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확보하라.’
예나 지금이나 한강은 번영의 상징이 틀림없다. 고대사를 살펴봐도 그렇다. 한성백제(BC 18~AD 475년)의 굳건한 500년 도읍지가 바로 한강이었다. 고구려는 장수왕 때 백제의 한강을 빼앗으며(475~551년) 최절정기를 이뤘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자는 신라였다. 고구려·백제로부터 한강을 확보한 신라는 3국통일의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지금도 2,000년의 역사를 넉넉한 품으로 가득 담고 묵묵히 흐르는 한강. 한성백제의 수도인 풍납토성과 강 건너 아차산, 그리고 지금은 아파트 숲으로 변해버린 구의동은 5~6세기대 한강을 둘러싼 그 피비린내 나는 3국 전쟁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개발의 지도에서 외로이 남아있던 ‘쓰레기 섬’=그로부터 1,500년이 지난 1977년 7월. 야트막한(해발 53m) 구릉인 구의동 유적에 대한 현장설명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유적은 이른바 화양택지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벌어진 긴급구제발굴이었다.
3,000여 평에 달하는 이 구릉은 이미 절해고도였다. 주변은 개발계획에 따라 이미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도떼기시장 같았고 현장의 동남쪽은 쓰레기 소각장이 되어 악취가 진동했다. 그것은 귀찮으니 빨리 발굴을 끝내라는 아우성 같았다. 그래야 이 구릉의 흙을 사용, 택지개발에 활용하고 이 땅 또한 아파트 단지로 개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구릉은 예전부터 말 무덤, 혹은 장군총, 아니면 조선왕실의 태를 묻은 태봉(胎封)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구제발굴을 맡은 발굴단은 외형이 꼭 둥근 봉토형태를 띠고 있는 이 구릉이 백제고분일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으로 조사를 실시했던 것이다.
“이 유적은 빈전(殯殿)일 가능성이 커요. 중심에 관을 넣고 목조가옥을 세우고 출입시설까지 만든 임시 영혼의 생가. 수나라 역사책에도 고구려·백제가 삼년장(三年葬)을 했다는 기록이 있잖아요.”
현장설명회에 참여한 발굴단장인 삼불 김원룡의 ‘말씀’이었다.
1971년 무령왕릉 발굴결과 왕과 왕비가 죽고 3년상을 치렀음을 확인한 게 그 증거라는 것이었다. 이 구의동 유구 역시 가묘(假廟) 기능을 수행하다가 3년 뒤 이 가설건물을 전부 불사르고 그 위에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든 것이라는 노학자의 결론이었다. 말하자면 ‘한성백제고분’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원로학자들도 비슷한 결론이었다.
조사원들은 “군사시설일 가능성도 있다”는 의견을 개진했으나 하늘같은 어르신들의 견해에 뭐라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왜 혼란이 생겼을까. 애초부터 구릉의 정상에 있는 이 유적이 백제왕릉일 것이라는 선입관이 워낙 강했다. 주변에 백제고분군이 널려있으니 이곳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선입견, 또한 무덤 호석의 기능을 담당한 것으로 보이는 삼국시대 석축이 빙 둘러 싸였고, 분명한 봉토를 형성했으며 중심부에 2중의 광(壙)이 있다는 점 등….
출토유물이 철제무기류 외에 농기구, 방추차, 다양한 토기류 등 부장품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 점도 고분임을 입증하는 자료로 보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위치가 구릉 정상부라면 도리어 오히려 군사요새일 가능성이 크고, 외부 석축부도 호석(護石)의 기능 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방어시설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축석부의 돌을 굴려 적을 살상하기 위한….
이밖에도 생활공간(원형수혈) 내부에 조성된 온돌시설 또한 특이한 유구였다. 이는 몽촌토성에서도 같은 형식의 온돌이 확인된 바 있다. 결국 이 유적은 실제생활이 이뤄진 주거유적이라는 뜻. 동시에 1,353점의 철제무기류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군사요새의 성격도 가진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고고학계 어르신들의 의견을 정면으로 반박할 자신은 없었다. 발굴현장의 젊은 연구자들은 고민에 휩싸였다. 그들은 그해에 펴낸 약보고서의 초고를 삼불에게 보여주며 ‘군사유적일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삼불은 다행히 후학들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래, 잠정적으로는 백제고분이라고 하고 군사유적일 가능성도 있다는 식으로 약보고서를 작성하지….”
이렇게 화양지구 발굴조사는 이해 9월, 2개월 만에 끝났다. 구릉은 완전히 삭평되어 아파트 단지로 변해 버렸다. 유물들은 모두 발굴 주관처인 서울대 박물관으로 옮겨갔고 조사단도 뿔뿔이 흩어졌다.
◇“자네들의 연구가 그렇다면 맞을게다”=그런데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88년 겨울.
서울대 박물관에서 백제 몽촌토성 발굴 토기를 복원하던 최종택(당시 박물관 미술사)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 달 간의 복원과정에서 아주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인 ‘나팔입 항아리(廣口長頸四耳甕)’가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선생님, 분명 고구려 토기인 것 같습니다.”
1989년 2월, 발굴유물 전시회가 열리던 서울대박물관. 최종택(현 고려대 교수)과 박순발(당시 조교·현 충남대 교수)은 스승(삼불 김원룡)에게 운을 뗐다. 스승의 꾸지람을 듣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스승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렇게 연구했다면 자네들이 맞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순간이었다. 이 몽촌토성 토기의 재평가는 자칫 영원히 ‘백제 고분’으로 치부될 뻔했던 강 건너 ‘구의동 유적’이 고구려 남하정책의 전초기지임을 확인해주는 망외의 성과를 끌어냈다.
최종택은 이 몽촌토성의 ‘고구려 토기’와 77년 백제고분으로 추정됐던 구의동 출토 토기가 아주 비슷하다는 점을 간파했다.
“80년대 말부터 중국이 죽의 장막을 점차 걷으면서 우리 학자들이 동북 3성의 고구려 자료들을 보기 시작했잖아요. 예전에는 몽촌토성 같은 곳에서 고구려 토기가 나왔어도 그걸 ‘고구려계 토기’라고 해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백제인들이 만든 것이라고 치부했었어요. 고구려나 백제나 같은 조상이니까. 그런데 중국의 고구려 자료가 나오면서 확연해졌어요. ‘나팔입 항아리’는 5세기 대 고구려 토기의 표지모델(표지유물)입니다.”
최종택 등은 구의동에서 확인된 온돌이 중국 지안(集安)의 동대자 고구려 건물지에서 나온 온돌과 유사하다는 점도 알았다.
주변의 입지조건이나 유구의 규모·형태, 그리고 유물의 양상이 아차산, 용마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성 유적과 같다는 점에 더욱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는 구의동 유물을 다시 검토한 끝에 이 철기들은 고구려 사람들이 제작·사용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고구려의 최전방 초소, 고구려 제국완성의 상징=백제고분으로 평가되던 구의동 유적은 결국 고구려의 최전방 군사유적으로 확정된 것이다.
이제 고구려의 최전방 초소가 축조됐던 무렵의 고구려·백제의 패권다툼을 살펴보자.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6세기 무려 37회의 접전을 벌인다. 최초의 전쟁은 369년인 고구려 고국원왕 39년, 백제 근초고왕 24년대인 치양(백천)접전이었다.
전쟁의 초기에는 백제의 우세였다. 백제는 근초고왕이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죽이는 등 4세기 후반까지는 5승1패(10회 전투 중 4회는 승패 불명)의 압승지세를 보였다.
하지만 광개토대왕대에 들어 양상이 바뀐다. 중국 전연(前燕)과의 교전 때문에 백제와의 전쟁에 신경을 쓰지 못했던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즉위 392년)부터 백제를 압박한다. 392년부터 장수왕 때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킬 때(475년)까지 11번의 싸움에서 7승(4번은 승패불명)을 거둔다.
특히 “광개토대왕 6년(396년)에는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여 백제의 국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자 백제왕(아신왕)이 남녀 1,000인과 세포(細布) 1,000필을 바치고 무릎을 꿇어 영원히 노객(奴客)이 될 것을 다짐했다”(광개토대왕 비문)는 명문이 있을 정도.
전세가 완전히 고구려 쪽으로 기울었던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의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제왕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인질로 잡고 귀국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를 압박하던 북쪽의 후연과 남쪽의 백제 중 남쪽인 백제를 누란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AD 400년 무렵부터는 다시 북쪽으로 고개를 돌려 후연을 괴멸시키고 AD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벌함으로써 만주정복을 완성했다.
413년 부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장수왕은 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뒤 본격적인 남진정책을 폈다. 장수왕에게는 고국원왕을 죽인 백제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였다. 승려 도림을 첩자로 보내 백제의 국고와 민력을 소모시킨 뒤 끝내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다.
고구려 최전방 초소인 구의동 유적은 비록 아주 작은 규모지만 광개토대왕·장수왕대 고구려 최전성기의 국력을 상징하는 귀중한 유적이었다.
필자가 조사원으로 참여하던 77년 발굴현장의 기억이 새롭다. 해발고도가 53m에 불과한 야트막한 구릉이지만 주변이 낮아 주변지역을 훤히 조망할 수 있었다.
아차산성과 암사동 유적,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 잠실유적 등이 한눈에 보인다. 지금 생각해보면 구의동 유적이 천혜의 요새였던 것이다.
지금 중국의 역사왜곡 문제가 불거진 이 때, 구의동 유적이 70년대 개발의 미명아래 마구 파괴시킨 과거사가 쓰리도록 아프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돌이켜보면 70년대의 사회는 ‘유적의 보존’이라는 개념자체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었다. 그저 ‘잘살아보세’ 하는 구호에 모든 가치를 포기해야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나아졌는가.
◇구의동 유적은 이제 한양아파트=물론 사회적인 인식이 30여 년 전보다는 좋아졌지만 개발의 유혹은 여전히 우리의 이성을 흔들고 있다.
이 구의동 유적은 지금도 자치단체에서 무분별하게 전개되고 있는 개발정책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조상들의 숨결이 담긴 유적·유구는 일단 파괴되고 훼손되면 영원히 복구할 수 없다는 것. 역사 역시 한번 지워지면 영원히 잊혀지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강 남쪽에서 잠실대교 북단으로 건너가다 보면 오른쪽에 한양아파트가 보입니다. 그 한양아파트, 바로 그곳이 구의동 유적입니다.”
아파트 숲으로 변해 온데간데없는 유적의 흔적을 애써 찾아보려는 옛 발굴단원들의 공허한 말이다.
한 가지 여담.
지난 1995년 겨울 77년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왕년의 용사들이 모였다.
“평생 찜찜해 할 것 같았어요. 보고서라고 해봐야 20여 쪽에 불과한 약보고서 밖에 없었는데 제대로 된 종합보고서는 내야 할 것 같아서…. 그게 돌아가신 삼불 선생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구요. ‘바로잡을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던 스승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라도 수정된 보고서를 내야한다는 그런 생각들을 모았죠. 구의동이 백제고분이 아니라 고구려 초소라는 그런 수정된 결론….”
당시 조사원들인 윤대인, 윤덕향, 윤연중, 최은주, 그리고 고고학자 조유전과 최종택 등이 뜻을 모았다. 원래는 93년 타계한 삼불이 보고서 간행을 이끌어야 했다는 점에서 망설이기도 했다. 스승의 학설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행동이 아닌 가 해서.
하지만 여러 이야기 끝에 “보고서 발간은 스승님이 더 바라는 일일 것”이라는 어줍지 않은 결론에 도달했다. 발간 비용은 구의동 조사이후 가업을 잇기 위해 고고학도의 길을 포기한 윤대인이 부담했다. 이렇게 해서 97년 ‘한강유역의 고구려 요새’라는 이름의 종합보고서가 발간됐다. 실로 20년만의 일이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