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424년 전 이맘 때 조선에서는 큰 변란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임진왜란이었습니다. 당시 1592년 4월13일 30만명으로 무장한 왜병 가운데 선봉대 2만이 700척에 분승해서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습니다. 부산첨사 정발이 부산진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전사했고, 왜병은 파죽지세로 동래성을 포위했습니다. 당시 동래부사는 송상현이었습니다. 송상현은 백성들과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습니다. 항복을 권하는 왜병에게 송상현 부사는 “네놈들하고 싸워 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백성들과 함께 전사하고 맙니다. 그 중에는 제 몸만 지키려고 빠져나온 자들도 물론 있었습니다. 이것이 동래성 전투입니다.
이 싸움의 참상은 영조 때 동래읍성을 수축하려던 동래부사 정언섭이 왜병의 총칼에 난도당한 백골을 일부 수습함으로써 기왕에 남아있던 기록과 함께 밝혀졌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 그 끔찍한 참상이 다시 한번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부산지하철 공사를 벌이던 중에 무자비하게 살해된 조선 백성들의 유골들이 발굴된 것입니다. 이번 주 74번째 팟캐스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주제는 ‘끔찍했던 1592년 4월15일의 전쟁기록’입니다.
1731년(영조 7년) 어느 날.
동래성 수축을 위해 공사를 벌이던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은 경악했다.
땅을 파다가 임진왜란 때 묻힌 것이 뻔한 백골들이 다수 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포환(砲丸)과 화살촉들이 백골 사이에 띠를 이뤘다. 이에 숙연해진 정언섭은 백골들을 수습한 뒤 비문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제전(祭田)을 설치했다.
정언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향교에 넘겨 해마다 유생들에게 그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여지집성·輿地集成’ 기록에서)
-도랑에 묻힌 415년 전의 역사
그로부터 꼭 274년 뒤인 2005년 4월 어느 날.
당시 경남문화재연구원 정의도 학예실장은 부산 지하철 3호선 수안동 전철역사 예정지를 지나다가 급히 차를 세웠다. 이곳은 3호선 역사 예정지로 확정되었을 때 사전지표조사를 벌였지만 별다른 유구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던 곳이었다.
“시내 중심가이고, 이미 현대적인 건물과 도로가 조성되어 있으니 지표조사는 사실 불가능했지요. 다만 이곳이 동래읍성과 불과 50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으므로 공사를 벌일 때는 전문가의 입회조사가 필수적이라는 의견을 냈어요.”
하지만 시공사 측이 별일 있겠느냐면서 공사를 시작했던 것인데, 그 모습을 정 실장이 본 것이었다. 당장 입회조사에 들어갔다.
“트렌치를 넣어보니 석축이 노출되는 거예요. 그 때만 해도 전기 동래읍성의 성벽 선(線)이라 생각했어요.”(김성진 경남문화재연구원 연구원)
갈수록 수상한 기운이 감지되는 유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성벽으로 여겨졌던 석축의 반대편 쪽에도 또 하나의 석축이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물이 흘러간 흔적이 보이고….”(안성현 당시 조사팀장)
또 하나, 양쪽 두 개의 석축을 연결해주는 목제 가교(폭 110㎝×길이 500㎝)도 확인되었다.
“아! 이것은 처음엔 생각도 못했던 유구. 바로 해자(垓子)일 수밖에 없는 유구였습니다.”
해자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城)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 혹은 인공적으로 조성한 도랑이다. 발굴단이 해자의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지웠던 것은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 전투를 묘사한 ‘동래부사순절도(東萊府使殉節圖·보물 392호)’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1760년 변박(卞璞)이 그렸다는 이 순절도에는 해자가 묘사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고고학 발굴은 그동안 확실하다고 여겨졌던 기록을 수정하고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는 거지.”(조유전 토지박물관장)
그때부터 깜짝 놀랄 유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무말뚝이 해자 바닥에 쫙 깔려있고, 그 사이에서 걷잡을 수 없는 유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인골이 여기저기서 걸려나오고, 찰갑(札甲·철판을 이어만든 갑옷)과 첨주(첨胄·투구의 일종), 환도(環刀)와 깍지(궁수의 엄지손가락에 끼우는 가락지), 창, 화살촉 등 정신없이 나왔습니다.”(안성현)
2005년 7월~2008년 1월까지 출토된 유물은 대단했다. 인골이 쏟아졌다. 그리고 완형 및 말린 형태의 찰갑이 각 1점씩, 첨주(투구의 일종) 1점, 화살촉 116점, 환도 16점, 도자(刀子) 21점, 장군전(將軍箭·총통에서 발사된 화살을 통칭) 5점 이상, 깍지 1점, 창 2점, 장검 같은 무기 1점 등등…. 하지만 발굴과정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인골이었다.
동래읍성에서 확인된 20대 여인의 두개골. 왜병의 칼날에 머리가 잘린 끔찍한 모습이다.
-진혼제를 올린 사연
“출토인골들은 하지골이나 상지골~슬관절이나 주관절이 연결됐다던가, 두개골과 경추가 함께 확인됐다던가 하는 것은 인대와 근육이 붙어있는 단계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것, 즉 죽은 뒤에 해자로 유기된 것입니다.”(안성현)
특히 북서쪽에서 확인된 두개골의 경우는 20~40대 성인남자의 것으로 보였는데, 머리 뒤쪽에 구멍이 뚫려 있는 채였다.
“모두 무언가에 머리를 찔렸거나 베임을 당해 죽은 게지요. 발굴단은 고고학자로서 일생일대의 발굴이라는 좋은 기분보다는 선조들이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에서 숙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정의도)
발굴단은 곧 임진왜란 때 비명에 간 이들의 넋을 달래는 진혼제를 지냈다. 아마도 274년 전 동래부사 정언섭도 같은 심정이었을 터. 하지만 발굴은 어렴풋한 1차 자료만을 제공할 뿐. 당시 발굴자들은 지금까지도 “20~40대 남녀의 인골은 확인되지만 어린아이의 것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그것은 섣부른 단정. 고인골 전문가 김재현 동아대 교수에게 인골들은 400여년 간 맺힌 한을 풀어내듯 임진왜란의 참화를 생생하게 증언해주었다. 기자에게 따끈따끈한 분석자료를 건네준 김재현 교수의 목소리는 상기됐다.
“분석결과 인골이 최소 81개체로 확인됐는데요. 최대 114개체까지 보입니다. 대단합니다. 인골들은 모두 해자의 바닥에서 집중적으로 검출됩니다. 이것은 모두 같은 시기에 해자에 방치됐다는 얘기죠. 또한 두개골을 비롯한 상지골들이 흩어져 있지만 인위적으로 해체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3차에 걸쳐 검출한 인골을 분류하면 남성이 59개체, 여성이 21개체에 이른다. 성별은 10대 후반에서 4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남양주 호평의 조선시대 민묘에서 확인된 인골 14개체 가운데 10개체가 40대이고요. 통계청 자료를 보면 1960년대 평균수명이 52.4세, 1970년대 평균수명이 남자 59.6세, 여자 67세인 것과 동래 희생자들을 비교해보죠.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남녀노소가 모두 희생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5살 유아와 20대 여인이 들려준 왜인의 만행
전쟁이라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인골을 친구처럼 여기는 김재현 교수마저 경악시킨 것이 있었다.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피살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과, 그리고 바로 발굴단이 없다고 단언했던 어린아이 유골의 확인이다. 일단 유아인골을 보자.
“예. 이 어린이는 두개골의 발달상황으로 보면 소아(小兒) 단계도 아니고, 만 5세 미만의 유아(幼兒) 같아요.”
이 유아의 두개골에는 전두골의 우측에 총이나 활로 맞은 사창(射創) 혹은 칼·창 등으로 찔린 자창(刺創)의 흔적이 보인다.
“일본군의 조총에 맞은 흔적입니다. 조총의 총알이 부정형인데, 상처도 원형이 아니라 부정형의 둘쭉날쭉한 형태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상흔의 깨진 정도와 경사각도를 보면 이 유아는 전쟁통에 왜군이 쏜 조총에 비껴 맞았거나, 유탄에 의해 희생되었을 겁니다.”
기자는 태어난 지 5살도 안된 어린아이의 죽음과, 그 죽음을 지켜보며 절규했을 엄마, 그리고 일본군에 의해 해자로 던져지는 그 비극적인 상황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아니 그 엄마도 어린아이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겠지.
두개골에서 확인된 상흔을 나눠보면 칼로 베인 절창(切創·모두 4개체로 남성 3개체와 여성 1개체), 총과 활에 의한 사창 또는 자창(2개체), 둔기에 의한 두개골 함몰(2개체) 등이다.
그런데 20대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을 분석하던 김재현 교수는 눈을 의심했다.
“아 글쎄, 이 힘없는 여성의 머리를 두 번이나 칼로 벤 겁니다. 인골을 보면 알겠지만 이른바 전두골은 무자비한 단번의 칼놀림으로 예리하게 잘려있잖아요. 그런 상황인데도 두정골도 칼로 베고….”
그러니까 왜병은 이 여성을 두번이나 무참하게 칼로 벤 것이다. 더욱 눈을 의심하게 만든 것은 상흔의 부위를 보고나서이다.
“칼로 벤 상흔의 위치가 이상했습니다. 보통 전쟁통에 백병전을 벌일 때 칼을 휘두르면 얼굴의 양쪽 옆을 베기 마련입니다. 각도상으로…. 그런데 이 여인의 상흔을 보면 왜병이 왼쪽에 서서, 꿇어 앉아 있거나 고개를 숙인 여인을 내리친 것이 아닐까요.”
분석하던 김 교수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혹 이것은 처형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병들이 아무 죄없는 여성을 꿇어 앉혀놓고 이렇듯 두번이나 칼로 내리쳐서 처형한 것이 아닌가.”
기자는 일제시대 때 일본군이 칼로 사람을 베기 직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고 몸서리친 적이 있다. 이렇듯 일본의 만행은 시공을 초월하여 반복된 것이다. 비단 이 여성뿐 아니라 남성의 두개골 분석에서도 뒤에서 혹은 앞에서 칼로 벤 흔적이 남아있다.
“이뿐이 아닙니다. 칼로 베인 것 같기는 한데 그 창구(創口)의 단면이 반듯하지 않은 인골들이 있어요. 이것은 칼이 아니라 다른 무기로 베였다는 소립니다. 또 두개골이 함몰된 인골이 남녀 1개체씩 확인됐어요.”
그렇다면 모두 조선인들의 인골뿐인가. 적병들의 인골은 없는 것일까.
“인골은 우리가 살펴봤던 비참한 전투상황을 증언해줄 뿐 아니라 당대 한·일 양국 사람들의 형질이라든가, 영양상태를 알 수 있는데 분석결과 아주 재미있는 데이터를 얻었습니다.”
-왜인들은 없었다
우선 당대 동래사람들의 영양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치아를 확인할 수 있는 두개골과 하악골 32개체 가운데 에나멜 질감형성(Enamel hypoplasia)이 26개체에서 확인됐다는 분석결과가 나왔다.
“에나멜 질감형성은 영양실조에 의해 나타나는 선인데, 치아발육부진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동래인들의 키는 컸다. 남성인골 19개체의 평균신장은 163.6㎝, 여성 5개체의 평균신장은 153.4㎝였다. 이는 당대 일본 에도(江戶)시대 왜인의 평균 키(남성 155.09~156.49㎝, 여성 143.03~144.77㎝)보다 무려 8~10㎝ 컸다.
“영양상태는 좋지 않은데, 신체조건은 일본인들을 압도했다는 얘기예요. 남양주 호평에서 확인된 인골들의 평균키는 남성 161.2㎝, 여성 148.7㎝인데 이 역시 에도인들보다는 큰 것이죠. 당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열도 사람들보다 컸다는 얘기이고, 제한된 통계지만 동래인들은 더 컸다는 소립니다.”
형질인류학적인 분석에서도 차이가 났다. 동래인들의 두개장폭지수(頭蓋長幅指數), 즉 이마·뒤통수의 길이와 귀와 귀 사이의 길이 비율을 나타내는 지수를 비교한 결과를 보자.
동래인의 두개장폭지수는 남성과 여성이 이른바 중두(Medium cranial·남성)와 단두(Short cranial·여성)인데 반해 에도인들은 장두(Long cranial·남성)와 중두(여성)에 자리잡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까지 분석된 동래읍성 해자 인골들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일 뿐이고 왜인은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어째서일까.
“저들의 시신도 있었겠지요. 다만 동래성 전투 이후 성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니까, 저들의 시신은 모두 수습했을 거고, 조선인들은 모두 해자에 투기되었으며, 그 해자는 메워졌겠지.”(조유전 선생)
자, 이제 타임머신을 타고 참극이 벌어졌던 1592년 4월15일, 동래성으로 뛰어들어가 보자.(계속)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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