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다!” 2009년 6월 서울 종로 청진동 ‘피맛골’ 일원을 발굴하던 한울문화재연구원 조사원들이 함성을 질렀다. 18세기 건물터를 약 2m 파내려 가던 중에 완벽한 형태의 백자항아리 3점(위 사진)을 발견한 것이다. “집 앞마당에 구덩이를 파서 항아리 3점을 가지런히 묻어놓았던 겁니다”(김홍식 원장).
갖가지 추측이 나왔다. 15세기 중후반의 작품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18세기 이 집의 주인이 백자항아리를 300년 이상 가보처럼 소장해왔다는 이야기다.
그러다 어떤 급변사태가 터져 집 앞마당에 구덩이를 파서 급히 묻어두고는 후일을 기약하며 떠난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어떤 사정 때문에 끝내 돌아오지 못한게 아닐까. 분명한 것은 백자 3점의 가치가 18세기에도 가보로 전해질만큼 보물급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도자기 전문가들은 3점 모두 경기 광주 일대의 관요(官窯)에서 생산한 최상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랬으니 신주단지 모시듯 했을 것이다. 조선 백자는 시대정신을 반영하면서 변해왔다.
유홍준 교수(명지대 석좌)는 “맑은 흰빛(15세기)-아이보리(16세기)-회백(17세기)-설백(18세기 영조 연간·달항아리)-유백(乳
白·18세기 정조 연간)으로 계속 변했다”고 설명했다.
삼채~칠채의 화려한 채색위주 자기를 만들었던 중국과, 중국의 제작기법을 따랐던 일본과는 사뭇 다르다. 조선은 날렵한 성형이나 요란한 기교를 쏙 빼고 자연미로 가득찬 순백자를 선택했다.
특히 미술사학자 최순우는 백자달항아리를 두고 “잘 생긴 며느리 같다”면서 “중국처럼 거만하거나 일본처럼 신경질적이지 않은 항아리”라 표현했다.
‘피맛골’ 백자항아리의 경우 순백자 항아리의 희소성이 있고, 흠결도 없으며, 출토지 또한 확실한 조선 전기(15세기)의 작품이라는 점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가 빼어나다.
그래서 문화재청이 최근 3점 모두를 보물로 지정예고한 것이다. 그래도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백자항아리가 출토된 피맛골 일원엔 고층건물들이 빽빽히 들어섰다.
조선시대 시전행랑과 육조건물들의 자취가 깔려있던 ‘피맛골’(아래사진은 재개발 전의 피맛골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백자를 고이 간직한 18세기 어느 백성의 사연도, 고관대작의 행차를 피해 뒷길을 택했던 피맛골 서민들의 애환도 모두 잊혀졌다. 골목이 사라지자 500년 이상 이어온 숱한 이야기들도 잊혀지고 말았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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