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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국보 보물 사적 '1호', 그 불편한 진실은?

 

국보 1호·보물 1호가 숭례문·흥인지문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사적 1호가 포석정이라는 것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하지만 국보·보물·사적 1호 속에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지금부터 그 ‘불편한 진실’을 하나하나 들추어보자.

 

<사진 1>조선총독부가 1934년 8월27일자로 낸 <관보>. 고시 제340호로 조선의 보물, 고적, 천연기념뭉 169건을 등록했다./국립중앙도서관

■보물 1호 남대문, 2호 동대문, 고적 1호 포석정


이 땅의 문화재에 가치를 부여하고 보존한 것은 일제 때의 일이다. 1933년 12월5일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만들어 공포한다. “역사의 증징(證徵) 혹은 미술의 모범이 되고 학술연구에 도움이 될만한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을 영구보전한다는 뜻”이었다.(동아일보 1933년 12월6일)

그런 다음 문화재 지정을 자문할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를 만든다.(12월14일) 지금의 문화재위원회 같은 조직이었다. 총독부 내무국장 우시지마(牛島省三)를 비롯, 25명으로 구성했다. 한국인은 5명이 들어갔다. 총독부 사무관이던 유만겸과 중추원 참의 류정수, 그리고 학계에서 이능화·김용진·최남선이 포함됐다. 일본인으로서는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과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등이 있었다.(동아일보 1933년 12월15일)
총독부는 이듬해인 1934년 8월27일자 <관보>의 고시를 통해 1차 지정문화재를 발표한다. 필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강현 학예연구사의 도움으로 그 날짜 <관보>를 찾아볼 수 있었다.

관보는 ‘소화 9년(1934년) 8월27일 월요일 조선총독부 관보 제2290호. 조선총독부 고시 제30호. 조선총독부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 제1조에 따라 지정한다.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로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정번호와 문화재의 명칭, 소재지, 소재지역, 토지소유자 순으로 이날 지정된 문화재를 표로 정리해놓았다.

‘보물 1호 경성 남대문, 보물 2호 경성 동대문…. 고적 1호 경주 포석정지, 천연기념물 1호 달성 측백나무 숲….’
관보에 게재된 문화재는 보물 153건, 고적 13건, 천연기념물 3건 등 169건이었다.

 

 

<사진2>관보에는 보물 1호 경성 남대문, 보물 2호 경성 동대문, 고적 1호 경주 포석정 등의 내용이 분명하게 보인다.

■편의상 붙인 ‘1호’일 뿐이다?

주목할만한 첫번째는 일제가 국보없이 보물만 지정했다는 점이다. 내선일체를 부르짖었던 일본의 논리는 간단했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이며, 따라서 일본의 국보가 식민지 조선의 국보라는 것이었다. 국권을 상실한 조선의 국보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는 해방 후에도 아무런 비판없이 답습됐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면서 지정문화재를 국보와 보물로 나누어 지정한 것이다. 이때 남대문은 국보 1호, 동대문은 보물 1호가 됐고, 포석정은 사적 1호가 됐다.

두번째 논점은 ‘일제가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문화재를 중요도에 따라 번호를 매긴 게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형식을 보면 그렇다. 표만 보면 등급별 번호가 아닌 ‘지정번호’, 즉 지정되는 순으로 ‘편의상’ 붙인 흔적은 있다. 예를 들면 보물 1·2호인 남대문·동대문이고, 3호는 보신각종이다. 4호와 5호는 원각사 다층석탑과 원각사비이다. 5호와 6호는 중초사 당간지주와 중초사 삼층석탑이다. 8호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이지만. 9호와 10·11호는 개성 첨성대와 개성 남대문, 개성 연복사종이다. 남대문과 동대문, 진흥왕순수비를 빼면 같은 장소에 있는 문화재끼리 묶어놓은 흔적이 있다. 고적의 경우 1호는 경주 포석정, 2호는 김해 회현리 패총, 3호는 봉산 휴류산성, 4호는 강서 간성리 연화총이다. 그런데 5~9호까지는 평남 용강 지역의 안성리 쌍영총(5호)·안성리 대총(6호)·매산리 수렵총(7호)·신덕리 성총(8호)·신덕리 감신총(9호) 등이 줄을 잇고 있다. ‘편의상’ 일련번호를 붙여 지정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100% 맞는 이야기일까. 일제는 그저 조선의 문화재에 ‘편의상’ 일련번호를 붙인 것일까. ‘불편한 진실’의 이야기를 이어본다. 지난 2002년 일본인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는 서울대학원에 아주 흥미로운 석사학위 논문을 제출한다. 논문제목은 <근대 한·일 양국의 성곽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지 정책>이었다. 논문 내용을 재구성해보자.

 

■남대문·동대문은 살고, 서대문은 철거된 까닭은?


“포차 왕래에도 지장이 있는 문이다. 그런 낡아빠진 문은 파괴해버려야 한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을 즈음. 조선군 사령관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916~1919년 제2대 조선총독)이 핏대를 올린다. 남대문을 파괴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렇지않아도 일본거류민회는 서울 용산 지역에 40만~50만명 규모의 신도시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이른바 도시개조계획이었다.
신도시 계획 속에는 서대문~수구문을 직통하는 도로를 개설하고, 종로를 대십자로로 만든다는 청사진이 들어있었다. 또 남산의 북쪽 산록을 공원으로 조성하고, 용산에 대경마장을 만드는 것 등도 포함돼 있었다.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서울의 관문인 남대문이었다. 여기서 한성신보 사장을 지낸 아다치 겐조우(安達謙藏)의 언급을 곱씹어보자.

“선인동화(鮮人同化)를 위해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 있다. 역사적으로 배일(排日)재료를 공급하고 있는 기념물이다. 그런 기념물을 선인들이 보고 들을 때마다 동화에 방해됨이 적지 않다. ~그런 기념물을 서서히 제거할 방법을 취할 필요가 있다.”(1910년 <조선> ‘32호’)

조선인들이 임진왜란 등의 전승기념물이나 조선왕조의 상징기념물 앞에서 반일감정을 북돋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선일체의 걸림돌이니 하나하나 파괴해야 한다는 게 아다치의 주장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남대문도 일제로서는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조선의 왕도이며 대한제국의 황도인 서울의 정문이었으므로….

각설하고, 하세가와의 ‘파괴’ 발언으로 남대문은 풍전등화 격이 됐다. 심지어는 “대포를 쏘아 남대문을 파괴하자”는 논의도 있었다. 훗날 간행된 <경성사화(京城史話·1936년)>를 보자.

“예산이 없어서 이전하는 것도 곤란했습니다. 그래서 용산의 포병대와 교섭해서 대포의 탄환으로 문을 포격해서 파괴하는 것도 생각했습니다.”

 

이 서슬퍼런 ‘남대문 파괴’ 발언에 반대하는 이가 있었다.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거류민단장이던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였다. 그는 문제의 하세가와 사령관은 물론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주한 일본공사와의 친분이 두터웠다. 고종 황제도 알현한 일본 거류민 가운데 최고유력자였다. 그의 반대논리는 명쾌했다.

“남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빠져나간 문입니다. (임진왜란) 당대의 건축물은 남대문 이외의 두 세가지 밖에 없습니다. 파괴하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까.”

나카이의 집요한 설득에 ‘파괴론자’인 하세가와는 뜻을 굽히고 말았다. 나카이는 남대문 좌우도로를 확장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동대문(흥인지문)도 살아남았다.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동대문으로 입성했다”는 사연 때문이었다. 

사실 일제의 이같은 인식은 훗날 나온 ‘조선여행안내’나 ‘경성안내’ 같은 간행물에도 나온다. 1927년 발행된 ‘취미의 조선여행(趣味の朝鮮の旅)’에서 남대문을 소개하는 글을 보자.

“그 옛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정벌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남대문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이 동대문에서 경성으로 쳐들어갔다고 하는데, 그 남대문이 이 남대문이다.”

일제가 남대문과 동대문을 보존한 까닭은 이렇게 분명하다. 문화재적, 미술사적 가치 때문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 선봉에 섰던 장수들이 입성해서 한양을 함락한 곳이었기 때문에 보전된 것이다. 일제로서는 역사적인 승전의 관문이었으니까…. 그렇지 않았으면 철저히 파괴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예컨대 일본의 전승기념물이 아니었던 서대문(돈의문)과 서소문(소의문), 동소문(혜화문)은 철거당했다. 특히 1915년 서대문이 시구개수공사의 일환으로 철거되자 여론이 들끓었다. 오죽했으면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까지 나섰다. 신문은 서대문을 의인화한 “나는 경성 서대문이올시다”는 기사에서 ‘마지막 슬픈 소리와 영구히 사라질 새문(서대문)’을 안타까워 했다. 

 

<사진3>사적 1호 포석정. 일제는 포석정을 신라망국의 상징으로 치부하면서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펼쳤다. /문화재청

■사적 1호는 망국의 상징?

그렇다면 일제가 지정한  ‘고적 1호’ 경주 포석정은 어떤가. 두고 볼 것 없이 포석정은 ‘치욕의 역사현장’이었다. 신라망국의 상징이기도 했고…. <삼국사기>를 보자.


“경애왕 4년(927)겨울 11월에 견훤이 갑자기 서울에 쳐들어갔다. 왕은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왕은~허둥지둥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견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살하도록 했고, 왕비를 강제로 욕보였다. 부하들을 풀어 궁녀들을 욕보였다.”(‘신라본기·경애왕조’)
그야말로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담한 현장이다. 지금까지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라가 망하는 줄도 모르고 흥청망청 술판을 벌이다 1000년 사직을 나락으로 빠뜨린 사실을…. 일제는 이 포석정을 멋대로 정비했다. 물이 흘러드는 입수구 부분의 일부도, 물이 빠지는 출수구 부분도 없는 데도…. 없어진 부분을 짜맞추어 정비해버린 것이다. 여기서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 있다. 경애왕이 술판을 벌였다는 때는 음력 11월, 즉 한겨울이었다. 또 경애왕은 두 달 전인 9월(음력) 후백제 견훤의 침략으로 위험에 처하자 고려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건은 구원병 1만 명을 냈는데, 미처 경주에 도달하기도 전에 견훤군이 침략한 것이다.

 

 ■경애왕은 그때 ‘포석사’에서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

아무리 정신나간 왕이라지만 그래 한겨울에 노천에서 술판을 벌였을까. 그것도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졌는데?
<화랑세기>를 보면 의미심장한 대목이 나온다. 심심치않게 등장하는 ‘포석사(鮑石祠)’ 혹은 ‘포석(鮑石)’이다. 포석‘정(亭)’이 아니라 사당을 뜻하는 포석‘사(祠)’라는 것이 중요하다. <화랑세기>를 보면 이 포석사에는 화랑 중의 화랑으로 추앙받은 문노(文努)의 화상을 모셨다. 문노는 제8대 풍월주(재임 579~582)였다. 그는 삼한일통 후 ‘사기(士氣)의 종주(宗主)’ 즉 ‘씩씩한 기운의 으뜸’으로 삼았다. 그런 문노의 화상이 포석사에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포석사가 나라의 안녕을 비는 행사가 열렸음을 의미한다. 포석사에서는 귀족들의 길례(吉禮)도 열렸다. 문노와 윤궁이 혼인할 때는 진평대왕이 친히 포석사에 간 적이 있다. 또 태종무열왕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동생 문희의 혼인식이 열린 곳도 바로 포석사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경애왕은 술판을 벌이려 한겨울에 포석정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누란에 빠진 나라의 안녕을 간절히 빌기 위해 왕실과 귀족들을 동원해서 포석사로 간 것이었다. 거기서 간절히 1000년 사직의 유지를 빌다가 그만 후백제군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사진4>대한제국시절의 숭례문(남대문). 전차가 숭례문 홍예를 관통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내선일체를 위해 임나관계 유적을 문화재로…”

1938년 11월26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자. 일제가 어떤 생각으로 조선의 지정문화재를 선택했는 지를 잘 보여준다.

“4회 총회에서는 101종을 새로 지정했다. 금번 지정되려는 것은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히 표명하는 것이라 하야 주목을 끄을고 잇다.”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히 표명하는’ 문화재를 중심으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목록을 보면 흥미롭다. 고적의 경우 ‘창령 화왕산성·창녕목마산성·김해 분산성·함안 성산산성·김해 전 김수로왕릉·김해 전 수로왕비릉·김해 삼산리고분·고령 지산동고분·창녕고분군 등’을 등재했다. 그러면서 이들 문화재의 등록사유를 ‘임나(任那)관계고적’이라고 기재했다. 그 지긋지긋한 임나일본부설과 관계가 깊은 유적들이라고 해서 지정해놓은 것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뒷받침할만한…. 또 경남 양산 물금의 증산성도 지정됐다. 증산성에는 ‘문록경장역관계’ 고적, 즉 ‘임진왜란 때의 고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문록경장의 역(役)’이라 한다. 증산성은 임진왜란 때 다데 마사무네(伊達政宗)가 쌓았다고 해서 고적의 반열에 올랐다.

그렇다면 원점으로 돌아가보자. 일제는 과연 편의상 남대문·동대문에 보물 1·2호. 포석정터에 고적 1호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임진왜란 때 ‘조선 점령의 상징’이 됐던, 그래서 헐지않고 보존했던 남대문·동대문은 말할 것도 없겠다. 포석정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닐까. ‘적이 쳐들어왔는 데도 흥청망청 놀았던 신라망국의 상징’을 사적 1호로 삼은 것…. 그것은 ‘그러니까 너희들은 결국 식민지로 살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식의 패배주의를 심어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사진5>일제 강점기 때의 흥인지문

■성벽철거에 앞장선 친일파 군상들

여담으로 한심한 이야기 한편 기록해두자. 역시 서울대 석사논문을 쓴 오다가 발굴한 자료이다. 1905년 통감부를 설치한 일제는 내정간섭을 한층 강화했다. 친일파들이 맞장구쳤음을 물론이었다. 1906년, 대구에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구 거주 일본인들이 “대구 성벽을 헐고 도로를 만들자”고 요구한 것이다. 이때 대구군수는 친일파 박중양이었다. 그는 대한제국 정부의 ‘불허’ 방침을 무시하고, 대구 성벽을 철거해버렸다. 군수가 대한제국 황제의 명령을 무시한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박중양은 별다른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박중양의 뒷배를 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8개월이 지난 1907년 6월18일, 이른바 ‘제18회 한국 시정개선을 위한 협의회’가 열린다. 이 협의회는 이토 히로부미 통감 주재로 대한제국 정부의 각부 대신이 참여하는 회의였다. 이토가 사실상 한국의 내정을 총지휘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총리대신 이완용이 황당한 제안을 한다.

“(서울의) 도로를 닦고, 개천을 준설할 비용이 필요합니다. (서울의) 성벽을 매각해서 그 대금을 공사비용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맞장구를 친다. “그렇다. ~금일의 시대에는 그런 성벽은 무용지물이니까…. 그런데 철거는 (고종) 황제의 황명이 필요할 것이다.”

칭찬을 들은 이완용이 기고만장했다. “그렇습니다. 서울에서 성벽을 철거하면 다른 지방에서도 따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지난 날 박중양이 대구 성벽을 헐어 견책을 당했는데…. 이젠 정부 스스로가 성벽을 철거하게 됐습니다.”

그러자 참석자들이 박장대소했다. “그런가요? 하하하!”                  

 

이기환/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