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숙종 때 강화도에 실전배치된 서양식 화포 불랑기 1문이 발굴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1679년(숙종 5년) 강화도에 쌓은 건평돈대에서 확인됐는데, 실제 <숙종실록>을 입증해주는 실물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당시 숙종은 강화도 해안 요충지에 방어 및 관측시설인 돈대 54곳을 쌓았다. 이번에 발굴된 불랑기에는 무기의 제작기관과 감독관리 및 장인의 이름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강희 19년(1680년 숙종 6년) 삼도수군통제사 전동흘 등이 강화도 돈대에서 사용할 불랑기 115문을 만들어  진상하니 무게는 100근이다. 감주군관 절충장군 신청, 전추관 최이후, 전만호 강준, 장인 천수인."

강화도 건평돈대에서 발굴된 서양식 화포 불랑기. 포 뒤에서 장전하는 후장식 화포다. 거치된 상태에서 포탄을 장전할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포신(모포)과 포탄 및 화약을 장전하는 자포가 분리되어 가스가 샐 가능성이 많다는 약점이 있다.|인천시립박물관 제공

그런데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330년전 무기에 불랑기라는 정체불명의 이름이 붙은 이유는 무엇일까.

“불랑의 신마(神馬)가 황도(북경)에 왔는데 굳세고 훤칠한 기상 어디 비할까.”(<익재난고>)

1263년(공민왕 12년) 이제현의 시에 ‘불랑’이라는 나라 이름이 언급됐다.

그런데 시의 제목에 ‘서극(西極) 불랑에서 바친 신마’라는 각주가 달려 있다. 불랑을 ‘서역 가운데서도 가장 먼 나라’로 인식했던 것이다.

‘불랑’은 게르만인의 일파가 세운 프랑크 왕국의 한자표기어다.

프랑크 왕국은 5세기 후엽~9세기 중엽까지 서유럽 대부분을 통합한 대제국이다.

유럽인들이 통일제국 ‘진(Chin)’을 떠올리며 중국을 ‘차이나’라 한 것과 같은 이치다.

동양인에게 서역의 끝 유럽은 ‘불랑기(佛郞機)’로 굳어졌다. 16세기부터 해양개척에 나선 포르투갈을 통칭 불랑기라 했다.

1521년(중종 16년)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이석은 북경에서 만난 포르투갈 사절단을 보고는 긍정적인 소감을 밝혔다.

“개명된 사람들이며 글자도 진언(인도글자)이나 언문(한글) 같았는데 매우 정교했습니다.”(<중종실록>)

출토당시의 불랑기.

그런데 이 무렵 도입된 서양식 대포 이름도 ‘불랑기’였다.

이 또한 도자기가 영어로 ‘차이나’가 된 것과 같은 의미다. 박제광 건국대박물관 학예실장에 따르면 16세기초 동양에 소개된 불랑기는 지금으로 치면 미사일 같은 첨단 발사무기였다.

전통적인 대포는 포문, 즉 포 앞에서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는 전장식 화포였다.   

그런데 불랑기는 현대식 화포처럼 포 뒤에서 장전하고, 빠른 속도로 연발할 수 있는 후장식 화포다.

조선도 1563년(명종 18년)에 불랑기를 자체 제작했다. 이것이 2009년 서울시 신청사 부지(군기시터)에서 발굴된 불랑기(보물 861-2호)이다.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불랑기도 보물(제861-1호)이다. 현존하는 불랑기는 약 12문이다.

임진왜란 때인 1593년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병조판서 한음 이덕형은 “불랑기를 비롯한 대포를 성밖 5리에서 일시에 쏟아대니 불빛이 하늘에 치솟고, 왜적이 모두 쓰러졌다”(<선조실록>)고 전했다.

조선인들은 이따끔 마주친 서양인들을 외계인 취급했다. ‘코가 너무 커서 귀 뒤로 코를 돌린 다음 물을 마시거나 항상 한 발을 들고 오줌을 싼다더라’(<하멜표류기> <청장관전서>)는 인식 수준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박연)와 하멜을 등용해서 서양의 첨단 화포술을 배우려 했다. 나름 실사구시를 실천한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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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