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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27) 양구 펀치볼(上)

-중학교 발굴단 ‘선사유적’ 을 캐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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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생, 해안중학교에서 근무해보지 않을래요?”

1986년초. 춘천여고에서 근무중이던 김동구 교사는 강원도교육청으로부터 해안중(亥安中) 발령을 통보받았다.

“그 지역의 자연생태계와 역사문화유적을 조사해야 하는데 선생님이 해줘야겠어요.”

해안중이라. 양구군 해안면이라면 그야말로 오지 중의 오지가 아닌가. 아마 편치볼이라 하면 귀에 확 들어올 것이다. 해안면은 56년 4월 이른바 ‘정책이주민’들이 정착한 이후 민통선 이북에 있는 유일한 면단위 마을이다. 휴전선이 지척이고, 민북지역이다 보니 학술조사가 어려웠다. 마침 도교육청이 역사·생태부문 전공자인 교사 5명을 뽑아 해안중학교에 발령을 낸 것이다.

# 중학교 교사가 찾아낸 선사유적

‘중책을 맡고’ 부임했지만 도대체 뭘,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막막했다. 역사를 공부했다지만 학술조사에는 경험이 없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5월 어느 날이었다.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 길을 걷고 있는데, 어느 집 마당에서 꼬마가 무슨 돌 같은 것을 갖고 노는 걸 보았다. 유심히 살펴보니 돌로 깎은 무슨 도구가 분명했다. 아니 이것은 돌로 만든 창이었다.

“꼬마야. 이거 어디서 주웠니?”

“저기 학교 앞 밭에서요.”

김동구 교사는 곧바로 꼬마가 알려준 곳으로 달려갔다. 꼬마의 말이 맞았다. 김교사는 잠깐의 노력으로 민무늬토기 조각과 석기를 갈던 숫돌 조각 등 선사시대 유물들을 대거 수습했다. 김교사는 그때부터 신바람을 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예비군 훈련을 위해 조성된 참호였다.

“참호의 벽을 봤는데요. 깎인 흙, 문화층에 청동기편들이 박혀 있었습니다.”

2005년 정년퇴임한 김동구씨(65)는 기억의 편린을 짜맞춘 회고담을 기자에게 풀어헤쳤다.

“그때부터 유물이 많이 나온 밭 1000여평에 대한 표본발굴에 들어갔어요.”

발굴 전문가도 아닌 그는 2m×1.5m 정도의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혼자 파셨어요?”

“아니, 우리 학생 2명이 붙었죠. 어휴, 지금 그 놈들 이름이 생각 안나네.”

# 중학생 발굴단

그러니까 중학교 선생님이 발굴단장이었고, 까까머리 중학생 2명이 발굴단원이었던 셈이다.

“애들을 데리고 1년 반 동안 발굴했어요. 방학 때를 주로 이용했는데, 유물이 다치지 않게 얼마나 조심스럽게 했는지….”

‘해안중학교 발굴단’의 성과는 대단했다. 발굴구덩이 밑바닥(1m20㎝ 깊이)에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토기편을 비롯해 수많은 석기, 토기 조각들을 수습한 것이다.

“우리는 토기편, 석기편들을 하나하나 맞추었어요. 1년반이 지난 뒤 정리해보니까 유물이 라면상자로 2상자가 되더군요. 그래 어떻게 해요. 학교에다 (유물을 진열할) 책장 좀 사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해안중학교에 ‘중학교 발굴단’이 조사한 유물이 전시되었다. 전시실의 이름은 해안중 향토사료관. 이 유적이 학계에 보고되기 시작한 것은 정식 학술조사가 시작된 87년부터. 강원일보가 기획한 민통선 북방지역 생태문화계 조사단의 일원으로 해안면을 방문한 최복규 강원대 교수의 말.

“해안중학교에서 김동구 선생이 모아놓은 유물을 실견하고, 해안면 지역을 쭉 조사했는데 아, 거기서 20여기의 고인돌을 확인했어요. 소양강 상류로 유입되는 성황천과 해안천가에 고인돌 무덤이 흩어져 있었지요.”

당시 문화공보국에서도 민통선 학술조사를 벌였는데, 그때 조사단에 참여했던 김병모 한양대 교수도 김동구 교사에게 “대단한 유적을 발견했다”고 평가했다.

“각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는데, 이 일이 있고나서 해안중학교가 문화공보부에 의해 ‘문화재보호학교’로 지정되었어요.”

해안의 지형단면도.


아직 지표조사만 이뤄졌을 뿐인데 이 지역에선 10만년 전으로 편년될 수 있는 구석기 유물과, 신석기시대 대표유물인 빗살무늬토기, 청동기 시대의 표지유물인 고인돌떼와 점토대기(덧띠무늬) 토기, 그리고 철도자(쇠손칼) 등 초기 철기시대 유물이 시차를 두고 나타났다. 물론 김동구 교사가 확인한 빗살무늬 토기편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덧띠토기, 검은간토기, 고배형토기, 쇠뿔모양 손잡이, 홈자귀, 간돌도끼, 숫돌, 갈판, 돌끌, 보습, 가락바퀴 등 청동기시대 덧띠토기 주거유적에서 출토되는 전형적인 유물 조합상이 나타났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학계가 놀랄 만했다. 이 첩첩산중에 구석기인들이 둥지를 틀었다는 점, 그리고 구석기인들이 물러간 다음에도 신석기인, 청동기인, 초기 철기시대인들이 단절없이 이곳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유적을 조사했던 차재동씨(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는 “신석기의 경우 빗살무늬 토기가 북한강 최북단 내륙지역에서 나왔다는 게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 피안의 세계

최복규 강원대 교수는 특히 청동기 유물상에 주목한다.

“이런 산중 분지,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심산유곡에 10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죠. 그리고 덧띠토기인들의 경우 지표 채집만으로도 주거유적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유물 갖춤새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어요.”

최교수는 “하나의 부족집단이 이 해안면을 거점으로 해서 둥지를 틀고 살았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청동기 주거지만 보면 BC 3세기대 대규모 취락지라는 해석이다.

그런데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 왜 하필 이곳이었을까. 왕성한 이동력을 기반으로 사냥·채집 생활을 한 구석기인들이야 이런 첩첩산중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치자. 하지만 어느 정도 안정된 정착생활로 나름대로는 편안한 생계기반을 갖고 있던 신석기인들과 청동기인들은 왜 이 오지에 둥지를 틀었을까.

“처음 조사하러 올 때도 혀를 내둘렀습니다. 사람이 들어와 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들어가는 입구가 얼마나 가팔랐는지….”

최복규 교수는 87년 당시 해안면 답사를 떠날 때의 일을 생생하게 떠올린다.

한번 추정해보자. 옛 사람들은 소양강을 거슬러 올라가 최상류 지류인 인북천에 닿았을 것이다. 그런 뒤 해안분지 동쪽지역인 당물골로 올라왔을 것이다. 그들은 별세계를 보았을 것이다. 첩첩산중, 그 험난한 물길과 계곡을 아슬아슬 통과해서 닿은 땅. 그들의 눈앞에 갑자기 펼쳐진 광활한 초원. 그것은 피안의 세계였을 것이다.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세상사, 괴롭고 힘겨운 세상사 모두 잊고 살았을 것이다. 8월 어느 날 기자는 ‘왜’라는 궁금증을 안고 해안분지에 닿았다. 수속을 밟고 군인이 지키는 초소를 지나 가파른 외길을 10여분 달려 올라갔다. 여정의 끝은 을지전망대. 비무장지대 철책 위에 선 해발 1049m의 전망대에 섰다. 그리고….

〈이기환 선임기자|양구 해안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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