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 위엔 하늘이 있다’고 한 선배들의 자랑스러운 직필 전통을 계승하고….”
최근 28개 역사 관련 학회가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성명’에서 자랑스런 사관선배들의 직필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고 했습니다. 궁금합니다. 과연 지금 위기에 빠진 역사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존경하는 바로 그 ‘사관 선배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조선조 태종시대의 사관 민인생과 홍여강이었습니다. 이 분들의 계급은 7~9품에 불과한 전임사관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름은 포털사이트 인물 검색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분을 비롯한 태종 시대의 사관들은 ‘제발 내 곁으로 오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싫어한 태종 임금의 곁을 절대 떠나지 않으려 했습니다. 태종이 누굽니까. 어린 이복동생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동복의 형마저 쫓아낸 뒤 옥좌에 오른 무시무시한 임금 아닙니까. 그런 태종이 “편전에는 들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자 사관 민인생은 하늘을 가리키며 응수했답니다.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임금이 편전 출입을 끝내 막자 민인생은 문틈으로 임금을 엿보다가 유배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홍여강은 어떻습니까. 그 분은 공신들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직필을 위해 몸을 던졌고, 편전 앞 섬돌에서 내관들의 부축을 받고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과연 왜 이렇게 임금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을까요. 왜 임금과 신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려 했을까요. 지금의 역사가들은 왜 이 분들을 새삼스레 기억하고자 할까요. 이번 주 팟캐스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주제는 바로 <어느 사관의 절규,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입니다. 경향신문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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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계는 ‘사관 위엔 하늘이 있다’며 직필을 실천하고자 했던 선배들의 자랑스런 전통을 계승하고….”
지난 10월 30일 전국역사학대회에서 28개 역사 관련 학회가 발표한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성명’에서 ‘권력의 부당한 간섭에 대항한 선배들’을 언급했다. 궁금증이 든다. 과연 그 ‘자랑스런 선배들’은 누구인가.
■지독한 사관 선배들
학자들이 직접 언급한 바로 그 사관 선배들은 바로 조선조 태종 시대의 사관 ‘민인생(閔麟生)’과 ‘홍여강(洪汝剛)’이었다. 조선시대 전임사관의 직위는 기껏해야 7~9품의 하위직이었다. 두 사람은 지금 이 순간도 네이버와 같은 인터넷 포탈 사이트의 ‘지식백과’나 인물검색에도 나오지 않는 사관들이다.
태종이 누구인가. 세자이자 이복동생인 그 어린 방석과 방번 등을 죽이고(1차 왕자의 난), 형(방간)까지 쫓는 등(2차 왕자의 난) 피바람을 일으키며 왕위에 오른 무시무시한 임금이 아닌가. 오죽했으면 형님이자 임금이었던 정종(방과)마저 동생(이방원)만 만나면 부들부들 떨었다지 않은가. 그 모습을 보다못한 부인 정안왕후가 절규했다.
“전하께서는 동생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십니까. 하루빨리 양위하시어 마음 편히 사세요.”(<연려실기술> ‘정종조고사본말’)
반강제로 형의 양위를 받아내고 즉위한 태종에게 감히 어느 누가 잡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사관 민인생이 나섰다.
태종이 즉위한 지 4개월이 안된 1401년(태종 1년) 3월 18일이었다. 태종이 조준·이거이·하륜 등 고관대작과 10여 명의 무신들을 거느리고 하루종일 매사냥을 한 뒤 날이 저물고 나서야 돌아왔다. 그런데 온종일 태종의 눈에 거슬리는 자가 있었다. 임금의 곁을 끝까지 찰싹 달라붙어 ‘얼굴을 가린채’ 뭔가를 끄적대던 민인생이었다. 태종이 찰거머리처럼 따라붙는 저 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민인생이 대답했다.
“신은 사관인데 감히 직사(職事·직무)를 소홀히 할 수 없어 온 것입니다.”
심사가 뒤틀린 태종이 한마디 하려는데, 총제 이숙번이 막아섰다.
“전하. 사관의 직책은 매우 중하옵니다. 원컨대 더는 묻지 말아주소서.”
■사관은 제발 들어오지 마!
윤 3월이 지나고 맞이한 4월 하고도 29일 이번에는 사관 홍여강이 나섰다. 홍여강 역시 대단한 사관이었다. <태종실록> 1401년 2월 20일조를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사관 홍여강이 공신들의 잔치가 열리던 연청(宴廳)에 들어가려다 공신 심귀령에게 매를 맞고 쫓겨났다”는 기록이다. 심귀령은 젊었을 때부터 태종 이방원을 따라다닌 호위무사로 1·2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좌명공신에 오른 인물이었다. 홍여강은 바로 기고만장한 공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기록하려다가 안하무인이었을 심귀령에게 맞았다는 것이다. 물론 홍여강이 속한 춘추관이 심귀령을 비난하는 문서를 보냈고, 사헌부가 탄핵했지만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렇게 봉변을 당한 홍여강이었지만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4월25일, 이번에는 임금의 일상을 기록하겠다고 편전(보평전)에 들어서려 했다. 그러나 태종은 홍여강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편전의 뜰 아래까지 진입했다가 내시들이 홍여강의 팔짱을 끼어 부축한채 내보냈다. 태종의 입장불허 방침은 분명했다.
“무일전(無逸殿)이라면 물론 사관이 좌우에 있어야 해. 하지만 이곳(편전·보평전)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야. 승지(承旨)들이 모두 사관의 직책을 겸했잖아. 그러니 사관이 반드시 들어올 것이 없어.”(<태종실록>)
이 무슨 말인가. 태종은 즉위하자 마자 ‘무일전’과 ‘편전(보평전)’을 따로 조성했다. 태종은 정전이 너무 좁다고 해서 좀더 넓게 고쳐 짓고 무일전(無逸殿)이라 이름 붙였다. 그러면서 정사를 보는 곳을 무일전, 쉬는 곳을 편전(보평전)으로 구분지었다. 그러니 쉬는 곳까지 사관이 올 필요가 있겠는가. 게다가 사관직을 겸한 승지들이 승정원일기를 기록하는데, 전임 사관까지 와서 귀찮게 할 필요가 있느냐. 뭐 이것이 태종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정사를 어떻게 무 자르듯 전각에 따라 구분지어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임금이 편전에서 쉬다가도 대신들을 불러 정사를 논할 수도 있고, 그곳에서 경연장(경전을 논하고 논쟁하는 곳)을 베풀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일기 형식인 승정원일기와 임금·신하의 잘잘못을 엄정하게 평가하는 전임 사관들의 역할은 다를 수밖에 없다.
■사관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홍여강은 결국 쫓겨 나갔지만 이번에는 민인생이 나섰다. 사관들의 저항이 시작된 것이다. 민인생이 다시 편전 문을 들어서려 하자 도승지(비서실장) 박석명이 제지했다.
“이봐. 홍여강도 왔다가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는 주상의 명을 듣고 돌아갔어.”
민인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석명에게 “오히려 전지(傳旨·직접 명령)를 들은 바 없다”면서 편전의 뜰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태종이 민인생을 보았다.
“사관은 어찌 들어왔는가.”(태종)
“전하께서 사관이 좌우에 입시하라고 윤허하셨습니다. 그래서 들어왔습니다.”(민인생)
“편전에는 들어오지 마라.”(태종)
“편전이라 해도 대신들이 정사를 아뢰고, 경연이 열리는 곳인데 사관이 들어오지 않으면 누가 제대로 기록한단 말입니까.”(민인생)
“(웃으며)편전은 내가 편히 쉬는 곳이야. 들어오지 않는 것이 옳아. 그리고 사필은 곧게 써야 하는 것인데 비록 편전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태종)
이때 민인생이 결연한 한마디를 던진다.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으면, 사관의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臣如不直 上有皇天)”
■임금이 밝으면 신하도 곧아집니다
또 그로부터 며칠 뒤인 5월 8일 태종은 경연을 베풀어 정사를 논한 뒤 거나한 술자리를 마련했다. 기분좋은 자리였다. 그런데 이 때 민인생이 사관의 편전 입시문제를 거론했다.
“전하의 오늘 강론은 정말 정교했사옵니다. 원컨대 편전에 앉아 정사를 들으실 때도 사관이 입시해어 그 아름다운 말(嘉言)을 기록하게 하소서.”
이첨·박신·조용·김과 등의 신하들이 민인생의 주장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경연에 사관이 입시하는 것은 가하지만 정사를 듣는 때에 들어오는 것은 좀…. 저희도 고려조 우·창왕 시절 사관이었는데 두렵고 위축되어 감히 임금을 뵙지 못했습니다.”
민인생은 이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은 것입니다. 어찌 감히 전조(고려조)를 오늘에 비교하려 하십니까.(主明則臣直 豈敢以前朝比今日乎)”
술자리 분위기를 깨뜨리는 민인생의 일갈에 ‘좀 더 논의해보고 결정하자’고 미뤘다.
■엿보는 자가 누구냐
태종은 결국 매달 6번씩 관원들이 모여 임금에게 정사를 아뢰는 6아일(衙日)에 한해 사관의 입시를 허락했다. 나름대로 절충안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1401년 7월 8일, 편전에 앉아있던 태종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과연 누군가 문밖에서 엿보고 있었다. 깜짝 놀란 태종이 “어떤 자가 편전을 엿보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내관들이 달려나가 보니 사관 민인생이었다.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까 몰래 훔쳐보며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려 한 것이다. 태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도승지 박석명에게 특명을 내렸다.
“이제부터 사관은 매일같이 입궐하지 않도록 하라.”
결국 사관 민인생은 편전의 휘장까지 걷고 엿보는 등 예절에서 벗어났다는 죄목으로 유배형의 처벌을 받았다.
■아! 지긋지긋한 저 자들!
그러나 민인생·홍여강에 이어 사관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9년 뒤인 1410년(태종 10년) 4월28일 사관 최사유가 민인생·홍여강처럼 편전의 뜰에 들어왔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이 때 태종은 노발대발하면서 “지금부터 정전(正殿)에서 열리는 조계(朝啓·군신들이 모이는 정식회의)를 제외하고 경연청이나 광연루(廣延樓) 같은 곳에는 절대 사관을 들이지 마라”는 엄명을 내린다. 하지만 ‘사관 위에 하늘이 있다’는 사관들의 끈질긴 항거에 태종은 항복하고 만다.
2년 뒤인 1412년(태종 12년) 7월29일 <태종실록>에 태종과 지신사 김여지의 문답내용이 나온다.
“사관이 다시 편전이 들어온 것인 언제부터였지?”(태종)
“경인년(1410년)이옵니다. 사간원이 주청을 올려서 그때부터 들어오게 됐습니다.”(김여지)
“….”(태종)
이 대목에서 <태종실록>은 김여지의 심리상태를 흥미롭게 기록해놓았다.
“김여지는 왜 태종이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했으며, 또 대꾸 조차 하지 않았는지 매우 의심하며 두려워 했다. 임금이 사관을 또 들이지 못하게 할까봐 그런 것이다.”
태종은 ‘최사유 사건’ 이후 사관의 편전 입시를 사실상 전면금지했지만 사간원의 맹렬한 반대로 철회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관들이 뭔가 또 임금의 심기를 건드리는 꼬투리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김여지를 불러 ‘사관의 입시를 다시 금하라’는 명을 내릴까 하다가 겨우 참았음을 <태종실록>은 암시하고 있다.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
당대 사관들의 지독한 직필정신을 일러주는 단적인 예가 하나 있다.
당시 태종은 시도 때도 없시 사냥을 나갔는데 이것은 나라의 안녕에는 큰일이었다. 대신들은 “임금이라 함은 옥좌에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두려워하면서 정사를 펼쳐야 하는데 사냥을 일삼는다”고 아우성쳤다. 사냥을 나갔다가 변을 당하기라도 한다면 이것은 감당할 수 없는 변고였다. 그런데 1404년(태종 4년) 임금이 반대를 무릅쓰고 노루사냥에 나섰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졌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런데 깜짝 놀라 훌훌 털고 일어난 태종이 한다는 말이 걸작이다.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勿令史官知之)”
이 때의 사관은 필시 그 지긋지긋한 민인생이었으리라. 그런데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사관은 태종 임금이 ‘이 일을 모르게 하라’는 말까지 기록해서 결국 <태종실록>에 남긴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후세 사람들이 읽고 있는 것이고…. 결국 당대의 사관들은 천하의 지존인 임금이 쓰지 말라는 것 까지, 즉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이 ‘오프더레코드’를 걸어놓은 것까지 쓴 것이다.
■역사는 백성을 가르치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요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맞서는 역사학자들이 표상으로 여기며 거론한 ‘사관 선배들’이다.
그렇다면 사관 민인생·홍여강·최사유는 왜 그토록 임금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을까. 자그만치 1500여 년 전 진흥왕(재위 540~575)에게 신라의 역사서 국사(國史)의 편찬을 권하던 이찬 이사부의 말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국사는 군신의 선악을 기록하여 후대의 엄정한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국사가 편찬되지 않으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습니까.”(<삼국사기>)
이사부는 ‘역사는 백성의 잘잘못이 아니라 군신의 잘잘못을 기록하고, 그것으로 후대의 평가를 받는 것’이라 강조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란 군주가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대신)의 잘잘못을 가려 후대의 평가를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춘추>를 쓰며 견지했던 춘추필법이다. 공자는 ‘훗날 군주가 될 사람들의 참고용’으로 <춘추>를 썼다고 누누이 강조했다.(<사기> ‘공자세가’)
그랬으니 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쓰자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했다’고 한 것이다.
위정자가 백성을 가르치려고 역사를 기록했다는 대목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러니 위정자가 감히 역사를 백성에게 가르치려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포폄을 거스르는 난신적자라 할 수 있다.
■보도자료로만 기사 쓸 것인가
그러니 제대로 된 학자들이라면 보수든 진보든 가릴 것 없이 역사교과서의 국정화에 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뉴라이트 계열이든, 진보 계열이든 상관없이 역사가가 아닌 위정자가 백성을 가르치려는 책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스스로 역사가임을 포기하는 자들이다. 비유하자면 언론사 기자 더러 정부가 제공하는 보도자료만 갖고 기사를 쓰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아무리 보수·진보 언론의 기자라도 보도자료 만으로 기사를 쓰라면 가만 있겠는가. 기자도 일종의 사관이 아니던가. 역사가에게는 든든한 ‘백’이 있다. 민인생의 말대로 사관의 위에 있는 ‘하늘’이다. 여기에 붙이자면 ‘춘추필법’이 있다. 이 ‘춘추필법’에 따라 역사에 반하는 난신적자들은 1000년이 지나 썩은 해골이라도, 혹은 구족(九族)을 멸해서라도 반드시 주벌된다고 했다. 모두 역사서(<명종실록> <광해군일기> 등)에 일관되게 나오는 내용들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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