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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릉 송백'의 치욕을 절대 잊지마라"…일본에 사신단을 보내는 영조가 눈물로 신신당부했다

최근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조선통신사 재현선을 체험형 문화공간으로 활용한 ‘선상박물관 문화기행’을 4월 28일부터 10월 20일까지 운영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올해 ‘선상박물관 문화기행’은 전남 목포를 중심으로 문화유산 소개, 옛 뱃길 산책, 수중발굴유적지 탐방, 문화예술 공연, 체험 등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특히 옛 뱃길을 따라가는 운항경로는 연구소에서 출발하여 천연기념물 갓바위, 삼학도, 목포항구, 고하도, 달리도 수중발굴현장, 시하바다를 둘러보는 여정이다.
조선통신사선은 지난 2018년 실물크기인 길이 34.5m, 너비 9.3m, 깊이 3.0m, 총 137t수로 재현했다.
이런 배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4년간 12차례에 걸쳐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들을 태웠다. 한번에 300~500명 정도가 파견됐으며, 5~10개월 걸린 긴 여정이었다. 조선국왕이 일본의 막부 장군(쇼군·관백)에게 보내는 외교사절을 ‘조선통신사’라 했고, 일본이 조선국왕에게 파견하는 사절단은 ‘일본국왕사’라 했다.

1763년 에도 막부를 방문중인 조선통신사 일행의 행렬도이다. 조선통신사의 규모는 5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가는 곳마다 수많은 환영인파가 시문을 나누고, 필담을 나누려 몰려들었다고 한다.  

■고구마를 도입한 외교관

조선이 외교사절을 일본에 보낸 것은 세종 때부터였다. 1429년(세종 11) 교토(京都)에 파견된 정사 박서생(생몰년 미상)의 사절단이 최초의 통신사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전에는 주로 왜구 금지요청이 주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국교가 단절됐지만 전쟁이 끝난 뒤 새롭게 들어선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1543~1616)의 에도(江戶)막부(1603~1867)가 조선과의 화친을 강력하게 원했다. 그래야 막부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화 학술의 선진국인 조선과의 교류 측면도 염두에 두었다.최고 500명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 일행이 최장 10개월간 일본에서 체류하면서 쓰는 경비는 일본으로서도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2차례나 조선통신사를 받아들일만큼 일본의 이익이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물론 조선으로서도 일본의 국내 사정을 탐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교과서에서 배웠듯이 고구마를 도입한 것도 바로 조선통신사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 조선통신사가 바로 1763년(영조 39년) 파견된 계미통신사(사행단)이다. 정사(사절단장)인 조엄(1719~1777)이 이끄는 계미통신사가 쓰시마(對馬島)에 들러 고구마 종자를 들여왔다. 알다시피 고구마는 대표적인 구황작물이다. 좋지않은 기상조건에서도 수확할 수 있으니 굶주린 백성들의 배를 채울 신기한 작물이었다.그런데 이 계미통신사의 파견은 고구마 도입 뿐 아니고 ‘우여곡절’, ‘파란만장’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사건 사고가 많았던 여정이었다. 

<조선통신사래조도>. 1848년 아네가와 도에이의 그림이다. 조선통신사에 대한 환영열기를 그렸다. 가히 18세기 한류열풍이라 할 수 있다.고베시립박물관 소장 

■잊지마라 ‘이릉의 송백’

계미년인 1763년(영조 39) 7~8월, 영조는 일본으로 떠나는 사절단을 접견한다. “임금(영조)께서 통신사로 떠나는 세 사신을 불러 친히 ‘이릉송백(二陵松柏)’의 글귀를 외웠다. 임금은 목이 메고 눈물을 머금은 듯 했다. 그러면서 친히 ‘호왕호래(好往好來)’, 즉 ‘잘 다녀오라’는 네 글자를 직접 써서 사신들에게 나눠주었다.”(조엄의 <해사일기>)“임금이 사신들을 불렀다. ‘그대들에게 시 짓는 능력이 있는지 먼저 시험해보고자 하니 글을 짓고 차례로 제출토록 하여라.’”(원중거의 <승사록>)영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첫번째는 ‘이릉송백’의 치욕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릉’이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도굴되어 시신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던 선릉(성종)과 정릉(중종)을 뜻한다. 왜란 이후 윤안성(1542~1615)이 포로귀환을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사신단에게 지은 시가 바로 ‘이릉의 송백’ 시다. 즉 ‘왜적에 훼손한 선릉과 정릉에서 소나무와 잣나무 가지가 자라지 않는다(二陵松柏不生枝)’는 회한에 가득찬 시이다. 영조는 150여 년 전 ‘이릉의 치욕’을 절대 잊지말라고 당부한 것이다. 또 영조는 왜 사설단원들의 시문을 시험해보겠다는 것이었을까.사절단이 가면 반드시 일본의 문사들과 ‘시문 배틀’을 벌일 것인데 그 배틀에서 조선의 우월성을 일본인들에게 한껏 과시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영조는 “‘정주(程朱·정자와 주자의 성리학)의 존재를 모르는 오랑캐(일본인)들에게 충신독경(忠信篤敬)을 가르치라”고 명했다. 사신단의 서기로 참여한 원중거(1719~1790)는 떠나기 직전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예의의 나라인 조선이 관복을 단정하게 하고 행동과 위엄있는 법칙을 잃지 않고 ‘정주’가 아니면 말하지 않고, 경서(經書)가 아니면 인용하지 않겠습니다.”(<승사록>)이때 떠난 사절단을 역사는 ‘계미통신사행’이라 일컫는다. 

계미사행단이 귀국 직전 한달간이나 머물러야 했던 오사카. 일본인에 의해 조선 외교관이 피살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조선 외교관 보려고 인산인해

통신사 일행은 일본열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조선에서 온 통신사 일행을 보기위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시를 주고받으려고 온 자, 필담을 나누려 온 자, 구경하러 온 자 등 수백명이 몰려들었다. 요즘의 K팝 스타들을 연상하면 좋을 듯 싶다. 조선사신들의 글을 받으려고 ‘새치기’하는 자들도 나왔다. 그럴 때마다 사절단은 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정중하게 타일렀다.“그대에게 부끄러운 낯이 있으니 이것은 덕으로 나가는 기본입니다.”조선 사절단은 일본인들이 건네는 선물도 일절 받지 않았다.     “(우리가 하도 건네주는 선물을 받지 않으니 일본인의 무리가) 벼루 두 개씩 선물하면서 ‘이것은 손님을 위한 사람의 정이니 받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나(원중거)는 이렇게 말하며 정중하게 거절했다.”여기서 끝나는게 아니라 원중거는 “군자는 사람을 덕으로 아낍니다. 우리가 돌아갈 때 짐이 깨끗하여 물건이 하나도 없다면 여러분들의 마음 또한 상쾌하지 않겠냐”(<승사록>)고 점잖게 타일렀다. 영조 임금의 신신당부에 부응하듯 그 몸가짐이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경건하고 깨끗했던 것이다.

■왜 조선국왕을 황제폐하라 불렀을까

그럼에도 ‘계미통신사 사행’의 여정은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조선은 여전히 일본을 깔보고 있었지만, 일본 역시 조선을 낮춰보려고 했기 때문이다.일본은 ‘천황’을 청나라 천자와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고 막부의 장군을 ‘일본국왕’이라 하여 조선국왕과 맞먹는 관계로 만들려 했다. 사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일본은 여러 문서에 조선국왕을 ‘황제 폐하’로 칭했다. 이는 황제의 나라인 중국과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불경스러운 호칭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굳이 일본의 ‘황제폐하’ 호칭을 거부하지 않았다. 김성일(1538~1593)의 <학봉집>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일본이 주상(조선국왕)을 ‘황제폐하’로 한 것은 ‘거짓황제(일왕)’가 주상과 대등한 지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조선이 스스로를 ‘조선국왕’이라 낮출 경우, 일본이 ‘일본국왕’이라 칭하는 ‘관백(關白·막부의 최고지도자인 쇼군)’와 대등한 관계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의 황제 칭호를 거부할 수 없는 겁니다.”

2018년 각종 문헌자료 등을 바탕으로 재현한 조선통신사선.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노골화하는 일본의 무례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태도가 돌변하기 시작하더니 1711년(숙종 37)의 8차 사행에서 기어코 사달이 났다. 일본은 성명도, 도장도 찍지않은 ‘관백(막부의 최고지도자)’의 답서를 전달하더니, 심지어는 중종(中宗)의 휘(생전의 이름)까지 범하는 무례를 저질렀다. ‘임금의 이름을 쓰는 것’은 대역죄에 해당되는데, 일본이 외교적 관례를 깨고 도발한 것이다.‘계미통신사’의 사행 때도 그같은 무례가 되풀이 됐다. 통신사가 상근관(箱根關)을 넘을 때 까닭없이 말에서 내려 걷도록 했다. 더욱이 사행단이 내린 땅은 진창길이어서 신발이 젖고 옷이 더러워졌다. 게다가 통신사의 담뱃대를 들고 있던 하인들을 막아서는 무례를 저질렀다.   결국 ‘전명연(傳命宴)’에서 폭발하고 만다. 통신사들이 막부의 관백에게 무릎을 꿇고 4번이나 절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각 태수들도 관백을 맞을 때 두 번 절하는데 유독 통신사만 4번이나 절을 올린 것이다. 이 때의 치욕을 제술관 남옥은 이렇게 회고한다.(남옥의 <일관기>)“이른바 위제(僞帝·가짜 황제)라는 자가 있는 데도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한 추장(관백)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 치욕스러움을 직접 목도한 뒤에는 갑절이나 원통해서 곧장 머리카락이 갓을 뚫고 나오려 했다.”통신사들을 더욱 ‘열받게’ 만든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일본의 역사왜곡이었다.남옥(1722~1770)의 <일관기>와 원중거의 <승사록>은 “사행단을 방문한 시방언(柴邦彦)이라는 자가 전한 시(詩)의 경우 인용한 두 나라의 역사가 ‘극히 놀랍고도 망령된 것’이어서 보낸 그대로 봉해서 돌려주었다”고 기록했다. 고대사와 임진왜란을 얼마나 왜곡했는지 시문의 문답행사와 필담이 중단되고, 보낸 시를 다시 밀봉해서 되돌려줄 정도였다는 것이다. 일본은 당시 중국 진시황 때의 방사 서불(徐市)의 일본도래설과, 임나일본부설의 기초가 된 진구(신공) 황후의 삼한정벌 등을 사실(史實)로 왜곡하고 있었다. 

조선통신사 재현선에서 펼쳐보이는 사물놀이.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충격의 외교관 살인사건

불미스런 사건사고도 빈발했다. 특히 귀국길 오사카에서 일어난 최천종 살해사건은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다.(1764년 4월7일)외교사절이 공식방문 중에 피살됐다? 아마도 한·일 외교사에 길이 남을 불상사일 것이다. 쓰시마의 소통사 스즈키 덴죠라는 인물이 7일 새벽 최천종의 숙소에 들어와 살해했는데, 사소한 말다툼에서 비롯된 살인사건이라 한다. 이 충격적인 살인사건으로 통신사들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또 무슨 변고가 있을까 두려움에 떨며 밤을 지세우는가 하면, 바람소리에 장막이라도 움직이면 자객이 침입한 것이 아니냐며 부들부들 떨었다. 사잘단은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한달동안 오사카에 머물었다. 사건은 도주한 스즈키 덴죠가 사건발생 11일 만인 4월18일 검거되어 5월 2일 참수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사실 이 충격적인 사건이 그저 사소한 다툼에 의한 ‘우발적인 사건’으로 치부될 것인가.
진상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일본 정부가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 사이 조선통신사들은 속절없이 애만 태울 뿐이었다는 것이다.
“4월8일, 현장조사가 없었다. 안과 밖의 소식이 통하지 않아 깊은 구덩이에 빠진 것 같았다.” “4월14일, 쓰시마 도주의 답장이 7일만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사건의 진상을 속이고 은폐하며 모호하게 하려는 계책으로….”(남옥의 <일관기>)
조선통신사의 일본 본토 사행은 ‘계미 통신사’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1811년(순조 11)의 마지막 12차 사행은 쓰시마에서 이뤄졌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