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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만년 전 직립 보행한 인류, 이 ‘짱돌’ 하나로 세계를 정복했다

지난 2000년 11월 5일자 ‘마이니치(每日) 신문’에 일본 열도를 충격에 빠뜨리는 사건이 보도됩니다. 
이른바 ‘구석기 유적 조작 사건’이었습니다. 고고학자인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가 미야기현(宮城縣) 쓰기다테초(築館町)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 발굴 현장에서 가짜 석기를 파묻는 장면을 ‘몰래카메라’로 폭로한 겁니다,
후지무라는 1981년 미야기현 자자라기(座散亂木)에서 일본 최초의 구석기 유적(약 4만 년 전)를 발굴한 인물이구요. 이후 잇단 발굴을 통해 일본 구석기 유적 연대를 ‘70만년전까지’로 올렸습니다.
덕분에 후지무라는 ‘신의 손(神の手)’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마이니치 신문의 폭로 이후의 검증결과 후지무라가 조사한 162곳의 구석기 유적 전체가 ‘가짜’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일본의 구석기 연대는 한순간에 5만~8만5000년전(가네도리·金取 유적)으로 떨어졌습니다. 후지무라는 왜 무모한 자작극을 펼쳤을까요. 그는 “‘더 오래된 구석기 유적은 없느냐’는 주변 및 언론의 성화에 초조감이 생겼다”고 토로했습니다. 이 지점입니다. 후지무라의 자작극 이면에는 바로 한국의 ‘전곡리 구석기 유적’(27만 년 전)이 있었습니다. 
‘한반도에도 전기 구석기 유적이 있는데, 일본 열도에 없을 리 만무하다’는 강박관념이 일본내에 흐르고 있었던 겁니다.

■벽돌공장에서 확인한 아슐리안 주먹도끼
1978년 4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미 2사단 기후대 소속 그레그 보웬(1950~2009) 병사가 여자 친구와 경기 연천 전곡리 한탄강변 유원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애리조나주립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던 보웬의 눈에 돌멩이 하나가 포착됐습니다.
자연석 같기도 하지만 누군가 인공적으로 깎은 흔적이 있는 차돌이었습니다. 보웬은 간단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당대 프랑스 세계적인 구석기 학자인 프랑수와 보르드(1919~1981)에게 보냈습니다. 보웬의 서신을 받은 보르드는 김원룡 서울대 교수(1922~1993)에게 ‘심상치않은 석기의 발견’ 사실을 알렸구요. 
김교수는 제자(정영화 당시 영남대 교수)와 함께 현장을 답사했는데요. 

두 사람이 제일 먼저 당시 성업 중이던 전곡리 벽돌공장을 찾았는데요.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구석기 학자들에게 벽돌공장은 ‘보물창고’입니다. 벽돌 제조에 필요한 점토의 대부분은 구석기 시대에 퇴적된 고토양일 가능성이 높거든요. 그러나 벽돌공장에서는 점토에 들어 있는 돌멩이들을 불순물로 취급해서 골라내죠.
학자들이 그렇게 버려둔 돌멩이 더미에서 ‘노다지’를 찾는 겁니다. 과연 김원룡·정영화 두 교수는 돌더미에서 ‘구석기판 다이아먼드’를 캐냅니다. 그것이 세계고고학계를 놀라게 한 ‘아슐리안 주먹도끼’였습니다.  
아슐리안(Acheulean) 주먹도끼는 ‘구석기판 맥가이버칼’이라 할 수 있어요. 단순히 ‘찍개’의 수준에서 벗어나 찍고(송곳), 찌르고(창), 자르고(가위), 썰고(칼), 부수고(망치), 파기(곡괭이) 등의 기능을 겸비한 석기입니다. 
프랑스의 생따슐(St. Acheul) 유적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붙여진 이름입니다. 150만 년~10만년전까지 전기 구석기 시대(250만~10만년전)에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사용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스와르트크란스 동굴에서 확인된 180만년전 표범과 고인류 두개골. 고인류 두개골에 뚫린 두 개의 구멍은 곁에서 함께 수습된 표범의 이빨 자국과 간격이 꼭 맞았다. 고인류가 표범의 공격을 받아 두개골에 치명상을 입고 즉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깨진 ‘모비우스의 가설’
그런데 유럽과 아프리카에서는 유행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동아시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게 정설이었습니다. 
이것을 ‘모비우스의 가설’이라 하는데요. 동아시아에서는 단순히 ‘찍개문화’만 유행했다는 거죠.
그런데 전곡리 덕분에 ‘모비우스의 가설’이 전면 수정된 겁니다. 1978년 이같은 사실이 보고되자 세계 구석기 학계는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국내 언론도 난리를 떨었습니다. 이후 본격적인 발굴조사에 돌입했는데요. 
세계적인 구석기학자인 존 데스몬드 클라크 미 버클리대 교수는 “전곡리 주먹도끼의 연대는 27만~26만년 전일 가능성이 많다”는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후속조사에서 한탄강변 전곡리 유적 24만평 전체에서 구석기 유물이 고루 출토되었습니다.  
구석기인들의 집단 주거지였다는 겁니다. 1993년 이후 해마다 5월 이맘 때면 전곡리에서 구석기 축제가 벌어졌는데요. 
올해로 꼭 30년이 지났네요. 올해는 코로나 19 이후 4년 만에 5월 축제로 열렸습니다.

■2분15초에 불과한 인류역사
사실 ‘구석기’ 하면 ‘돌멩이’가 우선 떠오르죠. ‘돌멩이’ 발굴이 뭐 그리 의미가 있고, 재미가 있느냐고 심드렁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인가요. 최근들어 구석기 연구자들이 구석기와 관련된 대중서를 잇달아 펴내고 있습니다.
이한용 전곡선사박물관장의 <왜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채륜서·2020)가 스타트를 끊었구요.
최근에는 김상태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장의 <단단한 고고학>(사계절·2023)이 뒤를 이었습니다.
두 책 다 ‘고루하고 무미건조한 구석기’를 지극히 젊은 감각으로, 흥미진진하게 풀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벽돌공장’ 이야기는 이한용 관장의 책에 나온 거구요. 
김상태 부장의 책 중에서는 첫머리부터 눈길을 끄네요. 인류의 역사가 멀리봐서 700만년이라면 어떨까요. 
‘지구의 역사(45억년)’가 단 하루에 벌어졌다고 치면 인류의 역사는 마지막 2분15초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사, 참 부질없지 않습니까. 두 연구자의 책과, 리차드 포츠 등의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배기동 옮김·주류성·2013) 등을 토대로 구석기의 시대 여행에 나서볼까요.  

■고인류의 위대한 발자국
1969년 7월20일 에드윈 올드린·마이클 콜린스와 함께 아폴로 11호를 탔던 닐 암스트롱이 달표면에 첫발을 내디디며 역사적인 한마디를 던졌죠. “한 인간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우주 시대의 개막을 알린 겁니다. 1978년 탄자니아의 라에톨리에서 또다른 의미의 ‘인류의 첫발’이 발견됩니다. 
발견자는 평생 인류진화의 연구를 위해 헌신한 영국 출신 인류학자 매리 리키(1913~1996)였는데요. 
리키는 360만년전 화산폭발로 화산재에 쌓인 땅을 지나던 고인류 3명의 발자국들을 확인했습니다.
발뒤꿈치를 땅에 대고 깊게 누른 다음 발바닥을 뒤에서부터 차례로 댔다가 마지막으로 엄지발가락을 힘차게 누르면서 균형을 잡고 일직선으로 걸어간 직립 인간 특유의 보행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인류 직립보행의 서막을 연 ‘위대한 발자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명의 고인류는 360만 년 전의 ‘암스트롱’, ‘올드린’, ‘콜린스’라 할 수 있을까요.

■두개골에 난 표범의 송곳니 자국
따지고 보면 기본적으로 인류는 나약한 존재였죠. 다른 동물에 견줘 신체조건이 열악하기 이를데 없었죠.
1948년 남아프리카 스와르트크란스 동굴 유적에서 180만년전 살았던 젊은 고인류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고인돌의 두개골에서 두 개의 작은 둥근 구멍이 포착됐습니다. 이 두 개의 구멍은 동굴에서 발견된 표범의 송곳니와 동일간 간격으로 나 있었습니다. 주변에서는 당시 주요 단백질원이던 개미 집을 파헤쳤던 뼈도구가 확인됐습니다. 과학자들이 퍼즐을 맞췄습니다. 표범이 개미집을 파던 고인류를 공격해서 두개골에 치명상을 입혔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뿐이 아니죠, 280만 년 전 어린 아이 고인골의 눈 주변에 독수리의 부리자국이 선명합니다. 주변을 날던 독수리가 천진난만하게 놀고있던 아이를 먹잇감으로 채 갔을 겁니다. 

하루하루 불안하게 살다가 비명에 간 초기인류의 비참한 최후가 이들 화석에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직립보행’은 나약하기 이를데 없는 인류가 끈질기게 살아 남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두 다리로 곧추 서서 걷게 됨에 따라 손이 자유로워져 도구를 제작할 수 있게 됩니다. 서서 먼 곳을 보고, 생각하게 된 인류의 두뇌가 점점 커지고, 상징과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답니다.
지금도 수백만년전 네 발로 걸었던 흔적이 인간에게 남아있는데요. 척추뼈 끝에는 남아있는 꼬리뼈의 흔적입니다. 
‘두발 직립 보행’의 후유증이 지금까지 남아있죠. 다리, 허리, 무릎, 엉덩이, 발바닥 등 두 발 걷기에 동원된 곳들은 통증에 시달리게 되었죠. 대표적으로 디스크질환이 나타나잖습니까. 또 직립보행을 하게 되니 골반이 좁아졌죠. 그래서 태아가 나오는 산도도 좁아졌고, 따라서 출산의 고통도 생겼습니다. 

■구석기인의 패션
한가지 의문점이 생기죠. 왜 사람에게는 털이 없을까요. 최근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나왔는데요. 
침팬지 같은 영장류가 서로 털을 골라 이를 잡아주는 장면이 심심치않게 보이죠. 바로 이거라는 겁니다. 
귀찮고 불결하며 전염병을 옮기는 이와 진드기, 벼룩 같은 체외 기생충을 원천 봉쇄하려고 털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다 빙하기가 찾아와서 추워지는 데 어쩝니까. 동물의 털가죽을 덮어써야 했겠죠. 
그래서 인간이 입은 옷 속에 기생하는 ‘몸니’가 부활한겁니다.  

{"originWidth":700,"originHeight":508,"style":"alignCenter","caption":"프랑스 샤펠오생 동굴유적에서 확인된 60세 전후의 노인 유골. 치아와 척추, 관절마디가 모두 손상되어 있었다. 주변에서는 걷지도, 먹지도 못했을 노인을 정성껏 보살폈고, 사후 장례까지 치뤄주었을 것이다.

각설하고 옷을 입고 몸을 단장한 흔적이 고인류가 제작한 구석기 시대 조각상에 나타나 있는데요. 이른바 빌렌도르프 비너스와 브라상푸이 비너스, 말타 비너스 등을 보면 머리카락을 단장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예컨대 브라상푸이 비너스의 머리는 격자무늬 망을 쓰고 있는 것 같거든요. 
옷은 어떨까요. 러시아 부레트 유적 출토 비너스상에서는 요즘의 롱패딩을 입은 것처럼 굵은 음각선이 또렷합니다.
다른 비너스는 굵은 물방울 무늬가 온몸을 감싸고 있죠. 프랑스의 레스퓌그 비너스는 엉덩이 아래로 치마 같이 길고 두툼한 무언가가 내려와 있습니다.

■‘구석기판 시스타나 성당’
아름다움의 추구는 예술로 승화되죠. 
세기의 거장인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1939년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보고 장탄식했다죠. 
“알타미라 이후 모든 예술이 퇴보됐다”고요. 1만4000년전 원시인이 그린 벽화를 보고 뭐 그리 호들갑을 떨었을까요.
그러나 알타미라 벽화를 비롯한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를 보면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옵니다.
그중 3만2000년전 그려진 프랑스 쇼베 동굴벽화는 거대한 벽면을 사자 무리에게 쫓기는 코뿔소 떼로 채웠는데요.

마치 대지가 울리는 것같은 생동감이 전해집니다. 1만7000년전 그림인 라스코 벽화는 동물 한마리 한마리가 살아서 튀어나올 것 같은데요. 1만4000년전의 알타미라 벽화는 천장을 가득 메운 들소를 그린 초대형 그림인데요. 미켈란젤로(1475~1564)의 ‘천지창조’에 견줘 ‘구석기 시대 시스타나 성당 그림’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프랑스 튀크 도두베르 동굴에는 진흙으로 빚은 들소가 있는데요. 1만4000년전 작품이라네요.
그 작품 근처의 진흙 바닥에 어지러이 찍힌 사람 발자국이 남아있는데요. 2만7000년전 프랑스 코스케 벽화에는 손바닥 도장이 즐비합니다. 공동작업을 펼친 흔적이 아닐까 싶어요.

■구석기판 ‘엑스칼리버’
인류에게는 다른 동물과는 다른 뭔가가 있죠. 그것은 죽은 자를 위한 의식입니다.
예컨대 스페인 아타푸에르카 유적에서는 30여구의 인골과 함께 주먹도끼가 한 점 나왔습니다. 죽은 자를 위한 부장품으로 넣어준 겁니다. 사람들은 그 주먹도끼에 영국 아서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엑스칼리버’라는 이름을 붙였답니다. 
5만년전 프랑스 샤펠오생 동굴유적에서는 60세 전후의 노인 유골이 확인되었는데요. 그런데 출토된 유골 상태를 보니 치아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구요. 뼈의 척추와 관절마디 역시 염증으로 손상되어 있었습니다. 스스로 걷지도, 음식를 먹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렇게 천수를 다한 노인을 정성껏 보살폈고, 사후 장례까지 치뤄주었음을 알 수 있어요. 

2만년전 이탈리아 아렌 캉디드 유적에서 확인된 10대 초반 소년의 무덤은 화려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붉은 색을 내는 산화철을 뿌려 온통 붉게 만들었구요. 조가비 장식 모자와 신발 등 각종 장신구로 몸을 둘렀습니다. 손은 검은빛의 긴 돌날 한 점을 꼭 쥐고 있었습니다. 요절한 어린 자식을 묻는 부모의 애끊는 심정이 담겨있습니다.
이라크의 샤니다르 동굴유적에서는 6만5000년~4만5000년 전 네안데르탈인의 뼈들이 보였는데요. 뼈에는 다치고 병든 흔적과 함께 장기치료의 증거가 포착되었습니다. 석회암 더미에 조성된 무덤의 흙에서 소나무와 전나무, 그리고 꽃가루와 꽃술의 흔적도 보였습니다. 네안데르탈인들이 시신 위에 형형색깔의 꽃과 나뭇가지를 헌화하며 장례의식을 치렀던 겁니다.

■한반도 최초의 수출품
여기서 한반도 구석기 문화를 일별해볼까요. ‘슴베찌르개’라는 석기가 있는데요. 손잡이나 자루와 연결할 수 있는 짧은 꼭지(슴베)가 달린 창끝을 가리킵니다. 슴베찌르개를 나무자루에 묶어 연결하면 위력적인 사냥용 창으로 변신하죠. 
이 석기는 4만년전~3만5000년 사이 한반도 중남부에서 제작되었는데요. 어쩐 일인지 남으로는 일본 규슈(九州)에서 북으로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1500㎞ 범위 내에 이 한반도 중남부산 슴베찌르기가 보급되었답니다.
이 슴베찌르기야말로 최초의 한반도산 수출품이었던 셈입니다.
또 거친 화강암이 대부분인 한반도에서는 구석기시대 맥가이버 칼이라는 정교한 주먹도끼를 제작하기 어려웠는데요. 

그래도 한반도 구석기인들은 주변에서 쓸만한 규암과 석영 등을 골라 나름 정교한 석기를 만드느라 분투했습니다.
덕분에 남한 지역에서 확인된 곳만 1000여곳의 구석기 유적이 존재합니다.
강원 속초 청호동에서는 대규모 석기제작 공장이 확인됐는데요. 직경 30m 정도의 면적에 무수히 많은 석기 조각이 둥글게 흩어져 있었구요. 한가운데 또 하나의 작은 제작장이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석기를 만든 흔적입니다. 대량생산·분업·전문화의 공정이 이뤄진 것 같아요.
또 충북 단양의 4만년전 수양개 유적에서는 20.6㎝ 가량의 매끈하고 길쭉한 자갈이 확인되었는데요. 그 표면에 3.4~4.5㎜간격으로 비교적 일정하게 그은 금 22개가 새겨져 있습니다. ‘자(尺)’ 같지는 않구요.

1950년 콩고공화국에서 확인된 이상고 원숭이뼈(2만2000년전)에도 168개 눈금이 보였습니다. 이런 눈금이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는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어떻습니까. 신체적으로 나약하기 이를데 없는 인류가 마침내 만물의 영장이 된 게 경이롭기만 하죠. 
하다못해 키가 1m 가량의 단신에, 뇌의 용적이 420㏄에 불과한 ‘호빗족’ 마저 장장 6만년 가까이(9만5000년전~1만7000년전) 터전을 잡고 생존했답니다. 그뿐입니까. 수백만년전 돌멩이로 도구를 만들었던 인류가 이젠 AI(인공지능)까지 창조해냈잖아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인류가 살아남았던 이유가 뭘까요? 
바로 인간과 비인간의 사이에서 인간의 길을 걸어온 덕분이죠.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인간이 자꾸 ‘비인간’의 길로 접어 들어가려고 합니다. 인간의 장래가 염려됩니다.(이 기사를 위해 김상태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장과, 이한용 전곡선사박물관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김상태, <단단한 고고학> 사계절, 2023
이한용, <왜 호모사피언스만 살아남았을까>, 채륜서, 2020
리차드 포츠·크리스토퍼 슬론, 배기동 옮김,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 주류성, 2013
전곡선사박물관, <전곡 구석기 유적>, 2011
국립문화재연구원, <전곡리 유적조사 발굴보고서>,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