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는 자가 당대의 정치를 비방하는 글을 지어 조정의 길목에 내걸었다.”
888년(진성여왕 2년) 신라의 도읍지 서라벌에서 당시의 정치를 비난하는 벽보(榜·대자보)가 붙었다.
그것도 조정의 길목, 번화가에 붙은 비방문이었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나라 사람들이 비방문을 길 위에 던졌다(書投路上)”고 했다. <삼국사기>는 “벽보(혹은 대자보)를 붙였다”고 했지만, <삼국유사>는 “전단을 뿌렸다”고 한 것이다. 어찌됐든 글 내용은 알쏭달송했다. 다라니(밀어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비밀로 하려는 주문 같은 것)의 은어로 쓰여 있었다.
“나무망국찰니나제(南無亡國刹尼那帝) 판니판니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 우우삼아간(于于三阿干) 부윤사바아(鳧伊娑婆訶)”(<삼국유사> ‘기이편·진성여왕 거타지조’)
진성여왕(재위 887∼897년)은 “당장 비방문을 써서 내다 건(뿌린) 자를 잡으라”는 엄명을 내렸지만, 수사는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 때 어떤 자가 “범인은 분명 기용되지 못한 문인일 것”이라면서 대야주(합천)에서 은둔 중인 왕거인이라는 자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왕의 특명에 따라 긴급체포된 왕거인은 처형당하기 일보직전이 됐다.
진성여왕 때 서라벌 조정의 길목에 등장한 대자보(혹은 전단)의 내용을 소개한 <삼국유사>. ‘진성여왕과 신라는 망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라는 이 때 소판 위홍 등 3~4명의 총신과 여왕의 유모인 부호 부인 등이 정치를 농단하고 있었다.
■서라벌 대자보 사건
그러자 무죄를 주장하던 왕거인은 “분하고 원통하다”면서 감옥의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연단(燕丹)의 피어린 눈물 무지개가 해를 뚫었고, 추연(鄒衍)의 품은 슬픔 여름에도 서리 내리네. 지금 나의 불우함 그들과 같으니, 황천(皇天)은 어이해서 아무런 상서로움도 없는가.”
연단은 전국시대 연나라 마지막 태자인 단(丹)을 가리킨다.
자객 형가를 시켜 진왕(진시황)을 죽이려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앙앙불락한 진나라가 연나라를 침공하자 연나라 왕은 태자 단을 죽여 진나라에 바쳤다. 또 전국시대 음양오행가인 추연(기원전 305~240)은 주변의 모함으로 옥에 갇혔다. 억울했던 그가 하늘을 우러러 곡을 하자 초여름인 5월에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왕거인은 결국 연나라 태자 단과 추연처럼 억울한 지경에 빠졌음을 읊은 것이다.
왕거인이 감옥에서 벽서를 걸자 그날 저녁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벼락이 내리치면서 우박이 쏟아졌다. 진성여왕은 이 기이한 현상을 두려워한 나머지 왕거인을 석방해줬다.
■“신라여 망하라! 여왕이야 망하라!”
그렇다면 서라벌 조정의 길목에 붙었다(혹은 뿌려졌다)는 수수께끼 같은 벽보(혹은 전단)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찰니나제는 진성여왕을 가리킨 것이요,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소판(관작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우삼아간은 진성여왕의 측근에 있는 3~4명의 총신이고, 부이는 부호를 가리킨다.”(<삼국유사>)
‘나무(南無)’는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으로 절대적인 믿음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나무망국’은 나라가 망하기를 절대적으로 바란다는 뜻이다. 맨 마지막의 ‘사바하(娑婆訶)’는 앞의 주문내용이 반드시 이뤄지기를 바란다는 불교용어이다. ‘소판’은 진성여왕의 숙부이자 정부(혹은 남편)인 위홍의 관작(신라 17관등 중 세번째)이다. ‘부이’는 진성여왕의 유모를 가리킨다. <삼국유사>의 표현대로 당대 신라는 유모인 부호부인과 애인 위홍 등 3~4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농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자보(혹은 전단)는 ‘신라여! 여왕이여! 위홍과 부호 등 때문에 망하리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대자보에 담긴 망조의 기운
진성여왕 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천년사직에 접어들던 신라는 진성여왕대부터 망조가 든다. 극심한 왕위쟁탈전과 경제혼란으로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삼국유사>의 표현처럼 몇몇 총신들이 권력을 잡았고, 지방에서는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889년(진성여왕 3년) 원종과 애노의 반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조정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은 이른바 시무 10여조를 제시했지만(894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진성여왕은 귀족들의 변화를 이끌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라는 이후 급속도로 망국의 길로 빠진다. 905년(효공왕 9년) 궁예가 신라를 침범했으나 방어할 힘이 없어 성만 지키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도선 선사는 공공연하게 “신라의 운수는 이제 끝”이라고 주장했다. 궁예는 미륵이 나타나 새 세상을 열 것이라는 미륵사상을 퍼뜨렸다.
결국 서라벌 조정의 길목에 걸린(혹은 뿌려진) 대자보(혹은 전단)는 신라 망국의 신호탄 같은 것이었다. 대자보(전단) 이후 47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으니까….
■“여주(女主·문정왕후)가 정치를 농단하고 있다!”
1547년(명종 2년) 9월18일에 일어난 양재역 벽서사건은 어떤가.
이 때 붙은 벽보의 글씨는 매우 선동적인 붉은 글씨였다.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女主執政于上)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다.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됐다. 어찌 한심하지 않는가. 중추월 그믐날.”
이 무슨 벽보인가. 여기서 ‘여주’는 다름아닌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를 일컫는다.
문정왕후는 오빠인 윤원형(즉 명종의 외숙)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1545년) 윤임(죽은 인종의 외숙) 일파를 숙청했다. 벽서에 언급된 이기는 당시 병조판서로서 윤원형과 손잡고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괘서는 바로 이 어수선한 정치상황을 꼬집은 것이다. 그런데 이 벽서는 오히려 윤원형 일파에게 ‘정적 몰이’의 명분을 주었다.
“괘서(대자보)가 나도는 것은 여전히 불온한 생각을 갖고 있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이로써 윤원형 일파는 을사사화 때 쫓아내거나 죽이지 못한 반대파들을 모조리 색출해서 피바람을 일으킨다. 이것을 정미사화, 혹은 벽서의 옥이라 한다. 하지만 이 때의 벽서 역시 그냥 붙은 게 아니었다.
■임꺽정이 출현한 까닭
벽서가 붙은 지 12년이 지난 1559~62년, 즉 3년 동안 임꺽정이 황해도 일대를 휩쓸었다.
1559년 3월27일 다름아닌 중추부 영사 윤원형 등 당대의 실권자가 모여 도적떼를 없앨 계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요원의 들불처럼 퍼지는 도적을 막지 못했다. <명종실록>을 쓴 사관이 핵심을 찔렀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요즘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다.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사관은 “중앙 조정과 지방 수령이 깨끗하면 칼을 잡은 도적이 송아지를 사서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 덧붙였다.
결국 큰 도적은 임꺽정이나 그를 따르는 백성들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외면한채 조정에 피바람을 일으키는데만 골몰한 ‘여주(女主) 세력’, 즉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였던 것이다. 12년 전 대자보가 붙은 이유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호미로 막을 일이었던 것이다.
■대자보 베껴가는 백성들
조선 중·후기로 넘어가는 숙종 때는 어떤 일이 있었나.
“1684년 이후 무뢰배가 서로 모여 계를 만들었다. ~살주계가 있었는데 그 계의 책자에 ‘양반을 살육할 것, 부녀자를 겁탈할 것, 재물을 약탈할 것’이라는 약조가 있었다. 어떤 검계는 ‘장차 난리가 나면 양반을 아내로 삼을 수 있다’고 공언하기도 했다.”(<연려실기술> ‘숙종조 고사본말’)
숙종의 46년 재위동안 잦은 환국정치와 노·소론의 갈등 등이 염증을 불렀다.
백성들 사이에서 바야흐로 천민층을 중심으로 비밀결사조직이 결성되는 시기였다. 신분제가 동요되던 시기였던 것이다. 결코 태평한 시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익명의 대자보가 6번이나 붙었다. 1679년(숙종 5년) 우의정 오시수의 상언이 당대의 상황을 일러준다.
“인심이 깨끗하지 못해 차마 듣지도 못할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말로 여러 신하의 죄목을 꾸미고 익명서를 만들어 민가나 관아의 담장에 붙이거나 널리 퍼뜨리고, 백성들이 일시에 몰려들어 다투어 적는 것이 마치 과거장의 문제를 베끼듯 합니다.”(<비변사등록>)
■대자보 붙이면 교수형이다
그러자 아주 촘촘한 처벌규정을 만들었다. 그것이 이른바 ‘익명서정죄사목’이다.(<비변사등록>)
우선 익명서를 투서한 자는 ‘대명률’(명나라 형법서)에 따라 교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만약 방을 붙인 것이 대로변이면 부근에 사는 사람이, 관청이면 수직자가, 개인집이면 집주인이 즉시 불살라야 했다. 만약 그렇게 처리하지 않은 자는 유배 3000리와 전가족 변방 부처의 처분을 받았다.
그렇지만 대자보와 전단은 줄지 않았다. 숙종 때는 1675~1720년 사이에 6차례나 익명의 대자보가 붙었다.
1679년(숙종 5년)에는 “누구 누구가 나라에 원한을 갖고 날짜를 정해 난을 일으킨다”는 익명서까지 대궐문에 붙었다. 1711년(숙종 37년)에는 대청외교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숭명배청의 의리를 내세워 빨리 청나라를 공격하라는 내용의 대자보가 영은문에 걸렸다. 대자보는 명나라 태조 때 편찬된 <홍무정운>의 자체를 그대로 따랐다. 범인을 중국인으로 위장한 것이 틀림없었다.
조정은 대대적인 범인색출에 나섰지만 오리무중이었다.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죄로 포도대장 유취상과 종사관을 투옥시키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범인을 무리하게 색출하는 과정에서 무고사건이 잇따르는 등 후유증까지 낳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끝내 범인을 잡지못한채 종결되고 말았다. 1714년(숙종 40년)에도 “도둑이 숭례문에 익명서를 건 사건이 있는데 말이 지극히 부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른바 숭례문 괘서사건이다.
■대자보가 동시다발적으로 걸린 까닭
영조는 손자인 정조와 함께 조선의 중흥기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52년 간의 장기집권이었던 탓도 있지만,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설 때문에 민심의 이반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경종독살설은 결국 1728년 무신난(이인좌의 난)으로 비화했다.
그 해(1728년) 1월 서소문에 괘서(掛書)가 붙었다. 지경연사 김동필이 영조에게 고하는 장면을 보라.
“1월 11일 서소문에 괘서가 붙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전주의 괘서와 같다고 합니다. 전주 괘서는 호남 사람들이 다 목격했답니다. 그런데 남원 시장에도 흉서가 걸렸는데 서소문에도 걸렸으니….”
그러자 영조는 “전주와 남원에 이어 서소문 괘서는 모두 한사람의 소행인듯 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실 이 시기에 한성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도적이 쳐들어 온다는 소문과 함께 창의문 밖에 적병이 출몰했다는 유언비어까지…. 이 때문에 한성 인근의 백성들은 물론 남산 아래 사대부들까지 가족을 이끌고 피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때문에 나루터 길이 막히고 경기도 일대 안성과 용인 등은 마을이 텅 빌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영조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면서 4개 읍의 수령을 급히 무신으로 교체했을까. 그러나 영조는 전주와 남원에 이어 서울 서소문에까지 걸린 괘서의 범인 색출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인다.
“선왕(숙종) 때 연은문에 흉서가 걸렸는데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다. 혹시 사소한 원한을 갚으려고 무고하는 경우도 있고 죄없는 사람이 걸려들기도 하니….”(<영조실록>)
영조는 이른바 비공개수사를 통해 범인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20여 일이 지난 뒤 다시 한성부의 종가에서 또 한차례의 대자보가 걸렸다. 이때부터 공개수사로 바꿨다.
“어떤 요망한 사람이 이 윤기(倫紀)없는 요악한 말을 지어내어 민중을 미혹시킬 계획을 하는데 부도(不道)할 뿐 아니라 곧 난민(亂民)이니….”(<영조실록> 1728년 2월 19일)
이 대자보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경종 독살설과 관련, 당시 파다하게 퍼졌던 소문을 담았을 것이다. 그런데 영조가 공개수사를 통해 범인색출작전을 펼친 지 불과 25일 뒤(3월15일)에 무신난이 발생했다.
■차마 표현할 수 없었던 ‘부도지언(不道之言)’
무신란이 무엇인가.
경종 독살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 탄(坦)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한 거병이었다. 무신난에는 영남에서만 7만명, 전국적으로는 20만명이 가세하는 등 엄청난 기세를 탔다.
이 때 난을 이끈 이인좌가 “(반란군의) 군중에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조석으로 곡을 했다”(<당의통략>)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3월26일 체포된 이인좌 등의 진술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거병에 앞서 서소문·종가·남원· 전주에 대자보를 붙임으로써 조정을 혼란에 빠뜨리고자 했던 것이다. 난이 일어났을 때 진압군에게 혼선을 빚게 하려고 전국 각지에 대자보를 붙인 것이다.
과연 대자보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얼마나 망측했기에 영조 시대의 각 문헌은 그저 ‘부도지언(不道之言)’이라는 표현만 썼을까. 심지어 영조는 사관에게 특별히 “괘서의 내용을 절대 기록하지 말라”는 엄명까지 내린다.
아마도 ‘영조 당신은 이복형(경종)을 독살하고 임금이 된 자야!’라고 외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다!”
그로부터 27년이나 흐른 1755년(영조 31년)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가 급히 장계를 올렸다.
나주 객사에 대자보가 붙은 것이다. <영조실록>은 그것을 ‘흉서(凶書)’라 했다. 대대적인 범인 색출에 나섰다. 가뜩이나 하수상한 시절이었다.
“신축년(1721년·노론 4대신 등 노론이 쫓겨난 사건)과 임인년(1722년·목호룡 고변사건) 때의 잔당과 무신년(1728년·이인좌의 난)의 잔적들로서 번성한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이 나라를 원망함이 심각하고 근거없는 말이 날마다 일어났는데, 이 때 흉서가 걸렸다.”
흉서의 내용은 그야말로 흉(凶)했다. 역시 워낙 참담한 표현이어서 자세히 쓸 수는 없다고 했다.
내용 가운데는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有奸臣滿朝 民陷塗炭)”는 구절이 들어있었다.
장계를 받아본 영조는 기막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황건적 같은 무리구나. 틀림없이 무신년(이인좌의 난)의 잔당이다. 그러나 과인은 무신년 때도 동요되지 않았다.”
이같은 일이 다반사이니 걱정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어찌보면 의연하게 대처하려는 영조의 여유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혼란한 시대였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어쨌든 대대적인 수사 끝에 흉서를 내건 일당이 붙잡혔다. 주범은 윤지라는 인물이었다.
윤지는 무신난(이인좌의 난) 때 제주도를 거쳐 나주로 유배됐다가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다. 윤지는 고문을 받다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영조는 분을 참지 못하고 대역죄의 형벌로 그의 목을 베고 그의 집을 헐어 그 자리에 연못을 파는 형벌을 받고 말았다.
이 나주괘서 사건으로 죽은 이가 41명, 유배 20명 등 모두 65명이 엄벌을 받았다.
이렇듯 나름 치세에 선전했다는 평을 듣는 영조지만 이복형 독살설 때문에 재위내내 골머리를 앓았다. 역시 당대의 민심은 분명했던 것 같다. ‘당신은 이복형을 죽이고 임금이 된 사람이야’라는 손가락질이 받았던 것이다. 재위기간 내내 무려 15번이나 흉악한 대자보가 붙을만큼….
■“나의 거병을 따르라!”
1801년(순조 1년) 경상도 하동·의령·창원에서 민란을 선동하는 대자보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문장력이나 무예, 힘이 있으면서 하는 일이 없고 실농한 사람들은 나의 거병을 따르라. 재상이 될만한 자는 재상을 시키고 장수가 될만한 자는 장수를 시키며 지혜로운 자는 부림을 얻을 것이요, 꾀 있는 자는 가까이 할 것이다. 가난한 자는 풍요로움을 얻을 것이며, 두려워하는 자는 숨겨줄 것이다.”(<승정원일기> 1801년 12월 26일)
하안 무명에 한자로 쓴 대자보의 밑에는 ‘十爭一口(십쟁일구)’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사람들은 이 수수께끼 같은 ‘십쟁일구’의 뜻이 무엇인지 설왕설래했다. 수사 과정에서 실마리가 잡혔다.
‘십쟁일구(十爭一口)’에서 ‘爭’의 윗부분에 있는 ‘爪(조)’는 글씨를 보면 ‘月(월)’자와 비슷하고, 밑의 ‘尹(윤)’은 ‘甲(갑)’으로 보인다는 것. 또 ‘一’은 ‘口’와 합치면 ‘日(일)’이 된다는 것. 따라서 ‘시월갑일(十月甲日)에 세상이 뒤집힌다’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10월 갑자일인 21일에 변란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또 대자보 가운데는 ‘일인지구(一人之口) 이과지비(二戈之卑) 사두지자(四頭之字) 일자지열(一目之烈) 인물사원(人勿思遠) 삼칠가려(三七可慮)’라는 파자와 함께 ‘힘있는 자는 뒤를 따르고 힘없는 자는 산속으로 들어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잇달아 대자보를 내건 이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거나 유랑하던 지식인들이었다.
■대자보(전단)의 본질
‘진선(進善)의 정(旌)’이라는 고사가 있다.
중국 요 임금이 길가에 기(旗)를 세워놓고, 임금에게 교훈이 될만한 말(선언·善言)을 드릴 자가 있으면 그 깃발 아래 서게 하였다는 것이다.
반면 옛날 주나라 여왕은 비방하는 자를 감시했고, 그들이 입을 놀리면 죽였다.
그러자 점차 비방하는 사람들이 드물어졌다. 백성들은 감히 말하지 못하고 길에서 만나면 눈짓으로 뜻을 나눴다. 그러자 여왕은 재상 소공을 불러 자랑했다.
“그것보시오. 내가 비방을 없애버리니 아무도 감히 말하지 않게 되었소. 어떻소.”
그러자 소공은 손사래를 쳤디.
“아닙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을 막는 것보다 심각합니다. 물이 막혔다가 터지면 어떻습니까. 둑이 터지는 것 처럼 엄청난 피해자가 나올 것입니다. 물을 다스리는 자는 수로를 열어 물이 흐르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백성들이 말하게 해야 합니다.”
소공은 “정치를 잘하고 못함이 다 백성들의 말에 반영된다”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무릇 백성은 속으로 많은 생각을 하는 존재이며, 그들이 입으로 말하는 것은 속으로 많이 생각한 연후에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왕은 소공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3년 뒤 백성들이 연합해서 난을 일으켰고 여왕은 왕위를 빼앗겼다.(기원전 841년) 이후 두 재상인 소공과 주공이 14년간이나 정무를 공동으로 맡았다. 그것을 역사는 ‘공화(共和)의 시초’라 일컫는다. 앞서 거론한 대자보 사건을 관통하는 공통의 시사점은 무엇인가.
바로 대자보(혹은 전단)는 민심이 이반되고, 정치가 어지러울 때 혹은 망조가 들 때 어김없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자보의 출발은 ‘백성과의 불통’이다. 백성이 목숨을 걸고 익명서를 걸거나 뿌릴 때의 시대는 혼란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 언제나 상기해야 할 금과옥조는 이것이다.
‘백성은 물이고, 임금은 배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전복시킬 수도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순자> ‘왕제’)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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