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없는데…. 왠지 찜찜해. 파보면 뭔가 있을 것 같은 감이 드는데….”
2002년 4월 어느 날, 전북 완주 이서면 반교리 야트막한 구릉(해발 26∼42m)으로 이뤄진 갈동 현장. 전주시 관내 국도(이서~용정) 우회도로(17.5㎞) 건설을 위해 지표조사를 벌이던 호남문화재연구원 조사팀의 고민은 컸다.
지표조사 결과 아무런 고고학적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유적 없음’의 결론을 내리고 일사천리로 도로공사를 진행시켜도 무방했다. 그러나 ‘뭔가 감을 잡았던’ 조사단은 고심 끝에 ‘선(先)발굴’의 결단을 내렸다.
그런데 조사단의 그 ‘감(感)’이 엄청난 고고학적인 성과를 잉태할 줄이야. 2003년 7월부터 본격발굴에 돌입한 당시 호남문화재연구원 학예실장 김건수와 책임조사원 한수영은 그야말로 ‘행운의 고고학자’가 되었다.
“처음엔 그저 평범한 돌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살살 파보니 그야말로 깜짝 놀랄 ‘물건’이지 않겠어요. 말로만 듣던 세형동검 거푸집을 직접 보다니요. 얼마나 황홀한지….”
고고학계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렇게도 풀 수 없었던 고대사 수수께끼를 해결할 단서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감’으로 찾아낸 청동기 대량생산의 역사
공개된 청동 거푸집 1쌍. 거푸집은 용범(鎔范) 혹은 합범(合范)이라고도 한다. 두 개를 붙여 쇳물(청동물)을 부어 청동검을 제작하는 틀이다. 이들은 납석돌(석필 같은 돌)로 만들어 졌는데, 움무덤에서 수습된 것이다.
왜 고고학계가 흥분하는가. 바로 완주 거푸집의 발굴이 ‘기록부족, 자료 부족증’에 시달려왔던 한국 청동기 및 초기철기 문화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일제는 이 땅에는 구석기시대와 청동기 시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일제시대 때는 이를 반박할만한 기록은 물론, 고고학적 증거들조차 부족해서 갑갑한 상황이었다. 물증 없는 역사적 주장은 한낱 상상 속 소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발굴된 거푸집에서 만들어 진 단검은 검의 몸체가 좁고 가늘다고 해서 세형동검(細形銅劍)으로 일컬어진다. 전체길이는 30.9㎝ 내외이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대부분 확인되고 있으며 위로 만주, 아래로는 일본의 규슈지방에서도 출토 예가 보고 되고 있다.
그래서 이 동검을 한국식 동검이라고도 한다. 이 단검은 우리나라에서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 전후, 즉 청동기 시대 말~초기철기 시대까지 제작·사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석기~신석기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구리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후 구리가 너무 물러서 다른 금속을 섞으면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이를 도구로 제작하여 사용한다.
청동기 시대다. 훗날 사람들은 철을 이용, 도구와 무기를 사용하는 데 이를 철기시대라 한다. 철기시대에 들어오면 비로소 역사시대가 개막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청동기 시대는 BC 13세기 전부터 시작되어 BC 4세기 중국의 전국시대 철기가 한반도로 유입될 때까지의 약 1,000년을 말한다.
청동단검의 경우 중국에서 철기가 들여올 무렵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기원전후까지 사용됐다.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이 단검을 대량 제작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틀, 즉 거푸집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되었다는 점. 지금까지 한반도내에서 확인된 청동 거푸집은 평양 장천리·용인 초부리·전남 영암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신고품이거나 출토지가 불분명하다는 결정적인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전(傳)영암 출토 거푸집’의 취약점
특히 영암 출토로 전(傳)하는 거푸집은 그 종류가 다양하지만, 학술적인 조사발굴을 거치지 않은 약점을 안고 있다.
이 영암 출토 청동거푸집 세트는 6쌍으로 된 12점과 한쪽만 남은 1점, 반쪽만 남은 1점 모두 14점으로 되어 있다. 이 거푸집 세트로는 청동단검·청동꺾창·청동창·낚시바늘·청동침·청동소형도끼·청동끌 등 8종 24점의 청동제품을 만들 수 있다.
결국 이 거푸집 세트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청동제품 모두를 제작·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다량의 거푸집이 숭실대학교에 소장되게 된 과정을 보면 무척 흥미롭다. 1960년대 초 국립박물관 신참 학예사였던 이난영의 회고담.
“한 골동품상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아와서 이 거푸집 세트를 내놓으며 ‘사라’고 했어요. 김원룡 연구과장·윤무병 연구관 등 선생님들은 안달이 나 견딜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당시 박물관에는 유물구입비가 한 푼도 없었어요. 그러니 피눈물을 머금고 돌려보냈을 수밖에…. 기가 찰 노릇이었죠.”
사실 이 거푸집 세트는 가격 면에서 비싼 것도 아니었다. 청자나 금동제품처럼 골동품상들이나 소장가들이 좋아할 물건도 아니어서 인기도 없었다. 누가 그 진가를 알아준단 말인가. 당시에도 김원룡·윤무병 같은 전문가들이나 그 가치를 알 뿐이었다.
그런데 국립박물관이 돈이 없어 이 ‘물건들’을 사지 못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다.
◇1급 유물과 골동품의 차이는?
거푸집 세트는 한동안 행방이 묘연했다. 눈앞에 두고 거푸집 세트를 사지 못했던 김원룡·윤무병의 안타까움을 어찌 필설로 다하랴.
그런데 나중에 어찌된 일인지 거푸집 세트가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설립자인 고 김양선 선생의 손에 돌아갔다.
안타까워하던 김원룡 등은 “해외로 빠져나가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후문이다.
당시 골동품상인 장 모로부터 이 거푸집 세트를 구입한 김양선은 구입시 골동상으로부터 발견한 장소와 발견한 사람의 주소와 성명을 알려고 했으나 대답을 얻지 못했다.
다만 전남 영암군 학산면 독천리라는 곳에서 출토되었다는 얘기만 듣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출토지를 확인하기 위해 골동상인 장 모가 알려준 곳으로 가서 수소문했으나 헛수고였다.
결국 김양선은 출토지를 확인하지 못한채 세상을 떴다. 이 청동 거푸집은 이렇게 되어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었고, 다만 영암 출토로 전한다는 뜻으로 ‘전(傳)영암 출토 청동거푸집’이라 했다.
비록 출토지가 명확하지 않아도 우리나라에서 청동주조기술로 청동제품을 만들었음을 증명하는 물증이 되고도 남았다. 그래서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은 86년 국보 제231호로 우선 지정했던 것이다.
고고학에 있어서 어떤 유물이라도 그 유물 자체의 가치는 출토지가 명확하고 어떠한 조건, 즉 무덤 혹은 집터 또는 그 외의 다른 시설에서 출토되었는가, 그리고 어떠한 유물들과 같이 출토되었는가를 알아야만 학술적인 생명력을 갖게 된다.
그걸 고고학계에서는 1급 유물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학술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것은 파편 1점도 유물이 되지만, 발굴조사 없이 도굴된 것이거나 골동품상에 거래되는 모든 문화재는 말 그대로 골동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최초 수집자 김양선이 영암출토 거푸집의 정확한 출토지를 알아내기 위해 애를 태우며 동분서주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뒤를 이어 제자인 임병태 역시 스승의 뜻을 따라 출토지 확인 조사를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그 역시 세상을 떴다.
이들은 그만큼 이 거푸집에 대해 학술자료로서의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재활용의 지혜’ 실천한 2,200년 전 우리 조상들
그랬기에 2003년 청동단검·청동꺾창 거푸집 발견은 가히 혁명적인 성과일 수밖에 없다.
이 거푸집이 갈동의 청동기 후기 움무덤, 즉 토광묘(土壙墓)의 부장품으로 출토된 것은 우리나라 고고학적 발굴사상 최초의 일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나라에 청동기 제작 기술을 가진 집단이 존재했음을 ‘고고학적 발굴’로 분명하게 증명하게 된 것이다. 출토지(전북 완주)와 유구성격(토광묘), 그리고 출토상태(한 개는 서있고, 한 개는 넘어진 상태)와 공반 유물까지 완벽하게 구비된….
이 거푸집은 좁은 단검, 소위 세형동검을 만드는 한 쌍으로 된 합범이지만 한쪽의 뒷면에 청동꺾창(청동과·ㄱ자 형태로 나무에 끼워 낫처럼 말에 탄 적을 낚아 베는 무기)의 한쪽 틀이 새겨져 있음이 확인됐다.
말하자면 청동꺾창은 반쪽의 틀만 발견된 것이다.
이 이유는 발굴자의 견해와 같이 ‘청동꺾창’의 합범(2개의 틀을 맞춘 거푸집)이 먼저 만들어져 사용되다가 한쪽이 파손되자, 나머지 완전한 한쪽을 ‘세형동검 거푸집’으로 재사용하게 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현재의 최첨단 산업(반도체)과 2,300년 전 하이테크 산업(거푸집)의 만남
발굴도 흐름을 타는 것인가. 지난 2003년은 가히 ‘청동기와 초기 철기시대의 해’로 일컬어 질만큼 BC 3세기~BC 1세기 유적들이 쏟아졌다.
가평 달전리, 공주 수촌리, 강원 화천 등에서 잇달아 희소식이 터졌다. 모두가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을 정도로 대어급 발굴이었다. 청동기, 초기철기 전문가들이 현장을 쫓아다니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1년이었다.
무엇보다도 그토록 찾으려 해도 좀체 찾을 수 없었던 거푸집이 완주 갈동에 이어 경기 화성에서도 확인된 게 특기할 만 했다.
2003년 10월17일 밤 우연한 기회에 기자들을 만난 당시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장장은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오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증설부지에서 또 청동기 제작용 거푸집이 나왔어요. 지금 막 보고 왔는데….”
경기 화성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증설부지에서 BC 3~2세기 최첨단 산업인 청동기를 제작한 거푸집(틀)이 발견된 것이다. 비단 이건무 뿐 아니라 고고학자들 모두 흥분할만한 소식이었다.
이번에는 청동끌(銅鑿)을 대량 제작할 때 사용한 거푸집 1개(길이 20㎝, 폭 4㎝)였다. 갈동에 이은 두 번째 쾌거인 동시에 주거지에서 발견된 것은 처음이었다.
문제는 땅의 표면만을 긁은 상태에서 거푸집이 나왔으므로 좀더 발굴하면 당대의 생산공장(공방)이 확인될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도 2,300여 년 전 최첨단 청동기를 찍어내던 제작틀이 요즘의 최첨단 산업인 반도체 공장부지에서 나왔기에 화제를 모았다.
특히 거푸집이 발견된 곳은 ‘기가급’ 최신모형을 생산하는 라인부지였던 곳으로 알려지면서 더욱 흥미를 끌었던 것이다. 옛 사람들과 요즘 사람들의 텔레파시가 통한 것일까.
옛 첨단기술자와 요즘의 첨단기술자가 이렇듯 시공을 초월하여 같은 장소에서 숨쉬며 열심히 하이테크 산업을 발전시켰으니까.
◇재활용품 애용한 흔적?
세형동검 거푸집 발견으로 2,200여년 전의 세상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우리 조상들은 그때부터 ‘재활용품’을 애용했다. 완주 발굴 거푸집은 처음에는 청동꺾창 제작용으로 만들어졌다가 훗날 청동검 제작용 틀로 재활용된 것은 아닐까.
완주 거푸집의 ‘재활용설’을 부인하고 있는 이건무 전국립중앙박물관장 같은 이도 “숭실대 소장 거푸집 중에는 재활용품이 있다”고 한다.
즉 청동거울(다뉴세문경)을 만들려다가 실패한 뒤 뒷면에 쌍·외 낚시바늘 틀을 뜬, ‘재활용품’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
재활용인지, 다용도 틀인지는 몰라도 청동도끼를 만든 거푸집 가운데는 청동못과 낚시바늘의 틀도 함께 보이는 것도 있다.
청동기 전문가인 이건무 전 관장은 또하나 수수께끼를 던진다.
세형동검 거푸집 같은 대량생산용 틀에서 제작했다면 똑같은 동검이나 동꺾창 등이 나와야 하는 게 옳다. 그런데 어떤 무덤·주거지에서도 한반도에서는 지금까지 같은 거푸집에서 만든, 똑같은 형태의 청동유물이 단 한차례도 발견되지 않았다.
“예컨대 무덤에서 일괄로 청동검이 수십점 나온다면 그 중에는 똑같은 제품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없어요. 수십년 동안 전국의 출토유물을 그렇게 샅샅이 뒤져보아도…”
이건무 전 관장은 “제사용 혹은 높은 신분을 나타내는 위세품(威勢品)으로 단 한개씩만 만든 게 아닐까”하고 막연히 추측만 할 뿐. 그는 “혹 이 갈동유적이 그 해답의 실마리가 아닐까”하고 기대감을 안고 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