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아주 특별한’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지난 6월 서울 인사동에서 출토된 세종 시대 등 조선 전기 금속활자와, 옥루(자격루)·일정정시의 같은 과학기구의 부품 등 금속유물 1775점 전부를 전시하고 있는데요. 12월 31일까지 특별공개하고 있으니 시간나면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 6월부터 인사동 출토 유물 기사를 준비하면서 뒤통수를 한대 맞은 기분으로 읽은 실록 기사가 있었습니다.
■임금의 ‘일성정시의’ 설명글 토씨 하나 고칠 수 없었다.
1437년 4월 15일자 <세종실록>인데요. 세종의 명을 받은 승지 김돈(1385~1440)이 천문기구 ‘일성정시의’의 발명 내력과 원리를 쓴 기록입니다.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말 그대로 낮에는 해, 밤에는 별자리의 운행으로 시각을 측정하는 천문시계입니다.
이 시계는 낮에 태양 뿐만 아니라 밤에는 북극을 중심으로 항성이 규칙적으로 일주 운동을 한다는 사실에 착안한 조선의 발명품이죠. 그런데 김돈이 세종의 명을 받아 옮긴 일성정시의의 원리는 제 깜냥에는 도저히 해득할 수 없을 정도로 고차원적입니다.
그래서 ‘아니 얼마나 천문학에 통달했으면 저런 해설을 달 수 있을까’하고 승지 김돈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답니다. 그런데 글 중간에 반전의 내용을 읽고 무릎을 쳤습니다.
“일성정시의의 제작 원리를 주상(세종)께서 직접 지어 나(김돈)에게 주면서 ‘과인의 글을 토대로 해서 경들이 다듬고 보태라’고 하셨다. 하지만 임금이 직접 설명한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도 쉽고 상세해서 내(김돈)가 단 한 자도 고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글 머리와 끝만 살짝 보태 그대로 지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세종께서 해시계와 물시계를 결합한 ‘일성정시의’의 제작 및 작동 원리를 꿰뚫고 계셨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래서 김돈이 “토씨 하나 고칠 수 없었다”고 혀를 내둘렀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한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았던 임금
저는 다른 실록 기사를 떠올렸는데요. <세종실록> 1423년 12월 23일자인데요.
“임금(세종)은 늘 ‘난 말야. 책을 본 뒤에는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어’라 했다. 그 총명함과 학문 좋아하심은 천성이었다. 책 뿐이 아니고, 수많은 신하들의 이름과 그 사람의 이력, 그 사람의 가계도까지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았다. 한번 신하의 얼굴을 보면 여러 해가 지났다 해도 절대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아무게야!’하고 이름을 불러주었다.”
이 기사만 볼 때는 ‘천재 임금의 애교넘치는 자뻑’일까요. 아닙니다.
세종은 게으른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실록의 표현대로 ‘총명함’은 물론이고 ‘학문 좋아하심’도 장난이 아니었답니다.
책을 100~200번은 기본이고, 1100번이나 읽은 책도 있었습니다.(<세종실록> ‘1423년 12월 23일’)
<세종실록>은 “주상께서는 수라를 들 때에도 반드시 책을 펼쳐 좌우에 놓았고, 밤중에도 그치지 않았다”고 임금의 독서열을 침이 마르도록 상찬합니다. 공부에 관한한 세종의 자부심도 대단했는데요.
“내가 궁중에 있으면서 한가롭게 앉아 있을 때가 있느냐”고 반문하며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공부가 본인의 학문적 성취를 위한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세종은 중국책의 번역서를 틈나는대로 공부했는데요.
“과인이 중국어 번역서를 배우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니다. 명나라 사신을 접견할 때 미리 그 중국어 표현을 알면 대답할 말을 빨리 생각하여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라 했답니다.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공부한 거죠,
■황희·맹사성 투톱을 죽을 때까지 활용한 임금
한가지 딱한 생각은 듭니다. 이런 ‘노력하는 천재 임금’을 모시는 신하들이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종은 신하들을 절대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조금 심하게 말해 호호백발이 될 때까지 부려먹었답니다.
비근한 예로 임금이 주야장천 근정전에 앉아있으니 원로대신들까지 퇴근 후 집에 가서도 관복을 벗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냐. 임금이 언제 부를 지 몰랐기 때문이랍니다.
대표적인 예가 있죠. 세종은 1427년(세종 9) 1월 황희(1363~1452)을 좌의정, 맹사성(1360~1438)을 우의정에 발탁하는 인사쇄신을 단행하는데요. 승하한 선왕(태종)의 영향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정치적 포부를 마음껏 펼치겠다는 선언이었죠.
‘황희-맹사성 투톱’은 1435년(세종 17) 맹사성이 76살의 나이에 좌의정의 신분으로 은퇴할 때까지 8년간이나 지속됩니다.
황희는 1449년(세종 31)까지 무려 18년간 재상으로 세종을 보필하다가 87살의 나이에 은퇴했습니다. 세종은 은퇴한 두 분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국사를 처리할 때 자문을 요청했습니다. 맹사성·황희 두분은 약속이나 한듯 은퇴한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돌아가실 때의 연세는 맹사성이 79살(1438년), 황희는 90살(1452년)이었습니다.
세종은 그야말로 ‘황희·맹사성 투톱’의 재능을 죽을 때까지 활용했던 셈이죠. 세종 시대의 황금기가 ‘황희·맹사성’ 투톱체제에서 이뤄진 겁니다.
■세종에게 탈탈 털린 과학자
신하의 재능을 늙을 때까지 뽑아낸 예가 또 있습니다.
세종의 즉위 초기에 세종의 부름을 받은 무관 출신의 과학자이자 공조참판이었던 이천(1376~1451)인데요. 세종은 1420년(세종 2) 이천을 불러 “(태종 때 주조한) 활자(계미자·정해자)의 글자 모양이 고르지 않으니 당신이 한번 새롭게 만들어보라”는 특명을 내립니다. 그러나 당시 금속활자를 만들고, 그것을 조판·인쇄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금속활자는 모래주형(주물사)에 따라 주조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조한 활자가 네모 반듯하지 않고 모래알갱이가 붙어있어 주조 상태가 고르지 않았습니다. 힘들게 활자를 주조했어도 조판·인쇄 때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조판한 활자들을 고정시켜놓고 인쇄하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세종실록>(1434년 7월 2일)은 “조판틀 밑에 밀랍(꿀 찌꺼기)을 펴서 그 위에 글자를 배열한 뒤 인쇄했지만 아무리 말려도 부드러운 밀랍의 성질 때문에 겨우 두어 장만 인쇄하면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졌다”고 괴로움을 토로합니다. 그래서 선왕인 태종이 주자소를 만든다고 할 때 대소신료들이 “절대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극력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주자소가 설립되고, 온갖 시행착오 끝에 계미자(1403년)-‘정해자’(1407년)를 주조했지만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이럴 때 세종이 이천에게 “당신이 한번 해보라”는 명을 내린겁니다. 활자 주조와 조판·인쇄 때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던 이천이 난색을 표했지만 세종은 “당신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강요했습니다.
결국 세종의 명을 받잡은 이천은 나름 온갖 방법을 짜내서 급기야 새로운 활자를 주조하는데요. 경자년(1420년)에 주조되었다고 해서 ‘경자자’라는 이름이 붙은 활자입니다. 경자자의 개발로 하루에 20여장 인쇄할 수 있었는데요. 하지만 완벽주의자인 세종이 만족할 리 없었습니다. 여전히 활자 모양도, 조판·인쇄 때의 안정도도 부족했습니다.
찜찜했던 세종은 14년이 흐른 1434년(세종 16) 다시 이천을 소환합니다.
당시 이천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59세)였습니다. 지금의 환갑이면 ‘청춘’이라 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라면 손주들 재롱 보면서 편히 지낼 나이였죠. 이천으로서는 나이도 많고, 더 이상의 활자개발도, 조판·인쇄 때 고정시킬 방도를 찾기도 쉽지 않았을겁니다. 그러나 세종이 누굽니까. 절대 그냥 둘 리 없죠. 칠순·팔순이 넘은 맹사성·황희 같은 분도 시쳇말로 부려먹었는데, 환갑도 안된 이천을 그냥 둘리 없었죠. 14년 만에 다시 세종의 명을 받은 이천은 갖가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성과를 이뤄냅니다.
‘경자자’의 단점을 상당부분 보완하고, 조판·인쇄 때 글자들이 흔들리지 않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조판한 활자와 활자 사이의 빈곳을 대나무로 끼워 고정시킨 겁니다.(<용재총화>) 갑인년(1434년)에 개발한 활자라서 ‘갑인자’라는 이름이 붙었답니다.
‘갑인자’ 개발로 하루에 40여장 인쇄하는데 성공했는데요. 특히 ‘갑인자’로 찍어낸 책은 글자획에 필력(筆力)의 약동이 잘 나타나고 글자 사이가 여유있게 떨어져 있으며, 판면이 커서 늠름합니다. 그래서 이 ‘갑인자’는 활자본의 백미로 일컬어집니다.
그렇게 개발된 갑인자의 일부가 이번에 인사동에서 출토된겁니다.
아닌 말로 이천이야말로 세종에 의해 그 능력이 탈탈 털린 인재였답니다. 세종은 금속활자의 개발에만 이천을 활용한게 아닙니다. 장영실과 함께 혼천의와 간의를 비롯한 일성정시의 등의 해시계를 제작했습니다. 간의와 앙부일구 등의 기기를 실무 제작한 것도 이천이었습니다. 당대 세계 최고의 천문대로 평가받은 간의대를 건축한 이도 이천이었습니다. 대마도를 정벌할 때에 사용한 쾌속선도 제작했구요. 조선식 대형포인 조립식 총통완구를 독창적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세종도 대단하지만, 그런 세종의 끊임없는 요구를 모두 충족시킨 이천도 참 대단한 분이죠.
■“호의호식하는 너희보다 낫다”
세종이 특히 심혈을 기울인 분야가 바로 천문관측이었는데요.
이유가 있었죠. 예부터 하늘의 성변을 제대로 관측하는 것은 하늘과 백성을 소통시키는 통치권자의 능력이었습니다.
세종은 가만 있지 않았죠. 1420년(세종 2) 세종은 내관상감을 설치하여 첨성대를 세우고 전문가들을 대거 선발합니다. 심지어 은퇴 후 낙향(전남 장흥)했던 전 관상감 윤사웅(생몰년 미상)에게 역마를 보내 “이걸 타고 당장 입궁하라”는 특명을 내립니다. 요즘으로 치면 낙향한 은퇴관리에게 관용차를 보낸 겁니다.
그렇게 재발탁한 윤사웅 등 천문 관리들을 경기 남양(화성)·광주·부평·인천 등의 수령으로 임명합니다. 서울 부근에 있어야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재빨리 상경할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승정원에서는 “저 미천한 무리를 큰 고을 4곳의 수령으로 발탁하다니 말도 안됩니다. 빨리 명을 도로 거두시라”는 상소문을 계속 올렸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이들은 밤잠을 자지 않고 천문을 관측해서 기상이변에 대비하고 있다”면서 “편안히 앉아 호의호식하는 너희와는 비교할 수 없다”고 일축해버립니다.
■세종의 시대에 부응한 장영실·박연
그렇다면 장영실(생몰년 미상)은 어떨까요. 장영실은 아버지가 원나라 소주·항주 출신이고, 어미가 기생이었습니다. 신분은 동래관노 출신이었습니다. 세종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즉위 3년만인 1421년 장영실을 관상감으로 불러 혼천의(천체관측기)제도를 연구하도록 했습니다. 장영실은 이때 세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답니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임금의 지혜를 받든 장영실의 기묘한 솜씨는 임금의 뜻과 정확하게 일치해서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전합니다.
세종은 예서 그만 두지 않았습니다. “장영실 등은 비록 지위가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은 따를 자가 없다”면서 “중국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 기계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라”고 지시한 겁니다.
세종은 또한 “중국의 각종 천문 서책을 수입하고 보루각과 흠경각의 혼천의(渾天儀) 도해도를 도면으로 그려오라”는 특명까지 내립니다. 천재 과학자 장영실은 역시 천재 군주 세종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눈썰미였습니다. 1년 뒤 돌아온 장영실 등은 눈대중으로 외우고, 그려온 중국 흠경각과 보루각의 도해도를 바탕으로 1년 만에 조선에 돌아와 똑같은 것을 만들었습니다. 세종은 장영실 등이 눈썰미로 배워온 실력으로 자격루를 제작하자 “원나라 자격루보다 훨씬 정교한 물시계를 만들다니 기이하구나”라고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맹사성과 함께 세종 시대에 예악을 정비하는데 큰 공을 세운 박연(1378~1458)은 어떤가요.
세종은 일찌기 “율관(음악에 쓰이는 기본음을 불어서 낼 수 있는 대나무관)을 만드는 일은 박연 만이 할 수 있다”면서 “악기를 박연에게 맡기면 소리와 가락(리듬)을 알아낼 것”이라고 신뢰감을 안겼습니다.
<용재총화>는 “(세종 연간의) 사람들은 (박연과 장영실 등을 두고) 모두 세종의 훌륭한 제작을 위하여 시대에 응해서 태어난 인물들”이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답니다.
■천재 임금에 천재 신하들
앞서 거론한 분들 만이 아니죠. 조선의 역법인 <칠정산>을 편찬한 이순지(?~1465)와 김담(1416~1464), 간의대·보루각 조성에 공이 큰 김돈, <농사직설>을 편찬한 정초(?~1434) 등 손꼽을 수 없을 정도죠. 정초와 함께 각종 천문의기 설계에 간여한 정인지(1396~1478)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거론한 인물들 중 정인지 등 상당수 인물은 순수 과학자라기보다는 문·무관 출신입니다.
하기야 천재 임금과 천재 신하들 뿐이 아닙니다.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1450~1452)이 세자 시절 측우기를 제작했다는 <세종실록> 기록(1441년 4월29일)이 있습니다. “세자가 가뭄을 근심해서 강우량을 재려고 땅을 팠지만, 정확한 양을 측정할 수 없어서 구리로 만든 그릇을 궁중에 두어 비온 양을 측정했다”는 겁니다.
세종은 또 둘째아들인 세조(수양대군·1417~1468, 재위 1455~1468)를 시켜 갑인자의 큰 글씨(대자)를 쓰도록 했습니다.
세조의 글씨로 주조한 ‘대자 갑인자’는 <자치통감>의 ‘큰 제목’인 ‘강(綱)’에 사용됐습니다. 물론 1434년에 주조한 갑인자(소자)는 <자치통감>의 ‘본문’인 ‘목(目)’에 쓰도록 했구요.(<세종실록> 1436년 7월29일)
어떻습니까. 세종 연간에는 세종의 자녀들은 물론이고, 문·무신 등의 신료, 그리고 관노비까지 임금을 닮아 문과와 이과에 두루 능통한 천재들이 넘쳐났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분들이 의기투합한 결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속활자와 당대 세계 최고의 천문과학가구들이 발명된거죠. 천재 임금에 천재 정치가, 천재 관리, 천재과학자들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세종 시대가 재림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