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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사관의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공간에서 소개한 <흔적의 역사>가 2쇄를 찍었습니다  차후에 제2권 제3권이 나올 예정이니 기대해 주세요.

 

  지난 날을 서술하여 미래를 생각하고자 한 것입니다.(述往事 思來者)”(<사기> ‘태사공자서’ <한서> ‘사마천전·보임안서’)

 사마천이 불후의 역사서인 <사기>를 쓴 까닭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E) 핼릿(H) (18921982) 역시 <역사란 무엇인가>(1961)에서 유명한 말을 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다.(History i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그러고 보면 사마천이나 E H 카나, 두 사람의 뜻은 2000년의 시공을 초월했어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즉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거울이며, 과거(역사)를 배우는 것은 바로 현재와 미래에 대비하기 위함이라는 것. 이는 역사는 한낱 과거사일 뿐인데 과거에 집착할 필요가 있느냐는 야유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굳이 사마천이나 E H 카의 언급까지 들춰낼 필요도 없다 

김홍도의 <궁중의 여인>. 1781년 쯤 그린 것으로 보인다. 현대적인 미인상과 가깝다.|국립중앙박물관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거울

 필자는 역사칼럼(<흔적의 역사>)을 쓰려고 <사기><조선왕조실록> 등 다양한 문헌을 들춰볼 때마다 무릎을 친다. 과거의 이야기가 어쩌면 그렇게 오늘의 이야기를 빼닮았는지.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 때 찾아본 <태종실록>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침몰. 1000여 명이 수장됐다.

 사고원인은 인재(人災)였다. 선장의 무리한 운항과 화물과적 때문이었으니까. 실무자들에게 책임을 돌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임금(태종)모든 사고의 책임은 내게 있다(責乃在予)”하게 인정했다.

 필자가 총리 및 각료들의 인선과 인사검증과 관련해서 <실록>을 검토하자 만만치 않은 조선의 검증시스템이 포착됐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이 문제적 인물을 고집스럽게 임명하는 불통·오기의 인사를 단행하고, 대간관들은 서경권을 발동, 철저한 검증을 통해 거부권을 행사하고. 심지어 대간관들은 출근저지투쟁까지 벌인 끝에 문제적 인물을 기어코 낙마시켰다. 요즘 무슨 성인군자를 뽑는 것도 아닌데, 인사검증이 너무 혹독하다는 비판이 고개를 들고 있다. 하지만 조선 사회와 견주면 새발의 피라 할 수 있다. 칠순의 재상을 겨냥, “그의 살코기를 씹어먹고 싶다며 칠순의 재상을 욕한 이른바 막말 탄핵, 14년 전의 소문 만으로 사정기관의 수장(대사헌)을 공격한 이른바 풍문 탄핵마저도 허용된 사회였으니 말이다.

그 시대 임금들은 애완동물조차 맘껏 키울 수 없었다. “애완물에 빠지면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흐트러질 수 있다고 제동을 거는 신하들 때문에.

 길에서 담배를 꼬나문 성균관 유생들을 훈계했다가 봉변을 당한 재상 채제공의 이야기는 어떤가. ‘당신이나 잘하라는 소리를 듣고 유생들을 옥사에 가둔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야밤에 성균관 유생들이 옥사 앞까지 몰려와 풀어 달라면서 농성을 벌였단다. 채제공은 임금(정조)을 찾아가 정승 노릇 못해먹겠다고 하소연하고.

 군대 문제는 또 어떤가. <조선왕조실록>에는 4000건이 넘는 군대 관련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고전종합DB’에서는 무려 7544건이 검색된다. 군대는 고금을 막론하고 뭇 남성들의 평생 이야깃거리인 것은 틀림없다. 이 중 1659(효종 10) 병조참지 유계가 올린 상소문이 귓전을 때린다.

 조선의 남성 가운데 놀기만 하고 게으른 자가 10명 가운데 8~9명이 차지하고 간신히 남아 있는 선량한 백성에게만 병역을 부담시키고 있습니다.”

 유계는 이 대목에서 균등하면 가난하지 않고, 화합하면 부족함을 걱정하지 않으며 편안하면 나라가 위태롭지 않다.”는 공자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병역의 불평등이 이 지경이니, 무슨 방법으로 민중의 마음을 화합시켜 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순신 가문의 지독한 중국어 교육법을 보라. 이순신 장군의 5대조 할아버지인 이변은 중국어 마니아였다. 과거급제 이후 중국어를 배웠는데, 책상머리에 반드시 공효(功效·공을 들인 보람)를 이루고야 말리라는 다짐구호를 써 붙이고 밤을 세워 공부했다. 중국어에 능통하다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 배웠으며, 식구들이나 친구들을 만나도 반드시 중국어로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참으로 지독한 외국어 공부가 아닌가.

날밤을 지새우기 일쑤였고, 침실에 재해대책본부까지 설치했던 정조의 만기친람을 비난한 신하의 상소를 보라. “임금이 작은 일에 너무 신경 쓰시면 큰일에 소홀하기 쉽습니다.”

19세기 화가 유운홍이 그린 조선시대 조운선. 조운선 운행과정에서 과적과 무리한 운항 때문에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심심찮게 일어났다. 예컨대 태종은 조운선 34척이 침몰하고 사망 실종자가 1000명이 넘는 대형참사가 일어나자 '모든 책임은 네게 있다'고 자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정조도 작은 것을 거쳐 큰 것으로 나가는 법이라고 맞받아쳤으니 워커홀릭의 본능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임금은 허수아비 노릇만 하면 되고, 모든 국사는 똑똑한 재상이 처리하면 된다는 이른바 조선판 책임총리론을 강조한 정도전의 꿈과 야망은 또 어땠는가.

세월호 참사와 같은 대형사건 뒤에 참담한 유언비어가 떠돌곤 했는데, 명종 대의 인물인 상진의 간언을 상기하면 좋다.

유언비어는 참형으로 다스리라 했습니다. 이는 군주가 사람의 입을 막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진 이를 방해하고, 국가를 병들게 하는 말을 금지하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사초를 폐기하고 임금 곁을 떠난 참담한 사관 4인방은 또 어떤가. 이들은 전쟁이 끝나자 줄기차게 관직을 탐했다.

또한 다 쓰러져 가는 명나라를 맹목적으로 섬기려는 자들에게 고려의 실리외교를 배우라고 한 광해군의 한탄은 어떤가.

제발 고려의 외교 좀 배워라. 우리는 큰소리만 치고 있다. 그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또 하나 필자가 주목한 것은 과음으로 죽은 태조 이성계의 맏아들(이방우)이다. 이방우는 아버지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새 왕조 개창을 노골화하자 은둔했으며.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죽은 것이다. 이방우는 고려의 충신이었던 것이다.

나라를 잘못 만나 청나라까지 끌려갔다가 돌아온 환향녀들에게 찍힌 낙인은 화냥년이었단다. 임금 잘못 만나 곤욕을 치렀고, 귀국해서는 가문에서까지 버림받은 부녀자들의 피를 토하는 사연을 들어보라.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의 수많은 계층,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수많은 사건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임금이면서도 임금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정종, 만고의 성군이라면서 능지처참이라는 혹독한 형벌을 남발했던 세종, 연산군보다 더 악질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려 했던 태조와 영조, 인현왕후와 장희빈 등 두 여인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못된 남자 숙종, 지독한 골초로 조선을 흡연의 나라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정조.

또한 율곡 이이와 다산 정약용도 속절없이 당했던 신입생환영회, “소가 물마시듯 하며 술을 마시는 저 사람들은 뭐냐.”원샷풍조를 한탄한 다산, 직접 현장을 적발하지 않으면 간통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선언한 성종 임금, 국가적인 차원에서 노처녀 노총각들의 혼인을 주선한 조선판 솔로대첩’, 개미허리와 긴 생머리를 탐한 그 시대의 패셔니스타들.

이 책을 통해 볼 수 있는 조선의 민낯이다.

 

전 신윤복의 <봄날이여 영원하라>. 남녀간 의 사랑을 담은 풍속화다. 닫힌 방문 앞에 놓여있는 신발 두 켤레가 유난히 눈에 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사기벽에 걸린 이유

 필자가 일찍이 사기벽(史記癖)’에 걸린 이유가 또 있다. 사기가 백성들의 삶을 생생한 구어체로 묘사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陛下欲廢太子 臣期期知其不可”(<사기> ‘장승상 열전’)

 한나라 고조(유방)가 정부인(여태후)가 낳은 태자를 폐하고, 총애하던 후궁(척부인)의 아들을 세우려 했다. 그러자 평소 말을 심하게 더듬었던 주창이라는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언한다.

 폐하가 태자를 폐하시려는데 신은 결~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사마천은 ()()’를 연발함으로써 말을 더듬는주창을 묘사한 것이다. 이로써 말더듬이 주창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 얼마나 생생한 인물묘사인가.

 장의는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유세가였다. 그의 무기는 세치 혀였다. 어느 날 장의는 구슬을 훔쳤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수백대의 매질을 당했다, 그의 아내는 겨우 집에 돌아온 남편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장의와 부인의 대화가 이어진다.

 내 혓바닥이 아직 있는지 보구려.(視吾舌尙在不)”

 혀는 있구려!(舌在也)”

 그럼 됐소!(足矣)”(<사기> ‘장의열전’)

 <사기>는 장의가 빼어난 유세가라는 사실을 하나의 사례를 들어 내러티브로 구성하고 있다.

 이것이 무려 2000년 전에 쓴 역사서이다. 지루하지 않고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역사서. 사마천이야말로 20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도 범접하기 어려운 천재 스토리텔러라 할 수 있다.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사마천과 <사기>를 마냥 부러워할 필요는 없겠다.

 <사기>처럼 백성의 역사라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에게도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살아 숨 쉬는 역사, 그런 역사를 쓴 사관들이 있었으니까.

 중종 연간에 동지사 김안국이 여자 사관(史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왕과 왕비 등의 사생활까지 기록한다는 것이니 중종이 내심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밝힐 수는 없는 일. 중종이 고심 끝에 했다는 말은 마음이 올바른 여자라야 여자사관이 될 수 있다.(必正之女 然後可而)”는 것이었다. ‘마음이 고와야여자 사관을 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또 성종이 1481~83년 사이, 송영이라는 사람을 사헌부 장령과 지평에 임명하자 대간들이 아우성쳤다. 그러자 성종이 버럭했다.

 아니 송영이 무슨 배우냐, 도적이냐.(瑛俳優歟 盜賊歟) 왜 이리 난리를 떠는가.”

 서슬퍼런 연산군 시절, 사정기관(사헌부) 하위 공무원(6품 정언)인 조순이 칠순의 재상 노사신에게 했다는 막말 탄핵그의 살코기를 씹어 먹고 싶습니다.(欲食其肉)”였단다.

 오죽했으면 다름아닌 연산군마저도 “(그 같은 막말을 한 위인이라면) 임금이라고 공경하겠느냐(予雖服袞冕 其有恭敬之心乎)”고 비아냥대면서 문제의 조순을 처벌하려 했다. 이번에는 승정원까지 나서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그러자 연산군은 이렇게 야유를 보냈단다. “승정원도 대간들을 퍽이나 두려워하는구나.(承政院多畏臺諫)”

 1744(영조 20)의 일이다. 50살이 된 영조 임금은 10년 전, 그러니까 40살에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가져와 신하들와 품평회를 열었다. 이 장면을 묘사한 <승정원일기>를 보라.

 지금의 용안은 옛날 모습과 다릅니다.(比今天顔 有非昔時矣)”(장득만)

 현저히 다른가?(顯異乎)”(영조)

 크게 다릅니다.(大異也) 수염과 머리카락도, 성상의 안색도 (10년 전) 어진과 다릅니다.(不但鬚髮之異昔 玉色亦異於此眞矣)”(이종성)

 “(웃으며) 경들은 평소에 날 보고 하나도 늙지 않았다고 하더니. 지금은 무슨 말인가.(上笑曰 卿等每以予爲不老矣 今何其如此耶)”(영조)

 모두들 임금의 면전에서 폭삭 늙으셨다며 눈치없이 돌직구를 던지자 영조 임금이 투덜거린다.

 저기(10년 전 초상화)에도 흰수염은 있구먼 뭐.(彼猶有鬚白處矣)”

 어떤가. 270년 전의 어전회의를 생중계로 보고 있는 느낌이 들지 않은가. 이 모든 멘트는 누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임금과 신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은 역사 기록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참전한 명나라군의 철수를 기념해서 그린 <천조장사전별도>. 포르투갈 흑인용병 4명이 참전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몸집에 너무 커서 말에 타지 못하고 수레에 탔다는 기록에도 부합된다. |한국국학진흥원  

 ■위대한 기록

 <흔적의 역사>를 쓰면서 새삼 기록의 위대함을 느낀다.

 예를 들어 영조가 대신들과의 밀담을 사초에서 지웠을 때 전직 사관들이 한탄했다고 한다.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어도 사필은 굽힐 수 없습니다.(頭可斷 筆不可斷). 앞으로 엄청난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 태종이 노루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지자 급히 일어서며 한다는 말은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勿令史官知之)’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말이 <태종실록>에 기록된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당대의 사관이 사관이 모르게 하라는 임금의 명령까지 역사에 기록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태종이 편전까지 사관이 입시할 필요가 없다는 명을 내리자 당대의 사관은 묵직한 돌직구를 던졌다고 한다.

 사관의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上有皇天)”

 하기야 천하의 폭군이라는 연산군 마저 임금이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서 뿐(人君所畏者 史而已)’이라고 했다니까.

 <흔적의 역사> 칼럼은 20118월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처음에는 6장 내외의 신문용 원고분량에 맞추다가 조금 뒤부터 집필의 시스템을 바꿨다. 옛 자료를 찾을 때마다 끊임없이 엮여 나오는 무궁무진한 역사의 팩트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했듯이 저렇게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담겨있는데 어찌 앙상한 뼈대만 추려 정리한다는 말인가. 결국 아이템별로 30~60장 분량으로 양껏 풀어놓은 뒤 신문용으로는 사정없이 줄여 게재하는 방법을 써왔다. 신문용이 아니라 블로그용, 인터넷 용으로만 쓴 꼭지도 다수 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축적한 130여 회 꼭지 가운데 조선시대부분만 뽑은 것이다.

 필자는 역사학자는 아니다. 천생 기자다. ‘기자는 이야기꾼이어야 한다고 여기는 기자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옛 사람들의 이야기에, 발자취에, 흔적에 흠뻑 빠져 살고 있는 이유이다.

 물론 하루하루 새로움과 깊이를 좇는 일간 신문에서 서슴없이 소중한 지면을 내어준 회사야 말로 필자의 가장 든든한 밑천이고.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