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어느 날, 코흘리개 어린이가 청와대 앞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저편에서 다가오는 까만색 승용차를 보고 손을 흔들었더니 창문이 열렸다. 어떤 아주머니가 고개를 쑥 빼더니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아주머니는 고 육영수 여사였다. 얼마 후인 1968년 1월 21일 밤 9시 무렵 청운동 언덕에 살던 어린이는 콩볶는 듯한 총소리에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이튿날부터 헬리콥터가 북악산 상공을 돌며 ‘(무장) 간첩은 자수하라!’고 외쳤다. 생포된 북한 유격대원 김신조는 이렇게 외쳤다.
“청와대를 까러왔수다. 박정희 목따러 왔시요.”
이것이 1·21사태다. 이후 청와대 앞길엔 ‘통행불가’의 딱지가 붙었다.
김영삼 정부 때(1996년 2월) 비로소 풀렸지만 낮 시간(오전 5시 30분~오후 8시)으로 제한됐다. 말이 부분 개방이었지 지나가던 사람들의 기분을 잡치
게 한 일도 비일비재했다.
청와대 주변을 걸을라치면 “어디 가시냐” “가방 좀 열어보면 안되겠냐”면서 불쑥 다가왔다. 행인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것도 영 기분나빴다.
외국인 관광객은 무사통과시키면서 내국인만 검문하는 까닭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불통의 정권일수록 검문검색이 셌다는 것을 경험칙으로 느낄 수 있다.
얼마전 새 정부가 들어선 후 처음으로 청와대 앞길을 걸었다. 분위기가 확 달라져 있었다. 보안 요원들의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젠 검문 안하냐”고 물었더니 “열린 경호가 아니겠냐”는 웃음섞인 대답이 들렸다.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기관 소속 요원들일텐데 표정이 그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
그러더니 26일부터 ‘청와대 앞길을 24시간 개방한다’ 소식이 들렸다.
청와대 앞길은 사실 단절과 불통의 상징이었다. 남쪽(경복궁)과 북쪽(회맹단)을 가르고 있었다.
지금의 청와대 본관 터에 존재했던 회맹단은 쿠데타 등으로 정권을 잡은 조선조 태조와, 태종, 인조 등이 공신과 그 후손들까지 모조리 집합시켜놓고 충성맹세식을 열었던 곳이다.
단적인 예로 태종은 개국공신(1392)은 물론 1·2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운 정사공신(1398)과 좌명공신(1401)들이 5차례나 모여 충성을 다짐했다.
특히 1417년 4월 11일 지금의 청와대에서 행한 회맹은 특별했다. 개국·정사·좌명공신들은 물론 그들의 적장자(아들)까지 죄다 모여 충성서 다짐했다. 맹서문은 다음과 같다.
“자손된 자는 마땅히 몸받을 것을 생각하여 영세토록 잊으면 안된다. 만약 맹세를 바꾼다면 귀신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 자신 뿐 아니라 후손에게도 미칠 것이니….”
청와대 앞길 저 너머, 지금은 청와대 본관이 자리잡고 있는 저 곳이 바로 임금을 위해 대를 이어 충서하자고 맹세한 회맹단터이다.
희생물의 피를 바르고 조상신 하늘신에게 맹세했던 바로 그곳은 귀신의 터이다.
그 때문에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풍수상 청와대 앞길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사람들의 거주터, 북쪽은 귀신의 강림지(회맹단)에 해당된다”고까지 했다.
청와대를 거쳐간 주인들의 끝이 오죽 나빴으면 이런 말까지 나왔겠는가. 막혔던 길을 활짝 뚫었으니 십년묵은 체증이 풀리듯 소통하는 사회가 열렸으면 한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