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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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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장수 마음대로 탄생한 국보 11점…화순 대곡리 청동세트 발굴담 2400년 전 어느날. 전남 화순 대곡리에 큰 일이 터졌다. 이 일대를 다스리던 소국의 왕이 서거한 것이다. 제정일치의 시대, 즉 세상을 다스리면서 천지를 농단하여 사람과 하늘을 이어준 일인독존의 왕이 거한 것이다. 제사장이자 왕이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이 장례를 의논한다. 왕은 본향, 즉 천신이 되어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슬픔보다는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돌로 파서 무덤을 만드는 한편 그 안에는 굴피나무로 통나무관을 만들기로 한다. ■제사장 겸 임금이 서거하시다 우선 통나무 관 밑에는 청동으로 만든 칼 두 자루를 깐다. 액막이용이다. 그런 다음 통나무관에 시신을 누이고 청동신기(神器)들 즉, 청동검과 거울, 방울, 도끼, 새기개 등을 넣고 뚜껑을 덮는다. 이 모두 생전에..
벽돌에 새겨진 신라 전성기의 기와집…으리으리한 팔작지붕이었다 요즘엔 합금(구리+주석)이 워낙 좋아서 사라진 관행이지만 예전 설 명절마다 익숙한 풍경이 있었다. 곱게 빻은 기왓장 가루를 지푸라기 수세미에 묻혀 하루종일 놋그릇을 빡빡 문질러 닦는 풍습이었다. 그렇게 닦으면 놋그릇이 반들반들하게 되는데 어쩌랴. 한데 이게 보존과학의 측면에서 보면 아주 잘못된 관행이었다. “곱게 간 기와 가루로 빡빡 문질러대면 번쩍거리며 윤이 나죠. 그러나 결국은 그릇의 표면을 깎아내는 것이죠. 그러니 계속 문질러대면 그릇이 얇아지겠죠.”(홍원희 안성맞춤박물관 학예연구사) 놋그릇도 얇아진다지만 기왓장은 또 무슨 죄인가. 과거의 으뜸 건축자재였던 기와는 그렇게 ‘놋그릇 닦기용’ 가루가 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그러니 무슨 문화재 대우를 받았겠는가. 유창종 유금와당박물관장의 경험담이 흥미롭다..
능산리 절터의 목탑지 석조사리감은 왜 도끼로 훼손된채 발견됐나 여러분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각자의 취향에 따라 대답이 달라지겠죠. 금관이나 반가사유상, 석굴암, 불국사 등을 꼽는 분도 있을 거고, 혹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택하는 분도 있겠죠. 그런데 이러한 대표 문화유산 중에 막내라 할 수 있는 문화재가 있는데요, 바로 백제금동대향로인데요. 복제품의 몸값도 수백만원에 이른다는 금동대향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문=백제금동대향로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 중 하나라는 것은 알겠는데 막내라는 이유는요? 답=예 가장 늦게 발견되었기 때문에 막내라는거죠. 금동대향로는 1993년에 우연히 발견됐으니까요. 그리고 이 금동대향로는 복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데, 실물크기로 만든 가장 비싼 것은 300만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는데요. 특히 일본인들의..
홍문관 관리에서 홍어장수까지…조선판 '하멜표류기' 남긴 사람들 지난 2월초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의 특별전(‘ㄱ의 순간’)을 보던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림이 한 점 있었다. ‘조선인일본표착서화’(배가 조난당해 일본에 표착한 조선인을 그린 그림과 글씨)’라는 그림이었다. 일본 후쿠오카(福岡)의 개인사업가가 소장한 작품이 대여전시된 것이다. 이 작품이 특별전에 출품된 사연이 있다. 대학(평택대)의 일본어과에 재학중이던 학생(장윤화씨)이 일본에 머물던 친구에게서 작품의 존재를 알고서 서예박물관에 연락했다. 마침 특별전을 준비중이던 서예박물관측이 수소문 끝에 후쿠오카(福岡)의 개인사업가가 소장한 작품의 대여전시를 성사시켰다. ■표류민 초상화에 쓰여진 한글 흘림체 이 그림은 1819년(순조 19년) 1월7일 강원도 평해(지금 경북 울진)에서 멸치와 담배를 싣고 출항했다가..
하룻밤 사이에 수습한 무령왕릉…왜 최악의 졸속발굴이었나 올해는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기도 하고, 백제가 웅진천도 이후 다시 강국이 됐다는 이른바 갱위강국을 선포한지 1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공주시와 문화재청이 올해 내내 갖가지 행사를 펼쳐진다고 합니다. 축하받아야 마땅하겠네요. 그러나 고대사의 블랙박스를 열었다는 무령왕릉 발굴은 최악의 졸속 발굴이었다는 비판도 받는데요. 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에서 알아봅니다. 문=무령왕릉 발굴의 의미를 말하자면? 답=무엇보다 “내가 이 무덤의 주인공인 무령왕이요”하고 선언한 명문이 나왔으니까요. 삼국시대 고분 중에 이렇게 주인공을 알 수 있는 고분이 나온 건 처음입니다. 그러니까 이 무덤에서 나온 모든 유물은 연대가 분명하니까 삼국시대 유물의 연대를 편년하는 기준자료가 되었죠. 그래서 ..
사라진 송산리 29호분, 일인 교사 '도굴’ 88년 만에 발굴하는 이유 왜 하필 29호분일까.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웅진 백제 시기(475~538년) 왕릉의 구조와 상장례를 규명한다면서 첫번째로 지목해서 발굴 조사하는 고분이 바로 송산리 29호분이다. 송산리 고분군(사적 13호)은 웅진백제 시기 조성된 왕릉묘역이다. 그때의 임금이라면 문주왕(재위 475~477)-삼근왕(477~479)-동성왕(479~501)-무령왕(501~523)-성왕(523~554, 538년 사비로 천도) 등 5명이다. 일제강점기 자료를 종합하면 송산리에 29기 이상의 고분이 존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29호분의 정체 2019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표조사와 지하물리탐사 등의 첨단기법으로 분석해보니 자그만치 40여기의 백제고분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결과를 얻어냈다. 현재는 주인공이 밝혀진 무령왕..
내시도 궁궐 현판을 썼다…일제강점기 훼철된 385점 제자리 찾아보니 조선 왕비의 침전을 교태전(交泰殿)이라 했다. 경복궁에서 가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궁전이었다. 그런데 이름이 좀 얄궂지 않은가. 남편(임금)의 사랑을 얻으려는 왕비가 교태(嬌態)를 부리는 침실이라는 것인가.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교태(交泰)’는 에서 하늘과 땅의 사귐, 즉 양과 음의 조화를 상징한다. 임금과 왕비가 후사를 생산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교태전이라 한 것이다. 1395년(태조 4년) 태조는 서울에 새 궁궐을 짓고 대대적인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술이 거나하게 취한 태조가 정도전(1342~1398)에게 “새 궁궐의 이름을 지으라”고 명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구절을 외웠다. “(임금의) 술대접에 취하고 임금의 덕에 배부르니 후왕의 앞날에 큰 복(경복·景福)을 받게 할 것입니다.” ■왕비 침전..
'조선의 타임캡슐' 미라는 문화재인가 그저 무연고 시신일뿐인가 ‘혹시 암이 아닐까.’ 2002년 9월 경기 파주 교하의 파평 윤씨 묘역 중 무연고 묘에서 나온 미라의 옆구리 쪽을 살피던 김한겸 교수(고려대 의대)팀의 심장이 떨렸다. 미라의 홑바지 옷고름에 있는 글씨로 보아 ‘병인년윤시월’(1566년 윤 10월)에 묻힌 여인으로 추정됐다. 436년이 지났는데도 피부의 탄력이 살아있었다. 아직 인체에 수분이 남아있다는 증거였다. ■모자 미라의 충격 무엇보다 김교수가 경악한 것은 심하게 부풀어오른 옆구리였다. 이것이 수백년전 사망한 여인의 암덩어리라면 어떨까. ‘암 연구’에 획기적인 실마리를 제공하는 셈이 된다. 떨리는 심정으로 미라의 X레이 사진을 찍어보았다. 그랬더니 판독결과는 더 충격적이었다. 부풀어 오른 복강과 골반강 안에서 태아의 골격이 보이고 있었다. 암 덩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