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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점 한 점이 '세종의 국보'…Q&A로 풀어보는 공평동 유물

지난 629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획기적인 발굴자료가 발표되었습니다. 서울 도심 한복판인 공평동에서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가 1600여 점이나 나왔고, 각종 천문기구들도 발굴됐다고 하는데요. 유물 한 점 한 점이 국보급이라 할 수 있는데, 발굴의 의미를 알아보려 합니다.(KBS1라디오 김성완의 '시사야')

 

1=금속활자가 1600여 점이나 나왔으니까 매우 중요한 것 같기는 한데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세종(1418~1450) 하면 어떤 분인가요. 33년 재위하시면서 오로지 백성을 긍휼히 여기면서 정사를 돌본 분이죠.

삼척동자가 다 알다시피 세종의 업적은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 훈민정음 창제와 각종 과학기구 발명, 대마도 정벌과 46진 개척, 그리고 <농사직설> 편찬, 금속활자 개발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렵죠. 그러나 막상 세종이 이룩한 업적의 흔적을 실물로 찾기란 쉽지 않아요.

 

2=그런가요? 많을 것 같은데?

 

=훈민정음 해례본처럼 일부 남아있는 문화재가 있지만 나머지는 실록이나 문헌자료로만 보였죠. 예를 들면 가장 아름다운 금속활자로 꼽히는 갑인자는 물론이고, 해시계·물시계·측우기 등 과학기구 등 세종 연간의 것들이 남아있지 않아요. 금속활자의 경우 활자로 찍어난 책이나 <세종실록> 등 각종 역사·문헌자료에서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죠. 지금 복원된 과학기구도 훗날에 제작된 것을 토대로 복원한 거구요.

공평동에서 쏟아진 1600여점의 금속활자 중 세종연간에 주조된 갑인자 활자가 다수 확인됐다. 수도문물원구원 제공

3=1만원권에 혼천의가 새겨져 있잖아요?

 

=그건 세종 시대 것이 아닙니다. 실물이 없어서 송이영이라는 분이 1669년에 만든 혼천시계(국보 230)를 토대로 새긴 겁니다. 남아있는 것은 모두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겁니다. 또 자격루도 세종 때 제작한 것은 없고, 중종 때 다시 제작한 자격루의 부품 일부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4=그럼 엄청 획기적인 유물자료가 도심한복판에서 나온 거네요?

 

=서울 종로 공평동 도시환경정비사업지구인데요. 한마디로 빙딩이 들어서는 곳입니다. 탑골공원 이 바로 보이는데요. 허리우드 극장 들어가는 초입에 있어요.

세종 연간에 주조된 것으로 보이는 한글 금속활자. 지금까지 전해지는 한글금속활자는 불과 750여점이었고, 1455년(세조 1년) 주조된 을해자가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였다. 그러나 이번에 을해자를 비롯해 그 이전 세종 연간에 주조된 갑인자 한글활자가 다수 보였다,수도문물연구원 제공  

5=어떻게 발견된 건지 궁금하네요?

 

=건물 들어서기 전에 한창 발굴중이었는데 지난 6116세기 조선시대 문화층에서 심상치않은 유물들이 보였답니다. 1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에서 대형 항아리 1점이 노출됐고, 그 옆에는 16세기 승자총통 몇 점이 널브러져 있었다는겁니다. 그런데 그 항아리에서 작은 파편이 떨어졌데요. 자세히 보니 금속활자였다는 겁니다. 추가로 발굴해보니 청동종과 동판, 금속부품들을 비롯한 청동제 유물이 계속 보였구요. 그래서 급히 전문가들을 초청해 검토해보니 하나같이 경천동지할 유물들이었다는 겁니다.

 

6=세종 시대에 제작된 유물들이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금속활자 1600여 점은 세종 연간, 1434(세종 18)에 제작된 추정 갑인자를 비롯해서 모두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이었답니다. 이것은 기록이나 인쇄된 책으로만 보았지, 실물로 구경할 수 없었던 활자들이었습니다. 그 뿐이 아니구요. 세종~중종 연간에 제작된 물시계의 부품인 주전’(籌箭)이 보였구요, 무엇보다 세종 연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천문시계(일성정시의)가 나왔는데요. 이런 것들이 세종 연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처음 보는 세종의 유물들이라는거죠.

세종 연간에 제작된 흠격각 옥루 혹은 중종 연간에 만들어진 물시계(자격루)의 부품인 주전.수도문물연구원 제공  

7=이 중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유물은 뭡니까?

 

=모든 유물이 획기적입니다. 우선 금속활자를 볼까요. 아시다시피 세종이 왜 금속활자를 개발하려 했는지 아는게 중요하죠. 법조문을 읽을 줄 몰라 죄를 저지르는 백성들을 위해 세종이 가장 우선적으로 한 정책이 바로 금속활자의 개발과 보급이었습니다. 세종은 1420(세종 2) 하루 20여 장 인출할 수 있는 활자(경자자)를 만들었는데요. 만족할 수 없었어요.

 

8=세종의 눈높이에 맞지 않았나보죠?

 

=그렇습니다. 활자가 가늘고 빽빽해서 보기에 어렵고요. 무엇보다 조판할 때 활자가 이리저리 쏠리는 폐단이 있었데요. 그래서 세종은 1434년에 과학자 이천(1376~1451)을 재촉해서 경자자를 개선한 활자를 제작했는데요. 이것을 갑인년(1434)에 만든 활자라 해서 갑인자라 합니다.

 

9=그렇게 개발했다면 한층 진일보한 활자였겠네요?

 

=갑인자로 찍어낸 책은 글자획에서 필력의 약동이 잘 나타나고 글자 사이가 여유있게 떨어져 있으며, 판면이 커서 늠름했다고 합니다. 또 먹물이 시커멓고 윤이 나서 한결 선명하고 아름다웠데요. 그래서 이 갑인자는 활자본의 백미라 하는데요. 갑인자의 개발로 하루에 40여장 인쇄하는 단계로 진보됐구요. 세종은 이 갑인자를 20여 만 자나 주조했습니다. 이렇게 잘 만들어져서 조선시대 말기까지 이 갑인자만 6번이나 다시 만들었답니다. 특별히 세종 때 만든 갑인자를 초주 갑인자라 합니다.

 

10=세종은 그렇게 만든 갑인자로 책을 찍어냈나요?

 

=그렇습니다. 그 활자로 평소 찍고 싶었던 책을 보급합니다. 조선과 중국의 효자·충신·열녀 각 110명을 선정해서 삽화(그림)를 그리고, 그림 설명과 시()까지 붙인 <삼강행실도>를 제작·배포합니다. 무지몽매 때문에 삼강오륜을 저버리는 범죄는 없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또 아동용 수신서인 <소학>도 찍었고, 역사서인 <자치통감>까지 간행합니다. <세종실록>이제 큰 활자(갑인자)를 주조했으니<자치통감>을 인쇄하고 전국에 반포해서 눈이 침침한 노인들이 보기 쉽도록 하고자 한다고 뿌듯해 했답니다.

세종 때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천문시계 일성정시의. 밤에는 측정할 수 없는 해시계(앙부일구)와 오차가 있을 수 있는 물시계(자격루)의 단점을 보완해서 별자리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려고 제작한 세종의 발명품이다. 해와 별로 시간을 정한다는 기구라 해서 일성정시의라 했다.수도문물연구원 제공

11=그런데 세종 때 제작한 갑인자가 실물로 남아있지 않았었다는 건가요?

 

=인쇄된 책에는 보이는데 정작 실물활자는 전해지지 않은거죠. 이번에 갑인자로 추정되는 활자가 다수 보인겁니다.

 

12=어떻게 그게 세종 때 만들어진 갑인자라 할 수 있나요?

 

=아직은 100% 단정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보도자료도 추정이라고 표현했는데요. 그러나 발굴된 활자들 중 상당수 활자의 뒷부분을 보니까 쌀을 담는 됫박처럼 장방형 형태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세종실록을 보면 갑인자를 네 모서리를 반듯하고 평평하게 만들었다고 했거든요. 조판할 때 사각형태로 만들어 조립해야 흔들림을 최소화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만든 거죠.

 

13=1434년이면 한글이 창제되기 전인데 한글 활자는 발견되지 않았나요?

 

=아닙니다. 한글금속활자 역시 엄청 쏟아졌죠. 한글 활자는 당연히 1434년 한자 갑인자 제작할 때 만든 것은 아닐거구요.

1443년 한글 창제 이후 주조된 활자겠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번에 발견된 금속활자 중에는 15세기에만 한정되어 사용한 이른바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쓴 한글활자가 4점 정도 발견됐다는 건데요.

 

14=동국정운식 한글표기가 뭡니까?

 

=세종이 한글창제할 때 최만리(?~1445) 등이 반대한 명분이 뭐였습니까. “언문을 창제하면 누가 한문을 배우겠냐.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비판했거든요. 그래서 세종은 아니야. 오히려 한자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 한글을 만드는 거야라는 명분을 세우면서 그러려면 들쭉날쭉했던 한자음 갖고는 안돼. 한글로 통일된 표준음으로 한자음을 표기해야 해라면서 동국정운을 편찬했거든요.

규칙적으로 잘린채 드러난 총통. '만력무자', 즉 1577년 제작했다는 명문이 새겨진 소승자총통들이 보였다.수도문물연구원 제공

15=그런데 왜 15세기에만 쓰였다는 건가요?

 

=만들고 보니까 비현실적었던 거죠. 일률적으로 표준음을 만들기가 쉽지않아서 15세기 말인 성종(1469~1494) 때 흐지부지됐어요.

 

16=그렇게 15세기에만 쓰인 한글활자가 나왔으니까 적어도 15세기에 제작된 활자는 맞겠네요?

 

=그렇습니다. 발굴된 활자들은 세조(1455~1468) , 1455(세조1) 만든 또 다른 금속활자인 을해자일 수도 있다고는 합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세종 연간에 만든 한글 활자가 섞여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뒷면이 됫박형태인 활자가 300~400자 정도 되니까 그중에는 세종 때 제작된 한글 갑인자가 분명 존재할 거라는 거죠.

 

17=한자도 아니고, 갑인자로 된 한글활자는 그래도 많이 남아있지 않나요?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금속활자 인쇄술을 자랑하지만 정작 남아있는 한글금속활자는 750여점에 불과합니다. 그중 가장 오래된 한글금속활자는 1455년 제작된 을해자인데요. 남아있는 을해자는 29점에 불과합니다.

 

18=아니 한글금속활자가 그렇게 없어요?

 

=그래요. 그래서 이번에 확인된 한글금속활자들이 세종 때 만들어진 갑인자라도, 세조 때 만들어진 을해자라도, 가장 오래된 한글금속활자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지금 남아있는 을해자가 고작 29점인데, 이번에 발굴된 1600여점 중 갑인자 을해자가 수백점이라면 얼마나 대단한 발굴입니까.

동종. '가정 십년' 즉 1535년(중종 30년)에 제작했음을 알리는 명문이 새겨져있다. 이런 유물들은 연대가 확실해서 발굴지점이  16 세기 문화층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이번 발굴지점이 한국활자역사의 성지가 되겠네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보도자료에서는 공식화하지는 못했는데요. 세종이 갑인자를 만들기 14년전인 1420년 주조한 활자가 있다고 했죠. 경자자인데요. 이번에 발견된 활자 중에 경자자인 듯한 활자들이 30~40점 보였다는 겁니다.

 

20=그러면 발굴유물의 시기가 더 앞당겨지는 거 아닌가요?

 

=그러나 활자를 더 면밀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그저 보이는데로 공식화 해버렸다가 후속연구에서 아니면 어떻게 됩니까. 학계의 검토를 받아와야겠죠. 그렇지 않아도 규장각에 갑인자 계통의 활자가 100여 점 있는데 언제 제작된 갑인자인지 특정할 수 없었는데, 이번에 발굴된 갑인자 추정 활자하고 비슷하답니다.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정식발굴로 자료가 나왔으니까 규장각 소장 활자들도 연구대상이 되겠네요. 그 활자들이 세종 때 제작된 갑인자일 수도 있는거죠.

 

21=이번에 세종 시대에 제작된 과학기구도 나왔다면서요?

 

=그렇습니다. 금속활자도 쏟아져 나왔지만 아주 작은 동제품 부품들이 잘게 잘린 형태로 출토됐어요. 원형으로 구멍이 송송 뚫린 동판도 나왔는데요. 무슨 커피잔이나 우산을 여러개 꽂는 장치 같아요. 동판에서 일전(一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요. 화살 전자여서 화살과 관련있는 유물로 추정했다가 전문가가 보고 과학기구라는 판단을 했답니다.

 

22=어떤 기구였나요?

 

=알고보니 물시계, 즉 자격루의 시보장치를 작동시키는 주전이라는 부속이었던 겁니다. 원통형 구슬방출장치에 구슬이 담겨있어서 물 받는 항아리에 물이 차오르면 시각을 나타내는 눈금대가 올라오면서 걸쇠를 밀면 잠금이 풀려 구슬이 나가는 구조거든요. 그 부품들이 출토된 겁니다.

국보 급 유물리 쏟아진 출토지점. 큰 항아리가 나오고 그 안에 금속활자 1600여점 등 금속유물들이 보였고, 그 옆에서도 물시계와 일성정시 부품들이 쏟아져 나왔다.수도문물연구원 제공 

23=이 장치가 세종 때 제작됐다는 겁니까?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네요. 하나는 1438(세종 20)에 경복궁 강녕전 옆에 세워진 건물에 설치된 자동종합물시계, 즉 옥루이거나, 1536년 중종 때 창덕궁에 새로 설치한 보루각의 물시계, 즉 자격루일 수도 있답니다. 물론 세종 연간의 흠경각 옥루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중종 시대의 물시계라도 사상 첫 실물확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큰거죠.

 

24=다른 천문기구도 발견됐다고 하던데요?

 

=일성정시의라는 주 야간 겸용의 천문시계가 발견됐습니다. 참 세종이라는 분 대단하죠, 해시계인 앙부일구 만들고, 자동시보장치인 물시계를 또 만들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부족하다고 여겼어요. 밤에는 해를 이용할 수 없잖아요. 또 물시계인 자격루도 오차가 생길 수 있잖아요. 그런 단점을 보완해서 별자리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려고 제작한 세종의 발명품입니다. 해와 별로 시간을 정한다는 기구라 해서 일성정시의라 했어요.

 

25=세종 때 제작한 것이 맞나요? 후대에 제작한 것을 수도 있잖아요?

 

=<세종실록> 1437415일 자를 보면 일성정시의를 4개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그 이후에 제작한 기록이 없어요. 그리고 실록에 묘사된 일성정시의를 묘사한 내용을 보면 이번에 발굴된 출토품과 매우 흡사합니다.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세종 시대의 과학기술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거죠.

 

26=다른 유물들도 있나요?

 

=1588(선조 21) 제작되었다는 명문(만력 무자)이 새겨진 승자 소승자총통 8점이 발견됐구요. 가정 십년(1535) 명문이 새겨진 동종도 나왔습니다. 이런 유물들은 연대가 확실해서 발굴지점이 16세기 문화층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겁니다.

 

27=보아하니 출토품들이 모두 금속유물인데, 발굴지점은 뭐하던 곳이었나요?

 

=작은 크기의 금속활자를 빼고는 다른 금속유물들은 규칙적으로 잘려있었습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잘라 항아리 안과 밖에 묻어둔 겁니다. 활자 중에는 불에 녹아 서로 엉겨 붙은 것들도 일부 확인되었는데요. 총통의 명문으로 보아 1588년 이후 어떤 모종의 사건 때문에 묻혔다가 530여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거라고 봐야죠. 발굴단에서는 1588년 후 4년 뒤에 일어난 임진왜란이나 정묘 병자호란 등을 지목하더라구요.

 

28=이번 발굴결과를 정리하자면요?

 

=이번에 발굴된 갑인자, 일성정시의, 물시계를 보십시오. 오로지 백성을 위한 세종대왕의 마음을 증거해주는 문화유산들인데요. 지금까지는 실물을 확인할 수 없다가 이번에 찾아낸거잖아요. 세종대왕의 백성를 긍휼히 여기는 그런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문화유산이니 뭐 국보급 유산이 되겠네요. 물론 학계연구를 통해서 확실한 의미를 찾아야겠구요.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