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기행

(39)
부여의 남진 혹은 신라의 간접지배? ㆍ4세기 국내산 갑주 대거 출토 ‘임나일본부설’ 허구를 밝히다 흥분한 조합원이 휘두른 호미는 조합과 부산시의 창구역을 맡은 박유성의 귀 밑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쳤다. “모골이 송연했어요. 주민들도 흥분할 만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집에 대한 애착이 어지간하잖아요. 새 연립주택을 지으면 집값이 올라갈 것이 뻔했는데, 문화재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니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박유성씨)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은 부산시의 대안마련으로 극적인 타협점을 찾는다. 현장의 토지매입에 적극 나서는 한편, 집을 지을 수 없게 된 조합원들에게 다른 곳(연산동·구서동 등)에 집을 우선 마련해주는 방안을 찾은 것이다. “지금 보면 배울 점이 많아요. 부산시가 발빠르게 시민들의 재산권도 보장해주고 문화유산도 지키는 윈윈 전략을 ..
부산 시내 한복판에서 찾은 처녀분의 실체 ㆍ가야고분 속 신라 금동관의 사연을 더듬다 피란민의 애환이 담긴 무허가 판자촌. 지상의 가난한 이들의 삶터 밑엔 부유하고 강력했던 1500년전 선인들이 잠들어 있었다. 그들은 말이 없었지만 말머리장식 뿔잔·철덩어리·금관은 그들이 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터전을 잡았던 부산 동래 복천동 구릉. 그러나 이곳은 자연구릉이 아니라 AD 2~AD 7세기 사이 500년간이나 조성된 옛 선인들의 공동묘지였다.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 찬 흥남 부두에~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는 한국전쟁으로 피란길에 오른 이들의 애환이 담긴 노래다. 노래가사에서 절절이 담겨있듯 부산은 전쟁의 참화를 피해 내려온 ..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 문무대왕 지난 6월18일 필자는 경향신문 70주년 기획인 '경향 70년, 70인과의 동행'이라는 답사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답사단원은 35명이었는데, 매우 즐거운 여정이었습니다. 답사단을 이끈 분은 저의 스승님이자 저명한 고고학자인 조유전 선생이었습니다. 조유전 선생은 서울대 고고학과 2기 졸업생으로 문화재청 전신인 문화재관리국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속으로 경주 감은사 황룡사지 안압지 월성과 백제 무령왕릉을 발굴하신 고고학자입니다. 이번 경주여행은 감은사-대왕암-장항리사지-월성-황룡사지-분황사지를 돌았습니다. 공통점은 '터'이자 '흔적'입니다. 하고많은 경주의 수많은 볼거리중에 왜 하필 터이고 흔적일까요. 저명한 고고학자와 떠나는 신라 1000년의 여행을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는 2회에 걸쳐 고고학..
감은사 탑엔 문무왕의 사리가 안치돼있다 1997년 “감은사 동탑엔 문무왕의 사리가, 서탑엔 부처님의 사리가 각각 봉안됐다”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추정은 불교계를 뒤집어 놓았다. 우선 연구소 측의 주장. 문무왕은 처음으로 서역식 화장 장례를 도입한 ‘불심 깊은 왕’이었다. 왕을 화장했을 때 사리가 나왔다면 분명 그의 원찰인 감은사, 그것도 동탑에 봉안했을 것이다. 서탑의 경우 사리병 장식물이 부처님의 열반을 향연하는 주악(奏樂)의 천인(天人)들인 반면, 동탑엔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문무왕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호법신중(護法神衆)인 사천왕이 장식됐다. 동탑사리기. 문무왕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설도 있다.국립문화재연구소가 그런 연구성과를 내놨다. 문무왕은 재세기간동안 사천왕사를 건립했을 정도로 사천왕 사상과 관계가 깊었던 군주였다. 또 서탑엔 ‘봉황..
조선판 사랑과 영혼, "여보 나도 데려가요" 볕이 따뜻했던 1998년 4월 초. 경북 안동 정상동 야산은 부산했다. 1996년부터 안동시가 추진했던 택지개발공사 예정지였기에 분묘이장작업이 한창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지역에는 일부 안동 권씨 선산이 있었으나 고성 이씨 귀래정파(歸來亭派)의 선산이 대부분이었다. 고성 이씨 귀래정파의 입향조 이굉(1441~1516년) 이래 그 후손들이 정상동에 세거하고 있었다. 조선판 ‘사랑의 영혼’ 사연을 담은 원이엄마 편지|안동대박물관 ■살아있는 묘제박물관 따라서 이 선산에는 이굉의 묘에서부터 그 직계 종손과 후손들의 묘가 분포돼있었다. 안동대박물관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대규모 택지개발에 앞서 문화재 조사가 필수적이었다. “귀래정파의 선산은 조선 중기~현재까지의 묘제연구에 있어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었어요..
5분만 견뎠어도…자궁파열로 숨진 산모(하) 최근 대만에서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고 아주 다정스럽게 바라보는 모습의 미라가 발견됐습니다. 뭐 형체는 비록 흉하지만 아이를 안고 있는 품새에서 따뜻한 모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미라 뿐 아니라 모두 48구의 유해가 확인됐는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기원전 2000년 쯤 발생한 강진 때 엄마가 아이를 보호하려 했던 모습이 아니냐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이집트처럼 일부러 시신을 미라로 만들지는 않지만 이따끔씩 생생한 미라가 발견되곤 합니다. 특히 회곽묘를 썼던 조선시대 무덤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묘곽과 관에 흠이 없도록 싸바르는 회 때문에 관 내부가 완정 밀봉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발견된 조선시대 미라 가운데는 아주 드라마틱한 미라가 있습니다. 2002년 경기 파주 파평윤씨..
출산 도중 사망한 비운의 여인 미라(상) 최근 대만에서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고 아주 다정스럽게 바라보는 모습의 미라가 발견됐습니다. 뭐 형체는 비록 흉하지만 아이를 안고 있는 품새에서 따뜻한 모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미라 뿐 아니라 모두 48구의 유해가 확인됐는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기원전 2000년 쯤 발생한 강진 때 엄마가 아이를 보호하려 했던 모습이 아니냐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이집트처럼 일부러 시신을 미라로 만들지는 않지만 이따끔씩 생생한 미라가 발견되곤 합니다. 특히 회곽묘를 썼던 조선시대 무덤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묘곽과 관에 흠이 없도록 싸바르는 회 때문에 관 내부가 완정 밀봉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발견된 조선시대 미라 가운데는 아주 드라마틱한 미라가 있습니다. 2002년 경기 파주 파평윤씨..
고구려와 신라가 지하에서 만난 사연 “(경북 영풍군) 순흥면 어딘가에 새로운 벽화고분이 있다던데….” 1960년대 초반부터 대구·경북지역 골동품상 사이에 이런 말이 파다하게 돌았다. 그러나 이 말을 발설한 사람이 정확한 지점을 잊었고, 그마저 몇 해가 지나는 사이 이 발설자가 타계하는 바람에 그 벽화고분을 찾는 일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 격이 되고 말았다. 진홍섭(당시 이화여대 박물관장)은 암중모색을 계속했다. “동네 사람들의 말을 참고하면서 도굴 갱이 있는 무덤이 있으면 무덤 속에 들어가 벽화의 유무를 확인하곤 했어요. 그러던 73년 영풍 순흥 태장리에서 어숙술간묘(於宿述干墓)를 발굴한 것입니다.” 이 벽화 묘는 철저하게 훼손된 채 발견됐다. 1930년대만 해도 온전한 이 벽화 묘를 구경하기 위해 각지에서 200여명이나 몰려들었다는 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