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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종을 닮으려 했던 고종-순종 …왕세자 집무실 계조당 복원 이야기 “내가 세종의 업적을 계승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동궁(순종)은 훗날 나(고종)의 가르침을 준수해주기를 바란다.” 1891년(고종 28년) 2월8일 고종은 경복궁 안에 계조당을 고쳐 지은 뜻을 밝혔다. “세종 계해년(1443년) 문종이 동궁에 있을 때 계조당을 세웠고, 문종이 곧 대리청정했다. 세종 시대에 모든 제도와 문물, 법식을 다 갖췄고 가장 융성했다.”한마디로 고종은 세자인 순종과 더불어 조선의 성군인 세종과 그 아들 문종을 본보기로 삼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계조당을 고쳐 지은 것이다. ‘계조(繼照)’는 ‘사방에 비치는 광명을 계승하여 비춰준다(以繼明照于四方)’는 ‘이괘·삼전’의 구절에서 따왔다. 따라서 ‘계조’은 왕위계승을 뜻한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은 바로 ‘슬기로운 왕위계승’을 위해 ..
자격루 434년만에 때빼고 광냈더니…용문양에 제작자 이름까지 중국 주나라에는 아주 특별한 벼슬아치가 있었다. 닭을 관장하면서 새벽을 알리는 ‘계인(鷄人)’이라는 관리였다( 춘관). ‘계인’의 임무는 매우 중요했다. 왜냐면 ‘하늘을 공경하여 백성들에게 신중하게 때를 알려주는(欽若昊天 敬授人時)’( ‘요전편’)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때(時)’는 농사철의 시기를 가리킨다. 예부터 “군주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 ‘열전·역이기전’)고 했다. 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삼고 사는 백성들에게 절기를 가르쳐주지 못하면 군주의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시간을 사람이 일일이 알리다보니 번번이 착오가 생겼다. 농사철에 ‘때’를 잘못 일러주면 백성들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 아닌가. 만고의 성군인 세..
'직지'보다 138년 오래된 금속활자본…'국내 존재 사실 까맣게 몰랐다"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 1377년(우왕 3년) 찍어낸 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다. 그렇다면 문헌상 최초의 금속활자본은 무엇일까. 혹은 등 2건으로 알려졌다. 의 경우 “(1234~1241년 사이) 강화도에서 28부를 금속활자본으로 찍었다”는 이규보(1168~1241)의 언급()만 남아있다. ‘에 붙어있는 무신정권 실력자 최이(?~1249)의 발문. “기술자들을 모집해서 기해년(1239년) 주자본(금속활자본)을 거듭 인쇄한다”는 내용이다. 지금까지는 ‘목판본으로 다시 새겼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최근 “속활자본으로 거듭 인쇄했다’고 해석하는게 옳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깨달음의 뜻을 밝힌다(證道)’는 (이하 남명증도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원전은 선가의 수행지침서인..
고구려 사신 그려진 아프로시압 벽화의 속살, 국내연구진이 밝혀낸다 1965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 시의 아프로시압 도성지에서 도로공사 중 매우 흥미로운 동서남북 4면 벽화가 발견됐다. 정면(서벽)의 벽화는 7세기 중반 사마르칸트 왕 바르후만을 알현하는 외국 사절단 행렬을 그렸다. 좌측면(남벽)에는 남부지역인 수르한다리야에서 시집오는 결혼 행렬이 그려져 있다. 하얀 코끼리 등 위에 올라탄 신부를 말을 탄 시녀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1965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로시압 도성지에서 발견된 궁전벽화. 7세기 중반 사마르칸트 바르후만 왕을 알현하는 외국 사절 가운데 고구려 사신으로 추정되는 두 인물이 보인다.|문화재청 제공그 뒤를 낙타와 말을 탄 행렬이 따르고 있다. 우측면(북벽)에는 여인이 배를 타고 악기를 연주하고, 사람과 동물이 싸우는 내용이 그려져 있다. ..
덕수궁 '대안문'이 '대한문' 된 이유…"갓 쓴 여자 재수없어서" “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는데, 안(安)자가 계집 녀(女) 자에 갓쓴 글자이고 양장하고 모자 쓴 여자인 배정자의 대궐 출입이 빈번해서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쟁이의 말로 인해 대한문으로 고쳤다.”일제강점기 대중잡지인 제33집(1933년 7월 1일자)에 실린 덕수궁의 정문 ‘대한문’ 관련 일화이다. ‘문외한’이란 가명의 필자는 ‘팔자 고친 경성시내 육대문 신세타령’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대한문이야말로 여러 대궐문 중에서 제일 나이 어리고 팔자 사나온 문”이라고 지칭하면서 이름을 ‘대안문’에서 ‘대한문’으로 바꾼 이력을 소개했다.1906년 이전에는 덕수궁의 정문 이름이 ‘대안문’이었다. 그러다 그해 이름이 대한으로 바뀌었다. 1906년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바꾸고 수리한 뒤 그 내역을 기록한 중 ‘대한문상량..
740매 말갑옷의 비밀…삼국시대 전투마는 조랑말 크기 무려 740매의 말갑옷 편, 유구의 무게는 28t. 그러나 신라 전투마의 크기는 현재의 조랑말과 유사하고…. 경주주 ‘쪽샘’ 지구는 4~6세기에 살았던 신라 귀족들의 무덤이 800여기가 집중된 곳으로 유명하다. 2007년부터 20년 예정으로 본격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지난 2009년 쪽샘지구 C10호, 즉 5세기 전반 무덤인 목곽묘에서 획기적인 발굴성과가 나왔다. 말갑옷이었다. 쪽샘지구에서 확인된 말갑옷의 복원모습. 신라 기마병은 요즘의 조랑말 크기의 말을 타고 전투에 임한 것으로 추정됐다. 당시에는 이 말이 우량종이었을 것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발굴당시 말갑옷은 무덤 주인공의 널방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정연하게 깔려 있었다. 말갑옷의 목·가슴가리개 한쪽에는 사람 갑옷 중 투구와 목..
아주까리 오동나무 씨앗…25t트럭 100대분 흙더미에서 찾아낸 초미세 유물 1㎝도 안되는 아주까리 씨앗은 물론 1㎜ 안팎에 불과한 오동나무 씨앗까지…. 이것이 25t덤프트럭 100대 분량의 흙을 일일이 물체질로 걸러내 핀셋과 현미경으로 찾아낸 1600년 전 신라시대 씨앗들이다. 이 중 아주까리는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나 ‘…바람에 깜빡이는 아주까리 등잔불…’(가수 최병호의 1941년작 ‘아주까리 등불’)에서 등장할 정도로 친숙한 식물이다. 시와 노래에서 나오듯 등잔불이나 머릿기름으로 쓰였고, 혹은 들기름이나 참기름 대용으로도 사용됐다. 경주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아주까리 씨앗. 25t덤프트럭 100대 분량의 흙을 일일이 물체질로 걸러내 찾아낸 유기물이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그런데 1600년 전 신라인들도..
1600년전 아기반달가슴곰은 왜 경주 월성해자에 묻혔을까 “아기곰을 포함한 반달가슴곰의 가죽으로 군대의 깃발장식을 꾸몄다.' 신라의 1000년 도성인 경주 월성의 해자(외부 침입을 막으려고 성 주변을 파서 못으로 만든 곳)에서 1600년 전 신라인의 ‘삶의 흔적’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2016년부터 19년까지 월성 해자의 내부를 조사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금까지 얻어낸 유기질 유물과 관련된 학제간 연구를 통해 몇가지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고 최근 전했다. 1600년전 반달가슴곰의 뼈로 추정되는 곰뼈가 신라의 1000년 도성인 경주 월성 해자에서 출토됐다. 이 중에는 아기곰의 뼈도 있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월성은 기원후 101년 축성 이후 멸망(935년)까지 843년 동안 천년왕국 신라의 왕성이었다. 성이 초승달 모양이어서 ‘월성(月城·둘레 2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