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주나라에는 아주 특별한 벼슬아치가 있었다. 닭을 관장하면서 새벽을 알리는 ‘계인(鷄人)’이라는 관리였다(<주례> 춘관). ‘계인’의 임무는 매우 중요했다.
왜냐면 ‘하늘을 공경하여 백성들에게 신중하게 때를 알려주는(欽若昊天 敬授人時)’(<서경> ‘요전편’)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때(時)’는 농사철의 시기를 가리킨다.
예부터 “군주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사기> ‘열전·역이기전’)고 했다.
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삼고 사는 백성들에게 절기를 가르쳐주지 못하면 군주의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시간을 사람이 일일이 알리다보니 번번이 착오가 생겼다. 농사철에 ‘때’를 잘못 일러주면 백성들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 아닌가. 만고의 성군인 세종이 1434년(세종 16)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비 출신의 과학자인 장영실에게 제작을 명한 것이 바로 자격루(물시계)였다.
“시각을 알리는 자가 자주 착오가 일으킬 것을 걱정했다. 장영실에게 명해 시각을 알릴 목각인형을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의 힘이 들지 않았다.”(<세종실록> )
만약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벌을 내려야 한다. 그것을 안타까워한 세종이 ‘사람 대신 목각인형’으로 시간을 알리는 방법을 쓴 것이다. 세종이 1434년(세종 18) 물시계, 즉 자격루를 만들고는 그것을 설치할 건물 이름을 ‘흠경각(欽敬閣)’이라 했다.
‘하늘을 공경하여(欽) 삼가(敬) 백성들에게 농사철을 알린다’는 뜻이다. 이때 장영실 등이 제작한 자격루는 물의 증가 또는 감소에 따라 자동으로 시각을 알려주었다.
수수호에 새겨진 명문. 중종 때인 1536년 자격루 제작에 관여한 영의정 김근사, 좌의정 김안로 등 12명의 이름이 보인다. 이번에 이공장과 안현, 김수성, 채무적 등의 이름을 새롭게 읽어냈다.|문화재보존과학센터 제공
동아시아의 유압식 물시계와 아라비아식 자격장치를 조합시켜 스스로(自) 시간을 알려주는(擊) 최첨단 물시계(漏)였다. 물시계(아날로그)의 물 흐름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다시 일정한 시차로 구슬과 인형을 건드려 자격장치(디지털)를 작동하도록 설계됐다.
자동제어시스템에 의해 아날로그와 디지털 변환기로 접속되는 디지털 시계를 586년 전에 발명한 것이다. 한마디로 하늘을 존중하고 백성의 수고없이 자동으로 작동되는 시계를 만든 것이다. 자격루는 조선의 국가표준시계였다.
자격루는 현재 내로라하는 과학자들도 혀를 내두를만큼 정교하다. 과학자 30여 명과 최첨단 장비까지 총동원했지만 자그만치 23년 만에 겨우 복원됐다. 그게 2007년이다. 복원에 참여한 학자들은 “쇠구슬의 크기가 1㎜만 달라도 제대로 시간을 측정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복원된 자격루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됐는데, 지금 작동해봐도 오차는 1분 정도라 한다.
대파수호의 표면에는 자격루 제작시기를 알려주는 ‘가정병신육월 일조(嘉靖丙申六月 日造)’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가정’은 명나라 11대 황제인 가정제의 연호(1522~1566년)이며, ‘가정 병신년’은 자격루가 완성된 1536년(중종 31년)을 가리킨다.|문화재보존과학센터 제공
세종 때 제작한 자격루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1536년(중종 31) 다시 제작한 자격루의 일부인 파수호 3점, 수수호 2점만 창경궁 보루각에 남아 있을 뿐이다. 크기에 따라 대·중·소로 나뉘는 ‘파수호(播水壺)’는 물을 보내는 청동 항아리다. ‘수수호(受水壺)’는 물을 받는 청동 원통형 항아리(2점)이다. 쇠구슬이 굴러 조화를 이루던 부분이 없어지고 몸통부분만 남아있는 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중종 때 다시 제작한 자격루(국보 제229호)를 1년7개월동안 보존처리한 결과를 22일 밝혔다. 창경궁 자격루는 일제강점기에 덕수궁 광명문 안에 이동·전시되고 있었다. 박종서 문화재보존과학센터장 직무대리는 “청동재질로 된 자격루의 부식과 손상을 막기 위해 지난 2018년 10월 문화재보존과학센터로 옮겨 보존처리해왔다”고 밝혔다.
국보 제229호 창경궁 자격루. 세종 때 제작한 자격루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1536년(중종 31년) 다시 제작한 자격루의 일부인 파수호 3점, 수수호 2점만 창경궁 보루각에 남아 있을 뿐이다.|문화재보존과학센터 제공
1년7개월의 보존처리 결과 정확한 관찰이 어려웠던 수수호 윗쪽 명문이 뚜렷하게 나타났고, 3차원 입체(3D)스캔 등으로 수수호 표면에 새겨진 용문양을 제대로 복원했다.
수수호 상단에는 1536년 자격루 제작에 참여한 12명의 직책과 이름이 세로로 새겨져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영의정 김근사(1466~1539)와 좌의정 김안로(1481~1537), 우찬성 유보(1470~1544), 최세절(1479~1535) 등 8명만 확인된 바 있다. 나머지 4명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는데 이번 보존처리로 이름을 찾아냈다.
이공장(李公檣·?~?), 안현(安玹·1501~1560), 김수성(金遂性·?~1546), 채무적(蔡無敵·1500~1554) 등이다. <조선왕조실록>과 <국조인물고>, <문과방목> 등에 자격루 제작 시기에 이들이 명문의 직책을 맡았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중 이공장은 자격루 제작시기에 사복시정(정3품)을 역임했고, 안현은 사헌부 집의(종3품), 김수성은 사헌부 장령(정4품), 채무적은 장악원(궁중음악 및 무용담당 관청) 주부(종6품) 등의 직함을 맡고 있었다.
특히 중종은 문신이지만 천기에 밝은 안현과 김수성에게 천문관측을 전담시키는 전교를 여러차례 내렸다(<중종실록> 1532년 8월19일, 1537년 12월20일자 등).
<중종실록> 1536년 8월24일자는 “자격루 제작 공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담한 김수성(金守性)에게 숙마(熟馬·지금의 고급승용차)를 특별히 하사했다”고 했는데, ‘김수성(金守性)’은 김수성(金遂性)의 오기일 수 있다.
중종의 뒤를 이은 명종은 1546년(명종 1년) 사망한 김수성(金遂性)에게 간의(簡儀·행성과 별의 위치 시간의 측정, 고도와 방위를 측정하는 천체관측기기)와 규표(圭表·막대기의 그림자를 측정해 1년의 길이를 측정하고 24절기를 파악하는 관측의기)를 수리한 공적을 인정해 말 1필을 내리기도 했다.
2007년 복원한 자격루. 자격루는 동아시아의 유압식 물시계와 아라비아식 자격장치를 조합시켜 스스로(自) 시간을 알려주는(擊) 최첨단 물시계(漏)다. 물시계(아날로그)의 물 흐름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다시 일정한 시차로 구슬과 인형을 건드려 자격장치(디지털)을 작동하도록 설계됐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문화재보존센터는 또한 수수호 표면의 ‘하늘로 솟아오르는 용문양’을 3차원 입체(3D) 스캔과 실리콘 복제방법으로 펼쳐봤다. 그 결과 수수호 왼쪽과 오른쪽 용 형태가 대부분 같은 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얼굴, 수염이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와함께 용 문양에 겹쳐진 구름 문양이 관찰됐다. 장성윤 문화재보존과학센터 연구관은 “먼저 수수호 표면에 용 문양을 붙인 후 구름 문양을 붙인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수수호는 정교한 형태로 조각한 문양을 순서대로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대파수호의 표면에는 자격루 제작시기를 알려주는 ‘가정병신육월 일조(嘉靖丙申六月 日造)’가 세로로 새겨져 있었다. ‘가정’은 명나라 11대 황제인 가정제의 연호(1522~1566년)이며, ‘가정 병신년’은 자격루가 완성된 1536년(중종 31년)을 가리킨다. 이번 문화재보존센터의 비파괴분석결과 검은 색 명문에서는 은(銀) 성분이 다량 검출됐다. 은입사(금속 그릇에 은실을 이용하여 새긴 문양기법)된 명문은 부식 때문에 검게 보였지만 보존처리를 통해 은백색의 본래 빛을 찾게 됐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이번 보존처리를 통해 창경궁 자격루가 조선 시대 과학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과학 문화재라는 것을 재확인했다”고 평가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