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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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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가 넘쳐났던 세종 시대의 감옥…성군의 치세에 무슨 일이? ‘3m 가량의 높은 담장에 남녀가 구분되어 있는 옥사….’ 얼마 전에 조선시대 감옥을 주제로 한 논문이 발표됐다. 이은석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장이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펴내는 학술지( 54호 4권)에 발표한 논문(‘조선시대 지방 옥 구조에 관한 고찰’)이다. 발굴유적과 고지도를 비교분석한 논문인데, 그중 감옥의 형태가 원형이고, 남녀 옥사가 구분된 구조라는 것이 필자의 눈길이 쏠렸다. 우선 ‘원형감옥’ 이야기를 해보자. ■감옥은 왜 원형으로 지었을까 지금까지의 발굴과 고지도, 사진 등을 통해 분석한 조선시대 감옥은 모두 원형 감옥이었다. 조선시대 원형 감옥이 표시된 고지도는 109곳 146매에 달한다. 1914년까지 유지된 공주옥의 옛사진을 봐도 원형감옥이다. 또 1997년 발굴된 경주옥도, 2003~2004..
일제는 조선 임금들의 탯줄까지 일장기로 덮어놓았다 조선왕릉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2009년 왕과 왕비 무덤 44기 중 40기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왜 4기는 빠졌을까. 제릉(태조 이성계의 정비 신의왕후릉)과 후릉(2대 정종과 정안왕후릉)은 북한 땅에 있으니 뭐 그렇다치자. 연산군(1494~1506)과 광해군(1608~1623)의 무덤도 제외됐다. ‘왕릉’이 아니라 ‘묘’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등재명칭이 ‘조선왕릉’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묘’는 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과 광해군은 만 12~15년간 조선을 다스린 임금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폐위됐지만 그것은 조선 왕조의 일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까지 ‘왕릉’이 아니라 ‘묘’라는 딱지를 그대로 붙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자격을 얻지 못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
바둑 잘두는 신라공주가 중국의 기성 '마랑'을 만났다면… 황남대총은 신라의 왕과 왕비, 왕·귀족이 묻혀있는 경주 대릉원에서도 초대형 고분에 속한다. 표주박 모양으로 조성된 이 고분은 내물(356~402) 혹은 눌지마립간(417~457) 부부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분이 왕(마립간), 북분이 왕비 무덤으로 보인다. 1973~75년 대대적인 발굴 결과 금관과 금동관 등 7만 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1993~94년 황남대총(남분) 보고서를 쓰던 이은석 당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의 눈에 유독 밟히는 유물이 있었다. 주인공(60대 남성)이 묻힌 주곽(으뜸덧널)에 딸린 부장품 공간의 청동시루에서 출토된 칠기 2점이었다. 이중 1점(남분)의 바닥에서 확인된 ‘마랑(馬朗)’이라는 붉은 글씨가 심상치 않았다. ■‘마랑’이 누구인가 ‘마랑’은 과연 무엇을..
가야연맹의 '큰형님'이 따로 있었나…1인자 꿈꾸는 아라가야 “마치 쌍둥이 같네요.” 얼마전 가야연맹체 중에서도 아라가야의 중심지인 경남 함안 말이산 75호분에서 발견된 중국제 청자에 필자의 눈길을 확 잡아 끌었다. 5세기 중국 남조에서 제작된 완형의 연꽃무늬 청자그릇이었다. 발굴단(경남연구원 역사문화센터)은 5세기 중국 유송(420~479) 연간에 제작된 청자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국내 유사 사례로 소개한 천안 용원리 출토품을 제시했다. 그러나 곰곰이 살펴보면 용원리 뿐이 아니다. 한성백제의 왕성인 풍납토성(미래마을)에서 출토된 대옹(큰 항아리) 속에서 확인된 중국제 청자그릇과도 흡사하다. 4개(+중국제)의 청자 사진을 비교해보면 약간 초를 쳐서 ‘쌍둥이’ 같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전라도에서도 비슷한 청자가 출토된 적이 있다는 연구자들의 증..
신라 금관은 왜 순금(24K)이 아니라 19~21K일까…발굴 100년 맞아 분석해보니 올해는 한국고고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유적과 유물이 출토된지 50년과 100년 되는 해다. 먼저 1971년 공주 송산리에서 “내가 무령왕이요”하고 손들고 나타난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되는 해다. 이 무령왕릉 50주년 관련 행사는 비교적 다채롭게 펼쳐졌다. 여기에 국립공주박물관이 특별전(~2022년 3월20일)까지 열고 있으니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발굴 100주년을 맞았는데도 별다른 행사없이 지나치는 유적과 유물이 있다. 1921년 경주에서 최초로 발굴된 금관총 금관이다. 상식적으로 금관 같은 중요 유물이 발굴된 지 100주년이 되었다면 기념식을 연다, 학술대회를 연다, 특별전을 연다 하고 떠들썩했을텐데 그렇지 않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무령왕릉의 경우도 하룻밤 사이에 유물을 쓸어담..
무자비하게 도굴된 신라고분 속에서 고구려벽화가 현현했다 1960년대부터 대구 경북 지역 골동품상 사이에서 심상치않은 소문이 돌았다. “(영주) 순흥면의 어느 곳에 벽화고분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소문을 허투루 듣지않은 이가 있었다. 당시 진홍섭 이화여대 박물관장이었다. 틈나는대로 순흥 지역을 답사하던 진관장은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라 도굴 구덩이가 있는 무덤을 들어가 벽화의 유무를 확인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인 1971년 마침내 바로 그 순흥 태장리에서 벽화고분을 찾아냈다. 여러차례 도굴의 화를 입은 벽화 묘는 철저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도굴이 시작된 후 “무덤 내부의 벽에 칠해진 회를 삶아먹으면 만병통치”라는 헛소문까지 퍼졌다고 한다. 그 때문에 무덤 벽과 천정에는 채색화의 흔적만 겨우 남아있었다. 그나마 널길 천정에서 커다란 ..
돌아오지못한 1500년 전 부부총 금동관…왜 한일협정서 빠졌나 올해는 사상 처음으로 금관이 출토된지 꼭 100년 되는 해다. 때는 바야흐로 1921년 9월이었다. 경주 노서리에서 주막집 증축을 위한 터파기 작업을 하다가 우연히 유리옥 등 유물들이 수습됐다. 그렇게 시작된 발굴조사는 어수선했다. 긴급상황인데도 당시 김해 패총 발굴에 전력을 다하던 조선총독부가 전문인력의 파견을 늦췄다. 그 사이 발굴경험이 없는 지역의 비전문가들이 4일간 졸속으로 파헤쳤다. 그럼에도 금관을 비롯한 팔찌와 관모, 귀고리,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 등 온갖 황금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제는 금관이 나온 이 무덤을 ‘금관총’이라 이름 붙였다. 그러나 금관총 유물과 거의 흡사한 금동관을 비롯한 유물세트가 출토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5년 만에 현현한 부부 그보다 10개월 전인 192..
무령왕 부부 위로 황금 꽃비가 내렸습니다…무령왕릉 2715개 연꽃·원형장식의 비밀 무령왕릉 발굴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를까. 발굴 50주년을 맞아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무령왕릉 발굴 50주년-1971~2021)을 찾은 필자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선 출토된 묘지석에 따라 삼국시대 고분 가운데 유일하게 주인공(무령왕 부부)과 축조연대(523~529년)를 알 수 있는 무덤이라는 것이 떠오를 법하다. 5232점의 출토품 가운데 무려 12건(17점)이 국보로 지정되었을만큼 유물의 가치가 뛰어나다는 점도 관전포인트이다. 즉 왕과 왕비가 착용한 금제관식과 금귀고리, 금목걸이, 금제뒤꽂이, 은제허리띠, 금동신발, 용과 봉황무늬 둥근고리큰칼, 금·은 팔찌, 금·은장도, 베개, 발받침 등이 모조리 국보로 지정됐다. 무령왕릉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는 또하나의 ‘졸속발굴’이다.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