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이 주인공을 알아?’ 얼마전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가 펴낸 자료집(<황남대총 남분, 발굴조사의 기록>)을 보았다.
웬 뜬금없는 얘기냐 싶겠지만 새삼 2019년 9월에 방영된 KBS 프로그램(‘슈퍼맨이 돌아왔다’ 296회)이 떠올랐다.
축구선수 박주호씨의 자녀인 ‘건후와 나은’이 ‘왕가의 무덤’인 대릉원 대형 고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던 관람객 사이에서 천진난만 뛰노는 장면이다. ‘건나블리(건후·나은)’가 뛰놀던 그곳은 이미 경주의 소문난 ‘포토존’이었다.
남북 표주박 형태의 대형 고분과, 목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평일에도 수십미터씩 줄을 서는…. 그 배경 속 대형고분이 ‘황남대총’이다. 그렇지만 이 황남대총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는 이는 단언컨대 아마도 없을 듯 싶다. 그 이유를 ‘썰’로 풀어보자.
황금을 두른 부부
1973~75 경주 황남대총 남북분의 발굴조사에서 무덤의 두 주인공이 온갖 황금유물을 착장한 모습으로 현현했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소문난 경주 포토존의 비밀
1971년 6월 “경주 관광 개발계획을 마련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마련된 개발계획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가장 큰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인 98호분(황남대총·높이 22~23m, 밑지름 80~120m)을 발굴조사한 뒤 그 내부를 관광자원으로 공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고고학계는 그렇게 큰 무덤을 발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해서 인접한 155호분(천마총)을 시험 발굴해본 뒤 황남대총을 조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왕들의 무덤’ 속 포토존의 비밀
5~6세기 신라 왕과 왕족이 묻힌 경주 대릉원 속 소문난 포토존. 가장 큰 고분(표형분)인 황남대총과 목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관람객들이 평일에도 줄을 서는 곳이다.|오세윤 사진작가 제공
천마총 발굴(1973)로 경험을 축적한 발굴단(경주고적조사단)은 1973년 7월부터 황남대총 발굴에 돌입했다. 북분부터 시작된 발굴의 성과는 대단했다.
북분 주인공이 누워있던 곳에 마디마디에 달린 투명한 ‘비취 굽은옥’과 달개가 영롱한 출(出)자형 금관이 놓여 있었다.
희대의 발굴
황남대총 발굴은 경주관광개발계획에 따라 1973~75년 사이 이뤄졌다. 황남대총 남북분 축조에 소요된 흙과 돌은 11만t이 넘었고, 5t 트럭 분량으로 2만2500대 분량에 달했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가슴 쪽은 금판띠를 군데군데 배치한 유리구슬로 장식된 목·가슴걸이(경흉식)로 덮여있었다. 또 금제 허리띠 장식 및 띠드리개, 양 손목에 각 5점씩 찬 금팔찌, 열 손가락에 모두 끼웠던 금반지,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금제 굵은고리귀고리 등….
오죽하면 당시 발굴자(조사보조원)가 “황남대총 북분, 그곳은 누런 황금밭이었다”(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 회고했을까. 처음보는 유물이 많았다. 왼손목 끼워진 팔찌를 보자. 넓은 금판에 금 알갱이를 붙여 기하하적 무늬를 만들고 옥을 박아넣은 팔찌였다.
이 팔찌는 훗날 흑해 연안에서 들어온 서역계 유물로 밝혀졌다.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한 말갖춤새(마구)도 발굴자의 눈을 현혹시켰다.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금관을 포함해서 모두 3만5675점에 달했다.
명품 진열장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금관 등 황금유물을 포함해서 모두 3만5000여 점이 출토되었다.|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왕의 무덤’ 속 여성의 향기?
이와 같은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 마립간 시대의 산물로 알려져 있다.
마립간은 내물(356~402)·실성(402~417)·눌지(417~458)·자비(458~479)·소지(479~500)·지증(500~514) 등 6명을 가리킨다.
지증왕 연간(503) 중국식 칭호인 왕(王)으로 바뀌었으니 마립간 시대는 356~503년 사이를 의미한다.
온갖 황금 제품으로 치장한 황남대총 북분의 주인공은 ‘마립간’ 6명 중 한사람으로 해석됐다.
금관의 현현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투명한 ‘비취 굽은옥’과 달개가 영롱한 출(出)자형 금관이 놓여 있었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그런데 발굴 과정에서 수상쩍은 유물이 보였다. 기하학 무늬를 새긴 채화 가락바퀴(실을 뽑는 도구)가 여럿 확인됐다. 또 무덤 주인공이 착장한 귀고리와 장식 드리개는 모두 굵은고리귀고리였다.
고고학에서는 보통 ‘굵은고리 귀고리와 작은 칼(은장도), 가락바퀴’ 등은 여성, ‘가는고리 귀고리’와 ‘둥근고리큰칼’ 등은 남성의 지표유물로 해석한다.
무덤 주인공의 성별을 결정짓는 유물이 더 확인됐다.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씨가 새겨진 은제 허리띠 꾸미개가 보인 것이다.
황남대총 북분의 주인공은 ‘금관 쓴 여성’일 가능성이 짙어졌다. 그러나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7세기 전반(632~647)에 등장했다. 그럼 이 분은 대체 누구인가.
여성의 향기
금관이 출토됨에 따라 마립간(임금)의 무덤으로 추정되었던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여성의 지표 유물인 가락바퀴가 여러점 나왔다. 또 주인공은 여성임을 암시하는 굵은고리 귀고리를 달고 있었다.|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금관은 어디에?
관심의 초점은 1974년 8월부터 본격 발굴이 시작된 남분으로 옮겨졌다. 우선 남분이 북분보다 먼저 조성한 것으로 파악됐다. 발굴단의 기대는 컸다.
여성의 무덤(북분)에서 금관이 확인되었다면 남성, 그것도 임금의 무덤이 확실한 남분에서는 얼마나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올 것인가. ‘역시나’였다.
남분에서도 북분에 필적할만한 2만여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웃옷을 벗은채 춤을 추는 여성 흙인형과, 영롱한 빛깔의 비단벌레 날개 장식 말갖춤새, 여러 점(북분보다 많은)의 로만그라스 유리잔, 아가리가 봉황 머리 모양이면서 손잡이에 금실이 감긴 봉수형 병 등이 나왔다.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3세기 바둑 기성인 ‘마랑(馬朗)’ 이름을 새긴 칠기 그릇도 특이했다. 남분의 주인공이 ‘중국 바둑 영웅’의 이름을 새긴 바둑통을 애장했다는 얘기다. 남분의 주인공 역시 온갖 황금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남성의 상징인 ‘가는고리 귀고리’를 달고, 둥근고리큰칼도 차고 있었다.
‘부인대’ 허리띠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부인대’ 명 허리띠 장식. 무덤의 주인공이 여성임을 알리는 결정적인 증거로 여겨진다.|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60대 남성과 15세 여성
목관 안에서 출토된 인골의 아래턱 뼈 등을 분석해보니 주인공은 60대 전후의 남성으로 추정됐다.
목관 밖 석단에서 보인 인골의 주인공은 15~20세 가량의 여성으로 분석됐다. 이 여성 외에도 무덤 안에서는 상당량의 귀고리가 보였다.
한 연구자는 60대 주인공과 함께 순장된 이가 10명에 이를 것이라 분석했다.(북분에서도 10명 정도의 순장자가 보였다)
왕의 장식품
황남대총 남분에서도 2만여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6세기 왕(마립간)의 위상에 걸맞은 유물이었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이는 “(502년 순장이 폐지되기) 전에는 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 순장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는 기록과 부합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모두가 기대했던 금관이 보이지 않고, 금동관이 노출되었다.
어찌된걸까.
남분의 금동관 남성은 북분의 금관 여성에 비해 위계가 낮은 임금(혹은 왕족)이었단 말인가. 남성 임금보다 신분이 높은 여성이라면 대체 누구였을까. 다른 해석도 있다.
북분보다 이른 시기에 조성된 남분은 금관 제작 기술이 갖춰지기 직전에 조성된 고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심쩍은 추정이다. 황남대총 남분보다 앞선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교동 금관’이 있으니까.
이색 유물
남분에서는 웃옷을 벗은채 춤을 추는 여인 흙인형이 이채롭다. 또 서역에서 수입된 것이 분명한 로만그라스와 금실을 손잡이에 둘둘 감은 봉황머리 형태의 병(봉수형 병)도 출토됐다.|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마립간 시대의 신라
여기서 그 시대의 신라를 반추해보자.
356년 내물왕이 마립간 시대를 열었을 때 대외 정세는 엄청 불안했다.
영산강 유역을 지배한 백제가 가야와 왜를 앞세워 신라를 위협했다. 신라는 고구려에 기댔다. 399년 백제·왜 연합군을 격파한 고구려(광개토대왕)는 신라의 요청에 따라 군사 5만을 보내 가야와 왜를 크게 물리쳤다.(400)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내물왕이 죽자(402)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가 10년만에 돌아온 실성이 마립간이 되었다. 당시 서거한 내물왕에게는 아들(눌지·미사흔·복호·미상의 아들) 등 4명이 있었지만 나이가 어렸다.
60대 남성과 15세 여성
무덤 주인공과 순장자의 인골을 분석해보니 60세 가량의 암성(주인공)과 15~20세 가량의 여성(순장자)으로 밝혀졌다.|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때문에 내물왕의 사촌이면서 동서인 실성왕이 왕위를 계승한 것이다. 정변이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내물왕은 부모와 부인이 모두 김씨였지만 실성왕의 모계는 석씨였다. 계통이 달랐던 것이다. 즉위한 실성왕은 내물왕의 두 아들인 미사흔과 복호를 왜와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 예전(392년)에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내물왕을 원망한 것이다. 실성왕의 뒤끝은 대단했다.
실성왕은 인질 시절 친분을 쌓었단 고구려인을 몰래 불러 내물왕의 맏아들(눌지)을 죽이려 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눌지는 도리어 실성왕을 죽이고 마립간이 되었다. 정변을 정변으로 되갚은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즉위한 눌지왕은 아들에게 왕위가 이어지도록 제도를 다져 놓았다.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433) 그의 뒤를 이은 자비왕은 신라에 주둔 중이던 고구려군을 완전히 몰아냈다.(464)
소지왕은 왕경에 시장을 열어 물자가 유통되도록 했다.(490) 지증왕은 재위 4년 만(503)에 나라 이름을 ‘신라’로, 마립간의 호칭도 중국식 ‘왕’으로 확정했다.
금관 대신 금동관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기대했던 금관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금동관 만이 모습을 드러냈다.|국립경주문화유산 연구소 제공
■유력했던 ‘눌지왕’설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은 내물-실성-눌지-자비-소지-지증왕 중 한 사람일 가능성이 짙다.
연구자들은 경주 대형고분의 배치를 황남대총을 중심으로 ‘남-북’과 ‘동-서’ 방향으로 구분한다.
대체로 왕성(월성)과 가까운 119호-106호-황남대총-125호-130호-134호의 ‘남-북’ 축과, 39호-90호-황남대총-천마총의 ‘동-서’ 축을 상정한다. 중심고분인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이 눌지왕이냐, 내물왕이냐에 따라 배치도의 해석이 완전히 달라진다.
술렁거린 학계
북분에서 금관이, 남분에서 금동관이 나오자 학계가 술렁댔다. 금동관 남성이 금관 여성에 비해 위계가 낮은 임금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지금까지는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눌지왕(458년 서거)’설이 유력했다.
‘눌지왕’설에 따르면 대형고분의 출발점인 119호분을 마립간 시대를 연 내물왕릉일 가능성을 개진한다. 또 119호(내물왕)-황남대총(눌지왕)으로 연결되는 ‘남-북’ 축선은 북쪽의 초대형 고분인 125호분(자비왕)-130호(소지왕)-134호(지증왕)로 이어진다. ‘황남대총 남분=눌지왕’설에 따르면 ‘동-서 축선’(39호-90호-황남대총-천마총)은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눌지 마립간의 형제들인 미사흔·복호 등이 ‘동-서’ 축선에 묻혔을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북 축선은 내물왕-눌지왕-자비왕-소지왕-지증왕 등 왕위를 이은 내물왕계가 차례로 묻혔고, 황남대총을 중심으로 한 동-서축(39호·90호·천마총)은 눌지왕(황남대총 남분)의 형제(미사흔·복호) 등이 묻혔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복수의 세월
내물왕의 사촌이자 동서인 실성은 내물왕이 죽자(402년) 내물왕의 아들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내물왕의 어머니는 김씨, 실성왕의 어머니는 석씨였다. 계통이 달랐던 내물왕계와 실성왕 사이에 정변이 이어졌다. 결국 내물왕의 맏아들인 눌지아 실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새롭게 대두된 ‘내물왕’설
1990년 이후 ‘황남대총 남분=내물왕릉’이라는 설이 새롭게 등장했다. 이 경우 황남대총을 중심으로 ‘동-서’와 ‘남-북’ 축의 왕릉배치가 달라진다. 즉 대형고분의 조성순서가 동→서 방향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39호와 90호에 내물왕의 조부(39호)와 부(父·90호)가 묻혔을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황남대총을 중심으로 북쪽에 집중된 초대형 고분의 배치에도 차이가 생긴다.
눌지왕릉이 가장 큰 단독분인 ‘125호분(봉황대)’이 되고, ‘130호분=자비왕’, ‘134호분=소지왕’ 순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계산이 있었던 왕릉조성
대릉원의 ‘왕의 무덤’들은 그 주인공을 알 수 없다. 다만 연구자들은 대체로 왕성(월성)과 가까운 119호-106호-황남대총-125호-130호-134호의 ‘남-북’ 축과, 39호-90호-황남대총-천마총의 ‘동-서’ 축을 상정한다. 신라인들이 이 남-북, 동-서 축으로 대형고분을 조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황남대총을 기준으로 남쪽에 있는 106호(전 미추왕릉)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지증왕의 조부(내물왕의 아들) 무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연구자가 있다. 즉 내물왕-눌지왕-자비왕으로 이어진 왕통은 소지왕을 끝으로 다른 내물왕자의 후손인 지증왕으로 넘어간다.
그렇다면 왕위에 오른 지증왕은 오래전에 조성되었던 할아버지의 무덤을 크고, 보기좋게 고쳐 쌓았을 것이다. 그 고분이 바로 미추왕릉으로 알려진 106호 고분이라는 것이다.
내물왕설에 따르면 지증왕의 무덤은 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6세기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천마총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지증왕이 내물왕의 증손자(<삼국사기>)로서 ‘내물왕계의 적통’임을 강조한 배치일 수 있다는 것이다.
‘황남대총 남분=눌지왕’?
‘황남대총 남분=눌지왕릉’이라면 내물왕릉은 월성과 가장 가까운 119호분일 가능성이 크고, 남북 축선을 따라 자비왕(125호)-소지왕(130호)-지증왕(134호)로 이어졌을 것이다. 또 황남대총과 동서 축선에 놓은 39호분과 90호분, 천마총은 눌지왕의 형제들 무덤일 것이다.
■실성왕설? 미사흔설?
그렇다면 실성왕의 무덤은 어디일까.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을 실성왕으로 보는 연구자는 있지만 그리 주목받지 못한다.
417년 정변을 일으켜 실성왕을 죽이고 즉위한 눌지왕이 뭐가 예뻐서 선왕(실성왕)의 무덤을 호화찬란하게 꾸며주었다는 말인가. 그래서 황남대총과 멀리 떨어진 119호분이나 143호분을 실성왕릉으로 보는 연구자들이 있다.
물론 연구자 가운데는 황남대총이 왕릉이 아니라고 보는 이도 있다. 최근 황남대총 남분을 433년에 죽은 미사흔(눌지왕의 동생)으로 보는 견해가 등장했다.
미사흔의 부인은 일본에 와서 그를 구출한 제상의 딸이다. 그후 미사흔의 딸은 차기왕인 자비왕의 부인이 된다. 미사흔은 왕족 가계에 있어서 최고의 혈통이자, 눌지왕이 가장 아꼈던 동생이다.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 자격이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황남대총 남분=내물왕?’
황남대총이 내물왕릉이라면 동 서 축인 39호와 90호에 내물왕의 조부(39호)와 부(父·90호)가 묻혔을 가능성이 있다. 또 눌지왕릉이 가장 큰 단독분인 ‘125호분(봉황대)’이 되고, ‘130호분=자비왕’, ‘134호분=소지왕’ 순이 이어진다. 천마총은 지증왕릉이, 106호분은 지증왕의 조부일 가능성이 있다.
■여성 상위 시대?
그럼 여성으로 짐작되는 황남대총 북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아무래도 표주박 형태의 고분은 부부묘일 가능성이 크다.
왕-왕비라면 내물왕-보반부인, 실성왕-아류부인, 눌지왕-아로부인 등이 그 후보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주목되는 견해가 있다.
초기 마립간 시기의 임금인 내물왕-실성왕-눌지왕이 부계로 이어지지 않고 왕비를 기준으로 관계가 설정된다는 것이다.
정변의 패배자 실성왕은?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을 실성왕으로 보는 연구도 있지만 그리 주목받지 못한다. 황남대총과 멀리 떨어진 119호분이나 143호분을 실성왕릉으로 보는 연구자들이 있다.
즉 최초의 김씨 임금인 미추왕(262~283)과 광명부인의 예를 보자. 미추왕은 광명부인(조분왕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즉위할 수 있었다.
또 미추왕-광명부인의 딸인 보반부인(내례희부인·내물왕비)과 아류부인(실성왕비)은 자매 사이이며, 그들의 남편인 내물왕과 실성왕이 즉위했다. 또 아류부인(실성왕비)의 딸인 아로(눌지왕비)-치술부인(박제상의 부인)도 자매 사이이다.
그런데 눌지왕이 모계가 아니라 장자의 왕위계승을 추진하면서 양상이 다소 바뀐다. 눌지왕 이후 왕위가 아들인 자비왕-소지왕으로 이어진다.
소지왕의 뒤를 이은 지증왕의 어머니(조생부인)는 눌지왕비인 아로부인의 딸이다. 정리하자면 자비왕-소지왕은 부자계승을, 내물왕·실성왕·눌지왕·지증왕은 왕비나 왕모의 계보와 관련이 있다.
전지적 부인시점
마립간 초기 임금인 내물왕-실성왕-눌지왕은 부계로 이어지지 않고 왕비를 기준으로 관계가 설정된다. 그런데 눌지왕부터 자비왕-소지왕까지는 장자의 왕위계승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지증왕 때 다시 잠깐 모계로 바뀐다. 지증왕의 어머니(조생부인)는 눌지왕비인 아로부인의 딸이다.
■황남대총 북분의 주인공은 여사제?
또 신라 왕비의 이름에 ‘광명(빛)’, ‘새(鳥)’, ‘ar계(아로 등)’가 들어있는게 심상찮다.
아달라왕비인 내례부인, 지마왕비인 애례부인, 조분왕비인 아이금부인, 미추왕비인 광명부인, 내물왕비인 내례희부인(보반부인), 실성왕비인 아류부인, 지증왕의 어머니인 조생부인 등이 그들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기원전 53년 용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여자아이, 즉 알영이 박혁거세의 왕비가 되었다”고 했다. 또 <삼국사기> ‘잡지·제사’조는 “남해왕이 왕비(혹은 동생)인 아로(阿老·혹은 아루)에게 제사의 주관을 맡겼다”고 기록했다.
또 박제상(369~419)의 부인(눌지왕-아로부인의 딸)이 치술령의 신모로서 제사의 대상이 되었다는 <삼국유사> 기록도 있다. 그렇다면 당대 신라에서 왕비와 왕실 여성은 나라 제사를 주관하거나 신앙의 대상이 된 여사제의 역할을 담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금관이 출토된 황남대총 북분이 금동관이 나온 남분보다 위계가 높았을 수도 있다.
여사제 왕비
<삼국사기> ‘제사지는 “제2대 남해왕(4~24)이 왕비(혹은 동생)인 아로(阿老·혹은 아루)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기록했다.
표형분의 주인공을 여사제(왕비)로 본 연구자는 황남대총 남·북분의 주인공을 눌지왕(남분)과 아로부인(북분)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이라면 ‘내물왕+보반부인’이 황남대총 남북분의 주인공이라 풀이할 수도 있겠다.
그럼 남아있는 다른 표형분의 주인공도 ‘실성왕+아류부인’이나 ‘박제상+치술부인(눌지-아로부인의 딸)’, ‘습보+조생부인’(지증왕의 조부모) 등으로 비정할 수도 있다.
단독분으로 조성된 125호(봉황대)와 130호(서봉황대)의 주인공은 부자 계승에 원칙에 따라 왕위에 오른 자비왕(125호)과 소지왕(130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인공은 여성?
표주박 형태 쌍무덤은 왕-왕비 무덤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왕비가 국가제사를 지내는 여사제’의 직분을 맡았다면 위계가 왕보다 오히려 높을 수도 있다. |김재홍의 논문을 바탕으로 재구성
■5t트럭 2만5000대 분량 흙
이 대목에서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황남대총 남·북분에는 10만8000t(남분 6만3822t+북분 4만4271t) 가량의 흙이 쌓여있었다. 돌무지의 규모는 4377t(남분 2340t+북분2037t)에 달한다.
5t트럭 기준으로 흙은 2만1600대, 돌은 875대가 실어날라야 할 천문학적인 분량이다.
1500~1600년 전 이런 말도 안되는 흙과 돌을 나르느라 생고생 했을 신라백성들의 고초를 떠올려본다. 당대 경주 주민들 뿐인가.
백제 무령왕릉처럼 ‘내가 이 무덤의 주인공이오’하고 선언하는 명문을 남겼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엄청난 규모의 무덤에, 온갖 황금유물을 모두 쏟아넣고는 아니 그래 무덤의 주인공을 알리는 이름 석자 하나 남기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지 않았으니 1500~1600년이 지난 후학들이 무덤 주인공을 두고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그저 경주 대릉원의 소문난 포토존으로만 알고 있던 황남대총엔 이렇듯 무궁무진하고 복잡한 스토리가 묻혀있다.(이 기사를 위해 정인태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학예연구사,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 이희준 전 경북대 교수, 김용성 전 한빛문화유산연구원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했고 오세윤 사진작가, 권종원 경주시청 영상담당이 사진 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황남대총 남분-발굴조사의 기록>(학술연구총서 182), 2024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원, <황남대총 북분-발굴조사의 기록>(학술연구총서 160), 2021
김용성, ‘황남대총 남분의 연대와 피장자 검토’, <한국상고사학보> 42호, 한국상고사학회, 2003
김재홍, ‘신라 마립간시기 왕위 계승과 적석목곽묘의 조성 원리’, <한국상고사학보> 117호, 한국상고사학회, 2022
이은석, ‘신라 도성의 성립과 전개’, 일본 센슈대(專修大) 박사논문,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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