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차 왕래에도 지장이 있는 문이다. 그런 낡아빠진 문은 파괴해버려야 한다.”
“한성부(서울시)에 예산이 없어 이전은 너무도 곤란한 것이었다. 그래서 포병대의 도움으로 대포의 탄환으로 문을 포격해서 파괴하는 것도 생각했는데….”
남대문(승례문) 이야기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을 즈음, 남대문의 운명도 풍전등화 격이었다. 일본인 연구자인 오타 히데하루는 2002년 제출한 서울대 석사논문(<근대 한·일양국의 성곽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지정책>) 에서 그 사연을 풀어놓는다.
즉 을사늑약의 결과로 통감부가 개설되자 서울 거주 일본인들의 모임인 일본거류민회는 대대적인 ‘도시개조’를 계획했다. 핵심은 용산을 포함한 지역에 40~50만명을 수용할 신시가지를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눈엣가시, 조선의 성곽
서소문~수구문(광희문)을 직통하는 도로를 개설하고, 종로를 십자대로로 조성하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주둔한 왜성대와 욱정(예장동·회현동 일대) 등 남산 북록을 공원화 하자는 것이었다. 또 용산에 대규모 경마장을 건설한다는 계획도 포함돼 있었다. 용산 신도시 계획의 걸림돌로 꼽힌 것이 바로 남대문이었다. 그렇잖아도 일제는 남대문을 비롯한 조선의 성곽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당시 중의원 의원이자 한성신보 사장을 지낸 아다치 겐조우(安達謙藏)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조선>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선인동화(鮮人同化)를 위해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 있다. 역사적으로 배일(排日)재료를 공급하고 있는 기념물이다. 그런 기념물을 선인들이 조석으로 접하게 된다면 역사적으로 선인동화를 부정하는 재료가 되는 것이다. ~그런 기념물을 서서히 제거하는 것이 민심통일이나 선인동화를 위해 불가결하다.”(1910년 <조선> ‘32호’)
조선의 산성이나 사찰, 가람 등에는 지난날 배일 운동의 편액이나 기사 등이 남아 있다는 것. 조선인들이 그 항일 및 배일운동의 흔적을 조석으로 접하면 역사적으로 조선인 동화를 부정하는 재료가 되기 때문에 빨리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여론 속에서 때마침 용산신도시 개발계획이 발표되자 숭례문은 ‘교통의 장애물’로 취급됐다.
그러자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당시 조선군 사령관이 “낡아빠진 남대문은 빨리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심지어는 “포격으로 파괴하자”는 극단론까지 제기된 것이다.
■남대문이 생존한 이유
하지만 뜻밖의 인물이 뜻밖의 논리로 ‘숭례문 파괴’ 주장에 극력반대한다.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였다. 그는 고종황제도 알현한 바 있는, 일본거류민 가운데 최고유력자였다. 뿐만 아니라 하세가와 사령관과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일본공사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그런데 나카이의 반대논리 역시 ‘반전’이었다.
“남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빠져나간 문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건축물은 남대문 이외의 두 세가지 밖에 없습니다. 파괴하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까.”
나카이는 대안으로 남대문의 좌우도로를 확장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의 집요한 설득에 하세가와 등 ‘남대문 파괴론자’들은 뜻을 굽히고 말았다. 흥인지문(동대문)의 ‘생존’도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선봉에 섰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이 입성한 문이어서 파괴되지 않았다.
일제의 인식은 지금으로 치면 서울여행 가이드 북인 <경성안내>나 <조선여행안내> 책자에도 소개된다. 예컨대 1927년 발행된 <취미의 조선여행(趣味の朝鮮の旅)> 책자에서는 숭례문을 이렇게 소개한다.
“그 옛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정벌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남대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동대문을 통해 경성으로 쳐들어갔다고 하는데, 그 남대문이 이 남대문이다.”
그러니까 일제가 남대문과 동대문을 보존한 까닭은 문화재적, 미술사적 가치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승전의 관문’이었기에 ‘몸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일제와 아무런 인연이 없던 돈의문(서대문)을 비롯해 소의문(서소문), 혜화문(동소문) 등은 속절없이 철거당하고 말았다. 특히 1915년 시구개수사업의 명목으로 서대문이 철거되자 여론이 들끓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마저 서대문을 의인화한 기사(‘나는 서대문이올시다’)에서 ‘마지막 슬픈 소리와 영구히 사라질 새문(서대문)’을 안타까워 했다.(오타 히데하루의 2002년 논문)
■보물 1·2호 남대문·동대문, 고적 1호 포석정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지 18년 뒤인 1933년 12월5일, 일제가 아주 특별한 조치를 취한다.
조선의 문화재에 가치를 부여하고 보존하는 법(‘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제정한 것이다. ‘역사의 증징(證徵) 혹은 미술의 모범이 되고 학술연구에 도움이 될만한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을 영구보전한다는 뜻’이었다.(동아일보 1933년 12월6일)
법에 따라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를 만든다.(12월14일) 지금의 문화재위원회 처럼 문화재 보전과 지정 등을 심의하는 조직이었다.
보존회는 총독부 내무국장 우시지마(牛島省三)를 비롯, 25명으로 구성했다. 한국인은 5명이 들어갔다. 총독부 사무관이던 유만겸과 중추원 참의 류정수가 포함됐고, 학계에서는 이능화·김용진·최남선이 포함됐다. 일본인으로서는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과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등이 들어 있었다.(동아일보 1933년 12월15일)
총독부는 이듬해인 1934년 8월27일자 <관보>의 고시를 통해 1차 지정문화재를 발표한다.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로 시작된 관보는 지정번호와 문화재의 명칭, 소재지, 소재지역, 토지소유자 순으로 이날 지정된 표로 정리해놓았다.
‘보물 1호 경성 남대문, 보물 2호 경성 동대문…. 고적 1호 경주 포석정지, 천연기념물 1호 달성 측백나무 숲….’
이날 관보에 게재된 문화재는 보물 153건, 고적 13건, 천연기념물 3건 등 모두 169건이었다.
■국보 보물은 편의상 붙인 일련번호?
여기서 두가지 주목거리가 있다.
먼저 일제가 국보없이 보물과 고적. 천연기념물만 지정했다는 점이다. 일제의 논리는 명확했다. 내선일체라는 것.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이며, 따라서 일본의 국보가 식민지 조선의 국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권을 상실한 조선에 국보는 없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지정된 문화재는 해방 후에도 아무런 비판없이 답습됐다는 점이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면서 지정문화재를 국보와 보물로 나누어 지정한 것이다. 이때 보물 1·2호였던 남대문과 동대문은 국보 1호와 보물 1호가 됐고, 고적 1호였던 포석정은 사적 1호가 됐다.
또 하나, 일제는 과연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문화재를 중요도에 따라 번호를 매긴 게 아니었을까. 일견 그런 것 같기는 하다.
첫번째 문화재 지정 때 발표한 표만 보면 등급별 번호가 아닌 ‘지정번호’, 즉 지정되는 순으로 ‘편의상’ 붙인 흔적은 있다. 예컨대 보물 1·2호인 남대문·동대문이고, 3호는 보신각종이다.
4호와 5호는 원각사 다층석탑과 원각사비이다. 6호와 7호는 중초사 당간지주와 중초사 삼층석탑이다. 8호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이지만. 9호와 10·11호는 개성 첨성대와 개성 남대문, 개성 연복사종이다. 남대문과 동대문, 진흥왕순수비를 빼면 같은 장소에 있는 문화재끼리 묶어놓은 흔적이 있다. 고적의 경우 1호는 경주 포석정, 2호는 김해 회현리 패총, 3호는 봉산 휴류산성, 4호는 강서 간성리 연화총이다.
그런데 5~9호까지는 평남 용강 지역의 안성리 쌍영총(5호)·안성리 대총(6호)·매산리 수렵총(7호)·신덕리 성총(8호)·신덕리 감신총(9호) 등이 줄을 잇고 있다. ‘편의상’ 일련번호를 붙여 지정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입성했던 ‘승전의 문(남대문과 동대문)’을 굳이 보물 1·2호로 등록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또 하나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고적 1호’로 지정된 경주 포석정이다. <삼국사기> 등 정사의 기록으로만 보면 경주 포석정은 ‘굴욕의 현장’, ‘망국의 상징’이다.
“경애왕 4년(927년) 겨울 11월 왕이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놀고 있었을 때 견훤이 갑자기 쳐들어왔다. 왕은~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견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살하도록 했고, 왕비를 강제로 욕보였다.”(‘신라본기·경애왕조’)
목불연견의 참상이 아닌가. 나라가 망하는 줄도 모르고 질펀한 술판을 벌이다 1000년 사직을 나락으로 빠뜨린 저 부끄러운 역사를…. 과연 그랬을까.
아무리 정신나간 왕이라지만 한겨울(음력 11월)에 노천에서 술판을 벌였을까. 그것도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졌는데? 경애왕은 두 달 전인 9월(음력) 후백제 견훤의 침략으로 위험에 처하자 고려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건은 구원병 1만 명을 냈는데, 미처 경주에 도달하기도 전에 견훤군이 침략한 것이다.
■포석정의 비밀
그런데 <화랑세기>를 보면 의미심장한 대목이 나온다. 심심치않게 등장하는 ‘포석사(鮑石祠)’ 혹은 ‘포석(鮑石)’이다. ‘포석정(亭)’이 아니라 사당을 뜻하는 ‘포석사(祠)’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 포석사에는 화랑 중의 화랑으로 추앙받은 문노(文努)의 화상을 모셨다. 문노는 제8대 풍월주(재임 579~582)였다. 그는 삼한일통 후 ‘사기(士氣)의 종주(宗主)’ 즉 ‘씩씩한 기운의 으뜸’으로 삼았다.
그런 문노의 화상이 포석사에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포석사에서 나라의 안녕을 비는 행사가 열렸음을 의미한 것은 아닐까. 포석사에서는 귀족들의 길례(吉禮)도 열렸다.
문노와 윤궁이 혼인할 때는 진평왕이 친히 포석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또 태종무열왕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동생 문희의 혼인식이 열린 곳도 바로 포석사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경애왕은 술판을 벌이려 한겨울에 포석정으로 간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누란에 빠진 나라의 안녕을 간절히 빌기 위해 왕실과 귀족들을 동원해서 포석사로 갔을 것이다.
거기서 간절히 1000년 사직의 유지를 빌다가 그만 후백제군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설상가상 일제는 포석정을 멋대로 정비했다. 물이 흘러드는 입수구 부분의 일부도, 물이 빠지는 출수구 부분도 없는 괴상한 형태로 복원해버린 것이다.
포석정은 그렇게 해서 고적 1호의 이름을 얻은 것이다.
■내선일체의 상징?
일제가 어떤 생각을 갖고 식민지 조선의 문화재정책을 폈는 지를 짐작할 수 있는 기사들이 남아있다.
1933년 8월11일자 <동아일보>는 아주 의미심장한 기사를 쓴다. 조선총독부가 이른바 ‘보물고적천연기념물보존령’을 제정하면서 국가(일제)가 관리해야 할 문화재의 범위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문화를 수입하야 이것을 일본에 전한 조선사의 변천, 고대 일중(日中)관계를 천명하는 유적 등…. 학술상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것은 금후 국가관리 하에 영구히 보존할 터이다.”
즉, 조선의 독창적인 역사를 보전하기 보다는 중국문화를 수입해서 일본에 전한, 이른바 ‘일중관계의 역사’ 위주의 문화재를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1938년 11월26일 기사를 보면 좀더 명확해진다.
“4회 총회에서는 101종을 새로 지정했다. 금번 지정되려는 것은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히 표명하는 것이라 하야 주목을 끄을고 잇다.”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히 표명하는’ 문화재를 중심으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우선 고적의 경우 ‘창령 화왕산성·창녕 목마산성·김해 분산성·함안 성산산성·김해 전 김수로왕릉·김해 전 수로왕비릉·김해 삼산리고분·고령 지산동고분·창녕고분군 등’을 등재했다. 그러면서 이들 문화재의 등록사유를 ‘임나(任那)관계 고적’이라고 기재했다. 예의 그 지긋지긋한 임나일본부설과 관계가 깊은 유적들이라고 해서 지정해놓은 것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뒷받침할만하다’는 이유로…. 또 경남 양산 물금의 증산성도 지정됐다. 증산성에는 ‘임진왜란 때의 고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증산성은 임진왜란 때 다데 마사무네(伊達政宗)가 쌓았다고 해서 고적의 반열에 올랐다.
이 모든 증거를 볼 때 일제가 남대문·동대문에 보물 1·2호. 포석정터에 고적 1호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명확하지 않을까. 조선 점령의 상징인 남대문과 동대문, 그리고 나라가 망하는 줄도 모르고 술판을 벌인 하지만 일제는 포석정을 ‘조선망국의 상징’으로 삼은 것이 아닐까. ‘나라가 망하는 해도 술판을 벌이는 무지몽매한 민족’ 임을 역사 앞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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