이토 히로부미를 두고 ‘조선의 독립에 큰 공을 세웠다’고 상찬하고 있다. 오보가 아니다. 8월25일 기사를 보라.

“이등박문씨는 일본 정치의 대가다. 유람차 우리나라 황성(서울)에 들어오는데 정부가 특별히 후대하려 한다. 독립협회도 특별히 총대위원 3명을 정해서 용산 강두까지 보내 이등박문씨를 환영한다더라.”

‘일본 정치의 대가’인 이토 히로부미를 영접하려고 독립협회 수뇌부 3명이 용산까지 나갔다는 것이다. 6일 뒤인 8월 31일 기사는 갈수록 태산, 목불인견이다.

“일전에 이등 박문 후작이 외부에 갔다가 안경을 잃었다 하니 당당한 제국 외부에서 귀한 손님이 안경을 잃은 것은 남에게 들리지 못할 수치로다.”

‘귀한 손님’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방문 도중 안경을 잃어버렸는데, 그것이 조선의 수치라며 부끄러워 했다는 것이다.

독립문 편액을 이완용이 썼다는 사실을 적확하게 밝혀준 동아일보 1924년 7월15일 기사

 

■서재필, 그리고 필립 제이슨
독립신문을 주도적으로 만들고, 독립문 건립의 실제 주인공인 서재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독립문 뒤 서대문 공원 한편에 <독립신문>을 들고 선 서재필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독립신문이 어떤 신문인가.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1895년 12월 귀국해서 만든 순한글 신문이다.

제국주의 열강의 아귀다툼 속에서 방향감각을 잃고 우왕좌왕하던 격변의 시대에 민중계몽을 자임하고 탐관오리와 부정부패를 고발한 점은 평가해줘야 한다.

기부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는다는 것을 개탄한 독립신문 기사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7일이 신문의 날로 기념해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서재필에게 향한 비판적인 시각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예컨대 서재필은 “조선이 부강한 나라가 되려면 김치와 밥을 버리고 소고기와 빵을 먹어야 한다”고 설파(1896년 10월10일)하기도 했다.

 

물론 마냥 비판만 할 수는 없다. 조선의 실학자 박제가는 “조선이 발전하려면 중국어를 공용화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 적도 있으니까….

 

그런 측면에서 논설에 나타난 서재필의 ‘소고기와 빵’ 운운은 당대의 시대상황이라면 애교로 봐줄만 하다. 그러나 서재필이 뼛속까지 미국인 행세를 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미국망명 중이던 서재필은 중추원 고문 자격으로 초빙된 ‘미국인’이었다. 더이상 서재필이 아니었다. 필립 제이슨이었다.

 

오죽했으면 윤치호 마저 “서재필은 쓰거나 말하기 모두에서 모국어를 잊어버렸다. 무척 놀랐다”고 회고했을까. 황현의 <매천야록>은 “서재필은 환국한 뒤 고종을 알현하면서 안경을 쓰고, 궐련(시거)을 꼬나물고 뒷짐을 지고 나타나 외신(外臣)을 칭했다. 조정이 온통 분노했다”고 썼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에서조차 ‘피재손’이라는 미국인으로 등장했다. 훗날 서재필이 추방되었을 때가 가관이었다.

출국을 만류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귀국 정부가 나를 필요 없다고 해서 가는 것이다.”

조선은 더 이상 서재필의 나라가 아니라 ’귀국’, 즉 ‘너희 나라’였던 것이다. 서재필은 추방당하면서 조선정부로부터 2만8800원을 받아갔다.

 

필립 제이슨은 외국인으로서 10년 계약으로 조선정부의 고문으로 왔다는 것. 그리고 아직 계약기간이 7년 10개월이나 남았다는 것.

 

그런 나를 중도에 추방했으니 남은 계약기간에 받을 월급 2만8200원을 달라는 것. 서재필은 여기에 여비 800원까지 챙겨갔다니….

물론 서재필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충정을 몰라주는 무지몽매한 고국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겠냐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백번 천번 양보해도 누란의 위기에 빠진 고국을 진정으로 걱정하는 선각자의 모습은 아니다. 다 쓰러져가는 고국의 정부로부터 여비까지 받아갔으니 말이다.

 

성금을 낸 독자들의 명단을 일일이 실었던 독립신문.

■신문사 모금운동의 효시 
독립문의 건립은 대대적인 성금모금운동으로 펼쳐졌다.

 

요즘엔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최근까지 언론사가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펼친 것과 다름없었다. 최초의 순한글 신문의 역사가 전국적인 모금운동으로 시작된 것부터가 참 특기할만한 일이다.

 

독립문 건설을 위한 독립협회 결성식을 보도한 <독립신문> 1896년 7월4일자를 보자.

“이완용 등…모은 돈이 510원이더라. 본받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심지어 막벌이꾼이라도…돈 낸 사람의 이름을 신문에 내고, 또 나무패에 써서 독립문을 건립하고 나면 붙일 것이다. 돈 2만원을 모으면 석탑을 세우고 석탑에 이름들을 새길 것이다. 누구든지 조선의 독립을 경사로이 여기면…보조금을 조선은행소로 보내기를 바라노라,”

신문은 또 독자들이 지어보낸 애국가·독립문가 등을 대대적으로 소개한다.

“영은문 쇄파하고 독립문이 높아지네. 독립문 지은 후에 독립가를 불러보세.”(양성 김석하의 독립문가·7월16일)

“독립문에 맹세하여 우리나라 힘써보세. 사람마다 널리 배워 우리나라 힘써보세.”(배재학당 문경호의 독립가·8월20일) 

1898년 1월18일 독립문 준공에 들어간 건축비 가운데 1000원 이상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구구절절 써놓은 기사. 독립문을 건설한 심의석 기사가 1000원을 자비로 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음력 설 이전에 부족한 돈을 내야 한다는 것과, 회장(안경수)과 부회장(이완용)이 빚보증을 서서 부족한 돈을 빌렸다는 내용도 있다.

 

<독립신문>은 또 모금자의 이름과 사연, 기부액수를 일일이 게재했다. 초반에는 백성들의 호응도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리석은 사나이와 계집…빈부를 막론하고 기부하는데 하물며 병정들이야. 각 지방의 하사·병졸들도 기부하겠다고 나서…”(8월18일)

이 뿐이 아니다. 미국 유학 중이던 조선 사람이 독립문 건립소식을 이역만리에서 전해듣고는 금화 3원(은전 5원85전)을 기탁했다는 미담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이 독립된 것을 햇빛 같이 드러내는 줄 알고 무수히 경축하며…이런 사람은 외국에 간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벌써 자기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더라.”(10월24일)

독립문 건립의 열기가 이어지자 황태자(순종)가 1000원을 하사하고 각부 내각 대신들도 100원 이상씩 갹출하기도 했다.(12월 5일)

<독립신문> 1896년 12월31일자는 “독립협회는 처음에 불과 5명부터 시작했지만 지금 기부금을 낸 회원만 근 2000명에 달한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모금운동에 소학교 학생과 시장 상인, 심지어는 군인과 기생까지 성금대열에 합류했다.  

 

1976년 독립문의 모습. 1979년 성산대로가 건설되면서 사직터널~금화터널을 잇는 고가차도가 생기자 원래 자리보다 70미터 가량 서북쪽으로 이동했다. 길을 조성한다며 이처럼 큰 규모의 문화재를 통째로 옮긴 것이다. 그 발상 자체가 소름끼친다.

■‘폴란드가 되려냐, 미국이 되려나.’
초반 열기에 힘입어 9월16일 독립문 건립을 위한 첫삽을 떴고, 두 달 여 뒤인 11월22일 대대적인 정초식(주춧돌을 올리는 일을 기념하는 식)을 열었다.

 

배재학당 학생들은 ‘조선가’, ‘진보가’, ‘독립가’를 불렀고 영어학교인 육영공원 생도들은 체조시범까지 보였다. 이날 일반 시민까지 포함하면 5000~6000명이 참석했다.

이 때 외부대신이자 독립협회 위원장인 이완용이 ‘조선 전장이 어떠할꼬’라는 주제로 했다는 연설이 의미심장하다. 

“조선이 독립하면 미국과 같이 부강한 나라가 될 터요, 합심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해치면 구라파에 있는 펄낸(폴란드)와 같이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터이다. 세계 사기에 두 본보기가 있으니 조선은…미국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

<독립신문>은 이완용의 연설을 두고 “모두 정당하고 이치가 있었다”고 치켜세웠다. 이때까지 친미파였던 이완용이 14년 후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가 된 것이다.

이완용이 선택한 길은 폴란드나 미국이 아니라 결국 일본이었던 것이다. 

 

■‘돈 좀 내세요’-앵벌이 기사의 향연
그런데 태산명동에 서일필이라 할까. 이렇게 떠들썩했던 독립문 공사는 질척대기 시작한다.

기공식이나 기부금 납부자 명단을 대대적으로 실었던 초반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심지어는 독립문의 준공날짜도 나와있지 않다. 여러 문헌을 토대로 1897년 11월 20일 쯤에 준공이 이뤄진 것으로 보일 따름이다.

그것을 반영하듯 <독립신문>엔 독립문 준공에 필요한 자금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기사가 처음 등장한다. 1898년 1월 18일 기사이다.

“독립문 준공에 들어간 돈이 3825원이다. 독립문을 만든 기사 심의석씨가 혈심(血心)으로 자기 돈을 근 1000원 들여 문을 완공했다. 그러나 아직 독립협회가 지불하지 못한 돈이 1000여원이다. 이 돈을 음력설 전에 지불해야 하는데….”

신문은 구구절절 하소연 하고 있다.

 

독립협회가 비상대책위원회를 열어 회장(안경수)과 부회장(이완용)이 보증을 서서 빚을 냈다는 것. 그 돈을 일단 기술자들에게 나눠주고, 빌린 돈은 회원들이 추렴해서 석달 안에 갚아야 한다는 것.

 

신문은 “누구든 대한 독립을 즐겁게 여기고 협회의 체면을 구기지 않기 바라는 이는 힘껏 추렴하여 이 빚을 갚게 해주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

이후 <독립신문>은 하루 걸러 지면에 ‘성금 좀 제발 내달라’는 독촉성 사고(기사)를 게재한다.

“독립문 지은 돈이 부족합니다. 각자의 형편대로 독립협회 사무소로 가져 오시오. 건립비용을 충당하는 일에 영화롭게 쓸 일이요.”(1898년 1월20·22·29일…)

“독립문·독립관·독립원은 대한 동포의 보조금으로 비용을 마련하는 것을 내외국민이 다 아는 바이거늘…. 독립문이 준공됐는데도 비용부족으로 공사비를 충당하지 못하니 어찌 개탄하지 않으리오.”(1898년 4~9월)

 

건립 초창기의 독립문. 이완용의 힌자 글씨인 '獨立門'이 선명하게 보인다.

■태산명동에 서일필
1898년 1~9월 사이 ‘앵벌이 기사’를 대충 세어보니 50여 회에 이를 정도다. 그래도 모금이 여의치 않자 ‘외국사람이 보기에도 수치스럽다’는 독자의 기부 기사까지 제재한다.

“김포군 박용의씨가 기부금 2원을 보내면서 본사에 편지하기를… ‘독립문은 대황제 폐하를 위한 문인데…공사비가 많이 부족하다니…외국사람들이 보기에도 수치스럽다’고 했다. 독립문을 모두 이 박씨같은 열성으로 위한다면….”

그럼에도 당시 먹고살기도 급급한 백성들이 십시일반으로 공사대금을 갹출하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서재필이 그렸던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의 모습은 축소되고 말았다. 단적인 예로 거창한 정초식에 비해 준공식 기사가 눈에 띄지 않는다.

28년 후인 <동아일보> 1925년 9월16일자를 보면 독립문 건립 이후의 사정을 가늠할 수 있다.

“독립문이 오백년 중국 사신을 맞이하느라 궁상을 떨고 섰던 모화관을 집어치우고 들어섰는데…얼마 지나지않아 독립문 가장자리에는 말뚝을 치고 철사로 얽어매어…일청(청일)전쟁으로…허수아비나마 독립이란 행세를 하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놓았는데….”

건립한 이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채 방치하고, 심지어는 출입을 금지시켰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태극기가 꽂힌 독립문, 변소로 전락한 독립문
그러나 시작이야 어떻든, 목적이 어떠했든 한일병합으로 국권을 잃은 이후 독립문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표상으로 변모했다.

미국 하와이 동포들이 발행하던 <신한민보>는 1913년 8월27일 경술국치를 기억하려는 삽화에서 독립문을 그려넣었다.

“독립문아 너로구나…빈터만 남았구나. 잠시 욕을 슬퍼마라. 동경성을 깨뜨린 후에 개선문을 지으리라.”

1919년 3·1운동 당시 누군가가 독립문에 태극기를 꽂은 일도 있었다. 당시 그 높다란 독립문(높이 14.28m, 너비 11.48m)에 태극기를 꽂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면서 ‘도깨비 짓’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화들짝 놀란 일본 경찰이 소방차를 동원해서 태극기를 뽑아냈다. 일제는 그 참에 소방펌프를 뿌려대 원래부터 새겨져 있던 태극기의 색채를 지워버렸다.(<동아일보> 1925년 9월16일)

 

그 이후 독립문 오른편 다리에는 보기에도 위태로운 틈이 생겼다.

독립문을 향한 백성들의 마음은 ‘안타까움’ 그 자체였던 것 같다. 1924년 9월3일 <동아일보>는 ‘부랑자의 변소’로 전락한 독립문을 개탄하는 독자투고를 게재했다.

“독립문의 모습을 보니 기가 막힌다. 올라가는 층대는 무지한의 변소가 됐고, 위층부터 불시에 붕괴될 것 같다.”

 

농산물의 수입을 반대하는 시위대가 독립문 위에 올라갔다. 독립문은 애초에 건립되었을 때는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지만 나중에는 일제로부터의 독립,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싱징물로 바뀌었다.

■일제는 왜 독립문을 문화재로 지정했을까.
하지만 이완용의 ‘독립문’ 현판이 웅변해주듯 독립문은 ‘이중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일제가 독립문을 조선 백성의 독립열망을 담고 있던 기념물로 여겼다면 허무러지도록 방치했거나 아예 철거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냥 놔두면 붕괴할 것이니 철폐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4100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대대적인 독립문 수리공사에 나섰다.

“독립문 철폐론도 상당히 있었지만 결국 수선하기로 결정했다. 경성부가 4100원을 보조해서…. 건설한 지 30여년간 방치해서 수리하지 않아 거의 퇴락할 지경이고….”(<동아일보> 1928년 8월 20일)  

한술 더 떠 일제가 아예 독립문을 고적(제58호)으로 지정했다는 것 또한 흥미롭다.

“조선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회 회의 결과 대방군 태수 장무이의 고분을 비롯해 경성의 성벽, 독립문, 노인정, 사직단, 신라 무열왕릉, 부여 청마산성 등 49건을 고적으로 선정했다.”

1935년 8월 9일의 일이다. 일제가 다름아닌 ‘독립문’을 전승해야 할 문화재로 지정했다는 사실은 심상치않다. 사실 문화재란 최소한 100년은 지나야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그게 불문률이다. 그런데 건립된지 불과 40년도 채 되지 않은 독립문을 문화재로 지정했다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독립문에 서린 백성의 땀과 피
예컨대 일제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입성한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보물 1·2호(훗날 국보 1호·보물 1호)로 지정했다.

실제로 일제가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히 표명하는 유물·유적을 문화재로 지정했다”는 기록(<동아일보> 1938년 11월26일)이 있다. 일제는 신라 경애왕이 술판을 벌이다 죽임을 당한 포석정을 고적 1호로 지정한 바 있다.

조선의 부끄러운 역사를 부각시킨 것이다.

 

독립문과 함께 고적으로 지정한 태방군 태수 장무이(중국인)의 고분(서기 288년)은 어떨까. 중국인의 무덤을 굳이 문화재로 지정함으로써 외세(중국)의 지배에 허우적댄 조선역사의 타율성과 정체성을 강조한 것이다.

독립문은 어떨까. 일제는 독립문을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표상물로 여겼으며, 이완용 등 독립협회 인사들중 상당수가 친일파로 변모한 점을 강조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독립문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감추고, 일본이 조선의 조력자였음을 홍보한 기념물로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그럴 듯 하다.

이 순간 독립문 앞에서 선다. 저 높이 우뚝 서있는 이완용의 ‘독립문’ 편액이 곱게 보일리 없다. 그럼에도 만감이 교차한다. 독립문에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 친일파의 체취만 남아있는게 아니니까….

 

자강독립을 꿈꾸며 손에 손에 1전 1전씩 들고온 뭇 백성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지 않은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 참고자료>

기록문화회, <부끄러운 문화답사기>, 실천문학사, 1987

윤덕한, <이완용 평전>, 도서출판 길, 2012

목수현, '근대기념물과 만들어지는 기억', <미술사와 시각문화> 제2호, 미술사와시각문화학회, 2003

이유직, '독립공원의 조경사적 의의'. <한국조경학회지> 제36권 1호, 한국조경사학회, 2008

김도태, <서재필박사 자서전>, 수선사, 1948

정상우, '한국사 콘텐츠-독립문,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다'(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R0020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