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는 분서를 자행했다. 그러나 육경(六經)은 사라지지 않았다. 진나라는 갱유를 저질렀다. 그러나 유생들이 끊어지지 않았다.”
청말 민국 초의 사상가인 캉유웨이(康有爲·1858~1927)는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이렇게 평했다. 캉유웨이는 과연 유교 경전(육경)을 포함, 천하의 모든 서적들을 깡그리 불태우고, 모든 유생들을 산채로 묻어버린 진시황의 폭군 이미지를 ‘세탁’하려 했던 것일까.
중국 CCTV <백가강단(百家講壇)> 프로그램에서 <사기>를 강의한 왕리췬(王立群) 교수(허난대)의 <진시황 강의>(김영사)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사기>를 펼쳐 들었다. 진시황이 죽은 때가 기원전 210년이고, 사마천이 <사기>를 쓴 중심연대를 대략 기원전 110년 언저리로 본다면…. 약 100년의 차이라면, 사실상 동시대의 역사인 셈이 아닐까.
바로 그 시대의 사료를 찬찬히 뜯어보면 역사가의 포폄을 걷어낸 후의 ‘당대의 진실’을 가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기>가 기록한 ‘분서갱유’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왕리췬 교수와 함께 살펴보자.
■분서를 단행한 이유
우선 ‘분서를 보자.
기원전 213년(진시황 34년), 제나라 출신의 박사 순우월이 진나라의 군현제(중앙집권체)를 비판하면서 “봉건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직간을 올린다.
“상주 시대 왕조는 천자의 자제와 공신들을 제후로 봉해 왕실을 보위했습니다. 이제 폐하가 천하를 소유하게 됐는데, 자제분들은 오히려 평민으로 지내십니다. 만약 제나라의 전상(田常)이나 진(晋)나라의 육경(六卿)이 나타나면 폐하를 누가 보필하겠나이까.”
순우월이 언급한 전상은 춘추시대 제나라의 대신이었다. 그러나 전상은 주군인 간공을 죽이고(기원전 481년) 평공을 옹립하는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킨 뒤 스스로 재상이 되어 전권을 행사했다.
제나라는 결국 기원전 4세기 말, 나라의 주인이 강씨(강태공의 후예)에서 전씨(전상의 후예)로 완전히 바뀌었다. 춘추시대 진(晋)나라의 ‘육경(六卿)’은 진나라 정치를 좌지우지한 6가문을 뜻한다. 범씨와 중항씨, 지씨, 한씨, 조씨, 위씨 등 6가문이다. 훗날 6경이 내란을 일으켜 한·위·조 등 3가문이 승리를 거뒀고, 진나라가 3등분됐다.
그러니까 순우월은 중앙집권체제 아래서 대신들의 권력이 커진다면 이를 통제하기 매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즉 황제가 위기에 빠질 때 황제의 일가친척이나 측근들이 제후로 있다면 곧 구원하러 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진시황은 순우월의 간언을 공론에 부쳤다. 이 때 승상 이사가 작정했다는 듯 반박에 나선다.
“하상주 3대는 각각 다른 방법으로 천하를 다스렸습니다. 서로의 제도를 반대해서가 아니라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어찌 3대의 일을 본받으라는 것입니까. 전에는 제후들이 서로 다퉜기 때문에 높은 관직과 봉록으로 유사(遊士)들을 초청했습니다. 이제 천하가 안정됐는데…. 지금 모든 유생들은 지금 것을 배우지 않고 옛 것만을 배워 세상을 비난하고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있습니다.”
이사는 “진나라의 전적이 아닌 것은 모두 태우고 박사관에서 주관하는 서적을 제외하고서는 천하에 수장돼있는 시경·서경 및 제자백가의 저작들을 모두 태우게 하라”는 주청을 올린다.
“이제 감히 시경과 서경을 말하는 자는 모두 멸족시키고…. 불태워 폐기하지 않은 서적은 의약과 점복, 종수(種樹) 관련 서적 뿐이며….”
승상 이사의 간언을 들은 진시황은 “그렇게 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것이 ‘분서사건’의 전모다.
■갱유사건의 전모
그렇다면 ‘갱유’의 진실은?
기원전 214년, 방사(方士) 노생이 천하를 통일하고 의기양양하던 진시황에게 은근슬쩍 말을 꺼낸다.
“황제께서 때때로 미행(微行·신분을 알리지 않고 몰래 민정을 시찰하는 일)하시면 악귀를 물리칠 겁니다. 악귀가 사라지면 진인(眞人·신선)이 올겁니다. 황제의 거처를 모르게 하면 아마 불사(不死)의 약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진시황은 이 말을 듣고 전국을 순행했으며, 행차하는 곳을 절대 알리지도 않았다. 또, 방사들을 시켜 ‘불사의 선약’을 구해오도록 했다. 그러나 불사의 선약이 어디 있겠는가. 선약을 구하지 못한 술·방사들이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술사들인 후생과 노생이 “진시황에게 절대 선약을 구해주면 안된다”고 속삭인 뒤 도망가고 말았다.
“황제는 자신의 허물을 듣지 않고 날마다 교만해져서 아랫사람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 속여 황제의 비위만 맞추고 있소. 방술(方術·술법)에 영험이 없으면 (우리는) 사형죄로 즉각 처단될 것이오.”
후생과 노생의 도망소속을 접한 진시황의 배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그렇잖아도 선약을 구하러 갔던 술사들이 돈만 축낸채 종적을 감췄다는 소식이 잇달았던 터였다. 진시황이 분노했다.(<사기> ‘진시황 본기’) “~방사(方士·천문, 의학, 신선술, 점복 등에 종사하는 자)들을 보내 선약을 구하게 했거늘…. 한종(방사)의 소식이 끊기고, 서불(방사)은 막대한 금액을 낭비하고서도 선약을 구하지 못했으며, 서로 불법으로 이익을 챙기며 서로 고발하고 있다는 소식만 매일 듣고 있다. ~노생 등을 존중하여 많은 것을 하사했는데, 이제 나를 비방하면서 부덕을 가중시키고 있으니~ 어떤 자는 요망한 말로써 백성들을 혼란시키고 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진시황이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고발했고, 시황제가 친히 법을 어긴 자 460명을 생매장”했다.
이것이 역시 <사기>에 기록된 ‘갱유’의 전모이다.
■억울한 진시황
그런데 훗날 당나라 시대에 접어들면서 슬그머니 바뀐 것이 있다. ‘분서’가 ‘<시경>과 <서경>을 포함한 모든 서적’으로 바뀌었고, ‘갱유’의 대상이 ‘술사’에서 ‘유생’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후 ‘분서갱유’, 즉 폭군 진시황을 상징하는 고사성어가 굳어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예컨대 후한 시대의 위굉(衛宏)이 편찬한 <고문기자서(古文奇字序)>는 <사기>의 서술과 매우 다르다. ‘갱유’를 언급한 대목을 보자.
진시황이 고문자를 소전(小篆·진시황이 만든 글씨체)과 진나라의 예서로 바꾸려 했다. 그러나 천하의 지식인들이 따르지 않았다. 논쟁이 분분해졌고, 진시황은 지식인들을 죽여야겠다는 음모를 굳히게 됐다. 그런 다음 천하의 지식인들을 여산으로 유인해 파묻었다.”
<사기>와 <고문기자서>의 차이는 엄청나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사기>는 이른바 ‘갱유’ 사건의 책임을 ‘진시황을 속인 방사들’에게 돌렸다. 그러나 <고문기자서>는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천하의 지식인들을 죽이고자 한 ‘진시황’에게 돌렸다. 그런데 <고문기자서>의 편찬자(위굉)는 후한 광무제(재위 25~57) 시대 인물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썼던 시기(기원전 110년 정도)보다 150년 정도 후대 사람이다.
당연히 앞선 자료인 <사기>의 기록을 더 신뢰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위굉은 사료의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채 진시황을 폄훼했다. 그런데도 후대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신뢰감이 떨어지는 위굉의 설을 따랐다. 진시황을 천하의 폭군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후대 사람들의 낙인은 그렇게 무서웠던 것이다.
■‘사기’를 읽어봐라
그런데 남송 시대의 대학자인 정초(1104~1162)가 진시황을 위한 변명에 나선다.
진시황의 ‘분서경유’가 그리 대단한 사건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실 <사기>를 정독하면 정초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들이 꽤 많을 것 같다.
먼저 정초는 그의 대표작 <통지(通志)>에서 “진나라는 유학을 끊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진시황이 파묻어 죽인 유생은 ‘일시적으로 의견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까지 들었다.
즉 한나라 초기 대표적인 유학자인 육가(陸賈)와, 한나라 건국 때 의례를 제정한 숙손통(叔孫通) 등은 모두 진나라의 유생들이었다는 것이다. 정초는 특히 진나라 조정의 대조박사(待詔博士)였던 유학자 숙손통이 휘하의 유가 제자 100명을 인솔하고 한왕 유방에게 항복했음을 떠올렸다. 이것은 진나라 때에도 유학과 유학자들이 엄연히 활약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사실 <사기>의 분서사건을 읽어보면 ‘귀책사유’가 진시황보다는 황제를 속인 ‘방사들’에게 있었음을 판단할 수 있다. 물론 헛된 불로장생을 꿈꿨던 진시황의 죄도 있지만 황제를 미혹시킨 방사들의 죄가 훨씬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진시황이 생매장한 자들은 유생보다는 방사(술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설혹 그 가운데 유생들이 끼어있었다 해도 “그저 짧은 시간에 발생한 일회성 사건이지 지속적으로 이어진 사건은 아니”라는 게 정초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분서의 진짜 범인
‘분서’를 두고도 진시황은 나름 억울함을 토로할 수 있겠다. 역시 <사기>를 찬찬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진나라 승상 이사는 ‘분서’를 주장하면서 “진나라 전적이 아닌 것을 태우되 박사관에서 주관하는 서적을 ‘제외하고’, 천하에 수장된 시·서경 및 제자백가의 저작들을 모두 태워야 한다”고 했다. 또 ‘의서와 농서 등 실용서’들은 살린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박사관에서 주관하는 서적’과 ‘의서와 농서 등 실용서’는 ‘분서’의 대상에서 뺀다는 것이었다. 흔히 알려져있듯 모든 책을 불살라버릴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하나, <사기> ‘소상국세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유방이 항우에 앞서 함양(진나라 수도)을 접수했다. 한나라 상국 소하(蕭何)는 진나라 궁중에서 법률과 정령(政令·정치 관련 조서 및 명령서) 도서들을 거둬들였다.”(<사기> ‘소상국세가’)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한나라 상국 소하가 ‘상당량의 진나라 전적을 거둬들였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아쉬움이다. 소하가 진나라 귀족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었을 나머지 전적들을 수거대상에서 뺀 점은 천추의 한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왜냐면 유방의 뒤를 이어 함양에 쳐들어온 항우가 ‘살육을 일삼으며 진나라 궁실을 닥치는대로 불살랐고, 그 불길이 3개월이나 계속됐기 때문’이다.(<사기> ‘항우본기’)
이 때 남아있던 모든 궁궐의 모든 서적 또한 불탔을 것이니까. 이 때문일까.
청나라 학자 유대괴(1698~1780)는 <분서변(焚書辨)>에서 진시황을 위한 변명에 나섰다. “한나라 상국 소하와 항우의 죄가 더 크다”면서….
“육경(유교경전)은 진나라에 의해 훼손된 게 아니라 한나라에 의해 그렇게 됐다. 서적이 불탄 것도 이사의 죄가 아니다. 항우의 죄다.”
반면 정초는 특이하게도 ‘분서’의 책임을 ‘학자들 스스로’에게 돌렸다.
“한나라 이후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서적은 100권에 1~2권에 지나지 않는다. (진나라의 분서 때문이 아니다.) 학자들이 책을 읽으면서 지저분하게 주석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것이 경서를 불가피하게 훼손시킨 것이다.”
진시황 때문이 아니라 ‘저분한 주석달기’ 풍조가 ‘서적 훼손’의 주범이었다니….
■백성을 미혹시킨 자들
더욱 면밀하게 살필 것이 있다. 진시황이 ‘분서’사건을 일으킨 원인이다. 역시 <사기>를 읽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진나라 승상 이사가 ‘분서’를 주장하면서 했다는 말이 핵심을 찌른다.
“이제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했는데…. 유생들이 개인적으로 학습하여 조정의 법령을 마음 속으로 비난하고, 저잣거리에 나와 떠벌이며, 백성들과 더불어 비방하는 말을 조성할 뿐입니다. 금지하지 않으면 황제의 위세가 떨어지고, 아래에서는 붕당이 형성될 것이며~.”
무슨 말인가. 전국시대, 주나라 천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을 때 천하의 처사들이 제멋대로의 학설을 쏟아냈다. 맹자는 이를 두고 ‘사설왜리(邪說歪理)’, 즉 사특한 학설과 왜곡된 이론이라 했다.
맹자는 이를 두고 “아버지도 군주도 없는 짐승 같은 인간들의 말”이라 했다. 처사들은 전국시대 최강국인 진나라를 두고도 ‘만진(만秦)’, ‘폭진(暴秦)’, ‘호랑진(虎狼秦)’. ‘무도진(無道秦)’이라는 등 상스런 단어를 총동원해서 진나라를 욕했다. 한결같이 오랑캐이자, 무도하고 포악한 나라라는 비난이었다. 그런데 이제 ‘바로 그 무도한 나라’가 통일의 시대를 연 것이다.
그런데도 이사의 주장처럼 ‘유생이라는 자들이 자신의 학설에 따라 백성들을 미혹시켜 세상을 혼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때 박사 순우월이 ‘봉건제의 부활’을 외치며(기원전 213년) ‘주나라 시대로의 회귀’를 주장한 것이다. 진나라 승상 이사로서는 ‘울고 싶자 뺨 때린’ 격이었다.
청나라 때 문학가인 주이존(朱彛尊·1629~1709)은 바로 그 이사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분서란 ‘처사횡의(處士橫議)’, 즉 근거없이 아무 이론을 마구 내세우는 행태를 작심하고 바로 잡으려 일으킨 것”이라 분석했으니 말이다.
법치국가였던 진나라의 법률은 철저했다. 단적인 예로 연나라가 파견한 자객 형가가 진나라의 대전에서 진시황을 찌르려 했을 때….
진나라의 좌우 대신들은 멀리서 축구감독처럼 큰소리로 고함만 질러댔을 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왜냐. 대신들이 무기를 들고 대전에 오를 수 없다’는 진나라 법률 때문이었다. 황제가 죽을 위기에 처해있는 데도 ‘법대로’를 지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진나라인데, 게다가 통일까지 된 마당에, 저마다 ‘감놔라 배놔라’를 외치는 백가들의 ‘꼬락서니’를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백가의 사설(邪說)만을 기록한 저작만 불태웠으면 욕을 덜 먹을 수도 있었다. <시경>과 <서경>을 태운 것을 두고 너무나 많은 비난에 시달렸기에…. 왕리췬 교수는 이를 두고 “백가의 사설이 혹 <시경>과 <서경>의 형태를 빌려 생명력을 얻을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을 것”이라 분석한다.
그렇다고 보면 진시황을 만고의 폭군으로 만든 <분서갱유>의 오명은 다소 간 ‘세탁’될 수도 있겠다. 캉유웨이의 변명처럼….
■진시황의 진짜 죄상
하지만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씻을 수 없는 진시황의 죄가 있다. 바로 백성을 고달프게 한 죄다.
“천하가 진나라 때문에 오랫동안 고통받고 있다.”(天下苦秦久矣)“
기원전 208년, 진섭과 오광이 거병을 모의하면서 천고에 남을 유명한 말을 나눈다. 진나라의 폭정 때문에 백성들이 도저히 살 수가 없어 거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훗날 한 고조가 되는 유방도 고향인 패현의 장로들에게 진승과 똑같은 말을 하며 거병에 가담할 것을 종용한다. 유방은 자신에게 쓴소리를 해대는 역이기에게도 “이 미친 놈아! 천하가 진나라 때문에 고초를 받고 있는데 무슨 헛소리냐”고 똑같은 소리를 해댔다. 진섭 반란군의 장수로 반군을 모병하던 무신(武臣) 역시 “천하가 한마음으로 진나라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며 지방의 호걸들을 설득했다.
사실 진 제국을 무너뜨린 진섭은 한낱 ‘변방의 수졸’ 신분이었다. 무슨 계획적인 반란도 아니었다. 그저 수졸들 틈에 섞여있다가 갑자기 논밭과 들판에서 들고 일어난 것이다. 유방 역시 고향에서 외상술이나 얻어먹는 무뢰배였다. 작전도 무기도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진섭의 한마디처럼, ‘민심을 잃어버린 진나라의 폭정’이 그들을 일약 난세의 영웅으로 만든 것이다.
“(진섭이)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고 장대를 높이 들어 깃발로 삼았다. 그래도 천하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양식을 짊어진 채로 그림자처럼 따랐다.”(<사기> ‘진시황본기’)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객사한 지 불과 5년 만에 진 제국은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한나라 경제(재위 기원전 157~141년) 때의 인물인 가생(기원전 201~168년)은 진나라의 멸망 원인을 조목조목 분석한다. <신서(新書)>에 실린 그의 논평은 진나라의 과오를 논한 <과진론(過秦論)>이다. 진시황 사후 50~60년 뒤의 분석이니만큼 사실상 동 시대의 평가라 할 수 있다.
“진이 천하를 통일하자 천하의 사인들이 순순히 귀의했다. 약육강식의 전쟁 때문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지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시황은 탐욕스러운 마음을 품고 독단적인 지모를 행해~ 선비와 백성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도를 버리고 개인의 권위를 내세워 문서를 금하고 형법이 가혹했으며, 사술과 무력을 앞세우고 인의를 뒷전으로 여기며….”
가생은 진나라의 멸망을 “인의를 버려 민심이 이반됐기 때문”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또….
“대체로 천하를 얻을 때와 지킬 때의 방법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진나라가 통일 후에도 정치개혁을 하지 않았으니…. 진시황이 상나라와 주나라의 예를 본받아 정책을 시행했다면…. 또 (진시황 사후에도) 진 이세(호해) 역시 고달픈 백성들에게 인정을 베풀고~위신과 인덕으로 대했다면 폭란의 간악한 일도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했다면…’은 아쉬움 속에 그저 해보는 ‘가정’일 뿐이 아닌가. 중국 CCTV <백가강단(百家講壇)> 프로그램에서 <사기>를 강의한 왕리췬(王立群) 교수(허난대)의 <진시황강의>(김영사)를 읽으면서 스스로에게 새삼스런 질문을 던진다. 과연 진시황은 희대의 폭군인가, 천고의 영웅인가. 누가 보면 그런 우문(愚問)이 어디있냐고 비웃을 지도 모른다. 하나 이것은 지난 2000년을 끌어온 뜨거운 논쟁이 아닌가. 사실 ‘민심의 이반’ 측면에서 보면 진시황은 손가락질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아방궁과 만리장성 수축, 그리고 불로장생의 선약찾기, 그리고 분서갱유와 흉노 및 백월의 정벌 등….
지긋지긋한 전국시대의 전쟁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려던 천하의 백성들을 다시 사지로 몰아넣었으니까…. 다만 진시황이 ‘천고의 영웅(千古一帝)’이었음은 맞는 것 같다. 명나라 이지(李贄·1527~1602)가 평했듯이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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