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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거둘 땅을 빼앗다니…" 1500년전 신라 판결문 뜯어보니

“응? 이거 뭔가 글씨 같은데?” 1988년 3월 20일 경북 울진 죽변면 봉평 2리 마을 이장 권대선씨는 길 옆 개울에 처박혀있던 돌을 유심히 바라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봐도 돌에 새겨진 문양은 글씨 같았다. 이 돌은 두 달 전인 1월 20일 주두원씨 소유 논에 거꾸로 박혀있다가 포크레인 작업으로 뽑아내어 길옆 개울로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돌의 문양이 글씨라는 것을 확신한 권대선 이장은 즉시 죽변면사무소와 울진군청에 신고했다. 이것이 유명한 울진 봉평비(국보 제 242호)의 발견 이력이다. 

이번에 3D 가공 이미지로 판독해본 포항 중성리 비문 글씨. 다양한 각도의 조명에서 찍은 결과 135도, 225도, 315도에서 찍은 사진이 양호했다. 이 사진은 조사각 315도에서 찍은 것이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곤장 60대, 100대에 처한다’

봉평비는 앞면에만 모두 10행 397자(혹은 398자)이며, 비의 중간부분 일부를 빼면 대부분 판독할 수 있었다. 이 비석은 한마디로 판결문이다. “갑진년(甲辰年) 정월 15일 훼부 모즉지매금왕과 사훼부의 사부지 갈문왕 등이 하교하신 일이다”라고 시작한다. 전문가들은 ‘갑진년’은 바로 524년(법흥왕 11년)이며, 모즉지매금왕은 법흥왕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5세기 어느 무렵 고구려가 세운 중원 고구려비에는 “고려왕이 신라 매금(寐錦)과 오래도록 형제의 연을 맺는다”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그 시대 신라 임금을 ‘매금’이라 일컬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봉평비는 “524년 법흥왕을 비롯한 14명의 6부 귀족들이 회의를 열어 죄를 지은 ‘거벌모라와 남마지촌’의 주민들을 처벌하고, 지방의 몇몇 지배자들을 곤장 60대와 100대씩 때릴 것”을 결정한 판결문이다. 거벌모라와 남마지촌의 주민들은 무슨 죄를 지었을까. 판결문을 요약해보자.

영일 냉수리비. 503년 무렵 일어난 분쟁과 관련해서 지도로 갈문왕을 비롯한 7명의 왕들이 전세(前世) 2왕의 교시를 증거로 하여 진이마촌의 ‘어떤 재물(財)’을 절거리의 소유로 결정했다”는 내용이다. 비문은 “이 판결 이후 다시는 이 재물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하며, 만약 다시 말썽을 일으키면 중죄를 주겠다”고 경고했다

“거벌모라와 남미지촌 주민들이…길이 좁고 오르막도 험난한 이야은성에 불을 내고 성을 에워싸니 대군이 일어나는 지경이어서 이와같은 자들은 (처벌해야)…신라 6부에서는 얼룩소를 잡아 (배를 가르고 피를 뿌리는 의식을 행했다)…거벌모라 니모리 일벌, 의지 파단 등은 장 60대씩, 남미지촌 사인 익사와 어즉근리는 장 100대에 처한다…만약 이와같이 하는 자는 하늘에서 죄를 얻으리라.”


■재물을 둘러싼 송사의 판결

그로부터 딱 1년 뒤인 1989년 3월 어느 날, 경북 영일군 신광면 냉수2리의 마을 주민 이상운씨는 자신의 장골밭을 열심히 뒤지고 있었다. 평소 역사 및 고고학 부문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던 이씨가 “비석을 발견한 적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예전 이야기를 불현듯 떠올린 것이다. 쇠꼬챙이로 밭을 이리저리 파던 이씨는 마침내 밭 가장자리에 박혀있던 돌 하나를 발견했다. 이씨의 짐작이 맞았다. 땅 표면에서 15㎝ 정도만 노출된 돌에는 뭔가 글자 같은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정신없이 땅을 파 돌을 완전히 노출시키자 땅 속에 쳐박혀있던 비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씨는 전체 높이 60㎝, 너비 70㎝, 두께 30㎝나 되는 이 비석을 '끙끙’ 거리며 리어카로 운반한 뒤 자기집 감나무 아래로 옮겨놓았다. 이것이 영일 냉수리비이다.

울진 봉평비. “524년 법흥왕을 비롯한 14명의 6부 귀족들이 회의를 열어 죄를 지은 ‘거벌모라와 남마지촌’의 주민들을 처벌하고, 지방의 몇몇 지배자들을 곤장 60대와 100대씩 때릴 것”을 결정한 판결문이다. 


영일 냉수리비(국보 제264호) 역시 모든 글자를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양호했으며, 이 역시 판결문이었다.

우선 ‘계미년(癸未年) 9월25일 사훼(沙喙) 지도로(至都盧) 갈문왕(葛文王)’이라고 새겨진 명문으로 미루어 이 비가 503년, 즉 지증왕 2년에 건립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즉 <삼국유사>에 “지철로왕(智哲老王)은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지대로(智大路)이고, 지도로(智度路)라고도 일컬어졌으며 죽은 뒤 시호를 지증이라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 비석은 1년전 발견된 울진 봉평비(524년)보다도 21년 빠른 것이다.

비석은 “503년 무렵 진이마촌에 사는 절거리와 말추, 사신지 등이 어떤 재물을 둘러싸고 서로 다투자 지도로 갈문왕을 비롯한 7명의 왕들이 전세(前世) 2왕의 교시를 증거로 하여 진이마촌의 ‘어떤 재물(財)’을 절거리의 소유로 결정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만약 절거리가 먼저 죽으면 절거리의 집 아이 사노(斯奴)가 그 재물을 갖도록 하라”고 덧붙이고 있다. 비문은 “(말추와 사신지는) 이 판결 이후 다시는 이 재물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하며, 만약 다시 말썽을 일으키면 중죄를 주겠다”고 경고했다.  

3D 이미지를 통해 판독한 포항 중성리 신라비 내용. 그동안 읽지 못하거나 불분명한 글자 12~13자를 완전히 판독했다.|하일식 연세대 교수 제공

■포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명문 비석

영일 냉수리비가 발견된지 다시 20년이 지난 2009년 5월 11일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학성리 주민 김헌도씨는 자기 집 앞에서 한창이던 도로개설공사 현장을 지나가고 있었다. 김씨의 눈에 걸린 것은 며칠전부터 공사현장에서 눈에 띈 자연석이었다. 크고 평평한 돌이라 화분받침대로 제격이라 여기고 그 무거운 돌을 낑낑 대며 아파트(일성빌라) 담벼락 아래로 일단 옮겨놓았다. 다음날인 12일 임시로 옮겨놓은 돌을 확인하러 간 김씨의 눈이 빛났다. 그날(12일) 새벽에 내린 비 때문에 돌에 붙어있던 흙이 씻겨나가자 돌 표면에서 뭔가 낙서 같은 것이 보였다.

마을 후배와 무거운 돌을 옮겨온 김씨는 페인트 붓으로 붓질까지 해서 남은 흙까지 말끔히 털어냈다. 그러자 한자로 된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옛날 비석임이 틀림없었다.

김헌도씨 등의 신고로 비석의 존재를 알게 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역시 바삐 움직였다. 당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박종익 학예실장과 김보상 학예사가 현장으로 달려갔다. 

“김헌도 씨 집에 도착한 게 5월14일 오전 11시30분쯤 됐을까요. 비석은 김씨 마당에 담요에 덮여 있었는데…. 담요를 들추자 영롱한 햇빛을 받은 비에 글자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어요.”(박종익씨)

3D 이미지를 통해 다양한 각도로 판독한 끝에 ‘중절(中折)’자로 읽어냈다. |하일식 교수 제공

박종익 실장의 눈에 의미심장한 글자가 스쳐갔다. 그것은 비문의 첫머리에 보인 ‘신사(辛巳)~’라는 글자였다. 간지(干支)는 곧 그 유물의 연대이다. 연구소 측은 곧바로 이 비석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 옮겼다. 정밀조사 결과 비석은 최대크기 105.6㎝, 무게 115㎏에 달했으며 굴삭기 등 중장비로 긁힌 흔적이 비면의 중앙상부와 아래쪽이 남아 있었다. 글자는 최대 203자 정도가 될 것으로 추정됐고, 대부분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양호했다. 전문가들은 비석의 연대가 신사년인 441년, 501년, 561년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을 주목했다. 그 중에서도 고졸한 글자, 관직의 명칭 등을 감안하면 561년보다는 501년 혹은 441년일 가능성이 더 커보였다. 그렇다면 이 비석은 501년에 세웠든, 441년에 세웠든, 지금까지 발견된 신사 고비 가운데 시대가 가장 이른 것이다.

기존의 본(本)자로 판독되던 글자가 졸(卒)자의 이체자로 확인되었다.(위 사진) 또 5행8번째의 글자는 종전에는 말(末)과 주(朱)자로 견해가 갈렸으나 3D 판독결과 주(朱)자로 확정됐다.(아래사진) |하일식 교수 제공

■‘듣보’ 표현으로 ‘대략난감’

학계는 흥분했다. 중성리 비석의 발견을 ‘자료가 거의 없는 한국 고대사 분야에서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단비’라 표현했다. 게다가 비석의 글자를 대부분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니 정확한 판독은 시간문제로 여겼다.

하지만 막상 읽어낸 글자를 토대로 해석하려던 전문가들은 ‘아차!’ 했다. 만만하게 보았던 비문의 내용이 너무도 난해했기 때문이었다. 전문가들의 우려는 곧 현실로 드러났다. 특히 ‘세령(世令)’, ‘진벌일(珍伐壹)’, ‘궁(宮)’ ‘백구(白口)’ 등 이른바 ‘듣보’ 표현이나 용어가 줄줄이 나왔다. 시쳇말로 ‘대략난감’이었다. 

이런 용어나 표현들은 비문을 해석하는데 핵심이라 엄청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비문의 문장이 아직 정형화하지 않은 것도 문제다. 동사의 위치가 모호한 곳도 있다. 지금까지 확인한 가장 고졸(古拙)한 형태의 문장이라서 그럴 것이다. 

발견직후 경북매일신문에 보도된 중성리 비석 사진, 비교적 판독하기 쉬운 양호한 상태로 확인됐다. 하지만 듣도 보도 못한 단어와 표현 등이 등장하는 바람에 정확한 판독에 애를 먹고 있다.

그런데 그런 사정은 포항 중성리가 발견된지 1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비문의 문장이 워낙 난해하다보니 누구도 실체에 가깝게 다가가기 어려운 탓이다. 다만 ‘6세기초 지금의 흥해지역에서 왕경인과 현지인이 뒤얽혀 무언가를 뺏고 빼앗겨서 분쟁이 생겼고, 그래서 중앙정부에서 분쟁을 판정한 결과를 고지(告知)한 내용’이라는 데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즉 풀어보자면 흥해(포항)지역에 어떤 분쟁(소송)이 일어났는데 소송 당사자만 11명이나 되는 복잡한 분쟁이었다. 그런데 이 분쟁에 왕경에 근거를 둔 이른바 6부(훼부, 사훼부 등) 사람도 간여했다. 이에 대해 중앙에서는 분쟁을 해결하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집행하도록 지시(敎)를 내렸다.

최종판결은 “예전에 두지사간지궁과 일부지궁이 빼앗은 것을 ‘모단벌훼와 작민사간지’에게 돌려주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만약 후세에 말썽을 일으키면 중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못을 박는다. 이 비석은 신라 중앙과 지방이 복잡하게 얽힌 소송의 평결을 담은 판결문을 담아 세운 고지문임을 알 수 있다. 

비석은 곧 평결의 과정을 낱낱이 알려 후세에 경계를 삼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요약하면 대체 무엇이 난해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울진 봉평비나 영일 냉수리비와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게다가 “말썽을 일으키면 중죄를 얻는다”는 대목은 영일 냉수리비와 똑같은 판결문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간단치 않다. 우선 빼앗은 것을 되돌려준 판결은 맞는데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즉 영일 냉수리비에서는 분쟁의 대상을 ‘재물(財)’이라 했지만 중성리비에서는 ‘무엇을 뺏고 되돌려주었는지’ 나와있지 않다. 또 다투는 사람, 즉 쟁인(爭人)으로 열거된 사람과, 뒤에 뺏고 돌려받은 사람 중에 일치하는 경우가 없다. 쟁인을 분쟁의 당사자라 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재물(財)’를 놓고 분쟁을 벌이는 당사자가 비문 속에 명기되어 있는 냉수리비와는 사뭇 다르다. 

중성리비문에 표현된 궁(宮)자. 하일식 교수는 “6세기초까지 존재하던 왕족 및 귀족 등 세력가들의 거처와 그에 딸린 재화와 토지 등을 관리하는 실무조직을 궁(宮)이라 일컬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싸운 것일까

지난 18~19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개최한 ‘신라 왕경과 포항 중성리 신라비’ 학술회의는 발견 10주년을 맞고도 여전히 오리무중인 ‘중성비문’의 실체를 더듬어본 기회였다. 

이 중에서도 대체 분쟁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두고 천착해온 하일식 연세대 교수의 발표문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하교수는 중성비문에 등장하는 분쟁의 대상은 ‘수조권(收租權)’ 혹은 ‘수조지’였을 것이라 추정했다,

수조권이 무엇인가. 한국사를 배울 때 자주 등장하는 토지제도이자 귀족·관료에게 지급하는 보수시스템이다.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고대 사회~조선 전기까지 이어진 제도였다. 당시에는 국가가 세금을 거둬 공무에 종사하는 귀족·관료에게 보수를 일괄 지급하지 않았다. 귀족·관료의 등급을 나눠 토지를 배정하고 국가를 대신해서 직접 세금을 거둘 수 있게 했다. 이것이 수조권이다.

하일식 교수는 중성리 비문에 등장하는 ‘분쟁의 대상’이 바로 수조권을 두고 벌인 다툼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하교수는 특히 ‘중성리 분쟁’이 고려시대 전시과(田柴科) 제도 아래서 자행된 수조권 분쟁을 연상시킨다고 보았다. 976년(고려 경종 1년)이 시행된 전시과는 관리, 공신, 관청, 기타 신분 등에 지급하던 종합토지제도이다. 전지(농사 짓는 땅)와 시지(땔감을 공급하는 땅)를 직접 관리·공신·관청 등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토지에 대한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 즉 수조권을 준 제도이다. 그러나 고려말 권력자들에 의한 불법적인 토지탈점이 전개됐고, 이것은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로 이어졌으며, 국가 재정구조 역시 파탄에 이르게 됐다.

중성리비에서 보이는 신사(辛巳) 간지. 글자의 모습이 고졸한 것으로 보아 501년이나 441년 신사년인 것으로 추정된다.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

단적인 예로 고려말 문신·학자인 이색(1328~1398)의 상소문을 보면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권세가가 토지를 겸병(兼幷)하니 까치둥지에 비둘기가 산다는 것이 모두 이것입니다. (수조권자가 누구인지 기록한) 토지대장에 가짜가 섞여있고, 전주(수조권자)가 1명이면 다행인데 3~4명, 심지어는 7~8명이 찾아와 곡식을 다퉈 거둬갑니다. 백성은 논밭(田)을 하늘로 여기는데….”(<고려사> ‘열전·이색’)    

이색의 상소는 수조권자를 자처하는 자가 하나의 토지에 3~4명, 심지어는 7~8명에 이르는 고려말의 폐단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즉 권세가라면 불법 또는 편법으로 자신의 수조지를 중앙정부의 토지대장에 올리고 가을이면 해당토지가 있는 곳에 가서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면 그보다 힘이 약한 본래의 정당한 수조권자는 맞서 싸우기 힘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약한 수조권자라도 경작하는 농민보다는 우위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 토지에 여러 명의 수조권자가 세금을 앞다퉈 거뒀고, 그에 따라 농민은 중복되는 수탈에 고통을 겪었던 것이다.

1388년(우왕 14년) 대사헌 조준(1346~1405)의 상소문은 전시과 제도가 무너진 뒤의 난맥상을 고발하고 있다. 

“(토지제도가 무너져) 수령과 안렴사(관찰사)가 본래의 업무를 접어두고 날마다 전송(田訟·수조권 분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추위와 더위를 피하지 않고, 땀을 훔치고 붓을 잡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쌓아둔 문권(토지대장)에서 증거를 맞춰보고 전호(佃戶·경작자)를 심문하거나 늙은이에게 캐묻습니다.”(<고려사> ‘식화·녹과전’)

지방의 수조권 분쟁을 일차적으로 판정하는 임무는 수령과 안렴사(관찰사)의 몫이었다. 그런데 ‘땀을 훔치고 붓을 잡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쌓아둔 문권(토지대장)에서 증거를 맞춰’ 해결할 정도로 지방관들이 수조권(지) 분쟁을 다루느라 격무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토지대장 등에서 수조권자가 누구인지 판정할 수 없을 때는 경작자(전호)를 심문하거나 그도 안될 때는 전후사정을 알만한 고을 노인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이들은 일종의 참고인이었던 셈이다.

비교적 상태가 좋게 판독되는 조사각 225도와 315도 각도에서 찍은 사진, 중앙정부가 파견한 ‘사인 과서모리’가  다중이 모인 자리에서 판결문을 낭독했다(白口)했다’는 뜻으로 읽힌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권력자 갑(甲)과 을(乙)의 분쟁 

그렇다면 이 고려시대의 수조권 분쟁과 5~6세기 신라시대 비석인 포항 중성리비와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중성리 비문을 보면 ‘두지사간지궁(豆智沙干支宮)과 일부지궁(日夫智宮)이 빼앗았다고 하니 이제 다시 모단벌훼(牟旦伐喙)와 작민사간지(作民沙干支)에게 돌려주라”는 내용이 있다. 이때 피고인들의 이름 뒤에 붙는 궁(宮)은 무엇일까. 사전적인 의미에서 궁은 왕이나 왕족 등이 거처하는 건축물이나 건축물을 포괄하는 구역을 뜻한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국왕 뿐만 아니라 왕후나 왕자, 공주가 거처하는 곳도 궁원(宮院)으로 일컬었다. 그리고 이들 궁원이 세금을 거두는, 즉 수조권을 행사하는 수조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려말이 되면 이들 궁원이 무도한 위세를 과시하며 다른 수조권자가 있는 땅(수조지)을 빼앗았다. 하교수는 궁원(宮院)이 특권적인 수조지를 배정받고, 그 수조지가 지방관의 관리 하에 경작·수조된 고려시대의 제도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불쑥 튀어나온 게 아니라고 본다. 전시대인 신라의 관행과 제도를 이어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중성리 비문에 등장하는 내용, 즉 ‘두지사간지궁(豆智沙干支宮)과 일부지궁(日夫智宮)이 모단벌훼(牟旦伐喙)와 작민사간지(作民沙干支)에게 빼앗았다가 돌려주어야 했던’는 것을 ‘신라시대판 수조지’로 보았다. 말하자면 신라시대의 궁(원)이 다른 사람들의 수조지를 빼앗았다가 돌려준 사건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통일기 이전 원효대사(617~686)와 요석공주의 만남을 전한 <삼국유사> ‘의해·원효불기’는 요석공주의 거처를 ‘요석궁’이라 지칭했다.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진평왕조’는 “585년(진평왕 7년) 진평왕이 대궁(大宮), 양궁(梁宮), 사량궁(沙梁宮) 3곳에 각기 사신(私臣)을 두었다”고 기록했다. 이 때의 궁은 단순 건축물이 아니라 공주의 거처이거나 재원과 직원을 관장하는 기구로도 일컬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문무왕조’는 “622년(문무왕 2년) 본피궁의 재화와 전장(수조지), 노복을 반으로 나눠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하사했다”고 했다. 신라의 왕경조직인 본피부는 경주 6부의 하나인데, 정씨 성(<삼국유사>에서는 최씨)을 배정했다고 한다. 이것은 김씨 왕족과 관련된 곳에만 궁(宮)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정씨성(혹은 최씨성)의 본피궁에도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622년 그 본피궁의 재화와 수조지, 노복을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나눠줌으로써 (본피궁이) 소멸됐다는 것이다.

중성리 비석이 발견된 지점,. 마을 주민 김헌도씨의 눈썰미가 아니었던들 그대로 사장되고 말았을 것이다.

■다중이 모인 자리에서 문서아닌 말로 판결문 읽었다 

그렇다면 중성리비에서 보이는 ‘두지사간지궁’이나 ‘일부지궁’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하일식 교수는 “6세기초까지 존재하던 왕족 및 귀족 등 세력가들의 거처와 그에 딸린 재화와 토지 등을 관리하는 실무조직을 궁(宮)이라 일컬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니 중성리 비문은 ‘궁(宮)이라 일컬어질만한 세력가(두지사간지궁과 일부지궁)가 그렇지못한 자들(모단벌훼와 작민사간지)에게 빼앗았던(奪) 수조권이나 수조지를 소송 끝에 중앙 정부의 패소 판결로 되돌려 준(還) 것’이라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중성리 비문에서 다른 6세기대 비문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표현이 있다.

 ‘백구(白口)’가 그렇다. 이것은 글(書)이 아니라 말(口)로 소리내어 이야기한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즉 판결내용을 알리고 “다시 말썽을 일으키면 중죄로 다스리겠다”고 엄중경고한 뒤 앞서의 모든 내용을 ‘말로 확인하며 소리내어 알리는’ 이른바 판결문 낭독을 ‘구(口)’라는 글자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비문을 보면 중앙정부의 명을 전달한 사인 2명이 ‘세령(世令)’했다는 표현도 나온다. 하일식 교수는 울진 봉평리비와 영일 냉수리비에도 ‘세중(世中)’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 주목했다. 따라서 하교수는 “중앙정부의 판결문을 소송 당사자와 관련자 뿐 아니라 그 지역에 사는 다중(多衆)이 모인 자리에서 선포한다는 의미로 ‘세(世)’자를 사용한 것이 아니냐”고 추정했다. 


■요점과 단어만 나열한 판결문

중성리 비문의 내용이 난해하고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가 또 있다. 울진 봉평비와 영일 냉수리비 등과 달리 문장 자체가 서술형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일식 교수는 “중성리 비문의 형식이 개조식(個條式)이어서 그렇다”고 풀이했다. 개조식은 오늘날의 행정서식과 공문과 비슷한 글 형식이다. 즉 글을 쓸 때 앞에 번호를 붙여가며 짧게 끊어 요점이나 단어만 나열하는 형식이다보니 후세 사람들이 해석하기가 역불급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하일식 교수의 주장이 무오류, 무결점일 수는 없다. 연구자들의 다양한 시각의 후속 논문을 기대해본다. 

울진 봉평비와 영일 냉수리비, 그리고 포항 중성리비 등 5~6세기 비석을 찾아냄으로써 당대의 재판과정에서 마음을 졸였고, 그 판결에 따라 일희일비 했을 1500년 신라인들의 애환을 복원할 수 있다. 그런 1500년전의 역사를 찾아낸 이들이 고고학자도, 역사학자도 아닌 평범한 농부들이었다. 그이들이 아니었다면 생생한 신라인들의 ‘삶의 현장’은 쓸모없는 돌로 버려졌거나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이 기사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18~19일 개최한 ‘신라 왕성과 포항 중성리 신라비’ 학술대회 발표문을 참고했습니다. 특히 하일식 연세대 교수의 ‘포팡중성리 신라비 비문 판독’과 ‘신라 포항중성리비에서 탈(奪)과 환(還)의 대상’ 발표문을 주로 인용했습니다. 또한 이인희 경일대교수와 전경효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의 ‘포항 중성리 자료집 제작과 이미지 촬영’ 발표문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9년 8월에 펴낸 보고서 <포항중성리 신라비>와 조유전·이기환의 2011년 공저인 <한국사기행>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