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왕조시대냐’는 말이 심심찮게 나옵니다. 불통과 오만, 그리고 신하 위에서 군림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을 찍어내려고 하는 대통령을 두고 왕조시대의 여왕이니, 왕조시대에나 있을 법한 행태라느니 하면서 걸핏하면 ‘왕조시대’ 운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묻습니다. 왕조시대가 뭐 어떻다고 왕조시대 왕조시대 하는 것입니까. 이번 주 팟캐스트에서 다룰 주제가 바로 ‘함부로 왕조시대를 욕보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왕조시대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요즘 돌아가는 정치상황을 보면 왕조시대가 100번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가 증명하는 왕조시대는 임금이 적어도 백성을 하늘로 여기고 받들었습니다. 임금은 기상이변이나 예기치 않은 재난이 일어나면 어김없이 ‘모든 게 내 잘못이며, 백성을 아프게 하고 있으니 나를 위해 쓰디쓴 직언을 서슴지 말라’고 했습니다. 특히 다산 정약용은 “직언을 하는 자는 결코 임금을 배신하지 않는다”고까지 했습니다. 옛 군주들은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왜 쓴소리, 즉 직언을 구했을까요. 그리고 신하들은 왜 죽을 각오로 바른 말, 곧은 말로 군주를 다그쳤을까요. 마지막으로 궁금합니다. 군주들은 왜 거슬리는 신하들의 쓴소리를 벌하지 않고, 되레 장려했을까요. 이번 주 팟캐스트 역시 관심있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경향신문 이기환 논설위원
“‘백성을 물이고, 임금은 배다. 물은 배를 띄울 수 있지만, 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고 했습니다.”
1502년(연산군 8년) 한치형과 성준, 이극균 등 3정승이 연산군에게 시폐(時弊) 10조목을 올렸다. 말하자면 임금의 잘못된 정치, 즉 실정(失政)을 10가지나 뽑아 ‘아니되옵니다’를 외친 것이다. 상대가 누군가. 이미 무오사화로 피바람을 일으킨(1498년) 폭군 연산군이 아닌가. 하지만 정승들의 말을 곱씹어보면 살벌하기만 하다.
‘백성을 물로, 임금을 배’로 비유한 대목은 <순자> ‘왕제(王制)’편에 나온다. 그러니까 정승들은 ‘임금 당신이 잘못하면 백성이 당신을 갈아 치울 수 있다’고 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에게 ‘당신 백성 손에 죽을 수도 있다’고 협박하고 있으니 말이다.
예컨대 삼정승은 “전하께서 후원에서 내시들과 함께 장난이나 치고, 사사로운 잔치나 벌이고 있으니 이게 옳은 일이냐”고 힐난했다. 그런데 연산군의 응답이 뜻밖이다. 치도곤을 내기는커녕 “경들의 말이 옳다”고 고개를 끄덕였으니 말이다.(<연산군일기>)
■직언하는 자는 배신하지 않는다.
연산군이 그 정도였으니 다른 임금들은 어땠을까. 흔히들 임금 마음대로 철권을 휘두르고 백성 알기를 우습게 아는 것이 왕조시대 군주의 모습이라 비유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왕조시대의 ‘으뜸 덕목’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신하의 ‘직언’과 임금의 ‘소통’이었으니까 말이다. 다산 정약용의 말을 들어보라.
“아첨을 좋아하는 자는 충성하지 못하고 간쟁을 좋아하는 자는 배신하지 않는다. 사람을 쓸 때는 반드시 이 점을 살피라고 주문한다.(<목민심서> ‘이전·吏典·용인’)
무슨 말인가. 최근 ‘배신의 정치’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다산은 되레 “할 말을 할 줄 아는 신하는 배신할 줄 모르고, 되레 아첨을 떠는 신하가 배신한다”고 한 것이다. 다산은 “무릇 바른 말을 하는 신하라야 군주를 배반하지 않는다”면서 “윗사람은 이런 이치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딱잘라 말했다.
다산 뿐인가. 이익은 “바른 말을 하고 극진하게 간언하는 신하야말로 국화(國華·나라의 권위와 위엄)”라고까지 했다.(<성호사설> ‘인사문·직언이국’)
“사람의 언론은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 자만 있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하는 자가 없다면 멸망이 임박한 것이다.”(<성호사설> ‘직언극간’)
여말선초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권근은 “군주가 지나친 직언을 했다 해서 죄를 주면 다음부터는 두려워해서 할 말을 못하게 된다”면서 “이것은 언로(言路)를 막는 것”이라 했다.
“신하의 말이 지나쳤다 해도 그 마음은 나라를 위한 충성입니다. 아부·아첨으로 제 몸만 도모하는 자와 같겠습니까. 되레 직언을 권장해야 합니다.”(<양촌선생문집> ‘상서류’)
■언로는 곧 인체의 혈맥
그런데 군주와 나라에게 직언은 왜 필요할까. 권근의 말마따나 언로를 뚫어야 했기 때문이다.
왜 언로를 뚫어야 했을까. 언로가 뚫리지 않는 나라는 곧 죽은 나라였으니까 그렇다. 1450년(문종 즉위년) 사헌부 장령 신숙주가 올린 상소를 보라.
“언로는 혈맥과 같습니다. 혈기가 조금이라도 통하지 않으면 온몸에 병이 발생합니다. 언로가 하루라도 통하지 않으면 사방에 병이 발생하여 군주가 편치 않게 됩니다.”
신숙주는 그러면서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직언과 극간(極諫)이며, 비록 귀에 거슬리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있더라도 꾹 참고 들어줘야 한다”고 진언한 것이다.(<문종실록>)
중국 주나라 여왕은 감시의 시스템을 작동시켜 백성의 입을 틀어 막았다. 백성이 입을 놀리면 죽였다. 백성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 여왕은 재상 소공에게 “내가 비방을 없애버리니 아무도 말하지 않게 됐다”고 자랑했다. 소공은 이 때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을 막는 것보다 심각하다”면서 “만약 막혔던 둑이 터지면 어찌 되겠느냐”고 충언했다.
“백성은 속으로 많은 생각을 하는 존재이며, 그들이 입으로 말하는 것은 속으로 많이 생각한 연후에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왕은 소공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3년 뒤인 기원전 841년 백성들이 연합해서 난을 일으켰고 여왕은 왕위를 빼앗겼다.(<사기> ‘주본기’)
■폐하는 폭군입니다.
사실 군주에게 바른 말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한비자>는 유명한 ‘세난(說難)’에서 임금에게 직언하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비린지위(批鱗之危)’라는 용어를 써가며 설명했다. 신하는 군주의 총애를 받을 수 있지만, 즉 용(군주)의 등에 탈 수도 있지만, 만약 너무 지나치면, 즉 용의 턱 밑에 거꾸로 난 비늘(鱗)을 건드리면 군주의 노여움을 사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임금의 노여움을 무릅쓰고 감행하는 직언을 ‘비린(批鱗)’이라 했다.
‘비린’으로 유명한 이가 한나라 창업공신이자 지독한 말더듬이라는 주창(周昌)을 들 수 있다. 주창은 한나라 고조 유방의 최측근이었다. 하루는 유방이 “나는 어떤 군주냐”고 묻자 주창은 “폐하는 걸주와 같은 폭군입니다(桀紂之主)”라 외쳤다. 유방이 정부인인 여후의 맏아들을 제치고 애첩 척희의 아들을 태자로 삼겠다는 유방을 ‘폭군’이라 소리친 것이다. 말을 심하게 더듬었던 주창은 황제 면전에서 “기, 기, 기어코 그 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期期期知其不可)”라 고함쳤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지독한 직언은 아마도 시간(尸諫)일 것이다. 시체(尸)가 되어서도 임금에게 바른 말을 한다(諫)는 뜻이니까 말이다. 시간의 주인공은 바로 춘추시대 위나라 대부였던 사추였다. 당시 위나라에는 거백옥이라는 충신이 있었고, 미자하라는 간신이 있었다. 위나라 군주 영공은 미자하를 무척 총애했다. 사추는 생전에 그토록 “거백옥을 등용하고 미자하를 내치라”고 임금에게 간했지만 소용없었다. 훗날 지병으로 죽음을 앞둔 사추가 아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내가 결국 임금을 바로잡지 못했구나. 죽어서도 예(禮)를 이룰 수 없다. 내가 죽으면 시체를 창 아래에 두어라.”
사추가 죽자 조문하러 온 위령공이 자초지종을 듣자 크게 깨달았다. 위령공은 마침내 거백옥을 등용하고 미자하를 내쳤다. 사추는 시체가 되어서도 임금에게 직언을 했고. 마침내 그 뜻을 이룬 것이다. 이보다 지독한 간언이 어디 있겠는가.
■직언의 끝판왕 열전
직언의 끝판왕으로 즐겨 인용되는 역사인물 가운데 주운(朱雲)과 신비(辛毗) 두 사람이 있다.
주운은 한나라 성제(재위 기원전 32~7) 때의 인물이다. 두려움없는 간언으로 이름을 떨쳤다. 당시 한나라 성제가 스승으로 존경하던 인물이 있었다. 안창후(작호) 장우였다. 주운은 그 장우가 황제 앞에서 바른 말을 하지 못한채 녹만 축내고 있다고 여겼다. 주운은 대신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목숨을 건 직언을 서슴치 않는다.
“폐하. 저에게 칼 한자루를 주소서. 무능한 자의 목을 베어 본보기로 만들까 합니다.”(주운)
“간신배라니 누구를 가리키는가.”(한 성제)
“안창후(장우의 작호)입니다.”(주운)
자신이 신임하는 정승을 목베겠다는 말이 아닌가. 성제는 “저 자를 당장 끌어내라”고 소리쳤다. 호위병들이 주운을 끌어내려 달려들었다. 하지만 주운은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전각 난간을 붙들고 매달렸다. 그러면서 소리쳤다. “안창후 장우의 목을 쳐야 합니다. 폐하!”
옥신각신하는 사이 난간이 뚝 부러졌다. 사건이 마무리되고 부러진 난간을 교체하려 했을 때 황제가 명을 내렸다.
“저 부러진 난간을 바꾸지 말고 그냥 맞춰 놔라. 목숨을 걸고 직언한 신하의 충성을 기려야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꺾을 절(折) 난간 함(檻)’의 ‘절함’의 고사이다.(<한서> ‘주운전’)
신비(辛毗)는 삼국시대 위나라 문제(재위 220~226) 때의 인물이다. 문제(조비)가 기주(하북성) 지방의 가옥 10만호를 하남으로 옮기려 했다. 대신들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문제는 “반대하는 자는 죽여버리겠다”고 입단속을 시켰다. 이때 신비만이 나서 조목조목 따졌다.
“폐하가 신하들에게 벼슬을 내린 까닭이 무엇입니까. 저희가 사사로운 일을 아뢰는 것입니까. 다 나라를 염려하는 것입니다. 어찌 노여워만 하실 수 있읍니까.”
황제는 신비의 간언에 한마디 대꾸도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신비는 황제의 옷자락을 끌어 당겼다. 황제는 옷을 떨친채 신비를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의 옷소매가 떨어져 나갔다. 잠시 후 황제가 나와 신비에게 물었다.
“왜 짐의 옷을 잡아 당겼느냐.”
“폐하는 민심을 잃고 백성은 먹고 살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떨어진 용포 자락의 반만 옮겼다. 이것이 바로 ‘견거(牽거·옷자락을 당겼다)’의 고사이다.(<삼국지> ‘위서’)
조선시대 임금들은 가뭄이나 홍수, 지진과 같은 재변이 일어나면 반드시 직언을 청하는 ‘구언교서’를 내렸다. 임금들은 "모든 재변은 못난 임금 탓이며, 불쌍한 백성을 생각하면 죽고싶지만 그럴 수 없다“면서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직언을 해달라“고 자세를 낮췄다. 사진은 <해동연표>에 등장하는 태종 때 구언했다는 기사.
■직언을 구하지 않는 자는 폭군
다른 사람이 대놓고 나에게 싫은 말을 하면 기분 좋을 리 없다.
더구나 지존이라는 임금이나 황제가 쓴소리를 참고 듣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군 혹은 성군이라면 쓴소리 듣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왕조시대 군주들이 즐겨 인용하는 이가 바로 한나라 문제(기원전 180~157)이다. 그는 과거의 한 과목으로 직언과 극간을 채택해서 바른 말을 잘하는 선비를 관리로 선발했다. 자그만치 2100년 전의 군주인데, 이 얼마나 선진적인 지도자인가.
이후 왕조시대 임금들은 줄기차게 직언을 구했다. 직언을 구하지 않는 자는 폭군이라 폄훼됐다.
북제-수-당나라 등 3왕조에서 벼슬을 한 배구(裴矩)를 보라. 북제가 망하자 수나라로 간 배구는 양제에게 아첨해서 신임을 받고 우문술(宇文述·?~616) 등 5명과 국정을 농단했다. 그는 618년 우문술의 반란이 실패한 뒤 당나라에 투항했다. 그런데 당나라에서의 배구는 180도 달랐다. 배구는 당 태종에게 “백성을 덕으로 인도하라”는 등 충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자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이 한결같아야지 왕조와 임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냐는 것이다. 아무리 어리석거나 포악한 군주라도 죽을 각오로 바른 말을 해야 충신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서> ‘배구열전’을 쓴 역사가는 흥미로운 평가를 가한다.
“군주가 직언을 싫어하면 충성이 아첨으로 변한다. 군주가 직언을 즐거워하면 아첨이 충성으로 변하는 것이다. 임금은 형체이고 신하는 그림자다. 따라서 형체가 움직이면 그림자가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모든 허물은 평소 직언을 좋아하지 않은 수 양제 탓이지, 배구의 탓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 태종이 화낸 까닭
그랬으니 옛 군주들은 미치도록 직언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명군, 현군, 성군 소리를 역사서에 남겨야 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중국 진(晉)나라 황제는 새해 정월 초하루가 되면 대궐 안의 뜰에 백호준(白虎尊·뚜껑을 백호로 장식한 술그릇)을 설치해놓았다. 새해 첫 조회 때 직언을 서슴치않는 대신에게 술 한 잔 하사했다.
직언과 관련해서는 당태종의 일화가 자주 인용된다. 그만한 성군에는 그만한 신하가 있다는 소리다. 하루는 당 태종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조회를 일찍 파했다.
“내 저 자를 죽일거야.”
재상 위징(魏徵·580~643)이 심한 말로 황제를 욕보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당태종의 부인 문덕황후가 오히려 남편에게 “축하드립니다”라 하례했다. 당 태종이 그 이유를 묻자 문덕황후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군주가 명철하고 신하가 정직하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니 축하드려야죠.”
태종은 그제서야 깨닫고 더불어 기뻐했다.(<정관정요>) 이 위징이라는 인물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위징은 황제가 매를 좋아해서 늘 어깨 위에 올려놓고 즐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나깨나 백성만을 생각해야 할 황제가 매나 키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차였다. 태종도 대쪽같은 위징을 늘 의식했다. 어느 날 매를 평소와 다름없이 매를 어깨 위에 올려놓고 즐기던 태종은 위징이 오는 것을 보고는 그 매를 품 속에 숨겼다. 그 모습을 본 위징은 일부러 오랫동안 나가지 않고 황제와 국사를 논했다. 황제의 애가 닳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품속에서 숨을 쉬지 못했던 매는 결국 죽고 말았다.(<자치통감> ‘당기·唐紀’)
■세종도 직언을 싫어했다
<실록>을 보면 우리 역사 속 임금과 신하들 가운데도 대단한 분들이 많았다.
예컨대 조선 역사상 가장 임금노릇을 하기 싫어했던 정종 임금조차 “경연 때마다 간관 1명은 반드시 입시해서 과인의 잘못을 직언으로 고하라”는 명을 내릴 정도였다.(1400년)
서슬퍼런 태종 때도 마찬가지였다. 1403년(태종 3년) 태종이 사냥에 정신을 팔리자 대간들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하늘의 경계를 조심하고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늘 두려워하고 삼가소서. 백성을 두려워 하소서.”
그것은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제 아무리 성군이었다지만 세종 임금도 직언은 귀에 거슬리기 마련이었다.
1440년(세종 22년) 고약해(高若海)라는 인물이 아주 무례한 어조로 세종 임금에게 직언을 쏟아냈다. 그러자 세종은 해도해도 너무한다면서 “저 무례한 자를 탄핵하도록 하라”고 사헌부에 특명을 내렸다. 하지만 사간원 우헌납 김길통이 득달같이 나서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아니 신하가 가볍게 진언하는 것이 아닌데 만약 임금이 고약해를 죄로 다스린다면 어느 누가 감히 임금에게 바른 말을 하겠습니까. 고약해는 생각한 바를 반드시 진술했습니다. 게다가 전하께서 일찍이 충직(忠直)하다고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좀 무례했더라도 죄를 묻지 마시고 언로를 넓히시옵소서.”
이에 세종은 “너희 말이 옳지만 과인은 직언을 미워한 게 아니라 그 무례함을 미워한 것일뿐”이라고 변명했다.
1440년(세종 22년) 사간원이 세종 임금을 맹비난한다. 임금이 도성 안의 사찰인 흥천사를 보수한 뒤 이를 경축하는 경찬회를 열려하자 벌떼처럼 일어난 것이다. 유교국가에서 웬 사찰중건이며, 무슨 경찬회냐는 것이었다.
“불씨(석가모니)를 존중하자는 겁니까. 게다가 여러 해 흉년이 들었고 농사도 여의치 않은데 어찌 홀로 무익한 일에 재물을 쓰고 뭘 축하한다는 겁니까. 급히 명령을 거두소서.”
세종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절이 중창되었으니 이를 축하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면서 “그리고 당장 하자는 한 것도 아니고 하중에 하자는 것인데 뭐 그리 빡빡하게 구냐”고 맞섰다. 그렇지만 사간원은 “나중에 하든, 지금 하든 경찬회는 절대 안된다”면서 “전하의 성덕에 누를 끼칠 것”이라 경고했다.
■사과의 법칙
왕조시대 군주들은 기상이변이나 대형사고 등 갖가지 재변이 닥쳤을 때마다 이른바 ‘구언(救言·임금의 잘잘못에 비판의 말을 구하는 일)’을 내렸다.
그런데 구언, 즉 직언을 구하는 임금들의 태도도 음미해볼만 하다. 즉 재변의 시기에 임금이 내리는 교지의 형식이 일정하다는 것이다. 어김없이 ‘나같은 소자(小子)가 외람되게 나라를 맡아’ ‘보잘 것 없는 내가 즉위한 이래’… 등등처럼 한결같이 겸손한 말로 시작된다.
그러면서 ‘모두 임금의 책임이며, 임금을 잘못 만난 백성을 생각하면 죽고싶은 심정’이라 한다. 그런 뒤 ‘모두 임금의 부덕에서 비롯된 소치이니 임금의 허물을 낱낱이 지적하고 앞으로의 대책을 마련해서 가리지 말고 올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무리 심한 직언이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마무리 짓는다. 이 모두가 재난에 맞서는 왕조시대 임금의 자세이다. 예컨대 1656년(효종 7년) 서남부 지방에 기상이변이 일어나자 효종이 내린 ‘직언을 구하는 교서’를 보라.
“내가 나라를 다스림이 보잘것 없어 기상이변이 발생했다. 두려움과 걱정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 죽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직언을 구해서 이 어리석은 자질을 변화시켜라.”
기상이변이 일어난 것은 부덕한 임금 때문이며, 그래서 죽고싶은 심정이란다. 임금의 진심이 묻어나오는 <실록> 기사가 아닐 수 없다.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도 마찬가지였다. 1660년(현종 1년) 기상이변으로 가뭄과 황충, 그리고 그에 따른 기근이 닥쳤다. 이삭이 나올 때인데 20일이 지나도록 비 한방울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종은 “이 모든 허물이 나에게 있는 것이지 고단하게 사는 백성들이 무슨 죄냐”고 한탄했다. 3년 뒤인 1663년(현종 4년)에도 가뭄이 계속되자 현종은 “차라리 금방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괴로움을 토해냈다. 백성이 모조리 죽게 생겼으니 국가가 누구를 의지하겠느냐는 것이다.
■‘죽고만 싶다.’
1690년(숙종 16년) 가뭄이 극심하자 숙종 역시 ‘구언’을 내린다.
“하찮은 소자(小子)가 외람되게 어려운 사업을 받아…덕이 모자라 홍수·가뭄 등의 변이 거르는 날이 없구나.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가엾은 우리 백성은 장차 죽음이 가까왔다. 차라리 죽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구나. 직언(直言)을 구한다. 임금의 부덕과 잘잘못을 숨김없이 아뢰라. 어떤 말이라도 죄주지 않을 것이다. 재변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1723년(경종 3년) 가뭄이 극심하자 경종이 내린 교지도 숙종의 것과 판박이다
“아! 보잘것 없는 내가 즉위한 이래 비상(非常)한 재앙과 홍수·가뭄·바람·우박 등의 참혹함이 거의 달마다 곡식을 해쳤고…. 하늘이 두려움을 주고 잘못을 고쳐 주려는 것이다. 임금이 반성해야 한다. 직언을 구하라. 광망(狂妄)한 직언이라도 용납할 것이다. 지금 내린 재이(災異)는 모두 무덕(無德)한 나의 소치이니….”
1725년(영조 1년) 영조 임금이 구언을 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아!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써 하늘을 삼는다. 하지만 백성은 곤궁하고 역질마저 겹쳤으며, 탐관오리가 죽은 사람에게까지 군포와 병역을 부과한다. 슬프다. 게다가 붕당을 만들어 아부하는 풍습이 요즘보다 심할 때가 없구나. 누구의 허물인가. 나의 허물이다.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밥맛도 없다.”
■‘대체 뭐하십니까’
그렇게까지 임금이 ‘내가 죽일 X이고, 모든 게 내 책임’이라고 전제했음에도 신하들의 직언은 폐부를 찌른다.
예컨대 1626년(인조 4년) 사헌부 대사헌 정경세 등이 인조 임금을 다그친다.
“(인조)반정 초기엔 백성을 지성으로 아끼셨는데…. 이젠 방백(관찰사)와 수령들이 백성들을 죽여도 머리카락 까닥하지 않고 가만 앉아계십니다. 백성 사랑하는 마음이 처음만 못하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직언을 포용하는 아량도 처음만 못합니다. 직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역린했다는 노여움만 삽니다. 이렇게 하셔서는 안됩니다. 통렬히 반성하시고….”
인조는 그저 “모두 나의 허물이 쌓인 탓”이라고 인정했다. 그렇지만 <인조실록>의 기자는 그조차도 부족하다고 꼬집고 있다.
“이 상소문은 임금을 조용하고 간곡하게 이끄는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상(임금)은 이 상소문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없다. 애석한 일이다.”
1635년(인조 13년) 이조참의 유백증은 ‘임금이 획기적으로 분발하라’고 주문한다.
“인심이 원망하여 이반하고 백성이 극도의 고생을 겪는 것은 전하가 안민에 뜻을 두지 않아서입니다. 또 언로는 국가의 혈맥입니다. 혈맥이 통하지 않고서 몸이 제대로 보존되겠습니까. 임금이 의심으로 아랫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을 술법으로 삼지 마소서.”
■‘내 잘못인데 당신이 왜 물러나’
1650년(효종 1년) 영의정 이경여가 막 즉위한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은 어떤가. 시중의 여론을 들먹거리고 있다.
“전하께서 초심을 잃었다는 것이 제가 들은 여론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위란의 지경에 빠졌다는 겁니다. 아! 천명은 믿기 어렵고, 인심은 쉽게 떠납니다. 임금의 도량이 좁고 사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겁니다.”
그러면서 이경여는 “제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경여의 상소도 상소지만, 효종의 반응은 더 음미할만 하다.
“부끄럽고 두려움이 교차한다. 허물을 반성해보니 망연자실할 뿐이다.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말 한마디 글자 하나인들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내가 띠에 써놓고 언제나 마음을 가다듬는 자료로 삼겠다.”
그러면서 효종은 “그런데 경(이경여)이 왜 물러나려고 하느냐”면서 “모든 것은 전적으로 임금이 하늘에 죄를 얻어서 내려진 재앙”이라 했다.
“날이 가물고 황충(메뚜기)이 발생한 것은 내가 어리석어 하늘에 죄를 얻었기 때문이다. 내 책임인데 경이 왜 사직하려는가.”
효종의 마지막 말이 백미다.
“나와 같이 일할 만한 자격이 없다고 하여 날 버리지 마라. 날마다 숨김없이 직언을 올려라. 그래서 나로 하여금 선(善)한 정치를 하게 하고, 허물을 고칠 수 있게 하라.”
임금 앞에서 꼿꼿이 서서 잘잘못을 따진 뒤 물러나려는 신하에게 “모든 것은 내 잘못”이라 쿨하게 인정하고 “내 잘못인데 당신이 왜 그만 두냐”는 임금의 태도를 보라.
대단한 임금에, 대단한 신하가 아닌가.
■재변이 없으면 되레 망한다
하고 싶은 말이 <정조실록>에 나와 있다.
“1784년(정조 8년) 임금이 직언을 구했다. ‘그대들도 유의하라. 그대들은 미리 유의하여 내 이 말이 또 실속 없는 데로 돌아가게 하지 말라.’”
그러면서 정조가 한마디 덧붙인다.
“<서경>을 보니 신하가 임금을 바로잡지 못하면 묵형(墨刑)에 처한다고 했다. 너희들은 힘쓰라.”
임금이 직언을 널리 구하면서 “직언은 대신들의 의무이며, 직언하지 못하는 자는 죄를 받는다”고 독려한 것이다.
또 있다. 재변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이다. 1798년(정조 22년) 좌의정 채제공이 무지개가 해를 관통한 일 때문에 임금에게 ‘선정을 베풀라’고 청한다. 채제공의 언급이 의미심장하다.
“오히려 재변이 없는 나라는 위태로운 법입니다. 재변이 없다는 것은 하늘이 그 나라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재변이 없다는 것은 속된 말로 하늘조차 포기한 나라라는 뜻이라는 거다. 왜냐면 싹수 있는 나라라야 하늘이 때때로 경계하라는 뜻으로 재변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의 공구수성을 권해 임금 스스로 깨닫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떤가. 이래도 왕조시대를 폄훼하는 발언을 일삼을텐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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