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일까. 그 찬란한 백제금동대향로가 왜 사찰의 공방지 바닥에 있는 나무물통에 은닉된 채 발견됐을까. 발굴을 총지휘했던 신광섭 당시 부여박물관장의 추측.
660년 무렵 나·당 연합군의 약탈·유린이 시작되자 스님들은 창졸간에 임금의 분신과도 같은 향로를 감춘다.
그들은 조국이 멸망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저 며칠만 숨겨 두면 괜찮을 것이라는 요량으로 황급히 향로를 공방터 물통 속에 은닉하고는 도망친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조국은 허망하게 멸망한다. 나·당 연합군은 백제 임금들의 제사를 지낸 절을 철저히 유린한다. 절이 전소되고 공방터 지붕도 무너진다. 백제의 혼을 담은 ‘대향로’도 깊이 잠든다. 그럴듯한 추론이 아닌가.
이렇게 보는 근거는 과연 무엇인가.
향로가 발견된 지 2년 만인 1995년, 이 절터 목탑지 밑에서 또 하나의 깜짝 놀랄 유물이 발견된다. ‘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조사리감’.
‘昌’은 27대 위덕왕(재위 554∼598)의 본명. 명문은 위덕왕 13년(정해년·567년) 누이동생, 즉 성왕의 따님이 사리를 공양한다는 내용이다.
신광섭은 삼국유사나 일본서기, 한서의 ‘소제기(昭帝紀)’ 등에서 맏공주를 의미하는 ‘上公主’ ‘長公主’ 등이 ‘兄公主’와 뜻이 같다고 보아 성왕의 맏딸, 즉 위덕왕의 맏누이동생이 사리를 공양한 것으로 해석했다.
위덕왕의 아버지 성왕(재위 523∼554)은 한성백제 몰락과 공주 시대의 정치적인 위기를 극복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맡는다. 그는 불교를 백제중흥의 기반으로 삼는다. 그러나 성왕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뒤를 이은 위덕왕은 그처럼 비명에 간 아버지를 기리며 국가적 추복불사(追福佛事)의 일환으로 이 목탑을 지었을 것이다.
절터 목탑지에서 확인된 석조사리감. 성왕의 맏딸이자 위덕왕의 누이동생이 사리를 공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현재 기단만 남아있는 이 목탑지를 발굴하다보니 이상한 현상이 목격됐다. 목탑의 심주(心柱)가 도끼로 처참하게 잘려 있었고, ‘창왕’ 명문 사리감도 비스듬히 넘어져 있었다. 이는 절을 유린한 적군들이 목탑의 사리장치를 수습하려 마구 파헤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다.
스님들은 조국이 멸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터. 그만큼 백제가 강대국이었다. 642년 7월, 의자왕은 신라 미후성을 비롯, 40여개 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8월에는 유능한 윤충(允忠)장군이 신라 낙동강 전선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던 대야성(합천)을 함락시켜 신라를 누란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오죽했으면 651년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그만 괴롭히고) 빼앗은 신라의 성을 마땅히 돌려주라”고 의자왕에게 국서를 내렸을까. 당 고종은 국서에서 “만약 백제가 빼앗은 성을 신라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법민(法敏·훗날 신라 문무왕)의 요청대로 왕(의자왕)과 결전을 벌일 것이며 고구려와 약속하여 구원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의자왕은 이듬해(652년) 당에 조공을 보낸 것을 빼고는 그 뒤부터 사실상 당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한 상태로 운명의 660년을 맞이한 것이다.
해동증자(海東曾子)로 일컬어질 만큼 지극한 효자였던 의자왕. 그는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는 등 강국의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어느덧 자만심과 타성에 젖어 독재자로 변질됐으며 요녀로 악명 높았던 군대부인(君大夫人)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충신들을 쫓아냈다. 충신인 성충(成忠)이 옥사하고 흥수(興首)가 귀양 갔으며, 그 빈자리를 신라의 간첩망에 포섭된 좌평 임자(任子) 같은 인물로 채웠다.
무엇보다도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지 못해 나당연합군 결성을 수수방관한 점은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신광섭은 “막강한 백제는 외교실패와 내부갈등으로 속절없이 멸망했다”면서 “나무물통 속 금동대향로는 바로 그 비운의 왕국 백제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