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 ‘쪽샘’이라는 지명이 있다. 황오동·황남동·인왕동 일대의 약 38만㎡ 면적인데, 이곳에 쪽빛 하늘이 그대로 비치는 샘이 있다고 해서 ‘쪽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신라의 천년고도 답게 경주는 그 어느 곳을 파도 유물밭인데, 바로 이 쪽샘 지구가 그렇다. 4~6세기에 살았던 신라 귀족들의 무덤이 800여기가 집중된 곳으로 유명하다. 1960년대부터 주택과 버스터미널이 들어서면서 고분 훼손이 심해지자 2002년부터 민가와 사유지를 매입하고 2007년부터 본격발굴하기 시작했다. 발굴은 20년 예정으로 진행되고 있다.

2009년 경주 쪽샘지구 C 10호 목곽묘에서 확인된 말갑옷이 복원을 끝내고 첫 공개됐다. 복원결과 말갑옷은 736매의 철편으로 중무장한 신라 중장기병의 것임이 드러났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이곳을 귀족무덤으로 규정하는 이유가 있다. 지름이 100m가 넘는 황남대총을 비롯한 왕릉급보다는 작기 때문에 귀족무덤이라 하는 것이다. 따지고보면 경주에 임금만 산 것은 아니지 않는가. 만날 왕릉만 발굴하기 보다는 귀족무덤을 발굴해서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복원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736쪽의 철편으로 무장한 말

이 쪽샘지구를 발굴해온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최근 두가지 발굴 및 복원 성과를 공개했다. 그 중 하나는 본격 발굴 2년 되던 2009년 쪽샘지구 C10호, 즉 5세기 전반 무덤인 목곽묘에서 확인된 말갑옷의 복원결과였다. 

이 말갑옷은 발굴당시 무덤 주인공의 널방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정연하게 깔려 있었다. 말갑옷의 목·가슴가리개 한쪽에는 사람 갑옷 중 투구와 목가리개가 놓여있었다. 또 말 갑옷의 몸통 가리개 위에는 사람 갑옷 중 대퇴부(허벅지) 부분이 포개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토기들이 부장돼 있었다. 피장자의 널방 옆에 달린 부곽에서는 말머리 가리개(마주·馬胄)와 안장, 재갈 등이 출토됐다. 말갑옷 뿐 아니라 무덤 피장자로 추정되는 장수의 갑옷이 함께 확인된 것은 획기적인 발굴성과라 할 수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삼국시대 개마무사(鎧馬武士·철갑옷으로 무장한 말을 탄 무사)의 실체를 보여준 고고학 자료였기 때문이다.

신라 행렬도’ 토기는 쪽샘 44호 무덤의 호석 북편에서 파손된채 출토됐다. 토기의 목과 어깨, 몸통 부분에 다양한 문양을 새겨넣었다. 즉 위로부터 1단과 2단, 4단에는 나무 목(木)자 혹은 사람 모양(1·2단)과 물결 모양(4단)을 반복했다. 3단에는 다양한 인물(기마·무용·수렵)과 동물(사슴·멧돼지·말·개) 등을 연속적으로 표현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말갑옷(총길이 약 290㎝×너비 약 90㎝ 가량)을 복원한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공개된 말갑옷은 대단했다. 갑옷은 철편을 무수하게 조립해서 만들었는데, 목·가슴 가리개 348매, 몸통 가리개 256매, 엉덩이 가리개 132매 등으로 확인됐다. 계산해보니 무려 736매의 철편으로 제작된 말갑옷이었다. 복원을 끝낸 연구소가 공개한 것은 말갑옷(36㎏)과 사람 갑옷(투구·목가리개·허벅지 부분) 등이다. 말갑옷의 목·가슴가리개 철편은 길이 6.8~7.2㎝, 너비 5~6.2㎝, 두께 약 0.2㎝이고, 몸통가리개 철편은 길이 12.2㎝, 너비 7.6㎝, 두께 0.2㎝이며, 엉덩이가리개 철편은 길이 8.3~10.2㎝, 너비 4.6~6.5㎝, 두께 약 0.2㎝ 정도다.

쪽샘 44호 고분. 고분의 호석 바깥에 빙 둘러 큰 항아리 9점을 꽂아넣었다. 그 주변에는 제사행위 후에 제기들을 깨뜨려 넣은 흔적이 확인됐다. 그중 ‘신라행렬도’ 토기가 출토됐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고구려벽화를 빼닮은 신라행렬도

말갑옷 외에 이번에 쪽샘에서 확인된 또하나의 획기적인 유물이 있으니 바로 토기에 새겨진 ‘신라행렬도’이다. 

‘신라행렬도’ 토기는 5세기대 신라 귀족 무덤으로 알려진 경주 쪽샘 44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에서 110여점의 다른 제사용 토기들과 함께 출토됐다. 전문가들은 고구려 고분벽화를 빼닮았지만 신라 특유의 문화도 빼놓지않은 ‘신라 행렬도’라 해석했다.

행렬도를 보면 말을 탄 인물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춤추는 듯한 모습이고, 활쏘는 사람들이 암수 사슴과 멧돼지, 호랑이, 개 등을 사냥하고 있으며, 주인공인 듯한 인물이 개(犬)와 함께 행렬하고 있다. 안악 3호분이나 무용총 등 고구려 고분벽화의 행렬도와 흡사하다. 하지만 신라 특유의 선각문 기하학 문양들도 보인다. 

행렬이라는 큰 주제 아래 기마·무용·수렵의 내용을 파노라마처럼 펼친 복합 문양은 신라 회화에서 처음 확인된 사례이다. 무덤제사와 관련된 유물로 추정된다. 

행렬도’ 토기 중 기마행렬. 말을 탄 인물과 말들이 행렬하는 장면이다. 상단에 말 탄 인물, 하단에 말 2마리로 구성되어 있다. 말의 갈기를 의도적으로 묶어 뿔처럼 묘사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왜냐. 근거가 있다. 제44호 고분의 호석 외곽 자갈층에서 큰 항아리(大壺) 9점이 일정 간격으로 고분을 빙 둘러싼 형태로 확인됐다. 이 항아리들 주변에서 ‘신라행렬도’ 토기와 ‘말모양 그릇받침’ 등을 포함하여 굽다리 접시, 뚜껑접시, 토제 악기 및 방울 등 주로 제사에 쓰이는 유물 110여점이 발견됐다. 큰 항아리를 제외한 나머지 제사 그릇들은 일부러 파손된 형태였다. 제의행위를 펼친 뒤 일부러 깨뜨려 묻어둔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고대 사회의 제사형식이다. 신라 고분 중에는 데이비드총(서봉총 남곽)과 금령총 등 중대형 돌무지덧널무덤에서만 확인된 바 있다. 이런 제사유물들을 시차를 두고 몇 회에 걸쳐 묻어두거나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호석 주변에서 제사 행위가 여러 번 이뤄졌다는 의미이다.


■3년상을 치렀던 고구려

궁금증이 든다. 신라인들은 무덤 주변에 왜 ‘행렬도’를 그린 토기를 왜 박아 놓았을까. 자문위원들은 토기에 새겨진 이른바 ‘행렬도’의 모티브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나왔다고 판단했다. 안악 3호분이나 무용총 등 고구려 고분벽화의 행렬도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행렬도’ 중 무용, 즉 춤추는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세부 그림. 고구려 벽화인 무용총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맨 위사람은 확인된 발부분 토기편으로 복원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사실 벽화는 고구려의 전형적인 문화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3세기말~5세기초 고구려 영토가 크게 확장하던 시기에 유행했다. 벽화는 생전의 풍요로운 삶이 사후에도 재현되기를 바라는 추모의 의미를 담았다. 망자를 사후세계로 고이 인도하는 추모행렬의 표현이기도 했다. 벽화에는 무덤주인이 남녀시종의 시중을 받으며 춤과 노래, 놀이를 즐기거나 대규모 행렬에 둘러싸여 외출하고, 산야를 질주하며 사냥하는 장면 등이 주로 등장한다.

어떤 경우엔 무덤 주인공의 생전 ‘리즈’ 시절을 그려보기도 하고 그리고 무덤 주인공이 사후에 원했던 삶도 그렸던 것이다. 중국측 자료인 <북사>나 <수서>에는 고구려의 장례문화가 기록돼있다.

“고구려는 사람이 죽으면 집안에 안치했다가 3년이 지난 뒤 길일을 택해 장사 지낸다. 부모와 남편의 상복은 3년 입고 형제는 3개월만 입는다. 그리고 처음과 끝에는 곡을 하고 울지만 장사 때는 북을 치고 춤을 추고 음악을 울리면서 죽은 자를 보낸다. 매장이 끝난 뒤 죽은 자의 의복, 노리개, 수레, 말 등은 모두 거두어 무덤 옆에 두는데 장례에 모였던 사람들이 다투어 가져간다. 고구려인들은 귀신을 섬긴다.”

수렵장면. 활을 든 인물들이 다양한 동물을 사냥하는 장면이다, 화면 하단의 기하문은 산(山) 또는 나무(木)를 묘사했을 가능성이 크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장례 때 북치고 춤추고 음악을 울리는 이유는

이중 ‘사람이 죽으면 집안에 안치했다가 3년 뒤에 장사지냈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시신을 일정기간 안치한다는 것은 사자의 영혼을 불러 다시 소생하기를 바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또 상주가 곡(哭)을 한다는 기록은 무엇인가. 이것은 사자의 육신에서 떨어져 주위를 떠돌고 있는 영혼을 다시 육신으로 불러들이는 일종의 초혼 의례일 수도 있다. 또하나 흥미로운 대목은 장례를 지낼 때 북치고 춤추고 음악 울리고 한다는 기록이다.

이 대목은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에 전형적으로 보인다. 무용총(舞踊塚)이라는 이름 자체가 ‘춤추는 그림이 그려진 무덤’이라는 뜻이지 않은가. 고구려 사람들은 장례의식에서 춤과 노래 등으로 현실세계와 사후세계를 이어준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또 무용총 그림을 보면 가무도 옆에 집과 음식을 나르는 3명의 여자가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죽은 자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의미를 지닌다는 해석도 있다. 또 ‘장천 1호분’을 보면 정자에 앉아 음식공양을 받으며 가무를 관람하는 묘주 부부가 있는데 이 또한 같은 맥락이다.

가장 크게 묘사된 인물. 행렬의 주인공으로 해석됐다. 주인공이 개(犬)와 함께 행렬하는 장면이 특이하다. 망자가 생전에 아꼈던 애견인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검은 개는 사당을 지키는 수묘의 동물로 표현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신라행렬도’ 토기에 등장한 강아지 

이번에 확인된 신라 행렬도도 바로 4세기 중반에 조성된 고구려 안악 3호분과, 5세기 전반에 제작된 고구려 무용총 등의 행렬·수렵도와 매우 흡사하다. 말을 탄 주인공(망자)을 따르는 시종과, 천국으로 떠나는 무덤 주인공을 막아서는 사악한 동물들을 무찌르고, 천국으로 떠나는 망자를 위해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의 모티브 등이 고구려 벽화를 닮았다는 것이다. 장송의례를 파노라마처럼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중 활을 쏘는 수렵도는 무덤 주인공의 천국행을 가로막는 사악한 동물을 무찌르는 의미라는 해석이 있다.

고구려 안악 3호분에 묘사된 행렬도. 주인공을 가장 크게 표현했고 말갈퀴를 묶어 뿔처럼 묘사했으며 수레를 탄 주인공과 호위군사, 군악대 등 이번에 확인된  ‘신라 행렬도’ 토기문양을 쏙 빼닮았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단적인 예로 고구려 벽화인 각저총을 보면 서역인인 듯한 장사와 씨름하는 모습이 나오고, 안악 3호분에서는 수박희(지금의 태견이나 권투 같은 무술)를 겨루는 그림이 등장한다, 이는 죽은 자가 천상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생사의 승패를 경쟁하는 통과의례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혹은 하늘문을 들어서는 무덤 주인공을 위해 마지막 걸림돌이 되는 악인을 무찌르는 행위라고도 풀이한다. 

기마행렬은 어떻게 해석되는가. 천상으로 떠나는 무덤 주인공을 배웅하는 그림일 가능성이 있다. 또 묘주의 혼을 태우고 하늘세계로 떠나는 이른바 혼을 실어나르는 혼차(魂車)라는 해석도 있다.

그런데 ‘신라행렬도’ 토기 그림의 맨 앞 기마인물 뒤에 있는 세사람을 두고 ‘춤추고 있는 사람들’이나 ‘주인공을 따르는 시종’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다르게 보는 이도 있다. 즉 세사람 중 두 사람은 바지를, 한 사람은 치마를 입었는데, 몸짓을 보면 꼭 두 손을 맞잡고 읍(揖)이나 곡(哭)을 하면서 망자를 추모하며 뒤따르는 유가족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한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고구려  무용총 벽화. 말을 탄 인물들이 사슴 호랑이 등 동물을 사냥하고 있다. 춤을 추는 인물들도 다수 표현되어 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또하나 주인공 앞에 그려진 개(犬) 그림이 인상적이다. 이 개는 죽은 이가 살아생전 아꼈던 반려견일까. 당연히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요즘도 반려견을 친가족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물론 다른 견해도 있다.

고구려 벽화에서 종종 개가 등장하는데 개를 영혼을 인도하는 동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또 ‘각저총’이나 ‘퉁거우(通溝) 12호분’의 경우 무덤길에 개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악령의 침입을 막는 문지기나 벽사의 의미일 수도 있다. 이밖에 도굴자에게 겁을 주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고구려와 신라는 형제관계였다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이 든다. 신라 토기의 그림이 고구려 벽화를 빼닮았다고 하는데 신라와 고구려가 대체 어떤 사이였을까. 사실 이 쪽샘 44호고분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4세기말~5세기 초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엄청 긴밀했다. 물론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고, 고구려가 형. 신라가 동생격인 형제국이었다. 

단적인 예로 392년(신라 내물마립간 37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 신라는 대서지의 아들 실성(훗날 실성왕 재위 402~417)을 인질로 보냈다, 인질로 보냈다는 것은 주종관계를 의미한다. 400년(광개토대왕 2년·내물마립간 45년) 신라가 왜구의 침입을 받자 고구려가 5만 보기병을 파견해서 왜병을 쫓아내기도 했다.(<광개토대왕비문>)

행렬도가 새겨진 ‘목긴항아리’(장경호). 목부분에서 몸통까지 총 4단으로 문양이 구성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고구려 장수왕(재위 413~491)이나 문자명왕(492~519)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충주 고구려비문을 보면 고구려는 신라 임금을 ‘동이 매금(東夷 寐錦)’, 즉 ‘동쪽 오랑캐(동이)의 임금(매금)’이라 지칭했다. 심지어 “영원토록 형제처럼 지내겠다(如兄如弟)”고 약속까지 했다. 고구려를 천자국으로, 신라를 동쪽 오랑캐인 제후국으로 칭한 것이다. 물론 주종관계는 5세기 중반부터 그 유명한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 때문에 틀어진다. 장수왕의 노골적인 남진정책에 위협을 느낀 신라(눌지마립간·재위 417~450)가 433~434년 사이 백제(비유왕·427~455)와 화친한다. 이후 고구려와 신라는 반목하게 된다. 

하지만 문화라는 것이 관계가 틀어졌다고 해서 금방 손바닥 뒤집듯 바뀌지는 않는다. 고구려 문화는 5세기 내내 신라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봐야 한다.

 

국보 제195호 토우 장경호(목긴 항아리). 표면의 문양이 이번에 출토된 ‘행렬도’ 토기 문양과 흡사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행렬도에 표현된 신라요소

물론 이 ‘신라행렬도’ 토기의 일부 문양에는 신라 특유의 요소도 표현됐다고 한다. 

그림 전반은 고구려 벽화의 풍속화 요소를 담고 있지만, 선각으로 표현된 나무 목(木)자와 산(山)자 같은 ‘다소 뜬금없는’ 기호문을 주목하라는 것이다. 

이런 기하문은 신석기, 즉 선사시대 유행한 문양이다. 이것이 고구려·백제와는 다른 문화라는 것이다.(전호태 울산대 교수)

“고구려·백제는 역사시대들어 ‘역사시대에 걸맞은 문화’를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쪽 분지에 자리잡아서 고립되어서 그런지 신라의 독특한 문화를 유지했거든요.”

즉 고구려·백제와 달리 신라문화는 왠지 ‘고인 느낌’을 주어서 전 시대, 즉 선사시대의 특징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에 확인된 ‘행렬도’ 기하문이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나무 목(木)자와 뫼 산(山)자의 기하학 문양은 그야말로 나무와 숲, 산의 모습을 단순화해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강현숙 동국대 교수)

어떤 이는 뭐 토기 그림을 굳이 고구려 벽화와 연결지을 것도 없이 신라의 장송의례를 표현한 그림으로 봐도 충분하다고 하는 이도 있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아닌게 아니라 토기 그림을 자세히 보면 기하학 문양이라는 목(木)자와 산(山)자 문양은 1단과 2단에 반복적으로 표현된 기하문의 형태와 같다. 이것은 신라 지역에서 출토되는 ‘목긴항아리’(장경호)를 비롯한 다양한 토기에서도 보이는 무늬와 흡사하다. 나무 木자 문양도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목긴항아리’ 등에서는 마치 사람이 만세를 부르는 문양으로도 등장한다. 또한 맨 밑바닥(4단)의 물결(∞) 문양의 경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토우장식 목긴항아리(국보 제195호) 표면에 새겨진 무늬와 똑같다. 

쪽샘 제44호고분에서 출토된 제사그릇들. 일부러 깨뜨려 넣은 흔적이 역력하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물론 이제 막 발굴한 유물이고, 또 아직 발굴도 덜 끝난 상태이기 때문에 섣부른 단정은 금물이다. 강현숙 교수는 “찾아낸 그림은 일부 토기편에 불과하므로 더 찾아내기를 바란다”고 주문했다.

이번 발굴에서는 말 문양의 토기(화로모양 그릇받침)도 찾았다. 역시 제44호 고분의 큰항아리 6호와 7호 사이에서 출토된 토기다. 다리부분만 확인됐지만 말 머리의 갈퀴, 다리 관절과 근육, 발굽까지 상세하게 표현됐다. 말의 목과 가슴, 몸통 전체에 격자문이 표현돼있다. 이 그림은 토기에 새겨진 말 문양 중 회화적인 표현이 가장 우수한 사례라 한다. 

‘행렬도’ 토기와 함께 출토된 ‘말문양 토기’.말 머리의 갈기, 다리 관절의 근육, 발굽 등이 상세하게 표현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새삼스럽게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1892~1992)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설파한 금언이 떠오른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이 말은 일반적으로는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와 미래를 제대로 살기 위해 역사를 배운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하지만 기자는 이 ‘신라행렬도’ 토기를 보고 있노라면 다른 생각이 든다. 1500년전 이 토기를 만들어 열심히 그림을 새긴 ‘과거의 신라인과 현재의 내가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는’ 듯한 느낌이다. 발굴단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향후 발굴에서 ‘신라행렬도’의 퍼즐을 맞출 단서들을 찾아내기를 바란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정호섭, ‘고구려 벽화고분에 나타난 신앙과 제의양상’, <고문화> 제74권 74호, 한국대학박물관협회, 2007

전호태, <고분벽화로 본 고구려 이야기>, 풀빛, 2010

강현숙, ‘고구려 고분 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2000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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