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충남 태안의 신진도라는 섬에 방치되어있던 폐가가 사실은 177년 된 유서깊은 건물이고, 그 건물이 인근 해역을 지키고 관리하던 수군지휘소였음을 알려주는 흔적들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는데요. 조선시대엔 이곳 앞바다에서 조선판 세월호 사건도 발생했다고 하는데요. 산림청 공무원이 우연히 찾아낸 이 폐가에서 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에서 알아보려 합니다.
177년전 안흥량을 지키는 수군 지휘소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폐가건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 제공
문=폐가는 원래 존재했던 것 아닌가요? 산림청 공무원이 어떻게 찾았다는 겁니까?
답=지난 4월21일이었는데 신진도의 산림연수원 시설관리인으로 근무하던 정동환이라는 공무원이 연수원 근방의 숲을 답사하다가 다 쓰러져가는 폐가를 발견했답니다.
문=보통 폐가라면 스산한 느낌이어서 그냥 지나치는 거 아닙니까?
답=그렇죠. 폐가가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서 산림청 차원에 그 건물을 활용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답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게다가 전날에 좋아하던 고향 어르신을 만나뵙는 꿈까지 꾸어서 왠지 그 폐가에 들어가 보고 싶었답니다.
문=조상 꿈은 아니어도 동네 어르신 꿈은 꾸었으니 길몽이었네요?
답=그렇습니다. 겉보기에 다 쓰러져가는 집 같았지만 막상 들어가보니 골격은 그대로 남아있었답니다. 그런데 정동환씨의 눈에 방 안의 천정을 지탱한 종도리에 보였는데, 아 글쎄 그 종도리에 심상치않은 글씨가 새겨진 것을 확인한겁니다. 그리고 뜯어진채 바람에 흩날리던 벽지 사이에서도 한자로 된 글씨를 보았답니다.
충남 태안 신진도의 177년 폐가에서 추가로 확인된 한시. 군포로 찰보리를 냈다는 내용을 담았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 제공
문=웬만한 사람들은 그저 지나칠 수 있었던 것 아닌가요?
답=그렇죠. 그런데 이 분이 부여출신이어서 뭔가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았답니다. 그래서 글씨를 읽어보니 ‘수군(水軍)’자가 보였답니다. 수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최소한 조선시대잖습니까. 그래서 가까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에 신고했답니다.
문=과연 백제의 고도 부여 출신 다운 신속한 신고였네요?
답=그렇습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전문가들과 함께 상량문을 읽어보니 ‘도광(道光) 23년 7월 16일’이었다. ‘도광’은 청나라 도광제(道光帝·1820~1850) 연호인데, 도광 23년은 1843년(헌종 9년)입니다. 이 폐가는 무려 177년 된 건물이었던 겁니다. 연구소가 조사해보니 이 집은 1970년대 말 주인이 바뀐 후 50년 가까이 방치됐답니다.
문=수군이라는 글자가 보였다면서요? 그건 뭐였죠?
답=‘수군(水軍) 김아지, 나이 15세, 키 4척, 거주지 내맹면, 아버지 윤희’ ‘보인(保人) 박복현, 나이 임오생 18세, 키 4척, 거주지 고산면, 아버지 성산’…. 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문=뭐 인적사항 같은 것이 적혀있는 것 같은데요?
답=맞아요. 군인의 이름, 주소, 출생연도, 나이, 신장을 아버지 이름과 함께 적어놓았는데요. 19세기 당시 이곳 태안 앞바다를 지키던 60여명의 수군, 즉 군인 명단이었습니다.
안흥량(安興梁)은 신진도, 마도, 관장목을 연결하는 물길이 험한 구역이다. 원래는 물길이 험하다고 해서 난행량(難行梁)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졌지만 하도 사고가 많이 일어나자 ‘편안하게 흥한다’는 의미의 안흥량으로 바꾸었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 제공
문=인적사항 보면 키가 4척인 군인들이 있던데, 키가 120센티 정도라는 건데 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답=그러게요. 생각해보면 자기키보다 큰 병장기 들도 근무했을거 아닙니까. 명단이 적힌 사람들이 다 태안 인근 출신이던데...
어쨌든 이후에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이 폐가를 추가 조사했는데, 흥미로운 사실을 더 밝혀냈어요. 이 건물은 260평에 달하는데 방 5칸, 광(창고) 6칸, 부엌 3칸, 소 외양간 1칸, 말(馬) 우리 등을 갖추고 있었답니다.
문=건물이 꽤 컸네요? 예사로운 집 같지가 않은데요?
답=맞아요. 건물에 창고가 6칸이나 있었다는 것은 여염집이 아니었다는 거죠. 소외양간과 말 우리도 있고, 그래서 연구소에서는 이 건물이 이 지역 수군을 관리한 지휘소였던 것으로 판단합니다. 즉 수군사령부였다고 판단합니다.
조운선이 태안 해역에서 조난당하는 일이 빈발하자 고려와 조선조는 공히 태안 일대에 대대적인 운하공사를 벌였다. 조선판 4대강 공사라 일컬을만 했다. 하지만 지반이 암반층인데다 급격한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에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부실 날림공사라는 지적이 잇따르자 급기야 운하공사는 무산되고 말았다.|경향신문 자료
문=그래서 수군 명부가 있었던 거군요?
답=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건물 벽에는 한시가 여러 편 적혀 있었습니다. 아마도 한시가 적힌 종이를 계속 벽지로 발랐을 겁니다. 제법 글씨도 잘 쓰고 내용도 좋은 시들이 남아있었답니다. 그중에는 물살이 빠르기로 악명이 높은 이 지역 앞바다에서 많은 인명피해가 났다는 것을 표현한 시와 글귀 들도 보였답니다.
문=어떤 시들인가요?
답=‘사람이 계수나무꽃 떨어지듯 하여, 밤은 깊은데 봄산도 적막하다”(人間桂花落 夜靜春山空)’는 시가 있어요. 이 시는 당나라 시인 왕유(699~759)의 시를 인용해서 태안 앞바다에서 희생당한 인명을 묘사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가능합니다.
또 벽지 중에는 무량과 수각이라는 글자 옆에 ‘농담’을 의미하는 ‘구롱’ 글자가 장난스럽게 쓰여있거든요.
문=그 구롱이라는 의미가 뭘까요?
답=‘무량수각’은 ‘영원한 생명을 기원하는 건물’이라는 뜻인데요. 침몰사고가 유난히 많은 해역에서 수군과 조운선(세곡 운반선)을 관리하는 수군지휘소였으니까 안전항해를 갈망한다는 의미에서 ‘무량수각’이라 이름을 붙였을 겁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농담을 의미하는 ‘구롱(口弄)’을 쓴 것은 수수께끼죠. 그러나 어떤 연구자는 이곳 바다의 특성상 아무리 조심해도 인명피해를 줄일 수 없는데 "무슨 무량수각이냐"는 뜻에서 누군가 붙인 낙서가 아니겠냐고 추정하더라구요.
태안(굴포) 운하를 뚫는 방법으로 갑문식 공법을 제시했다. 천수만~가로림만 사이에 5개의 저수지를 만들어 놓고 각 저수지마다 작은 배를 띄워 전달되는 세곡을 차례차례 실어나르는 방식이었다.
문="무사고는 무슨, 그건 농담이야" 뭐 이런 뜻이라는 겁니까?
답=이 지역 앞바다 이름을 편안한 안(安)자에 흥할 흥(興)자를 써서 안흥량이라 합니다. 편안하게 흥한다는 의미지만 함정이 있습니다.
원래는 ‘지나다니기 힘든 해역’이라는 뜻의 ‘난행량(難行梁)’이었는데 바닷물이 너무 험해서 이곳을 지나가던 조운선(세금을 거둔 배)이 여러차례 침몰했기 때문에 안전운항을 바라는 사람들이 이름만이라도 안흥량으로 고쳤다는 겁니다.
지금 태안반도에는 고려 인종~조선 세조까지 수차례 뚫었던 운하의 흔적이 남아있다. 천수만 쪽인 태안군 태안읍(인평리·도내리)과 가로림만 쪽인 서산시 팔봉면(어송리·봉담리) 사이에 물길을 낸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문=아니 이 지역 앞바다가 얼마나 험하기에 그랬죠?
답=인당수 아시죠? 안흥량은 예부터 황해도 인당수, 강화도 손돌목, 전남의 울둘목(명량) 등과 함께 ‘4대 험로’로 꼽혔습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의 기행문인 <고려도경>은 “안흥량에서는 암초 때문에 격렬한 파고와 세찬 여울이 휘몰아친다. 안흥량 물길이 열 물과 충돌하고 암초 때문에 위험하므로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잇따른다”고 했습니다.
문=예부터 악명이 높았군요?
답=그렇습니다.
문=그렇게 험하면 다른 뱃길로 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답=그러나 예전에는 해안을 따라 배가 운항했죠. 먼 바다로 가면 더 불안하니까.
그런데 이 안흥량 쪽 바다는 해안선의 출입이 가장 심하고 다수의 섬이 분포돼있는 데다 수중암초가 곳곳에 있어서 조류의 변화가 심합니다.
문=교과서에서 배운 리아스식 해안이라는 곳이죠?
답=그렇죠. 과거에 산과 골짜기였던 곳이 여러 가지 이유로 바다에 잠기면서 나타난 해안의 형태를 말하는데 이럴 경우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게 나타나게되죠. 그래서 억센 조류가 해저 암각이나 섬에 부딪쳐 소용돌이 치고,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가 물살을 더욱 빠르게 만듭니다. 그러니 간조(썰물) 때나 계절적으로 풍랑이 거셀 때 안흥량을 통과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했다.
안흥량(마도) 해역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선박. 잘 포장된 고려자기가 켜켜이 쌓여있다. 강진에서 올라온 조운선이 수장된 것이다.
문=간조 때나 풍랑이 거셀 때는 배를 띄우지 않으면 됐을텐데요?
답=그렇습니다. 그래서 음력으로 5~7월 사이와 9월 상순 이후에는 기본적으로 운항이 어려웠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흥량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전라도를 비롯한 3남 지역의 세곡(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서울(개경·한양)로 운반하는 조운선의 경우엔 반드시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죠.
문=그래서 사고가 많이 난 거군요?
답=그렇습니다. 2007년에 안흥량 바다에서 주꾸미 잡던 어민이 주꾸미가 소라에 들어가 껍데기를 막고있던 청자대접을 발견했는데요. 그 덕분에 고려시대 난파선 1척(태안선)을 인양했잖습니까. 또 몇 달 뒤에 인근 바다에서 다른 어부가 우연히 청자를 인양했고, 그것이 단서가 되어 고려시대 난파선 3척을 인양했죠. 이게 마도 1,2,3호입니다.
문=후손들 입장에서는 보물선을 인양한 셈이지만 고려시대 당시에는 비극적인 난파사고가 일어난거네요.
답=그렇습니다. 사고가 너무 많이 일어났습니다. 조선시대 개국초인 1395년(태조 4년)부터 60여년동안 안흥량에서만 파괴 및 침몰 선박이 200여척, 인명피해 1200여명, 쌀 손실 1만5800석 이상이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1667년 윤4월조(현종 8년)’는 “안흥량을 왕래하는 선박 중 뒤집혀 침몰하는 것이 10척 중 7~8척에 이르고, 1년에 침몰하는 것이 적어도 20척 이하로 내려가지 않으며, 바람을 만나 사고가 많으면 40~50척에 이른다”고 기록했어요.
문=1년에 20~40척이 침몰됐다는 거네요?
답=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1395년(태조 4년) 5월 경상도 세곡을 싣고 안흥량을 통과하던 조운선 16척이 침몰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1403년(태종 3년)과 1414년(태종 14년)의 침몰사고는 대형참사였습니다. 1403년 사고로 조운선 34척이 침몰, 선원 1000여 명과 쌀 1만 여 석이 수장됐어요. 1414년 사고 때는 66척이 침몰, 미곡 5000석이 가라앉았습니다. 1455년(세조 1년) 안흥량에서 일어난 해난사고로 조운선 54척이 가라앉았다는 기록도 있어요.
최근 태안 인근 해역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선박. 고려와 조선 때 수차례에 걸쳐 운하사업이 이어졌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탁상공론과 함께 부실 날림공사가 두고두고 문제가 됐다.
문=사고가 일어났다 하면 대형사고였네요?
답=그렇습니다, <경국대전>이 반포된 성종 때의 조운선의 수가 총 155척이었다. 그렇다면 태종 때 66척과 세조 때 54척이 침몰한 배의 수는 각각 전라도 조운선의 3분의 1에 이른다고 할 수 있어요.
문=이런 사고는 천재지변 때문에 날 수도 있지만 보통은 인재가 아닙니까?
답=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결국 사람이 문제인 인재였죠. 예를 들자면 1403년(태종 3년) 5월 5일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침몰, 1000명의 선원과 미곡 1만석이 수장됐는데요. 그 때 태종 임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책임은 과인에게 있다. 출항일은 풍랑이 거센 날이어서 배를 띄울 수 없었는데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 출발시켰으니…. 과인이 백성을 사지(死地)로 몬 것이다.” 뭐 이렇게.
문=이런 대형사고가 일어나면 진상조사를 해야하잖아요?
답=그렇습니다. 아마도 사고 특조위 같은 위원회가 구성되었겠죠. 거기서 3개월간 조사 끝에 임금에게 올린 보고를 보면 그 날의 참사가 움직일 수 없는 인재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조운선을 띄울 때는 풍랑을 잘 파악하고 화물적재 중량을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데, 그 중요한 일을 용렬하고 간사한 무리에게 맡겨 그런 사고가 일어났다”는 겁니다.
문=풍랑을 파악하지 않고 과적을 일삼은 무리 때문에 일어난 사고라구요? 뭔가 세월호 사고 같은 냄새를 풍기는데요?
답=그렇죠. 11년 뒤인 1414년(태종 14년) 8월 8일 전라도 운반선 66척이 태풍을 만나 침몰·파손돼 200여 명이 익사하고 쌀·콩 5800석이 수장된 사건이 일어났는데요. 이때도 비슷했습니다.
수군지휘소로 추정되는 폐가에서 추가로 확인된 ‘무량’과 ‘수각’ 글자. 특히 ‘무량’ 옆에 구롱(口弄), 즉 ‘농담’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인명피해가 많은 안흥량을 관리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바란다’는 의미의 ‘무량수각’이 가당치 않다는 의미일까.|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 제공
문=인재였다는 말이죠?
답=그렇습니다. 진상조사단 보고에 따르면 “7~8월에는 조운선을 띄우지 않는 법인데 조운선을 담당한 호조가 전라수군절제사에게 공문을 보내 ‘7월에 세곡을 실어 8월초에 배를 띄우라’고 지시했다는 겁니다.
문=그럼 중앙부서인 호조가 문제 부서였네요?
답=조운의 원칙은 4월 쯤 배를 띄우고 5월 안에 한강에 도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호조가 가장 위험한 시기인 7월 말~8월 초에 조운선을 띄우라는 명을 내렸고, 전라수군절제사 역시 무리한 명령인줄 뻔히 알면서도 배를 출항시켜 참변을 불렀다는 겁니다.
문=전형적인 인재였네요? 조선판 세월호였네요?
답=그래도 태종은 참사사고가 일어나자 ”모든 사고의 책임은 나“라고 내 탓임을 강조했죠. 그것이 지도자의 아주 최소한의 자세죠.
문=선박건조 기술이나 날씨예보가 모든 시스템에서 열악했던 고려 조선시대였으니 사고를 막기에는 한계가 있었겠네요?
답=그렇죠. 그래서 예전 방송에서 말씀 드렸지만 고려(인종·1134년)부터 조선(중종·1521년)까지 천수만(태안)~가로림만(서산)을 뚫는 운하 건설방안이 계속 모색되었습니다.
177년전 안흥량을 지키는 수군 지휘소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폐가건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 제공
문=그랬죠. 운하건설사업은 모든 국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대규모 국책사업이잖아요?
답=그렇지만 실제로 5~6차례나 공사가 강행되기도 했습니다.
고려 인종 때인 1134년부터 조선 중종 때인 1521년까지 약 400년 동안 그랬답니다. 그러나 운하사업은 졸속·부실·비리 등의 갖가지 구설수 속에 번번이 실패로 끝났습니다.
문=실패의 요인은 무엇이었나요?
답=운하사업의 요체는 해난사고가 빈발하는 안흥량 해역을 거치지 않고 천수만~가로림만을 통과하는 항로를 개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고려 인종 때 벌인 공사가 상당히 진척되었답니다. 그래서 미공사 구간이 7리 정도만 남았는데, 끝내 실패로 돌아갔죠. 공사구간의 지반이 화강암 암반층이었고, 급격한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이었죠.
문=그랬으면 포기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답=그래도 험한 안흥량을 피할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의 대가는 지불할 수 있다고 믿었죠. 특히 조선 개국후 태종 때인 1403년 조운선 34척, 미곡 1만석, 선원 1000명이 수장된 대형참사를 겪은 뒤 운하 공사를 밀어붙여서 5000여명을 동원해서 불과 17일만에 공사를 마무리지었습니다.
문=성공했다는 말인가요?
답=아니요. 그야말로 전형적인 부실 날림공사였죠. 공사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어요. 원래의 계획은 그럴 듯 했습니다. 가로림만에서 천수만까지 무작정 물길을 뚫어 바닷길을 통하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 일종의 갑문식 공법을 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문=갑문식 공법이란 어떤 것인가요?
답=고려 때 이미 뚫어놓은 운하를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거죠. 가로림만~천수만 사이에 뚫은 기존의 운항 곳곳에 5개의 저수지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저수지마다 작은 배를 띄운다는 거죠. 각 저수지에 도착한 조운선의 짐을 차례로 옮겨 싣는다는 겁니다.
수군지휘소로 추정되는 폐가가 확인된 신진도 수군진촌과 안흥진성 지도, 조운선이 오가는 부근 해역에서는 고려~조선시대에 대형참사가 잇달았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 제공
문=그럴 듯 하긴 하네요?
답=그럴듯하죠. 세곡을 가득실은 조운선을 운하의 출발점에 정박시킨 뒤 그 짐을 각 저수지마다 옮겨실고 다시 작은 배를 이용해서 그 다음 저수지로 옮기는 방법이니까요. 그러나 이 방법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문=그 전제조건이란 뭡니까?
답=운하의 출발점에 세곡을 가득 실은 조운선이 정박해서 짐들을 모두 내려서 그 다음 저수지까지 실어야 하잖아요. 그러나 안흥량 해역의 바람이 너무 세고 암초가 험한데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서 조운선이 정박하기가 어려웠어요.
문=그럼 출발점부터 잘못된 공사였잖아요?
답=그래서 태종이 길길이 뜁니다. ”아니 그렇다면 지금까지 무슨 공사를 한거냐. 현장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보고해서 계획을 수정해야 하는거 아니냐. 공연히 농사철 백성들을 동원해서 헛수고 한 거 아니냐”고 합니다.
문=현장책임자들을 질책한거네요?
답=태종이 현장책임자들을 소환했더니 이들 또한 변명합니다. “저희는 의정부 명대로 저수지 만들고 운하 뚫은 공사를 시행한 것 뿐입니다”라고.
문=전형적인 책임회피네요?
답=그렇습니다. 웃기는 것은 태종이 몇몇 신료를 현장에 보냈더니 이들이 “인부 1만 명만 있으면 석 달 안에 완공할 수 있다고 큰소리 뻥뻥 칩니다.
문=참으로 한심한 일이네요?
답=결국 충청도 관찰사가 비분강개한 상소문을 올리는데요. 저수지 5곳을 운하에 조성해놓고 각각의 저수지에 작은 배로 세곡을 차례로 실어나른다는 계획 자체가 탁상공론이었다는 겁니다. 왜냐면 전라도 조운선이 1년에 실어나르는 세곡은 9만석이 넘는데, 작은 배 1척에 실을 수 있는 곡식은 150석 정도밖에 안된다는 거죠. 작은 배 1척이 각 저수지 따라 세곡을 부지런히 옮겨 실어도 9만석 세곡을 운반하려면 반년이 걸려도 다 운반할 수 없다는 겁니다.
마을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복원해본 폐가(수군지휘소 추정)의 원모습. 이 건물엔 광이 6개, 방 5칸, 광 6칸, 부엌 3칸, 소 외양간 1칸, 말(馬) 우리 1칸 등이 있었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 제공
문=아니 작은 배를 여러 척 배치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답=기존에 운하공사를 다 끝낸 곳에는 기껏해야 세곡 150석을 실을 수 있는 작은 배 1척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았어요. 게다가 조수간만츼 차 때문에 세곡 실은 조운선이 정박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한달에 10일 정도만 배가 운항할 수 있었고요.
문=그래서 전형적인 탁상공론이라고 했군요?
답=그렇습니다. 이 계획은 태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하륜(1347~1416)이 세웠는데, 태종실록을 보면 ”하륜이 운하공사의 계획을 세우자 아부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꼬집었습니다. 결국 태종이 공사중이던 운하를 현장에서 본 뒤에 ”포기하라“는 명을 내리게 돼죠. 이후에도 몇차례 운하공사가 재개되곤 했지만 결국 포기됩니다. 어떤 경우는 공사과정에서 수뢰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답니다.
문=그럼 고려 조선 때 운하공사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겠네요?
답=지금도 태안반도에는 고려 인종부터 조선 세조 때까지 뚫었던 운하 흔적이 남아있답니다. 천수만 쪽인 태안군 태안읍 안평리 도내리와 가로림만 쪽인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봉담리 쪽이 운하공사가 벌어지는 곳이었답니다.
문=그렇게 실패로 돌아갔으니 모든 배들은 하는 수없이 안흥량 해역을 지날 수밖에 없었네요?
답=그렇습니다. 안흥량의 위상은 유지될 수밖에 없었죠. 삼남(충청·전라·경상도)의 배가 모두 통과하는 길목인데다 바람만 받으면 단 하룻만에 강화도까지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매력 덕분에 고려시대부터 강도(강화도)의 문호였고 수로의 인후(목구멍)으로 각광받았습니다.
문=조정에서도 안흥량 해역을 전략적 요충지로 대접해줬겠네요?
답=그래서 1654년(효종 5년) 효종은 경남 통영의 벼 3만석을 배치할 군량미 군비축소 22곳을 지정했는데, 안흥진에만 3분의 1에 해당되는 1만석을 배당했습니다. <여지도서> <충청도 읍지>(영조~헌종) 등에 따르면 안흥진에는 종3품 수군첨절제사 휘하에 465명의 수군이 배치됐었습니다.
문=이번에 발견된 수군지휘소가 바로 그런 흔적이네요?
답=그렇습니다. 이번에 확인된 건물 인근에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시대 건물로 보이는 전통기와집이 다수 남아있었다는 증언이 있답니다. 이곳이 수군진과 관련된 마을이었음을 알려주는 거죠.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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