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무장사에 김생의 글씨를 쓴 비석이 있는데 어디인지는 모릅니다.”
1760년(영조 36년) 무렵 경주부윤이 된 이계(耳溪) 홍양호(1724~1802)는 ‘전설의 명필’인 김생의 비석이 무장사에 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무장사는 원성왕(재위 785~798)의 아버지(대아간 효양)가 숙부인 파진찬을 추모하려고 지은 절이다. <삼국유사>는 ‘무장(무藏)은 태종무열왕(654~661)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와 투구를 이 사찰에 묻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속전을 소개했다. 이 절에는 승하한 소성왕(799~800)을 위해 부인인 계화왕후가 세운 아미타불상의 이력을 적은 비석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무장사비이다.
무장사비문의 복원도. 왕희지의 필체를 빼닮아 왕희지집자비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최근 이계 홍양호와 추사 김정희의 ‘김육진설’이 다시 거론되고, ‘황룡사 승려설’도 부각되고 있다. 이번에는 김생설까지 제시됐다. |최영성의 ‘신라 무장사비의 서자 연구’, <신라사학보> 제20호, 신라사학회, 2010에서
■콩가는 맷돌이 비석이었다
그 비석이 어느 순간 사찰의 폐사와 함께 실전됐다가 마침내 이계의 귀에 들린 것이다. 이계는 <경주읍지> 등을 살펴보고 아전을 시켜 무장사비의 행방을 추적했다. 결국 경주에서 북동쪽으로 30리 떨어진 심산유곡 암자에서 비석편을 발견했다. 절 뒤에 있던 콩가는 맷돌이 심상치않은 돌임을 깨닫고 그 돌을 세우니 바로 절반이 부서진 비석편이었다.
비석을 탁본한 이계는 “왕우군(왕희지의 다른 이름)의 풍도가 있고, 글씨를 쓴 이는 김생이 아니라 신라의 한림 김육진”이라고 풀이했다. 이계는 “전하는 사람들이 성만 보고 김생으로 잘못 일컬었던 것”이라 했다.
무장사비문의 첫째줄에 ‘대나마김육진 봉 교(大奈痲金陸珍 奉 敎)…’운운하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읽은 것이다. ‘대나마 김육진이 왕명을 받들어…이 비석을 썼다’고 보았다. 김육진은 <삼국사기>와 <구당서> 등에 나오는 실존인물이다. “809년(애장왕 10년) 대아찬 김육진을 당나라에 보내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고고학자 추사의 발견
아무튼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1817년(순조 17년) 4월 29일 다시 무장사터를 답사한 이가 있었다.
추사 김정희(1786~1856)였다. 추사가 누구인가. 북한 고고학자 도유호(1905~1982)의 표현대로 ‘최초의 근대적 고고학자’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추사의 명성은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의 발견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그 전까지 무학대사나 신라말 고승인 도선이 세운 것으로 여겨지던 북한산 비봉의 비석이 실제로는 진흥왕순수비라는 것을 확인하고(1816~1817) 이를 7000자가 넘는 장문의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런 추사가 1817년(순조 17년) 4월 하순~5월 초순 경주답사에 나서 서둘러 경주에서도 첩첩산중에 있던 무장사터를 찾았다.(4월29일) 추사가 궁벽한 곳에 방치되었던 무장사비에 유독 애착을 갖는 이유가 있었다.
무장사비와 김생의 글씨 3000여자를 집자해서 완성한 낭공대사비문의 비교.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 제공
추사는 홍양호가 뜬 무장사 탁본을 청나라 대학자이자 추사의 중국인 스승인 옹방강(1733~1818)과 그 아들인 옹수곤(1786~1815)에게 보낸 바 있다. 특히 추사와 동갑내기 절친인 옹수곤은 무장사비 탁본을 받고는 ‘신라무장사비도’라는 그림을 그려 추사에게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옹수곤은 1815년(순조 15년) 30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추사의 ‘무장사비 답사’는 바로 세상을 떠난 벗을 추모하는 답사여정이었다.
첩첩산중 무장사를 물어물어 찾아간 추사는 수풀더미를 뒤져 기어코 비석 조각을 수습했다. 추사는 그 순간 “너무 놀라고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驚喜叫絶)”면서 새로 발견한 비편의 옆면에 “저승의 옹수곤을 불러와서라도 이 금석의 인연을 함께하고 싶다”고 새겨두었다.
총 3번에 걸쳐 수습된 무장사비편. 1760년 이계 홍양호가, 1817년 추사 김정희가, 나머지 한 편은 1914년 조선총독부 출장원인 김한목과 일본인 아카자토 이주로가 각각 수습했다
추사는 우선 “이 무장사비의 서품(글자의 품격)이 낭공대사비보다 뛰어나다”고 전제했다. 낭공대사비는 954년(고려 광종 5년) 김생 글씨 3000여자를 집자해서 제작한 비석이다. 추사는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낭공대사비보다 무장사비의 품격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면서 추사는 “이 비석은 홍복사체인데 인각사비처럼 집자비는 아니다”라 했다. 추사의 이 언급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홍복사체’는 앞서 밝힌 대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해서 새긴 중국비석(‘성교서비’)의 서체를 일컫는다. 삼장법사가 인도 천축국에서 경전을 가져온 내력을 당 태종(재위 626~649)의 명에 따라 승려 회인이 왕희지의 묵적에서 한자한자 채집하여 전문을 역은 집자서이다. 한마디로 ‘왕희지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각사비’는 1153~55년 사이에 승려 죽허가 왕희지 글씨를 집자해서 경북 군위 인각사에 세운 보각국사탑비를 일컫는다. 종합하면 추사는 “무장사비가 왕희지체이지만 인각사비처럼 집자비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왕희지의 집자비인 ‘홍복사비문’. 직접 쓴 글씨가 아니라 집자비이므로 뭔가 고르지 않고 어색한 느낌을 준다.|
■추사의 견해보다 옹방강의 주장이…
정리하자면 비석을 발견한 이계 홍양호나 추사 김정희 모두 무장사비문은 왕희지체는 확실하지만 글씨를 쓴 이는 ‘김육진’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있다. 이렇게 당대 조선 금석학의 최고권위자들인 이계와 추사의 견해와 달리 ‘무장사비=‘왕희지 집자비’라는 것이 지금 이 순간까지 통설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바로 당대 중국의 걸출한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인 옹방강의 주장 때문이었다. 옹방강이 추사가 보내준 무장사비 탁본을 보고 “이것은 왕희지의 집자비”로 단정한게 시발이 됐다. 옹방강은 “무장사비문은 김육진이 지었지만 글씨는 왕희지의 행서”라 주장했다. 한마디로 왕희지 글씨인 ‘난정서’와 ‘왕희지 집자비’에서 다시 집자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난정서’가 무엇인가. 353년 3월 왕희지를 비롯한 명사 41명이 난정에 모여 연회를 열며 지은 시로 시집을 지었는데, 이때 왕희지가 쓴 서문을 ‘난정서’라 한다. ‘왕희지 집자비’는 앞서 밝힌대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해서 새긴 비석들이다.
■‘금강안 혹리수’ 추사의 견해는
추사는 이 무장사비를 두고 “안목이 달처럼 밝고…게다가 궤선에 맞추어 써내려간 솜씨가 아주 정밀하고 필획의 구성도 세밀하여 빈틈이 없다”면서 “멀리 있는 사람들(중국인들)에게 자랑할만하니 참으로 다행”이라고 했다.
중국학계 역시 이 무장사비가 ‘왕희지 서체의 진수를 얻은 것’이라 평가했다. 옹방강을 비롯한 학자들은 앞다퉈 조선학자들에게 무장사비의 탁본을 요구했다. 이는 당대 드물게 전하는 왕희지의 글씨를 얻어 습서(習書)에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중국인의 시각에서 그토록 빼어난 왕희지 글씨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곧 왕희지의 집자비일 수밖에 없다고 여겼음에 틀림없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무장사비의 탁본. 집자비라고는 상상할 수 없게 글자가 고르고 생동감 넘친다. 훨씬 자연스러운 글씨다. 직접 쓴 글씨로 보인다.|이종문의 ‘무장사비를 쓴 서예가에 관한 고찰’, <남명학 연구> 13권, 남명학회, 2002년에서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추사가 그토록 존경하는 중국 스승(옹방강)의 주장을 수긍하지 않고 ‘무장사비’가 왕희지 집자비가 아니라는 견해를 밝혔다는 것이다. 추사가 누구인가.
어떤 감정(鑑定)이든 ‘사찰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의 눈처럼 무섭게(金剛眼), 또 세금을 거두는 혹독한 세리의 손끝처럼 치밀하게(酷吏手) 그 진가를 가려내야 한다’고 설파한 인물이었다. 수틀리면 퍼붓는 추사의 독설에 상처받은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런 추사였기에 존경해 마지않는 옹방강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무장사비는 왕희지체는 맞지만 왕희지 집자비는 아니다’라는 견해를 에둘러 밝힌 것이다.
하지만 옹방강의 주장, 즉 ‘무장사비=왕희지 집자비’설은 통설로 인식됐다. 당대 청나라의 독보적인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인 옹방강의 존재감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었다.
■‘황룡’ 명문편의 발견
추사 김정희가 2번째 비석조각을 발견한지 100년이 지난 1914년 5월, 세번째 조각이 발견됐다. 조선총독부 출장원인 김한목과 일본인 나카자토 이주로(中里伊十郞)가 무장사터에서 1리(400m) 정도 떨어진 계곡 연못에서 발견했다. 이 조각에서 ‘황룡…’운운하는 명문이 확인됐다.
하지만 때가 바야흐로 일제강점기였다. 가뜩이나 한국문화의 예속성을 강조하려 했던 일제로서는 ‘왕희지 집자설’을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더 강조해도 시원치 않았다. 1930년대 ‘왕희지 집자설’을 공고히 한 일인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가쓰라기 스에지(葛城末治)였다.
가쓰라기는 <조선금석고>(1935년)에서 “이 비는 집자비이기 때문에 김육진이 ‘글씨 쓴 자’가 될 수 없으며 서체를 봐도 명백하다”고 단언했다. 가쓰라기는 이 무장사비가 왕희지 집자비인지 논증하지 않고 옹방강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중국의 옹방강, 그리고 일본의 가쓰라기의 ‘왕희지 집자설’은 해방 이후에도 별다른 비판없이 수용됐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주의 사학자인 문일평(1888~1939) 등 극소수가 ‘김육진이 글도 짓고 쓴 사람’이라고 주장했을 뿐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무장사비 탁본. ‘김육진 서 무장사비’라 되어 있다. 추사는 “중국의 학자·서예가들에게까지 자랑할만한 서품”이라고 극찬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닮았지만 다른 글씨
그렇다면 무장사비는 정말로 의심할 바 없는 ‘왕희지 집자비’인가. 아닌게 아니라 비문의 글씨가 왕희지와 닮아도 너무 닮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장사비의 탁본을 보면 이 비석의 글씨는 집자한 것이 아니라 직접 쓴 것이라는 인상이 너무도 짙다.
즉 집자비라면 글씨의 크기와 굵기가 고르지 않다. 그러니 전체적으로 조화롭지 못하다. 여기저기서 글씨를 모아 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땅한 글자가 없으면 이 글자 저 글자에서 일부 변이나 획을 따서 붙여야 한다.
집자비는 바로 이 모자이크 방식의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개별적으로 볼 때는 그런대로 모양을 갖춘 듯 하지만 전체로 볼 때는 완성도가 떨어진다. 단적인 예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 분명한 중국의 ‘성교서’를 보면 글씨의 굵기와 크기가 고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무장사비를 보면 왕희지의 서첩에 없는 글자를 임의로 만들어 넣은 흔적이나 왕희지 서체를 억지로 본뜬 듯한 어색한 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 어른 손톱만한 작은 글씨(가로 세로 3.2㎝)가 정간선(井間線·바둑판 모양 칸)에 있는데 그처럼 고를 수 없다. 물론 전면 집자가 아닌 부분 집자일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그랬다면 그 원본으로 쓰였을 ‘성교서비’나 ‘난정서’와는 글자 크기가 같지 않다. 게다가 그렇게 작은 글씨의 필세가 날카롭고 살아움직이는 듯 생생하고 글자간 조화 또한 완벽하다.
1817년 무장사터에서 비석편을 발견한 추사 김정희는 “비석을 발견하고 너무 놀라고 기뻐서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는 내용을 무장사 비서그이 옆면에 새겨넣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집자할 수 없는 글자들
무엇보다 판독가능한 무장사비의 글자가 448자인데, 그중 24%인 107자가 왕희지의 친필이거나 왕희지 집자비인 ‘난정서’ ‘성교서비’, ‘홍복사비’에는 없는 글자란다.(이종문의 논문에서) 물론 다른 왕희지의 친필을 구해 집자한 것이라 주장할 수는 있다.
왕희지(303~361 혹은 321~379)가 타계한지 4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신라에서 그런 글자를 집자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또 무(무)자와 울(鬱)자, 오(鼇)자. 참(참)자, 응(鷹)자 등 여러 벽자(잘 쓰이지 않는 글자)는 집자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최영성의 논문에서) 이런 글자는 서자(書者)가 직접 쓰지 않으면 곤란한 글자들이다. 무장사비가 집자비라면 그런 벽자들을 그렇게 천의무봉으로 처리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왕희지집자비인 ‘성교서비’는 승려 회인이 무려 25년에 걸쳐 집자해서 완성했다. 그에 비해 무장사비는 소성왕이 승하(800년)한지 불과 1년 만에 세운 비석으로 추정된다. 이 추정이 맞다면 1년 가량의 단시일에 이렇게 품격높은 집자비를 완성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도마위에 오른 왕희지 집자설
이렇게 260년 가까이 철옹성처럼 단단해져서 누구도 깨기 힘들었고, 또 애시당초 깰 생각도 가져보지 못한 무장사비의 ‘왕희지 집자설’이 이제야 도마 위에 올려져 있다. 혹자는 260년 전의 이계 홍양호와 200년 전의 추사 김정희의 견해대로 ‘신라의 대나마 김육진설’을 다시 제기했다. 즉 비문의 첫번째에 나오는 ‘수대나마김육진 봉 교(守大奈麻金陸珍奉 敎)’, 즉 ‘신라 대나마 김육진이 왕명을 받들어 직접 썼다’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이종문의 논문에서) ‘김육진설’이외에도 1914년 발견된 ‘황룡(皇龍)’ 부분에 주목해서 이 비석을 쓴 인물이 ‘황룡사 승려’라는 설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최영성의 논문에서) ‘守大奈麻金陸珍奉 敎□□…皇龍…’이라는 비문의 첫줄에 등장하는 서자(書者)가 바로 황룡사 스님이라는 것이다. 사실 승려가 금석문의 글씨를 직접 쓰거나 집자한 예는 많다.
중국의 ‘성교서비’를 집자한 회인 스님은 말할 것도 없고 신라에서도 ‘단속사신행선사비’를 썼다는 영업, 지증대사비를 쓴 혜강 등이 있다. 이밖에도 김생의 글씨 3000여자를 집자해서 낭공대사비를 완성한 석단목과 왕희지 글씨를 집자해서 인각사 보각국사탑비를 만든 죽허 같은 승려들이 그들이다. 무엇보다 이 ‘황룡’ 명문은 1914년이 되어서야 발견되었으므로 이계 홍양호와 추사 김정희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3고작으로 발견된 무장사비의 비신.|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전설의 명필 김생의 글씨인가
근자에는 근본으로 되돌아가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즉 홍양호가 260년 전 무장사비를 발견할 무렵 경주 노인에게 들었다는 이야기, 즉 ‘김생의 글씨’ 가능성이다.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은 올해 4~5월 경북 김천 수도암비에서 ‘원화 3년(808년)’ ‘김생서(金生書)’라는 명문을 확인하고는 영남지역의 고비를 답사한 결과이다. 박관장은 수도암비와 무장사비를 포함.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비, 경주 이차돈 순교비, 창녕 탑금당 치성문기비 등의 비석에서 김생의 진적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박홍국의 논문에서)
이것이 사실이라면 전설처럼 전해지던 김생의 진적이 6건이나 확인되는 셈이니 그야말로 미증유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
무장사비만 해도 <한민족대백과사전> 등은 여전히 ‘무장사비의…비신(碑身)은 왕희지의 글씨를 집각한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8~9세기를 풍미한 ‘전설의 명필’ 김생의 진적이 단 한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이번 박홍국 관장을 비롯해 ‘왕희지 집자설’에 문제를 제기한 몇몇 연구자들의 논문에서 봤듯 ‘무장사비’는 여러모로 보나 집자비가 아니라 누군가 직접 쓴 비석일 가능성이 짙은 것 같다.
그렇다면 김육진일 수도 있고, 황룡사 스님일 수도 있고, 혹은 김생일 수도 있다.
박관장은 김육진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만약 김육진이 천의무봉의 서예가였다면 왜 한·중 양국의 문헌에 그런 명필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을까. 박관장은 ‘황룡사 승려설’도 마냥 무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왕희지를 능가할 정도의 서품을 자랑한 ‘무장사비’를 남긴 사람의 이름이 ‘황룡사 승려’라 해도 놀랄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를 신봉해서 결혼하지 않고 사찰을 돌며 살았던 김생이기에 승려를 자처했을 수도 있다. 예컨대 김생의 글씨를 판각한 서첩인 ‘전유암산가서’의 끝부분에도 ‘보덕사 김생서(報德寺金生書)’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무장사비문의 주인공은 ‘황룡사 김생’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게 김생 글씨라고요? 왕희지죠?”
이 대목에서 <삼국사기> ‘김생·열전’의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즉 ‘김생의 사생팬’인 고려 중기의 문신·서예가인 홍관(?~1126)이 송나라를 방문해서 김생의 작품을 보여주자 중국인들이 이구동성했다.
“예. 여기서 왕희지의 글씨를 보게 될 줄 미처 몰랐네요. 고려사신이 어떻게 왕희지의 글씨를….”
홍관이 손사래를 치며 “김생의 글씨가 맞다”고 말하자 송나라인들은 ‘우릴 놀리냐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에이, 놀리지 마세요. 천하에 왕희지를 빼놓고 어찌 이런 신묘한 글씨가 있습니까. 말도 안됩니다.”
홍관이 아무리 ‘김생의 글씨’라고 해도 중국인들은 결코 믿지 않았다.
중국학자 옹방강의 ‘왕희지집자설’이 바로 이렇게 잘 쓴 글씨가 신라인의 작품일 리 없다는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런 중국학자의 주장을 ‘옳다구나’하고 수용해서 한국문화의 의존성·예속성을 강조한 일본학자(가쓰라기)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우리가 아닐까.
천학인 기자가 ‘김생설’이니, ‘김육진설’이니 ‘황룡사 승려설’이니 하는 주장에 가타부타 언급할 자격이 없다. 그것은 학계의 몫일 것이다. 다만 200년 이상 강고한 통설로 자리잡았던 ‘왕희지집자설’에 도전장을 내민 연구자들의 용기와 비판의식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물론 치열한 논쟁에서 살아남아야 할 일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박홍국, ‘김천 수도암 신라비의 조사와 김생 진적’, <신라사학보> 46집, 신라사학회, 2019
이종문, ‘무장사비를 쓴 서예가에 관한 고찰’, <남명학 연구> 13권, 남명학회, 2002년
최영성, ‘신라 무장사비의 서자 연구’, <신라사학보> 20집, 신라사학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