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상주본의 가치가 1조원? 어림없는 소리다.’ 언젠가부터 2008년 경북 상주에서 확인된 <훈민정음 해례본>(이하 <상주본>)의 가치가 1조원이라는 수식어가 늘 붙어다닌다. 그러나 이 상주본을 직접 봤거나 깊게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고개를 내젓는다. 어떤 이는 “<상주본>이 과연 문화재적인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랍다”고까지 한다. 그렇다면 왜 ‘<상주본>=1조원’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왜 전문가들은 ‘문화유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보고 있는 것일까.
2008년 나타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총 66쪽 가운데 18쪽이 없어서 ‘불완전한 진본’이라 평가된다. 66쪽 중 4쪽이 없는 <간송본>과는 비교가 안된다는 것이다.|경향신문 자료사진
■출현하자 마자 소유권 분쟁
때는 바야흐로 <간송본>이 출현한지(1940년) 68년 만인 2008년 7월 30일 엄청난 소식이 전해진다. <간송본>과 동일한 판본으로 추정되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경북 상주에 사는 배익기씨가 집 수리 도중 발견한 것으로 전해졌기에 이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상주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파란만장한 역정을 겪었다. 상주본을 처음 공개한 배씨와 ‘내가 원 소유주다’라고 주장한 조용훈씨(2012년 작고)의 소유권 분쟁이 시작됐다. 결국 대법원은 조씨의 소유권을 최종 인정했다. 조씨는 상주본을 국가(문화재청)에 기증했다. 문화재청은 2016년 승계 집행문을 받았다. 따라서 훈민정음 해례본(상주분)의 적법한 소유권은 문화재청으로 귀속됐다. 배씨는 이 상주본을 헌책방에서 훔친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을 살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4년 5월 “훔쳤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절도죄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배익기씨는 민사에서는 졌지만, 형사에서는 이긴 셈이 됐다. 배씨는 이후 이 상주본을 꽁꽁 숨겨놓은 채 “문화재청이 재산가치 추정액(1조원)의 10%인 1000억원만 주면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버텨왔다.
2008년 발견된 <상주본>은 낙장이 많아 <간송본>보다는 유물로서의 가치가 현격히 떨어진다. 다만 <상주본>에는 원소장자가 기록한 메모가 남아있다. 누군가 이 해례본의 제자해(글자를 만든 원리와 용법)를 요약하면서 자신의 견해 등을 기록한 주석이다. 사진은 칠음 오성 배치에 대한 메모이다.|이상규 교수의 ‘잔엽 상주본 훈민정음 분석’, <한글> 298, 한글학회, 2012년에서
■<상주본>도 나름 가치가 있지만…
왜 1조원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을까. 2011년 9월 재판과정에서 검찰이 <상주본>의 감정가액을 의뢰하자 문화재위원 등 서지학자 4명이 모여 ‘금전적 가치가 부적절한 무가지보지만 굳이 따진다면 1조원 이상’으로 판단한 게 빌미가 됐다.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의 경제적 가치가 8000억원 정도라는 자료가 있으니 그보다 가치가 더 큰 해례본은 1조원 이상은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1조원 운운’은 상징적인 금액이고, 그보다는 ‘무가지보’라는데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게 문화재위원들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배익기씨가 거두절미하고 ‘1조원’을 고집해왔던 것이다. 문화유물을 두고 굳이 가격으로 매겨야 한다는 배금주의가 은연중 사람들의 뇌리에 박혔던 것이 문제였다.
<상주본>의 자모배열에 대한 필사기록. 이상규 교수는 “이 주석은 성운학자로서 대단한 식견을 가진 이의 기록이며 이 내용을 정밀하게 조사하면 원 소장자가 어떤 가문의 학자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상규 교수의 논문에서
물론 <상주본>의 가치도 필설로 다할 수 없다. 특히 <상주본>을 직접 보았거나 검토한 전문가들은 <상주본>에 원소장자가 행간 아래에 남긴 필사 묵서를 주목하고 있다. 누군가 이 해례본의 제자해(글자를 만든 원리와 용법)를 요약하면서 자신의 견해 등을 기록한 일종의 주석이다.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는 “이 주석은 성운학자로서 대단한 식견을 가진 이의 기록”이라면서 “이 내용을 정밀하게 조사하면 원 소장자가 어떤 가문의 학자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자료부장은 “소장자가 달아놓은 메모(주석)은 <상주본>의 학술적 가치를 높인다”고 평가했다. 또 유일본이었던 <간송본> 외에 <상주본>이 현현함으로써 두 해례본을 비교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는 점도 꼽을 수 있다. 이상규 교수는 “두 판본을 비교해보면 동일한 목판에서 쇄출한 동일한 원본”이라고 밝혔다. 그중 <간송본>은 개장(改裝)과 함께 원본의 아래 윗부분의 일부를 잘라낸 것으로 확인됐다. 그렇지만 <상주본>은 위 아래가 잘라지 않은 원래의 판본 크기를 유지하고 있다.
■<상주본>은 ‘불완전한 진본’
하지만 유물로서의 <상주본> 가치는 <간송본>과는 감히 견줄 수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물론 <간송본>에도 흠결이 남아있다. 총 66쪽(33장) 가운데 표지와 세종의 어제 서문 등 앞부분 4쪽(2장)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66쪽 중 62쪽이 건재하다. 하지만 <간송본>과 달리 <상주본>에는 떨어진 부분이 상당히 많다. 2008년 배익기씨의 공개 때 <상주본>을 실사한 임노직 부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상주본>의 경우 세종의 어제 서문·예의 8쪽(4장)과 해례 부분 8쪽(4장), 뒷부분의 정인지 서문 2쪽(1장)이 떨어져 나갔다”고 밝혔다. 총 66쪽 가운데 18쪽이 탈락되고 48쪽이 남은 불완전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또 공개 당시 국립국어원장으로서 하루늦게 안동으로 달려가 원본 일부와 편집 이전의 안동 MBC 촬영본을 검토했다는 이상규 교수는 “총 66쪽 가운데 약 3분의 1만 보인다”면서 “공개된 자료 중 가장 앞면의 경우도 3분의 1이상 부식되었다”고 밝혔다. <상주본>의 보존상태가 <간송본>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경북 영주 풍기 희방사에서 훈민정음을 찍어낸 판목 400여장이 한국전쟁 도중 소실되었음을 알려준 1952년 11월12일 경향신문 기사. 만약 제3의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다면 역시 경북 지역일 것으로 기대된다.
한마디로 상주본은 ‘불완전한 진본’이라는 것이다.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은 “무엇보다 ‘간송본’의 경우 3쪽 정도는 남아있는 세종대왕의 어제 서문 및 예의부분이 ‘상주본’에는 단 1쪽도 남아있지 않다”고 밝혔다.
정재영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상주본>은 발견되었을 때 낙장이 많았던 것은 물론이고, 이후에 불에 그을린 흔적이 역력하다”면서 “불에 탄 것인지 고의로 태운 것인지 확인해봐야 한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불에 탄 흔적으로 보아 고의적인 훼손이 의심스럽다”면서 “<상주본>은 문화유물로서의 가치가 현격하게 떨어진다고 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상주본>은 <간송본>과 겨룰 수 있는 깜냥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상주본>이 <간송본>에 비해 보존상태가 좋고, 후대에 표제와 주석이 새롭게 더해졌으니 학술가치는 대단하다’는 수식어가 상식처럼 퍼졌다. 웬일일까. 굳이 다른 이의 예를 들 필요도 없다. 필자의 여러 기사들에도 이런 수식어가 복사한 것처럼 반복해서 붙어있다. 제대로 ‘팩트체크’도 하지 않고 기존의 수식어를 전제로 기사를 쓴 것이다. 낯뜨거운 일이다.
■죄인으로 전락한 <상주본> 소장자
<상주본>의 가치가 결코 <간송본>을 넘어설 수 없는 핵심요소는 또 있다. 바로 국보 제70호(1962년 지정)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1997년)인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를 알아보고 아끼고 보존하고 연구한 사람들의 숨결이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간송본>은 이미 80여 년 전에 한낱 벽지로 쓰였을 지도 모른다. 그에 비하면 <상주본>은 어떤가. 물론 <상주본>의 가치를 알아보고 공개한 배익기씨의 공로를 무시할 수는 없다. 만약 배씨가 아니었다면 <상주본> 역시 불쏘시개가 되어 사라져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지금 배익기씨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문화유산을 인질로 개인의 탐욕을 채우는 죄인으로 낙인 찍히고 있다. 뒤늦게나마 이용준이나 김태준, 전형필 등의 뒤를 따르는 인물로 평가가 뒤바뀔 지는 배익기씨의 결단에 달려있다.
<훈민정음 상주본>은 2015년 3월 화재로 일부 훼손됐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상주본>의 가치가 형편없이 떨어졌다고 평가하는 전문가들이 있다.|연합뉴스
■안동에서 또다른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올까
사족을 달자면 <간송본>과 <상주본> 등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곳이 다름아닌 경북 안동 지역이라는 점이 심상치 않다. <상주본>도 원래는 안동의 사찰인 광흥사 나한상 복장유물이었는데, 1999년 절도범이 훔쳐 조용훈씨(작고)에게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광흥사는 조선 전기 불경 등을 간행했던 곳으로 알려져있다.
2013년에도 광흥사 지장전 인왕상과 시왕상 복장에서 <월인석보> 권7, 권8, 권21(2종) 등 4책과 <선종영가집 언해> 등이 확인되기도 했다. 이들 자료에는 훈민정음 반포 직후의 글자와 말이 담겨 있어 한글 변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됐다.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자료부장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찍은 목판은 안동 광흥사에 보관돼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절에 불이 나면서 사라졌다”고 전했다. 광흥사 뿐이 아니다. 희방사(영주 풍기) 등에서도 <훈민정음>를 찍어낸 원판목 400매가 불에 탔다는 기록(1952년 11월12일 경향신문)이 보일만큼 영남은 훈민정음과 관계가 깊은 지역이다. 정재영 교수는 “만약 제3의 훈민정음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또다시 안동이나 그 인근지역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어제 서문과 예의까지 완벽하게 남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출현을 기대하면서 영국의 역사가 존 맨의 훈민정음 찬양을 인용해본다.
“한글은 단순하고 효율적이며 일파벳의 대표적인 전형이고, 알파벳이 발달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알파벳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김슬옹,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역사와 평가’. <한말연구> 제37호, 한말연구학회, 2015
이상규, ‘잔엽 상주본 훈민정음 분석’, <한글> 298, 한글학회, 2012
최기호,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와 애국지사 외솔 최현배’, <나라사랑> 126, 외솔회, 2017
박종덕,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과정 연구-학계에서 바라본 발견에 대한 반론의 입장에서’, <한국어회>, 31, 한국어학회, 2006
박영진,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 경위에 대한 재고’, <한글새소식> 395, 한글학회, 2005
김주원, ‘훈민정음 해례본의 뒷면 글 내용과 그에 관련된 몇 문제’. <국어학> 45권, 국어학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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