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5) 1만년전의 세계 제주 고산리(上)

제주 고산리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
  
ㆍ구석기와 신석기의 경계를 풍미한 맥가이버들

1987년 5월 어느 날. 


제주도 서쪽 끝 마을인 북제주군 한경면 고산리. 흙을 갈고 있던 마을주민 좌정인(左禎仁)씨가 돌 두 점을 주웠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뭔고?”

고구마처럼 생긴 돌이었는데, 예사롭지 않았다. 좌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돌 두 점을 집으로 가져갔다. 

“(윤)덕중아, 이 돌들이 이상하게 생겼는데 한번 봐라.”

마을엔 제주대 사학과에 다니던 윤덕중이란 학생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이 심상치 않은 돌을 보여준 것이다. 윤덕중 학생은 이 돌 두 점을 다시 스승인 이청규 제주대 교수(현 영남대)에게 보여주었다. 이 교수는 곧 돌을 수습한 현장에서 지표조사를 벌였다.

■농부가 찾은 1만년 전의 세계 

좌씨가 주워온 것은 길이 8.5㎝, 촉 3㎝, 두께 1㎝나 되는 큰 석창(돌로 만든 창) 1점과 긁개 1점(길이 4.3㎝)이었다. 석창과 긁개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석기제작 기법인 잔잔한 눌러떼기 수법으로 성형했다. 지표조사 결과 마제석부(자갈들을 때려 다듬은 다음 날부분과 몸통부분을 부분적으로 간 것) 1점과 각편석기 1점을 추가로 확인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강창화씨가 수습한 융기문토기. 토기는 신석기인들의 화폭이었고, 그들은 토기에 빼어난 예술성을 뽐냈다.
 
그후 7개월이 지난 88년 1월, 영남대 대학원생이던 강창화씨(현 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가 다시 이곳을 찾았다. 

“개인적으로 한번 조사해보고 싶었어요. 겨울 바람을 헤치고 이리저리 헤맸죠.”

그의 눈에 띈 곳은 수월봉(해발 65m)에서 북쪽으로 150m 떨어진, 국토방위군이 파놓은 참호였다. 그런데 참호의 단면 50㎝ 바닥 가까이에서 뭔가 이상한 징후가 포착되었다. 조심스레 파보니 그것은 융기문토기(隆起文·덧띠새김무늬)였다. 덧띠의 문양은 첫 줄은 수평을 이루지만, 둘째줄과 셋째줄은 일정한 간격마다 S자와 포물선으로 크게 휘어진 형상이었다.


농부 좌정인씨가 수습했던 석창과 긁개. 문화유산은 이렇게 이름없는 백성들 덕분에 찾고 보존된다.
 
“이런 석창과 긁개, 마제석부, 그리고 융기문 토기의 잇단 발견은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그저 몇 점 수습했을 뿐인데, 후기 구석기 말~신석기로 이행하는 단계의 유물(석창과 긁개 등)과, 신석기 초기 유물(융기문 토기)가 나왔으니까요.”(강창화씨)

이렇게 뜻깊은 단서가 나오자 가만 있을 수 없었다. 제주대박물관은 91~92년 겨울 약 6000점에 이르는 유물을 수습했다. 이어 94년부터 98년까지 세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발굴이 벌어졌으며, 모두 10만점이 넘는 유물이 쏟아졌다.

■그들은 ‘맥가이버’였다 

이쯤해서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구석기~신석기 시대의 전환과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결론적으로 말해 고산리 유적은 후기 구석기 최말기~신석기 초기로 넘어가는 전환기, 즉 1만2000~1만년 전의 유적으로 각광받고 있어요. 물론 연대에 관해서는 다소간 논란은 있겠지만….”(조유전 관장)

고고학적인 설명을 가하자면 동북아 후기 구석기의 전형적인 문화는 이른바 세형돌날문화(좀돌날문화)이다. 작은 몸돌에서 눌러 떼어낸 아주 자그마한 돌날과 긁개, 조각도, 석촉, 창끝, 양면석기, 송곳 등 다양한 도구를 만드는 것이다.

“동북아 후기 구석기 사람들은 손재주가 기가 막힌 사람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맥가이버’ 같은 사람들이었어요. 5㎝가 될까 말까 한 몸돌에서 맥가이버처럼 아주 다양한 도구들을 척척 만들어냈으니 말입니다.”


5㎝도 안되는 몸돌을 깎아 다양한 도구를 만든 구석기 최말기를 풍미한 사람들. ‘맥가이버’란 별명을 들을 만하다. <강창화씨 제공>

그런데 1만년 전을 전후로 구석기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정착을 하게 된 사람들은 농경생활을 하게 되고 곡식 등을 저장하는 도구, 즉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을 하게 된다. 바로 토기의 발명이다.

“농경과 간석기, 그리고 토기의 출현을 신석기혁명이라 하지. 그런 점에서 이 고산리에서 후기 구석기 최말기의 세형돌날 문화와 신석기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고토기(古土器)가 속출했고, 그리고 신석기시대의 출현을 알리는 토기 즉 융기문 토기가 나왔다는 게 의미심장해요.”(조유전 관장)

부연 설명해보자. 고산리에서는 후기 구석기 최말기 문화의 전통이 밴 세형몸돌, 세형돌날, 첨두기(尖頭器·끝이 뾰족한 도구), 양면 석촉(돌화살촉) 등이 속출했다. 또한 신석기의 여명을 알리는 고토기 조각도 2500여점이나 확인됐다.

“고산리에서는 특히 문양이 없는 원시 고토기 즉 식물성 섬유질이 혼입된 고토기가 전체 수량의 85% 이상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토기는 아무르강 유역의 세형돌날문화(1만1000~1만년 전)에서 보이는 후기 구석기 최말기~신석기 여명기에 출현하는 고토기와 흡사한 모습입니다.”(강창화씨)

이런 고토기는 인류가 토기라는 것을 처음 만들면서 450~600도에서 구운 저화질 토기이다. 구울 때 성형(成形)을 위한 보강재로 식물의 줄기를 섞었다. 연한 억새풀 같은 것을 짓이겨 썼다. 그런데 쉽게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두개 있다. 우선 첫번째.

“희한한 것은 이런 고토기가 한반도 본토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거지.”(조유선 관장)

“예. 그래서 학술적으로 이 고토기를 ‘고산리식 토기’라 부르게 되었지요.”(강창화씨)

왜 한반도에는 보이지 않은 고토기가 제주도에서는 보일까. 두번째 수수께끼. 이런 고토기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8000년 전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근거는 무엇인가.

■구석기와 신석기에 넘나든 경계인

“제주도 유적들을 살펴보면 이상한 현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후기 구석기 최말기 세형돌날문화 석기들과 고토기가 함께 출토되는 곳, 즉 1만1000~1만년 전의 유적은 고산리 한 곳밖에 없다는 겁니다.”(강창화씨)

반면 8000년 전부터로 편년되는 융기문(덧띠무늬) 토기문화가 제주도에서 성행한다는 것이다. 

융기문 토기는 애월읍 고성리, 제주시 아라동, 구좌읍 대천리 등 해발 200~450m인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서 흔히 확인되는 유물이다. 또한 발해연안, 즉 동이족의 본향에서 흔히 확인되는 지(之)자문 토기(빗살무늬 토기)도 보인다. 

지(之)자문 토기는 제주도 온평리 유적과 고산리 동굴유적에서 볼 수 있는데 모두 지그재그형의 사선으로 짧고 깊은 문양을 보인다.

기자는 이쯤해서 지난해 발해문명의 시원지, 즉 동이(東夷)의 본향이라 할 수 있는 차하이(査海)·싱룽와(興隆窪) 유적을 비롯, 다링허(大凌河)·랴오허(遼河) 유역에서 기자의 손으로도 숱하게 수습할 수 있었던 융기문·빗살무늬 토기들을 떠올렸다. 

또한 90년대와 2000년대 초까지 확인된 강원 고성군 문암리와 양양 오산리 유적에서도…. 

“융기문 토기는 시대의 선후는 있을지언정 문암리·오산리 등 동해안뿐 아니라 남해안, 충청내륙, 남해안 도서지방에서도 확인되지.”(조유전 관장)

강창화씨는 특히 제주도산 태토로 만들어진 융기문 토기가 제주도와 가까운 여서도에서 확인된 것에 주목하고 있다. 제주도와 남해안 지역이 같은 문화권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융기문 토기와 지(之)자문 토기를 포함한 빗살무늬 토기는 발해문명, 즉 동이족의 문화라고 하지 않았나. 이쯤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고산리 유적을 발굴 중인 조사단. 인공석인지, 자연석인지 구별이 어려운 구석기 발굴은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고산리 유적에서 강(창화) 선생이 수습한 융기문 토기와 고산리식 토기는 어떤 관계가 있지 않나요.”

고산리에서 후기 구석기 최말기 문화인 세형몸날문화+고산리식 고토기와, 초기 신석기 문화의 지표유물인 융기문 토기가 함께 나왔다면 문화는 단절이 아니라 연결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기자는 바로 그 점을 물은 것이다.

“제가 88년 1월 고산리 인근 참호에서 발견한 융기문 토기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제가 그곳에서 융기문 토기 1개체분을 확인한 뒤 무려 165㎡(50평) 이상을 더 팠습니다. 하지만 고산리식 토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떨어진 문화라는 뜻, 바로 융기문토기와 고산리식 고토기(식물성 고토기)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의미죠.”(강창화씨)

강씨는 제주도 삼양동 유적의 예를 든다. 즉 이곳에서는 신석기 초기의 토기인 세선(細線) 융기문토기(가는 선으로 덧띠를 만든 토기)와 함께 어로용 도구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한반도의 고성 문암리, 양양 오산리 유적과 닮은꼴이었다. 

자, 다시 요약해보자. 지금으로부터 1만1000~1만년 전 중국 동북과 연해주 사이인 아무르 강에서 살던 사람들이 내려와 지금의 제주도에 정착했다고 치자. 그들은 세형돌날문화와 식물성 섬유질을 보강한 고토기를 사용한 후기 구석기 최말기~신석기의 여명기, 즉 인류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시대를 풍미한 ‘경계인’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산리 문화를 창조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사라진다. 그런 뒤 융기문과 지(之)자문 토기문화의 주인공들로 교체된다. 이때가 8000년 전 쯤이다. 이후 제주도는 광범위한 동이의 문화권이 되어 문화의 연속성이 이루어지고 지금에 이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6월 말, 기자는 숱한 호기심을 품고 조유전 관장과 함께 고산리 유적을 찾았다. 역시 제주도다웠다. 비바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셌다. 할 수 없이 철수하고 오후에 다시 찾아갔다. 우리를 안내한 탐라매장문화재연구원의 윤중현 연구원이 협재해수욕장 쪽에 있는 섬 하나를 가리켰다.

“비양도인데요. 제주도에서 가장 최근인 고려 목종 10년(1007년)에 화산폭발이 일어난 곳입니다.”

새삼 제주도가 화산섬이라는 느낌이 가슴에 와닿는다. 다시 찾은 고산리 현장. 비바람에 쫓긴 아침엔 몰랐는데, 현장은 한장밭이라 일컬어질 만큼 해발 고도 15~20m 가량의 평탄대지다. 

“이런 평탄대지이니 삶의 터전을 마련했겠지. 예나 지금이나 좋은 터와 경관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은 한가지인 거야.”(조유전 관장) 

조 관장과 기자는 인근 수월봉을 찾아 유적의 경관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절경이죠. 저기 보이는 차귀도와 이곳 수월봉, 그리고 저쪽의 당산봉(해발 148m)은 이른바 기생화산(오름)인데요. 저기 당산봉에서는 날씨가 맑으면 중국의 상하이가 보인다고 할 정도로 중국과 가깝습니다. 이곳은 아직 관광객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제주도 절경 중 하나입니다.”(윤중현 연구원)

기생화산은 주로 10만년~2만5000년 전에 이뤄졌는데, 특히 고산리 현장을 품고 있는 수월봉 일대는 현무암 덩어리가 섞인 화산재로 이뤄졌다. 

“얕은 바닷속에서 분출한 수중폭발화산이라 이런 모양입니다. 1000도가 넘는 뜨거운 용암이 물을 만나 폭발하는데, 물과 용암의 비율이 1 대 1이면 폭발이 가장 커서 경사가 거의 수평에 이르는 응회암(수월봉처럼)을 이룹니다. 성산일출봉과 비슷한 형상입니다.”(강창화씨)

그렇다면 1만1000~1만년 전 제주도에 닿은 인류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절경을 찾았을까. 2000여년의 세월을 풍미한 그들은 왜 감쪽같이 사라졌을까. 그리고 어떻게 융기문 토기문화를 지닌 동이의 문화가 제주도에 안착했을까. 그 미스터리의 역사를 재구성해보자.

<제주 고산리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