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다닐 때 땅이 파이지 않게 한 시설일까.” 2021년 10월이었다. 종로구청 부지에 들어설 새로운 통합청사(구청+소방서 등) 공사 현장에서 수상쩍은 흔적이 확인되었다. 조선시대 건물터 5채와 함께 원형으로 깔아놓은 잡석 사이에 트랙 형태의 통로가 조성된 유구였다. 이곳은 조선 창업의 공신인 삼봉 정도전(1342~1398)의 집터였고, 이후 사복시(궁중의 가마와 말 등을 관장하는 관청)가 들어선 곳으로 알려져 있다.
원형 마장 트랙
공사 중인 종로구청 통합청사에서 확인된 조선시대 유구. 1843년 제작된 <숙천제아도> 와 발굴유구를 비교해보니 조선시대 사복시터가 분명했다. <숙천제아도> ‘사복시도’에 등장하는 열청헌터(사복시 책암관리 집무실 터와 좌우 마구간인 동고와 서고의 흔적도 보였다. ‘트랙을 갖춘 잡석 유구’ 역시 숙천제아도에 그 정체가 드러났다. |종로구청·수도문물연구원 제공
■둥근 원형트랙의 정체
그랬으니 말과 관련된 유구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처음엔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저 ‘말의 하중 때문에 지표면이 울툴불퉁해질까봐 깔아놓은 잡석’ 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발굴단(수도문물연구원)이 19세기 인물인 한필교(1807~1878)의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에 열람하자 그 단서를 찾아냈다. ‘숙천제아도’는 한필교가 평생 거쳐온(숙천·宿踐) 여러 관청(제아·諸衙)를 그린 그림(화첩)이다. 그 중 한필교가 1843년 사복시 판관(종5품) 시절 그린 ‘사복시’ 그림을 본 것이다.
발굴단은 드러난 유구와 그림 속 관아 및 시설을 비교해보았다. 우선 책임자인 사복시정(정3품)의 집무실(열청헌)과 좌우 마구간인 동고와 서고의 흔적이 맞았다. 그럼 이번 발굴의 핵심인 ‘원형 트랙을 갖춘 잡석 유구’는 어떤가.
둥근 대열의 정체
‘숙천제아도’를 보면 사복시 뜰에 말의 훈련을 담당하는 이마(理馬·정6품)의 지휘 아래 마부들이 둥근 대열로 말을 조련하고 있다. 그 그림과 발굴유구의 형태가 꼭 맞았다.|수도문물연구원·종로구청 제공
마침 ‘숙천제아도’에 심상치않은 모습이 보인다. 말의 훈련을 담당하는 이마(理馬·정6품)의 지휘 아래 마부들이 둥근 대열로 말을 조련하고 있다. 그 그림과 발굴 유구의 형태가 꼭 맞았다.
대체 어떤 훈련일까. 베테랑인 홍대유 과천 서울경마장 조교사에게 문의했더니 ‘말의 건강을 위해 필수적인 시설’이란다.
말을 마굿간에만 두면 스트레스 받아서 살 수 없으며, 무엇보다 건강에도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소는 위가 4개지만 말은 1개죠. 여물을 먹고 되새김질 하는 소와 달리 말은 토하면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소화기관이 약한 말은 장에 가스가 차고, 혹은 장이 꼬이는 산통(疝痛)에 걸리기 쉬운데, 말의 사망 원인 중 으뜸이죠.”(홍대유 조교사)
그래서 말을 기르는 곳에서는 필수적으로 ‘원형 마장’을 조성시켜준다는 것이다.
경마장의 말운동
과천 서울경마장에서 운동 중인 경주마들. 소화기관이 약한 말은 장에 가스가 차고, 혹은 장이 꼬이는 산통(疝痛)에 걸리기 쉽다, 말을 기르는 곳에서는 필수적으로 ‘원형 마장’을 조성시켜준다.(홍대유 과천 서울경마장 조교사 제공
■구청사에 들어설 말 운동 시설
그렇다면 어떨까. 새롭게 들어설 종로구청 통합청사 자리에서 조선시대 옛 관청(사복시)의 흔적이 또렷하게 드러났다면….
다행히 종로구청이 새로 들어설 통합청사 지하에 유적전시관(967평·3196㎡)을 조성하기로 했다.
이 공간에는 발굴된 원형 마장 유구와 열청헌, 동·서고 등이 모두 원형 복원된다. 특히 바닥에 흔적만 남은 유구를 미디어 파사드 영상으로 재현해서 보여줄 계획이다. 지하의 유구는 구청 1층 로비와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연결되도록 할 계획이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시각적인 연출이다. 지상 1층에는 건물터 및 마장 유구의 실제 위치를 표시하는 경계석과 표식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종로구 통합청사는 2027년 말까지 완공할 계획이다. 정문헌 종로구청장은 “새롭게 짓는 관청에 이와같은 유구 전시관을 조성하는 것은 종로구청이 처음”이라고 밝힌다.
조선시대 사복시
19세기 인물인 한필교(1807~1878)가 평생 벼슬살이를 하면서 거쳤던 관청을 그린 <숙천제아도>. 그중 한필교가 1843년 사복시 판관 시절 그린 ‘사복시도’에서 원형 대열로 운동하는 그림이 표현되어 있다.|국립중앙도서관 자료
■정도전의 집 마굿간이 사복시터
이 대목에서 필자의 시선을 잡아끈 사료가 있다. 그것이 수진방이라고 일컫는 이 일대의 원래 주인공 이야기다.
그 주인공이 개국 조선의 설계자라 하는 삼봉 정도전이다. 그와 관련된 사료를 한번 살펴보자.
“정도전이 오래 살려고 ‘목숨 수(壽)’에 ‘나아갈 진(進)’자를 붙인 ‘수진방(壽進坊)’에 집을 마련했다. 그러나 천명에 죽지 못하자 사람들은 ‘수진(壽盡·목숨이 다함)의 조짐’이라 했다. 진(進·나아감)자가 진(盡·다함)자와 음이 같기 때문이다.”(<삼봉집> 권8 ‘부록·사실’, <연려실기술> ‘지리전고·도성과 궁궐’)
무슨 말인가. 정도전은 경복궁과 근정전, 숭례문·흥인지문 등 궁궐과 전각, 성문은 물론이고 서울 5부 49방의 동네 이름까지 전부 지었다. 정도전이 지은 동네 이름 중에 ‘수진방’이 있었다. ‘오래 살기’(수진·壽進)를 원했던 정도전은 이 ‘수진방’에 집을 마련했다. 하지만 중도에 비명횡사했다. 사람들이 그때 “‘수진(壽進·오래 삶)’이 아니라 ‘수진(壽盡·목숨이 다함)’했다”고 혀를 찼다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비고’ 등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유구 전시관
종로구청은 2027년 들어설 통합청사 지하 1층에 전시관을 마련, 발굴된 사복시의 건물과 마장 유구 등을 전시할 방침이다.|종로구청 제공
“수진방에 정도전의 집터가 있었다. 제용감(궁궐의 직물 조달·감독 관청), 사복시, 중학당이 모두 정도전의 집터라 한다.”
<한경지략> ‘각 동조’와 <고운당필기> ‘재용감’에 디테일한 내용이 담겨 있다.
“…정도전의 사가(私家)가 수진방에 있었다. 지금의 중학은 서당 자리이고, 지금의 제용감은 안채 자리이며, 지금의 사복시는 마구간 터라고 한다. 아마도 정도전이 지세를 잘 보아서 말 4000마리를 매어둘 수 있는 땅을 차지한 것이다.”
정리하면 정도전 옛 집의 서당에 중학당이, 안채에 제용감이, 마구간에 사복시가 들어섰다는 것이다.
정도전의 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중학동~수송동 사이에 어마어마한 토지를 소유했다눈 것이다.
사료대로라면 지금의 종로구청 통합청사 부지가 정도전 집의 마구간 자리였다는 뜻이다. 하기야 말을 4000마리를 매어둘 수 있을 정도의 마구간이었다니….
종로구청 통합청사 청사진
종로구청 통합청사의 지하에 들어설 유적 전시관에는 발굴된 원형 마장 유구와 열청헌, 동·서고 등이 모두 원형 복원된다. 특히 바닥에 흔적만 남은 유구를 미디어 파사드 영상으로 재현해서 보여줄 계획이다. 지하의 유구는 구청 1층 로비와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연결되도록 할 계획이다. 지상 1층에는 건물터 및 마장 유구의 실제 위치를 표시하는 경계석과 표식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종로구청 제공
■말발굽에 짓밟힌 정도전의 기운?
필자는 이 대목에서 ‘파가저택(破家저澤)’의 형벌을 떠올린다.
대역죄나 존속살인 등 강상죄인을 극형에 처한 뒤 그 집을 헐고(파가·破家), 집터에 연못을 팠던(저택·瀦澤)….
대역죄를 뒤집어쓴 풍운아 허균(1569~1618)이 능지처참과 함께 파가저택의 형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물론 정도전은 허균처럼 ‘파가저택’의 극형을 받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정도전의 집은 왜 그리 갈기갈기 찢겨 여러 관청터로 나뉘어진 것일까. <태종실록> 1409년 12월19일자에 ‘팩트’가 등장한다.
“어린 세자(이방석)를 등에 업고 종사를 무너뜨린 정도전 등의 토지와 밭, 노비를 국고로 몰수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환수된 땅에 여러 관청이 들어섰다. 그중에서도 굳이 궁중의 말을 담당하는 사복시를 세운게 심상치않다.
정도전의 기운이 서려있는 땅을 말발굽으로 짓밟으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수진(壽進)과 수진(壽盡) 사이
사복시터의 원 주인은 개국 조선의 설계자라 하는 삼봉 정도전이다. 여러 사료에 따르면 서울의 동네이름을 모두 지은 정도전이 오래 살기 위해 ‘목숨 수(壽)’에 ‘나아갈 진(進)’자를 붙인 ‘수진방(壽進坊)’에 집을 마련했지만 중도에 죽었고, 사람들은 ‘수진(壽進·오래 삶)’이 아니라 ‘수진(壽盡·목숨이 다함)’한 것이라고 설왕설래했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
■정도전의 죄상
그렇다면 정도전의 죄상은 무엇이었던가. 1398년 8월26일이었다.
정도전은 자신의 집과 지근거리인 송현방(옛 미 대사관저 부근)에서 측근인 남은(1354~1398)·심효생(1349~1398)과 머리를 맞대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집은 남은의 첩 집이었다. <태조실록>이 전한 그 날의 긴 하루를 더듬어보자.
정도전 등은 어린 세자(방석·1382~1398)을 세워 국정을 농단했다. 세자(방석)는 태조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1396)의 소생이었다. 그러나 당시 어린 세자에게는 장성한 이복형이 4명이나 살아있었다.
태조의 첫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1337~1391)의 소생들이었다.
그중 조선 개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다섯째 정안군 이방원(태종·1367~1422, 재위 1400~1418)은 어린 세자의 앞길에 큰 위협이 되었다. 정도전 등은 그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급기야 운명의 그날(8월26일) 정도전은 “임금(태조)이 위중하다”면서 정안군 등 왕자들을 긴급 소집했다. 궁궐로 끌어들여 모조리 죽일 참이었다.
정도전의 마굿간
<한경지략>과 <고운당필기> 등은 “…정도전의 집이 수진방에 있었다. 지금의 중학은 서당 자리이고, 지금의 제용감은 안채 자리이며, 지금의 사복시는 마구간 터”라 했다. 정도전의 집에는 말 4000필을 매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고 한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
■‘한잔 술 실수에 그만…’
그 사이 정도전 등은 남은의 첩 집인 송현방에서 술을 마시며 ‘거사 후’를 모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낌새를 알아차린 정안군 등이 반격을 가했다. 세자(방석)와 그의 친형 방번(1381~1398) 등이 무참히 살해됐다.
또한 송현방의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역시 죽임을 당했다. 이것이 ‘1차 왕자의 난’이다.
<태조실록>은 “정안군(태종)이 엉금엉금 기어나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정도전의 목을 베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정도전이 그렇게 구차하게 삶을 구걸했을까. <삼봉집>(정도전의 문집)에는 죽기 직전 읊었다는 시 한 수(‘자조·自嘲)’가 실려있다. “조심, 또 조심하여 공력을 다해 살면서(操存省察兩加功) 책 속의 성현을 저버리지 않았는데(不負聖賢黃卷中), 30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三十年來勤苦業)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허사가 되었네.(松亭一醉竟成空)”
이 시에는 정도전의 삶이 오롯이 정리되어 있다. 즉 새 왕조 건설을 위해 눈코뜰새없이 움직이던 중 일순간의 순간 방심으로 변을 당했음을 슬퍼했던 것이다.
정도전의 저택
각종 사료와 옛 지도 등을 토대로 보면 정도전의 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중학동~수송동 사이에 어마어마한 토지를 소유했다는 것이다.|수도문물연구원·종로구청 제공
■‘불의한 군주는 죽여도 좋다’
정도전의 삶이 어땠기에 그랬을까. 젊은 날의 정도전은 여느 사대부처럼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모친·부친상으로 3년(1366~1369)의 낙향과, 부원파 이인임의 견제로 인한 9년의 유배 및 유랑 생활(1375~84)이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그 사이 정도전의 가슴엔 ‘혁명의식’이 차곡차곡 쌓였다. 우선 절친인 포은 정몽주가 ‘읽어보라’고 건네준 <맹자>가 그의 심금을 울렸다. “어짊과 올바름을 해치는 자는 군주가 아니라 한낱 사내에 불과하므로 (신하가) 죽여도 좋다”는 구절(‘양혜왕 하’)이 그것이었다. 역성혁명을 옹호하는 무시무시한 ‘맹자왈(曰)’이 아닌가.
긴 유배 및 유랑 생활에서 마주친 백성들의 비참한 삶도 정도전의 혁명의식을 깨웠다.
바야흐로 홍건적의 난과 왜구의 침입 등의 외우와 권문세족의 토지겸병 등 내환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던 시기였다.
“권문세가들이 농민을 압박, 토지를 빼앗기에 혈안이 돼 토지 하나에 주인만 7~8명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반면 방방곡곡이 홍건적의 난과 왜구 침략으로 싸움터가 됐다.”(<고려사절요> 등)
비참한 밑바닥 백성들의 삶을 목도했기 때문일까. 정몽주(1338~1392) 등 다른 이들은 유배 중이나 유배가 풀렸을 때 임금을 향한 ‘연군시(戀君詩)’를 남겼다. 그러나 정도전은 일절 쓰지 않았다. 백성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임금을 무엇 때문에 고마워한다는 말인가.
한양 도성의 설계자
정도전은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을 잇는 총 18km의 한양도성을 설계하고 완성했다.}문화재청 제공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여전히 유랑 중이던 정도전은 1383년(고려 우왕 9) 함주(함흥)를 찾아 도지휘사로 동북지방 국토방위 책임자였던 이성계를 만난다. <태조실록>의 정도전 졸기(1398년 8월26일)를 보자.
“(1383년) 정도전이 동북면의 이성계를 방문했다. 정도전은 (이성계) 정예부대의 호령과 군령이 자못 엄숙한 것을 보고 이성계에게 비밀리에 말했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은들 못하겠습니까.’”
‘이성계의 그릇’을 탐색하러 온 정도전이 이성계군의 엄정한 군세를 보고 ‘역성혁명의 뜻’을 굳힌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내용이 ‘정도전 졸기’에 들어있다.
“조선 개국 즈음, 정도전은 왕왕 취중에 슬쩍 말했다. ‘한 고조(재위 기원전 202~195)가 장자방(장량·?~기원전 186)을 쓴 것이 아니다. 장자방이 곧 고조를 쓴 것 뿐’이다….”
장자방은 항우(기원전 2032~202)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개창한 한 고조 유방의 책사였다.
정도전은 술자리를 빌려 큰 일 날 소리를 해대고 있다. ‘태조 이성계(한 고조 유방)가 정도전(장자방)을 기용한 것이 아니라, 정도전(장자방)이 이성계(한 고조)을 이용해서 조선(한나라)을 개창했다’고 취중진담했다는 게 아닌가.
만기친람
정도전은 한양의 종묘·사직·궁궐·관아·시전·도로의 터를 정했다. 또 숭례문·흥인지문·돈의문·소지문 등 4대문과 소의문·창의문·혜화문·광희문 등 4소문의 이름도 지었다.
■개국 조선의 설계자
‘이성계의 장자방’이 된 정도전은 조선 개국의 절대 공훈자가 된다.
정도전은 동북면 도안무사가 되어 함길도를 안정시키고 돌아왔다. 태조는 그런 정도전을 두고 “경(정도전)의 공이 (고려 때 동북 9성을 경영한) 윤관보다 낫다”고 치하했다.(<태조실록> 1398년 3월30일)
1394년 조선왕조의 기초 헌법이 된 <조선경국전>의 편찬도 업적이다. 통치규범을 육전으로 나누었는데, 국가형성의 기본을 논한 규범체계서였다. <조선경국전>은 훗날 <경국대전> 편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도전은 신도읍지(한양) 건설의 총책임자가 되어 공사를 진두지휘했다. 한양의 종묘·사직·궁궐·관아·시전·도로의 터를 정하고 그 도면까지 그려 태조 임금에게 바쳤다. 한양도성(18㎞)을 쌓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백악산(북악산)~인왕산~목멱산(남산)~낙타산(낙산)을 잇는 도성을 설계했다. 오행의 예에 따라 숭례문·흥인지문·돈의문·소지문(숙정문) 등 4대문과 소의문·창의문·혜화문·광희문 등 4소문의 이름도 지었다. 서울을 동·서·남·북·중 5부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수십개의 방(坊)으로 구획하고 이름을 정한 것도 정도전이었다. ‘수진방’처럼….
동네 이름까지…
서울을 5부49방으로 나누고 이름을 정한 것도 정도전이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군주는 어리석어도 좋다”
정도전의 사상 가운데 으뜸은 역시 ‘재상 중심’의 신권(臣權) 정치였다. 그의 주장은 너무 혁명적이었다.
“군주의 실제 권한은 딱 두가지다. 하나는 재상을 선택·임명하는 권한이다. 다른 하나는 그 재상과 정사를 의논하는 것이다.”(<조선경국전> ‘상·치전·재상연표’ <경제문감> ‘상·재상’)
여기서도 주안점이 있다. 군주는 국사에 관계된 큰 문제만 협의할 뿐, 그 밖의 정사는 재상이 모두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왜 재상에게 사실상의 전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을까.
재상정치
정도전은 군주의 직책은 “훌륭한 재상을 잘 선택하는 것”이라고 못박았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
“군주는 어둡고 현명하고 강하고 약함이 한결 같지 않다. 따라서 군주의 아름다운 점은 따르고 (군주의)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그래서 ‘도와서 자로잡는다’는 의미에서 상(相·재상)이라 한다.”(<조선경국전> ‘상·치전총서’)
무슨 말인가. 대대로 왕위를 잇는 세습 군주가 늘 현명하거나 똑똑할 수 없다. 군주가 현명하면 물론 좋다. 그러나 설혹 어리석은 군주가 즉위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서 뛰어난 관료들이 정사를 펼치고, 그중에서도 최고의 영재인 재상이 정사의 구심점을 이루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권정치, 즉 재상정치의 요체이다.
어리석은 군주, 똑똑한 재상
정도전은 재상에게 사실상 국정 운영의 전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습하는 군주가 똑똑할 수도 있지만 어리석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들쭉날쭉하지만 그 시대에 똑똑한 현인집단, 관료집단에서도 가장 똑똑한 재상을 구심점으로 정사를 펼치면 된다고 보았다,
■유학도 으뜸, 개국의 공도 으뜸
이런 정도전이었으니 송현방에서 죽임을 당할 때 ‘30년 사업이 한 잔 술에 허사가 되었다’고 한탄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과연 물거품이 되었을까. 아니었다. 아니었다. <태조실록>은 정도전을 참수한 태종의 명으로 편찬된 정시이다. 그런 <태조실록>은 정도전의 죄상을 거론하기는 했다. 그러나 말미에 “태조(이성계)와 함께 조선개국에 모든 힘을 쏟은 정도전이야말로 ‘참으로(誠)’ 상등의 공훈을 세웠다”고 평가했다. ‘참으로(誠)’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진심’이 듬뿍 담겨있는 평가가 아닐 수 없다. 정도전의 목을 벤 태종마저도 그를 ‘조선의 개창자’임을 인정했다는 이야기다.
영웅호걸이 등장했으나…
1465년(세조 11) 영의정 신숙주는 <삼봉집>의 후서를 써주면서 “개국 초 나라의 큰 규모는 모두 선생이 만들었다. 당시 영웅호걸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지만 선생(정도전)과 비교할 만한 이가 없었다”고 극찬했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
1465년(세조 11) 영의정 신숙주(1417~1475)는 정도전의 증손자 정문형(1427~1501)의 부탁을 받아 <삼봉집>의 후서를 써주면서 이렇게 평했다. “개국 초 나라의 큰 규모는 모두 선생이 만들었다. 당시 영웅호걸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지만 그 분(정도전)과 비교할 만한 이가 없었다”고…. 태조(이성계·재위 1392~1398)는 1395년(태조 4) 10월29일 낙성된 경복궁에서 연회를 베풀며 정도전에게 네 글자를 대서특필해 선물했다. ‘유종공종(儒宗功宗)’. 즉 ‘유학도 으뜸이요, 나라를 세운 공도 으뜸’이라는 글자였다. 그야말로 핵심을 찌르는 당대의 평가가 아닐 수 없다.
목만 남은 유골
1989년 삼봉 정도전의 묘로 알려진 서울 서초동 우면산자락에서 확인된 무덤에서 상급의 조선백자와 함께 몸통없이 머리만 남은 유골이 확인됐다. 참수된 정도전의 머리일 가능성이 있다.|한양대박물관 제공
■목없는 시신의 주인공
지난 1989년 3월, 서울 서초동 우면산 자락 삼봉 정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수상한 유골이 확인됐다.
몸통은 없고, 머리만 남은 유해였다. 이와함께 상당히 정제된 조선초기의 백자도 함께 수습됐다.
무덤을 발굴한 한양대박물관은 “상당한 신분의 피장자였음이 분명하다”면서 “정도전의 무덤일 가능성도 있다”고 추정했다. 이 대목에서 “정안군이 정도전의 참수를 명했다(令斬之)”는 실록의 기사(1398년 8월26일)가 눈에 띈다.
아마도 어떤 용기있는 이가 정도전의 잘린 목을 수습해서 정성스럽게 묻어두었을 지도 모른다.
이번 종로구청 통합청사 발굴에서도 사복시터는 나왔지만 정도전 집터는 확인되지 않았다.
사료에 표시된 정도전의 옛 집 영역이 너무 넓으니 특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 근처 어디엔가 묻혀있을 삼봉 정도전의 자취를 가늠해보며 그 이의 업적을 떠올려봄이 어떨까.(이 기사를 위해 수도문물연구원의 오경택 원장과 김윤호 조사연구팀장, 종로구청의 강영식 문화유산과 문화유산활용팀장, 홍대유 과천 서울경마장 조교사가 자료와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수도문물연구원, ‘서울 수송동(146-2번지) 종로구·종로소방서 통합개발 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4
한양대박물관, <전 삼봉 정도전 선생묘 발굴조사보고서>, 1990
한영우, <정도전-왕조의 설계자>, 지식산업사, 1999
'흔적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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