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초 경주 야마구치(山口) 의원에서 공중의로 일하고 있던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1908~1993)가 흥미로운 소식을 들었다. 경북 경주 사정동 영묘사 터(현재 사적 제15호 흥륜사지)에서 독특한 와당인 수막새 한 점이 발견됐고, 일본인 골동품상인 구리하라(栗原)에게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목조건축에서 지붕의 기왓골 끝에 얹는 수막새의 무늬는 대개가 연꽃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수막새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당시 26살의 청년의사 다나카는 구리하라 가게로 달려가 주저 없이 100원을 주고 구입했다.
1934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조선>과 학술지인 <신라의 고와연구>에 이 수막새가 소개됐다. ‘여자의 웃는 얼굴을 조각한 회백색 기와이며, 신라 와당 중에서도 아직 볼 수 없는 희귀하고 섬세한 문양이 특히 이색적’이라는 내용이었다. 제작시기는 7세기 쯤으로 판단됐다. 사람들은 이 얼굴무늬 수막새를 두고 ‘신라의 미소’라 했다.
그러나 1944년 다나카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신라의 미소’도 함께 가져갔다. 그렇게 이 기와는 기억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뒤에도 이 수막새의 존재를 잊지 않았던 이가 있었다. 바로 당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장이던 박일훈(재임 1963~73)이었다. 박 관장은 1934년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이 와당을 소개했던 오사카 긴타로(大阪金次郞)와 편지를 6~7차례 주고 받았다. “와당의 소재를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원로 고고학자인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1911~2011)과도 연락했다. 그 결과 기와를 소장한 다나카가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에서 야하타니시쿠(八幡西區)병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얼굴무늬 수막새도 간직하고 있었다.
와당의 행방을 찾아낸 박 관장은 곧 다나카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기와는 ‘신라의 미소’라 일컬을만큼 한반도에 있어야 제 가치를 인정받는다. 얼굴무늬 수막새를 기증해달라”는 것이었다. 간곡한 편지에 다나카의 마음이 흔들렸다. 결국 8년이 지난 1972년 10월 다나카가 직접 국립경주박물관을 찾아와 얼굴무늬 수막새를 기증했다.
문화재청은 2일 바로 이 ‘신라의 미소’로 알려진 경주 영묘사터 출토 ‘얼굴무늬 수막새’를 보물로 지정예고했다.
수막새는 추녀나 담장 끝에 기와를 마무리하기 위해 사용된 둥근 형태의 와당이다. 틀로 찍지 않고 손으로 빚은 이 수막새는 왼쪽 하단 일부가 사라졌으나 이마와 두 눈, 오똑한 코, 잔잔한 미소와 두 뺨의 턱선이 조화를 이룬 자연미가 돋보인다. 이 수막새가 발견된 장소는 경주 사정리(사정동)였다. 이곳은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왔다. 이 수막새도 한동안 흥륜사 출토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이 절터는 흥륜사가 아니라 영묘사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영묘지사(靈廟之寺)’, 혹은 ‘대영묘사(大令妙寺)’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영묘사는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인 635년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묘사는 유명한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 즉 ‘선덕여왕의 세가지 신비로운 예측’ 중 하나로 알려진 곳이다. 즉 영묘사 옥문지에 겨울인데도 개구리가 모여 우는 것을 본 선덕여왕이 “여근곡에 가면 백제적병이 있을 터이니 가서 죽이라”고 명했다는 것이 ‘지기삼사’ 중 두번째 예측이다. 영묘사에는 또 선덕여왕을 짝사랑하다가 탑을 돌며 불로 변해 죽은 지귀(志鬼)의 일화도 전한다.
선덕여왕의 전설이 담긴 이 절의 어느 건물에 얼굴무늬 수막새가 올려져 있었는지도 궁금할 따름이다.
문화재청은 “지금까지 유일하게 알려진 삼국 시대 얼굴무늬 수막새이자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면서 “신라의 우수한 와당 기술이 집약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기와가 단독으로 보물로 지정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LG 그룹의 로고도 바로 이 ‘얼굴무늬수막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화재청은 또 군위 법주사 괘불도, 예산 대련사 비로자나불 괘불도, 상주 남장사 영산회 괘불도 등 정밀조사를 통해 새롭게 가치가 알려진 괘불도 3건을 역시 보물로 지정예고했다.
괘불도는 영산재, 천도재 등 대규모 야외 불교의식을 위해 제작한 대형 불화다. 1714년(숙종 40년) 화승 9명이 그린 군위 법주사 괘불도는 높이 10m의 비단 16폭에 연꽃을 든 입상의 여래를 중앙에 그려 넣었다. 1750년 제작된 예산 대련사 비로자나불 괘불도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에 배치한 오존(五尊) 형식을 취하고 있다. 상주 남장사 영산회 괘불도는 영산재에 사용된 불화이다. 1788년(정조 12년) 총 22명의 화승이 참여해 완성한 것이다.
문화재청은 이밖에도 사찰 의례 때 사용된 ‘경선사’명 청동북(삼성문화재단)도 보물 지정예고했다. 이 유물은 13세기 청동북 중 기년명이 있는 보기 드문 사례이자 독특한 제작기법을 보여준다. 또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운 중추원부사 장철(1359~1399)에게 발급된 장철 정사공신녹권(천안박물관)도 역시 보물로 지정예고했다. 이 공신녹권은 지금까지 유일하게 확인된 조선 초기 정사공신 녹권이다. 문화재청은 30일간의 예고기간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할 계획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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