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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감쪽같이 사라져 돌아오지 않는 '국보 보물' 열전

1990년대말~2000년대초 전국의 사당·향교·서원·사찰에 걸려있거나 모셔놓았던 영정, 초상화, 탱화 등이 수난을 당한 적이 있었다.
“1990년대 말 시작된 TV 프로그램(‘진품명품’)에서 어느 사대부의 영정이 1억원이 훨씬 넘는 감정가로 추산되었어요. 이때부터 전국의 사당에 비상이 걸릴 정도로 영정을 노리는 문화재사범이 늘어났어요.”(강신태 전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
‘TV쇼 진품명품’은 문화재의 가치를 쉽게 알려주기 위해 감정가를 재미삼아 붙인 이름 그대로 ‘문화재 쇼’ 프로그램이었다. 대중을 위한 문화재 프로그램이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신선한 접근이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역기능도 나타났다.

불법 반출된 지 19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이선제 묘지 앞면. 이선제 묘지는 옆면에도 글자를 새겨 상감기법으로 마무리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봇물터진 영정도난사건
TV감정단은 1996년 방영된 45회에서 중종반정에 참여했던 류순정(1459~1512)의 영정을 당대 최고액인 1억2000만원으로 매겼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전광판의 액수가 ‘억’ 단위 이상 표시되지 않아서 불가피하게 9999만9999원의 감정가를 기록할 정도로 화제를 뿌렸다. 류순정 영정은 현재 몇 점 전해오지 않는 16세기 초의 초상화이고, 조선조 중기 공신상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 액수도 2년만에 역시 ‘영정’이 깨버린다. 1998년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1682~1759)의 영정으로 알려진 초상화에 2억5000만원의 감정가를 매겼다.  ‘TV쇼 진품명품’은 영정도 문화재적 가치가 엄청나다는 사실을 쇼 형식으로 알려주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돈에 눈이 먼 절도범들에게는 유산의 가치보다는 역시 돈만 보였던 것 같다. 강신태씨는 “‘영정이 돈이 된다’고 여긴 절도범들이 날뛰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전까지 사당이나 향교, 서원에 걸린 영정 등은 별다른 관리가 필요없었다. 누가 남의 집 가문 영정을 훔쳐간단 말인가. 강신태씨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당시를 회고했다. 
“아이고! 말도 마세요.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 가문 영정이 털렸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정신이 없었어요. 보안이 허술한 뭇 사당이나 향교, 서원에 걸린 영정이 큰 돈이 된다는 망상을 갖게 됐거든요. 문화재 전문털이범 뿐 아니라 잡범들도 손을 대기 시작했어요.”
얼마전 우여곡절 끝에 18년 만에 회수한 ‘익안대군 이방의 영정’(충남문화재자료 제329호)도 그 무렵 도난당한 것이었다.

 

■돌아온 익안대군 영정에서 태종의 얼굴을 본다
2000년 1월 7일 충남 논산 연산면 전주 이씨 종중의 영정각에 모셔둔 영정을 이중 잠금장치를 풀고 감쪽같이 가져가버렸다. 이 영정은 문화재 전문털이범인 서모씨가 훔쳐가 일본에서 문화재 세탁을 거쳐 국내로 들어온 뒤 18년만에 회수되었다. 익안대군 이방의는 태조 이성계의 셋째아들이다. 이성계의 맏아들은 이방우(1354~1393)이다. 그러나 고려의 충신으로 남기를 원한 이방우는 아버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뒤 철원 땅으로 은거했다. 이방우는 소주로 세월을 보내가다 그만 술병으로 죽었다. 만약 맏아들 이방우가 살아서 막 개국한 조선의 2대왕으로 등극했다면 조선의 역사가 어떻게 변했을 지 궁금해진다. 이성계의 둘째아들은 이방과(2대 임금 정종)이다. 

도난된 뒤 아직 회수되지 않은 국가지정 문화재들. 국보 1점과 보물 12점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셋째아들인 익안대군 이방의는 이방원(다섯째·태종)와 이방간(넷째) 등과 함께 개국공신 1등에 든 인물이다. 그러나 이방의는 정권에는 야심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태종실록>은 “이방의의 성격은 온후했으며, 술자리에서 취기가 잔뜩 올라도 결코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동생인 방원이 임금이 된 후에는 지병으로 두문불출했다.

<태종실록>은 “1403년(태종 3년) 태종이 병석에 누운 익안대군 이방의의 집에 가서 문병하자 이방의가 부축되어 나와 꿇어앉아 울었다”고 전했다, 또 태종이 “(병석의) 형님이 오래앉아 있으면 안될 것 같아 돌아가려 한다”고 하자 방의는 “오늘은 신(방의)이 병을 무릅쓰고 앉았으니 원컨대 술에 취해 눕는 것을 보고 돌아가셔야 한다”고 했다. <태종실록>은 “태종이 형의 말을 듣고 그대로 머무르니 방의가 부축된 채로 춤을 추었고, 임금(태종) 또한 일어나 함께 춤을 추었다”고 썼다, 형제간의 지극한 우애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회수된 익안대군 영정은 언제 그린 것일까. “1734년(영조 10년) 영조가 화공 장만득(1684~1764))을 불러 영정을 그리라고 했다”는 어필 기록이 남아 있다. 아마도 화가 장득만이 전해 내려오던 영정의 원본을 참고해서 그대로 그린 이모본(移摸本)일 것이다. 아마 화가는 익안대군의 영정을 ‘뽀샵’이나 ‘보정’ 처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왕조시대의 초상화는 ‘극사실’ 기법으로 그리지 않으면 진정한 초상화라 하지 않았다. 북송의 유학자 정이(1033~1107)의 정신, 즉 “터럭 한오라기가 달라도 타인(一毫不似 便是他人)”이라는 원칙에 따라 초상화를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장득만은 전해내려오는 익안대군의 영정 그대로 그야말로 터럭 한 올조차도 옮겨그렸을 것이 뻔하다. 이 익안대군 영정을 통해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동복형제인 정종(둘째 방과)과 태종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다.
필자가 지난 10일 익안대군 영정의 반환식이 끝난 뒤 전주 이씨 익안대군파 후손 및 정재숙 문화재청장 등과의 점심자리에서 깜짝 놀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후손들의 용모와 익안대군 영정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피는 속일 수 없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태조 이성계의 셋째아들인 익안대군 이방의의 영정. 도난된지 18년만에 회수됐다.|문화재청 제공

 

■도난당한 안평대군의 진필
필자는 익안대군 영정이 18년 만에 회수된 것을 계기로 도난문화재 현황을 급히 살펴보았다.
도난당한 뒤 돌아오지 않은 국가지정문화재(국보와 보물)만 해도 13건(국보 1건 보물 12건)에 달한다.
그중 돌아오지 않은 유일한 국보가 있으니 바로 안평대군의 진필인 ‘소원화개첩’(국보 제238호)이다.
잘 알다시피 “안평대군(1418~1453)은 불세출의 사람이며, 그의 글씨는 자연미를 방출한 걸작”이라는 평을 받았다, 조선전기의 문인인 최항(1409∼1474)은 시문집 <태허정집>에서 “동방에 서도를 일으켰고… 중국 조정의 선비들이 또한 글씨 한 장씩만 얻어도 가첩을 만들어 보배로 사랑하고 모방하여 비교하려고 했다”고 소개했다. 이를테면 중국대륙에 불어닥친 안평대군의 ‘한류’였던 것이다. 1450년(세종 32년)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 예겸은 “(안평대군의) 글씨는 보통 솜씨가 아니다. 이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연려실기술>)고 희망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안평대군의 진적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계유정란의 희생자였기에 모든 소장품들이 몰수됐고, 이후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유독 많은 전란에 시달렸으니 그 사이 어떻게 됐는지도 알 수 없다.
남은 것이라고는 ‘몽유도원도’의 발문과 ‘소원화개첩’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안평대군의 해서로 ‘몽유도원도’에 실린 ‘몽유도원기’는 일본 뎬리대(天理大)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내에 남아있는 안평대군의 유일한 진필이 바로 ‘소원화개첩’이다.
‘소원화개첩’은 당나라 시인 이상은(812~858)의 칠언율시 ‘봉시(峰詩)’를 필서한 것이다. 비단에 행서체로 썼으며 말미에 ‘비해당(匪懈堂)’이라는 안평대군 호의 낙관과 도장이 찍혀있다. A4용지보다 작은 크기(가로 16.5cm, 세로 26.5cm)의 56자 소품이다. 1987년 국보 제238호로 지정됐다. 이 작품의 소장자는 고미술수집가인 서정철씨였다. 그러나 이 ‘소원화개첩’은 17년전인 2001년 행방을 감췄다.
소장자인 서씨가 집을 비운 사이 도난당했다는 것이다. 당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강신태씨는 “‘소원화개첩’을 훔친 자들은 비전문가가 틀림없다”고 단정한다. 당시 소장자인 서씨의 거실에는 호당 3000만원을 호가하는 겸재 정선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절도범은 그 그림은 그냥 놔두고 ‘소원화개첩’과 신문지에 싸서 묶어놓은 간찰 100여점만 들고 갔다. 경찰은 2010년 이 ‘소원화개첩’을 인터폴에 국제 수배했다. 세상이 다 아는 국보이다보니 해외로 반출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까지 ‘소원화개첩’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2001년 도난당한 뒤 행방불명된 국보 ‘소원화개첩’. 지금까지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안평대군의  진필이다

 

■청와대에서 사라진 안중근 의사 유묵
도난당한 국가지정문화재 가운데 특히 낯부끄러운 유물이 바로 안중근 의사의 유묵 한 점이다. 안의사가 1910년 3월 뤼순(旅順) 감독에서 쓴 유묵이다. ‘허름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은 함께 도를 논할 수 없다(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는 글씨(보물 제569-4호)다. 그런데 이 유물의 소유자는 바로 ‘청와대’ 이며, 도난장소 역시 ‘청와대’라는 점이 한없이 부끄러운 대목이다.
1972년 8월16일 보물로 지정된 이 유묵은 4년 뒤인 1976년 3월17일 이도영 당시 홍익대 이사장이 청와대에 기증했다. 그런데 이 유묵은 어느 순간부터 감쪽같이 사라졌다. 도대체 언제 사라졌는지 그 시점도 알 수 없단다. 강신태씨는 “아마도 1979년 10·26 사태 이후 청와대가 어수선해졌을 때 사라진 것 같다”고 추정할 뿐이다. “안중근 의사의 이 유묵은 청와대 집무실에 걸려있었다”고 전했다. 문화재청 인터넷 사이트의 도난문화재 정보란에는 이 유묵의 소유자와 도난장소가 ‘청와대’라 기록돼있다. 안중근 의사의 손끝 흔적이 깃든 귀중한 유묵을 도난당한 곳이 다른 곳도 아닌 ‘청와대’란다. 부끄럽지 않은가. 대체 찾을 생각은 하고 있는가.

 

■돌아오지 않는 국보·보물
사라진 보물 중에는 전남 순천 송광사 16조사 진영 중 13점(보물 제1043호)도 눈에 띈다. 송광사 16조사 진영은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을 비롯해 송광사를 중심으로 고려 후기에 활약한 고승 16명의 초상화를 가리킨다. 1995년 1월 16국사 영정 중 보조·진각·정혜국사의 영정 3점만 남긴채 13점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당시 경찰은 국사전 뒤쪽 흙벽에 지름 1m 가량의 구멍이 난 것으로 보아 절 내부사정을 아는 문화재 전문절도범의 소행으로 추정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다.
1999년 3월 충북 괴산 소수면 사당에 보관된 조선 중기의 문신 유근(1549~1627)의 영정(보물 제 566호)도 도난된지 19년이 지난 지금에도 찾지 못했다. 1985년 2월 경기 여주 원종대사 혜진탑(보물 제7호)의 상륜부 중 보륜과 보주 부분이 사라졌는데, 33년이 지나도록 찾지 못하고 있다. 또 상주 정기룡 장군유물 중 ‘유서’ 1점(보물 제 669호·1985년 도난), 남원 실상사 백장암 석등 보주(보물 제40호·1989년), 황진가 고문서 2점(보물 제942호·1993년), 함양 박씨 정랑공파 문중전적-만국전도 1점(보물 제1008호·1993~4년), 익산 현등사 연안 이씨 종중 고문서(보물 제651호·1999년), 경주 기림사 비로자나불 복장유물 중 전적(보물 제959-1호·1993년), 예천 대동운부군옥책판(보물 제878호·1990년), 강화 백련사 철아미타불좌상(보물 제994호·1989년) 등이 돌아오지 않는 보물들이다.

 

청와대에서 종적을 감춘 안중근 의사의 글씨. 1979년 10·16 사태 이후 혼란기를 틈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누구의 소행인지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

■도난 및 도굴 문화재의 은닉 유통이 불가능한 이유
그나마 국가 및 시도지정문화재의 형편은 좀 나은 편이다. 아무래도 수사당국의 감시망이 훨씬 촘촘하기 때문이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1998년 이후 도난당한 문화재(총 2만2772점) 가운데 비지정문화재가 무려 95%(2만1611점)에 달한다.
회수율의 경우도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국가지정(국보 및 보물) 도난문화재는 88.5%(도난 89점, 회수 77점), 시도지정 문화재는 51.4%(도난 1072점, 회수 552점)에 달하지만 비지정문화재의 회수율은 24.4%에 불과하다.
사실 현행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지정문화재든 비지정문화재든 도난문화재를 은닉하거나 사고 파는 행위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문화재 사범의 공소시효는 10년이다. 그러나 이는 문화재 절도나 도굴범에 해당되는 공소시효이다. 지난 2002년부터는 훔치거나 도굴한 문화재를 은닉하고 있는 자도 처벌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연스레 “도난 및 도굴 문화재인 줄 모르고 구입했다”는 변명들이 나왔다. 법의 허점을 노린 주장이었다. 그래서 2007년 이른바 ‘선의취득 배제 조항’을 신설했다. 즉 “도난 및 도굴 문화재인줄 모르고 구입했다”는 선의취득의 개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조항에 따르면 공공기관은 문화재의 도난신고를 받으면 도난됐다는 공고를 반드시 내게 된다. 그런데 이 공고를 확인하지 않고 문화재를 사들이면 선의취득에 해당되지 않는다. 불법이다. 또 탱화를 비롯한 회화작품의 경우 일부러 출처를 지우거나 낙관을 훼손한 다음에 팔고 사는 행위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 역시 불법이다. 결국 문화재 은닉과 거래의 공소시효는 사실상 없는 것이다.

 

■도난신고를 꺼리는 이유
그럼에도 여전히 비지정문화재의 도난·도굴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난을 당하는 경우 반드시 당국에 신고해야 도난공고를 낼 수 있고, 그래야 도난문화재의 은닉 및 유통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지정문화재의 경우 문화재의 이력은 분명하다. 그러니 도난신고를 하면 수사당국의 통제가 가능하다. 그러나 비지정 문화재의 경우 그 이력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예컨대 어느 가문에서 전적류와 서적 등 1000여 점이 무더기로 도난당한 경우를 상정해보자. 이 경우 잃어버린 문화재의 세부목록이 없다면 대체 무엇을 도난 당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도난신고를 해봐야 도난목록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다면 수사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또하나 피해자가 도난신고를 꺼리는 경우도 있다. 왜냐. 도난신고를 하면 해외밀반출을 막기 위해 공항과 항만의 출입국 세관에 통보되고. 범인색출을 위해 고미술협회를 통해 도난목록이 공유된다. 따라서 신고를 하게 되면 도난유물이 영영 잠적할 수 있다는 우려가 생길 수 있다. 강신태씨는 “종종 피해자가 신고도 하지 않은채 도난된 문화재를 찾으려고 인사동 등지를 헤매는 경우도 많다”면서 “이 경우 범인은 물론이고 도난 문화재도 찾을 길이 없다”고 밝힌다. 단적인 예로 2010년 무렵 정상 거래된 어느 가문의 조상 영정이 10여년 전에 도난당한 지정문화재였음이 뒤늦게 밝혀진 적이 있다. 지금 그 영정은 피해가문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도난품인줄 모르고 정상적인 거래행위로 영정을 구입한 이는 지금도 ‘선의취득’을 내세우며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18년만에 되찾은 익안대군 영정이 전주 이씨 익안대군파 종중에게 반환되었다.

■도굴사실도 몰랐던 ‘이선제 묘지’의 반환 스토리
심지어는 도굴 도난 당한 줄도 모르는 피해자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도굴 당한 줄도 몰랐다가 일본에 밀반출된 뒤 천신만고 끝에 환수된 ‘분청사기 상감 경태 5년명 이선제 묘지’이다. 즉 1998년 9월2일 ‘눈 먼 김포세관…안타깝게 유출된 분청사기 상감묘지’라는 제목의 깜짝놀랄만한 기사가 실렸다.
묘지(墓誌)는 죽은 사람의 행적, 자손의 이름, 묘지(墓地)의 이름, 그리고 나고 죽은 때 등을 기록한 글이다. 문제의 ‘분청사기 상감 경태 5년명 이선제 묘지’는 ‘경태 5년’ 즉 1454년(단종 2년) 글씨와 문양을 백상감한 분청사기로 만든 이선제라는 인물의 묘지라는 것이다. 이선제(1390~1453)은 광산 이씨 상서공파의 5세손이었으며, 세종~단종 등 세 임금을 모시면서 34년동안 학자이자 사관, 관료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선제의 묘지가 감쪽같이 도난을 당했던 것이다. 문제는 누구도 이 묘지가 도난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도난 당한 묘지는 1998년 5월 김포세관을 통해 일본으로 밀반출이 시도됐다. 그러나 “내 목이 칼이 들어와도 이 물건을 해외로 반출할 수 없다”고 버틴 당시 김해공항 문화재 감정관실 양병준 감정관 덕분에 밀반출은 일단 무산됐다. 도난신고가 없었으니 묘지를 압류할 수도, 수사기관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양 감정관으로서는 국외반출만은 막아야 했다.
그러나 한달 뒤 기어코 일이 터졌다. 밀매단이 김포공항의 세관원을 뇌물로 매수한 뒤 감정절차를 아예 생략한 채 여행용 가방에 넣어 ‘이선제 묘지’를 일본으로 밀반출해버린 것이다. 광산 이씨 문중은 신문에 도난-밀반출 기사가 날 때까지 이른바 ‘이선제 묘지’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다. 당연히 본 적도 없었다. 무덤 안에 있었던 묘지를 어떻게 알았겠는가. 신문에 난 도물 및 밀반출 기사를 보고서야 부랴부랴 묘소로 달려갔다. 그러나 도굴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당연히 도굴 당한 시기도 짐작할 수 없었다. 조상의 분신과 다를바 없는 묘지를 잃어버렸으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1454년(단종 2년) 땅속에 묻힌 ‘이선제 묘지’는 언젠가인지도 모르는 시점에 도굴되어 유통되었고, 후손들조차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1998년 6월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던 것이다.
이 유물은 결국 2014년 광산 이씨 문중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끈질긴 환수노력, 그리고 선의취득했지만 뒤늦게 불법반출 사실을 확인한 일본측 소장자의 조건없는 기증으로 환수됐다. 일본으로 밀반출된 지 16년만에 돌아온 것이다. 이 유물은 올 6월17일 보물 제1993호로 지정됐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이선제 묘지 귀향이이기>, 2018에서’)
 

임진왜란 때 활약한 매헌 정기룡(1562∼1622) 장군의 유서가 사라졌다. 정기룡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원래 이름은 무수였으나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왕의 뜻을 따라 이름을 기룡으로 고쳤다.

  
■‘무가지보와 ’priceless’의 참뜻
문화재 도난의 뿌리를 끊을 방법은 없는 것일까. 한상진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은 “비지정문화재의 경우에도 철저한 수사로 도난문화재의 ‘선의취득’ 문제를 추궁하는데 주력하지만 역부족”이라면서 법과 제도의 완비를 주문하고 있다.
즉 현행법상 문화재를 도굴하거나 훔친 사람의 공소시효가 10년인데, 이를 20~25년으로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통상 문화재는 도굴이나 도난을 당한 후 오랜 시간 적발되지 않고 은닉ㆍ유통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문화재를 직접 은닉하거나 유통한 사람만 처벌되고 애초에 문화재를 도굴이나 도난한 사람은 처벌하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한다. 정작 도굴범이나 문화재 절도범의 공소시효가 짧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재사범의 공소시효를 늘리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들은 번번이 국회의 문턱을 넘지못했다. 지금도 계류중이다. 인명을 살상한 경우도 아닌 문화재사범에게 공소시효 20~25년은 너무 과하다는 법의 형평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2015년 형사소송법 개정에 따라 사형에 해당하는 살인죄의 공소시효가 폐지됐다. 그렇다면 형평성 문제를 논할 때는 아닌 것 같다. 문화재 절도는 단순절도가 아니다. 수백 수천년 동안 이어온 문화유산을 한순간에 잃게 하는 반역사적인 범죄이다. 그렇다면 문화유산의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문화재 사범의 공소시효를 없애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문화유산을 한자로는 ‘무가지보(無價之寶)’라 하고, 영어로는 ‘priceless’라 한다. ‘값어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돈으로는 매길 수 없는 그런 보물이라는 뜻에서 ‘무가지보’니, ‘priceless’니 한다. 무엇보다 문화유산을 돈으로 따지는 그런 천박한 풍토가 사라져야 한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