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해치가 언제부터, 왜 서울의 상징이 되었을까. 그리고 원래 해태가 아니었나.’
서울 시내 여기저기서 보이는 ‘해치 캐릭터’를 보고 늘 의아스럽게 생각했던 게 바로 ‘서울의 상징동물이 해치’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추진 중인 광화문 역사광장 조성계획에 ‘광화문 앞 월대와 해치상의 제자리 찾기’ 사업이 포함되어 지난해 11월부터 본격 공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필자가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게 됐다.
광화문 앞 양옆에 서있는 해치상. <고종실록> 1870년(고종 4년) 10월 9일자를 보면 “대궐 문에 해치를 세워 한계를 정했으며, 조정 신하들은 그 안에서는 말을 탈 수가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경복궁 중건 때 해치상을 세움으로써 대궐의 안팎을 구별했고, 이곳에 이르러서는 말을 내려야 한다는 일종이 ‘하마비’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중간 훅 들어온 해치
해치가 서울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결정된 것은 2008년 5월이었다. 서울시는 2007년 11월부터 서울을 상징하는 요소 27가지를 선정하여 서울 시민 및 외국인 설문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전통·역사적 요소로 ‘경복궁’, 자연환경 요소로 ‘한강’, 도시문화적 요소로 ‘N서울타워’를 가장 적합한 것으로 평가했다.
이 세 가지를 두고 다시 설문조사를 벌인 끝에 ‘경복궁’을 첫손으로 꼽았다. 하지만 서울시는 경복궁이 정적인데다 복잡한 구조물이어서 활용에 어려움이 있다면서 대안을 찾았다. 그 결과 경복궁과 관련이 깊은 상징 요소 8가지(호랑이·소·봉황·용·불가사리·해치·소나무·매화)를 찾았고, 그 중 ‘해치’를 최종선정했다.
광화문 해치상. 예전에는 주로 해태라 했다. 불의 산인 관악산을 노려봄으로써 화기를 진압해서 경복궁 화재를 막았다는 속설이 전해져왔다.
“해치는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는 정의로운 의미 외에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로서의 의미도 있습니다. 단지 화마 뿐 아니라 온갖 나쁜 기운을 막아줌과 동시에 행운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서울을 지켜주는 수호자로서의 의미도 함축합니다.”(서울시 홈페이지)
궁금증이 생긴다. 처음엔 거론되지도 않았던 ‘해치’가 ‘경복궁’ ‘한강’ ‘N타워’ 등을 따돌리고 서울의 상징이 될만큼 대단한 의미를 지닌 존재일까. 당시 자문회의나 세미나 등에 참석했던 전문가들에게 연락해봤다. 그랬더니 “(해치로) 다 정해놓고 자문회의를 연다는 느낌을 받았다”(김언종 고려대 명예교수) “세미나에서 해치의 부적합성을 따졌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김종대 국립민속박물관장)는 답변을 들었다.
김언종 교수는 “기본적으로 중국인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해태(치)를 서울의 상징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했다. 김종대 관장도 “시비와 선악을 구별한다는 해치가 입법부인 국회나 검찰청, 경찰청, 감사원 같은 사정기관이라면 몰라도 서울을 상징하는 동물일 수 없다”고 했다.
2008년 5월 서울의 상징으로 낙점된 해치의 BI(brand identity·왼쪽)와 캐릭터.
■해치냐 해태냐 해채냐
명칭부터 걸렸다. 그 전까지는 해태로 잘 알려졌는데, 왜 ‘해치’가 되었을까. 예부터 광화문 앞에 서있는 두 석상을 ‘해태’라 했고, 1945년 설립된 식음료 회사 이름과 그 회사가 운영하는 프로야구단 이름이 ‘해태’였다. 그런데 2008년 서울의 상징으로 최종결정되면서 ‘해치’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 짐승은 역대의 운서(韻書·사전의 일종)에서 ‘해태’, ‘해채’, ‘해치’ 등 다양하게 발음됐다. 물론 현재 중국 발음이 ‘즈(zhi)’이고, 프로야구팀 ‘해태’를 연상한다고 해서 해치를 택했을 수 있다. 하지만 발음은 시대마다 변하기 때문에 원래 발음을 구명해내기는 어렵다. 그러고보면 정확한 발음조차 알 수 없는 중국 짐승을 ‘서울의 상징’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김언종 교수의 논문(‘해태고’, <한국한문학연구> 제42권 42호, 한국한문학회, 2008)에 따르면 ‘해치’가 문헌상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2세기 무렵이다. 중국 한나라 시대 문인인 사마상여(기원전 179~117)의 ‘상림부’에 “비렴(상나라 말 장군)을 물리치고 해치를 사로잡아 희롱한다(推蜚廉 弄解치)”(<사기> ‘사마상여 열전’)는 내용이 나온다. 천자의 사냥터인 상림원에서 사냥하는 천자의 모습을 묘사한 글이다.
그렇다면 사마상여가 활약한 전한시대(기원전 206~기원후 8)에는 ‘해치’가 황제의 사냥감 정도이지, 상상의 동물(신수·神獸)은 아니었을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전한시대 유안(기원전 179~122)이 편찬한 <회남자>에도 “초나라 문왕(기원전 690~675)이 해치관을 쓰기를 좋아했다”는(‘주술훈’)는 구절이 보일 뿐이다.
중국문헌인 <대명회전> 에 등장하는 해치(왼쪽 두 사진). 맨 오른쪽 사진은 자금성 해치상이다. 중국에서는 전한말~후한초부터 해치가 외뿔의 상서로운 동물로 치부됐다. 이 외뿔로 옳고 그름과 정의롭고 사악함을 분변해서 그르고 나쁜 자들을 들이받는다고 여겨졌다. |이성준의 논문에서
■사냥감에서 사정기관의 상징으로
그런데 그렇게 등장한 ‘해치’는 후한(기원후 25~220)을 거치면서 매우 흥미롭게 윤색된다.
후한의 사상가 왕충(27~97)은 <논형>에서 “유학자들이 말하기를 ‘해치는 외뿔 양이다. 천성적으로 죄있는 자들을 안다”(’시응편’)면서 아주 그럴듯한 고사를 소개한다.
“요 임금 때 법을 관장한 신하 고요가 옥사를 다스릴 때 해치를 앞세웠다. 해치는 죄 있는 자만 골라서 들이받았다. 하늘이 낳은 성스런 외뿔 짐승으로 옥사를 돕는 효험이 있다.”
또 후한 이후 위나라 시대(220~265)의 학자 장읍은 사마상여의 ‘상림부’에 “해치는 외뿔 짐승인데, 훌륭한 임금의 형벌이 잘 시행될 때 조정에 나타나 정직하지 못한 자를 들이받는다”는 주석을 달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김언종 교수는 후한의 사상가인 왕충의 언급, 즉 “유학자들이 말하기를~”이라고 시작되는 <논형>의 구절을 주목한다. 전한말~후한초 유생들이 해태를 옳고 그름, 즉 시비와 사정(邪正)을 분변해서 판결해주는 외뿔의 서수(瑞獸)로 견강부회했다는 것이다.
사정기관인 대검찰청사 서편 동산에 서있는 ‘해치상’(왼쪽 사진). 서양의 유니콘을 연상시키는 긴 뿔이 하나 달려 있다. 누군가를 향해 돌진하는 자세로 한쪽 다리를 들고 있다. 입법기관인 국회의사당 정문에 들어서면 국회를 호위하듯 해치상 2기가 서있다. 해치는 시비와 사정을 분변하여 옳지않은 자를 응징하는 상상의 동물로 여겨졌다.
김교수는 “유생들이 전한 말부터 왕망(재위 기원후 8~22)이 세운 신 왕조(기원후 8~24) 무렵까지의 난세에 무너진 법질서를 회복해야 한다는 염원을 담아 해태(치)를 신화화 한 것”이라 해석했다. 유생들은 어떤 근거를 댄 것일까. 전국시대 사상가 묵자(기원전 475?~381?)에게서 단서를 찾았을 것이다.
“제 장공(기원전 553~548) 때 왕리국과 중리요라는 두 신하의 소송전에…장공이 사당에서 희생양 한마리를 죽여 놓고는 둘의 변론을 들었다. 왕리국의 변론 때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중리요가 변론할 때 갑자기 양이 일어나 뿔로 들이받아 (중리요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사당의 귀신이 그를 죽였다.”(<묵자> ‘명귀하’)
김교수는 이 대목에서 “그 시대 유생들이 묵자에서 힌트를 얻어 해태에 양의 고사를 견강부회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후한 시대를 지나면서 ‘해치=시비 사정을 판단하는 서수’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해치관’은 탄핵과 감찰의 임무를 전담한 어사의 전유물이 됐다. 이 제도는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걸쳐 도입됐다.
광화문 앞 양 옆의 해치상(왼쪽)을 모본으로 제작된 홍릉(1900년)과 만세문(1902년)의 해치상. 해치의 전통적인 특징인 뿔이 나선형의 돌출돌기로 평식화해서 표현되다가 점차 사라진다. |이성준의 논문에서
■해치관 깜박 잊은 사헌부 관리의 면직
<세종실록> 1426년(세종 8년) 2월26일자 기록이 특히 눈에 띈다. 즉 새롭게 개국한 조선의 복식규정을 정하려고 전 왕조(고려)의 자료를 뒤지다가 ‘1369년(고려 공민왕 18년) 명나라 태조(주원장)의 명을 받들어 왕(공민왕)에게 관복을 내리는 자문(외교문서)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즉 공민왕 시절에 명 태조의 명에 따라 문무관의 무늬를 정하면서 ‘어사대부(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와 중승(사헌부 집의·종3품) 등이 모두 해치관을 썼다’는 것이다. 공직자를 탄핵·감찰하는 사헌부(어사대) 관리들이 쓴 해치관이 실상은 명나라 태조의 명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1454년(단종 2년) 12월10일 <단종실록> 기사를 보면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의 흉배(가슴·등에 장식한 표장)에도 ‘해치’ 무늬를 새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796년(정조 20년) 2월9일 <정조실록>은 흥미로운 내용을 담았다. 즉 “사헌부 지평(종5품)인 이시원(1753~1809)이 해치관을 쓰지 않고 임금과 정사를 논하고 경전을 공부하는 경연장에 참석했다는 비난을 받아 사의를 표명했고, 결국 면직됐다”는 것이다.
1923년 10월4일 동아일보. 조선총독부가 조선부업품공진회 개막에 발맞춰 개통된 전차와 관람객의 동선에 방해가 된다면서 광화문 앞 해치상을 철거하여 궁궐 안쪽에 처박아 두었다고 고발했다.
■광화문 앞 해치상의 본모습
그렇다면 지금의 광화문 앞에 설치된 해치상 둘은 무엇인가. 1870년(고종 7년) 10월 9일 <고종실록>에 저간의 사정이 나와있다.
“대궐 문에 해치를 세워 한계를 정했다(闕門立해치爲限). 조정 신하들은 그 안에서는 말을 탈 수가 없는데…하교가 엄중한데 한갓 형식이 되었으니 어떻게 기강이 서겠는가.”
이 기사에서 두가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는 광화문 앞에 해치상을 세운 때가 경복궁을 중건한 뒤인 1870년 무렵이라는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해치상을 세운 이유이다. 일반적으로는 광화문 앞에 해치상을 세운 까닭이 두가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나는 출퇴근하는 관리들이 ‘시비 사정을 분변하는’ 해치의 꼬리를 쓰다듬으면서 공명정대한 정사를 다짐하라는 뜻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또하나는 화재가 잦았던 경복궁의 화기를 잠재우기 위해 세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종실록>에서 분명히 보듯 광화문 앞 해치상은 ‘대궐의 안팎을 구별하려고 세운 일종의 하마비’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연 어찌된 일인가. 워낙 해치가 2000년 전부터 ‘시비사정을 분변하는 상서로운 동물’로 알려졌으니 그 대목이야 그렇다치자.
1924년 5월20일 조선일보(왼쪽 사진)와 1925년 9월15일 동아일보. 서울시내 방화사건이 잇다르자 “경복궁 앞에 있던 해태를 없애버린 까닭이라고 격렬하게 공격하는 사람도 있다”고 보도했다(조선일보). 또 “해태가 사람의 시비곡직을 판단하므로 출입하는 백관들이 스스로 반성하고 경계하도록 궁궐 앞에 세워두었으며, 해태가 불의 산인 관악산을 노려봄으로써 경복궁의 화기를 잠재웠다”는 속설을 소개했다(동아일보). 그러나 문헌적 근거는 대지 않았다.
■해치는 물짐승인가 불짐승인가
그러나 한가지는 지금도 의문투성이다. 왜 해치가 물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로 알려졌고, 경복궁에서 발생했던 잦은 화재를 잠재우려고 해치상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그것도 지금 이 순간까지 전해지고 있을까. 사실 ‘해태=물을 상징하는 동물’이라는 문헌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규경(1788~미상)의 <오주연산문장전산고>이 등장하는 “(사라진 책인) <승아>에 이르기를 ‘해치는 불짐승(火獸)이고 멀구슬나무 잎사귀를 먹고 청결한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는 대목이 고작이다. 그러나 <승아>라는 책은 현존 여부조차 알 수 없는 책이고, 백번양보해서 ‘해치=불짐승’이라 해도 어떻게 해치를 경복궁 화기의 억제와 연결시킨다는 말인가. 견강부회가 아닌가.
그런데 일제강점기 언론보도를 보면 ‘경복궁 화기억제=해치’ 기사가 제법 등장한다.
예컨대 1923년 조선총독부가 조선부업품공진회 개막에 발맞춰 개통된 전차와 관람객의 동선에 방해가 된다면서 광화문 앞 해치상을 철거하여 궁궐 안쪽에 처박아 둔 적이 있었다. 10월4일자 동아일보는 ‘거적에 싸여 방치된 해치상’을 자못 비감어린 어조로 고발했다.
“해태라는 짐승은 사람의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재주가 있어…만조백관이 (광화문을) 출입할 때 수시로 경계하는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경복궁이 대궐터로는 좋지만 남으로 보이는 관악산이 화산(火山)이어서…화재예방을 위해 해태 같은 짐승을 만들어 관악산을 흘겨보게 했다는….”
이뿐이 아니었다. “바다에 사는 (물짐승인) 해태로써 관악산을 노려보게 하면 불이 날 염려가 없다 했다”(동아일보 1925년 9월15일자·1929년 11월23일자)는 기사가 잇따른다. 심지어는 “경성 시내에 방화 사건이 잇따르자 ‘경복궁 앞에 있던 해태를 없애버린 까닭’이라며 당국(총독부)을 격렬하게 공격하는 사람도 있었다”(조선일보 1924년 5월20일자)는 기사까지 보인다.
이와같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처박아 두었던 해치상을 1929년 11월 29일 조선총독부 건물(중앙청) 뜰 앞으로 옮겨놓았다. 지금 광화문 담장 밑에 바짝 붙은 채로 서있는 옹색한 해치상은 1968년 12월 광화문 복원 때 재이전한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이 ‘불짐승(火獸)’이라 정의했던 해치가 구한말~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어느 순간 ‘물짐승’으로 둔갑하여 ‘불산인 관악산을 흘겨(혹은 노려) 봄으로써 경복궁을 화재로부터 막아내는 신령한 동물’이라는 속설이 퍼지게 된 것이다.
관악산은 얼핏 보면 불꽃 모양으로 보여서 예부터 불의 산으로 일컬어져왔다. 이 관악산 때문에 경복궁에 화재가 잦다는 속설이 퍼졌다. 일제강점기 각 언론은 광화문 앞에 서있던 해치상도 ‘관악산을 째려(노려) 봄으로써 화기를 억제하려 했다’는 속설을 소개했다. 그러나 분명한 문헌기록은 없다.
■광화문 해치상에 뿔이 사라진 이유는
옛 문헌자료를 보면 한결같이 ‘해치=외뿔짐승(一角獸)’로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광화문의 양옆에 해치상에는 뿔이 보이지 않는다.
해치상의 변천사를 연구한 이성준 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사는 “17세기 이전까지는 중국처럼 뿔 달린 짐승으로 나오지만 이후 해치와 사자를 결합하는 과도기를 거쳐 뿔이 점차 사라진다”고 밝혔다. 그러다 1867~70년 사이 완성된 광화문 해치상을 기점으로 중국과는 다른 독창적인 모습이 정립됐다는 것이다. 이성준 학예사는 “숙종(1674~1720) 이후 소중화 사상 따라 조선의 문화수준에 깊은 자부심을 느끼며 중국을 모방하는 데서 벗어나 조선만의 고유한 색채가 발현된 것일 수 있다”고 평가한다.
물론 “해태가 해태인 이유는 시비 사정을 분별하여 비리를 저지르는 사악한 자를 뿔로 들이받아 제거하는 것이며, 따라서 뿔없는 해태는 더이상 해태가 아니다”라는 주장(김언종 교수)도 있다.
광화문 앞 해치상의 위치. 지금은 광화문 바로 앞 양옆에 놓아두었지만 표시석은 광장 쪽으로 나와있다. 그러나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디지털 이미지 분석기법을 활용하여 해치상의 원래 위치를 복원한 결과 원위치가 지금의 표시석보다 1~1.5m 정도 떨어져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서울 상징이 될 자격
필자가 서울의 상징이 해치로 정해진지 13년이나 흐른 지금 새삼스레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가 있다.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올해말까지 광화문 앞 월대(궁궐 등의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터를 발굴하여 원모습을 찾고, 해치상의 원위치를 특정한 뒤 2023년까지 복원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되면 지금 광화문 앞 양옆에 서있는 해치상 역시 원위치라는 곳으로 옮겨갈 것이다. 그때가서 지적하면 늦지 않을까 싶다.
물론 사정기관의 공무원들이 시비와, 곡직과 사정(邪正)을 제대로 분변하는 상징물로서 해치상을 바라보거나 만지는 거야 아주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한번 묻고 싶다. 서울과 서울시민의 상징 캐릭터로서 해치는 어떨까. 과연 해치라는 짐승이 대한민국 서울의 상징으로서 자격이 있을까.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김언종, ‘해태고’, <한국한문학연구> 제42권 42호, 한국한문학회, 2008
이성준, ‘조선후기 해치상의 도상변천-광화문 해치상을 중심으로’, <강좌미술사>39,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12
이순우, <테라우치 총독, 조선의 꽃이 되다>, 하늘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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